인시윤은 손으로 머리를 바치고 마음속으로 그것들을 기억했다.“알아. 네 오빠가 아끼는 사람이 백윤서라는 거. 서울제2중학교에서 누구한테 맞아서 네 오빠가 이 학교로 전학 보냈다고 들었어.”장소월은 국을 몇 입 먹어보고 아무 맛도 안나 싱겁다고 생각했다. 이 식당은 주변 환경이 좋고 야채도 신선하지만 유일한 나쁜 점은 사골 국물이 잘 끓지 않아 마지막에 풍미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전연우는 이미 집을 나와 백윤서랑 같이 살고 있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백윤서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거야.”장소월은 인시윤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렇게 말했다. 인시윤은 긴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혐오감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애는 너무 가식적이야. 너도 설마... 전연우 좋아하는 건 아니지?”장소월은 바로 부인했다.“그 사람은 영원히 내 오빠야. 나는 내 오빠를 좋아하는 일은 없어.”원래 경계하던 인시윤의 눈빛은 즉시 경계를 풀었고 그녀는 안도하며 가슴을 쳤다.“깜짝 놀랐네. 난 네가 백윤서와 똑같은 줄 알았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나중에 우리가 가족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럼 난 너를 시누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장소월은 담담히 입꼬리를 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시윤에게 전연우의 본모습에 대해 말해야 할까?그녀가 전연우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면 전연우는 이 상황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인시윤은 분명히 상처받을 것이다.그를 사랑하게 되면 점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을 것이다. 결국 황금색 철로 짜인 새장에 갇혀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끝내 구덩이에 빠져 허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만하자. 그녀 자신도 지금 곤경에 처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걱정할까?전연우가 누구와 결혼하든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식사 후 인시윤은 그녀에게 밀크티 한 잔을 더 사주었다.그녀는 뒤에서 누군가 인시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인시윤은 손을 흔들며 말
이제 강용은 장소월을 괴롭히지 않는다!정말 신기한 일이다...강용은 결국 농구에 흥미를 잃고 옆에 있는 물을 집어 들고 곧바로 코트를 떠났다....30 분 안에 수학 문제지를 푸는 건 확실히 어려웠다. 게다가 모두 교과서의 지식을 넘어서는 내용들이었고, 일부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푸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었다.마지막 수업의 종소리가 울리자 한결은 교과서를 닫았다.“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은 인시윤 학생의 생일이니 시윤 학생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오늘은 야자 안 합니다. 대부분 친구들이 인시윤 학생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았죠?”“모두가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요.”인시윤은 반에서 가장 활동적인 학생으로 꼽힌다.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장소월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천만에요.”1반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한결이 나가자마자 인시윤은 장소월의 옆으로 달려가 말했다.“소월아, 가슴 큰 친구야... 이제 그만하고 같이 가자!”인시윤은 정말 그녀를 골치 아프게 했다. 웬 이상한 별명을 붙여줬는지.장소월은 마지막 글자를 쓰고 재빨리 책을 닫았다.“다 했어. 가자.”인시윤이 그녀를 칭찬했다. “문제 정말 잘 풀었네! 어디 보자, 거의 다 정답인데 우리 올림피아드 그룹에 오지 않아서 아쉽다. 어쩌면 우리가 같이 서울대에 붙을지도 모르는데.”장소월은 동작을 멈췄다. “나도... 가도 될까?”“당연하지! 왜 안 돼?”“올해 올림피아드 대회는 총점으로 순위를 매기는데... 제운고랑 서울 2중 애들만 참가하는 거 아니야. 네가 전국 대회에서 10등 안에 들면, 소월아... 이건 가문의 영광이야!”“알았어! 혹시 그룹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해?”장소월의 뒤쪽에 앉은 두꺼운 안경을 쓴 소년의 표정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감정이 감돌았
백윤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뒷좌석에 앉아있는 장소월을 발견하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억울한 듯 말했다.“미안해, 소월아. 나 오늘 너희 반 수업시간표를 봤는데 오늘 저녁 자율 학습이 있더라고. 그래서...”장소월은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백윤서의 표정에 대해서도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탓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질근 감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다 제 탓이에요. 아저씨, 출발하죠! 먼저 윤서 언니를 데려다줘요.”“알겠습니다. 아가씨.”역시 장씨 가문에서 잔뼈가 굵게 일한 사람이라 무슨 말이든 과감히 내뱉는다. 정 집사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하여 장해진도 지금까지 그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백윤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집사님, 절 연우 오빠 회사에 내려주시면 돼요. 할 얘기가 있어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정 집사는 백윤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백미러로 장소월에게 말했다.“소월 아가씨, 장소를 바꿀까요?”그는 장소월의 동의를 구했다.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으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는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예전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할 때에도 늘 학교를 마치면 그의 회사에 가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회사에 갔었다.이렇듯 그녀와 백윤서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장소월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화려한 배경에 크나큰 부와 권세를 쥐고 있어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인시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갖은 시련을 이겨내 왔던 백윤서... 전연우는 과연 둘 중 누구를 선택할까?예전엔 당사자였지만 이젠 구경꾼에 불과하다.장소월도 전연우가 백윤서와 결혼해 전생에 진 빚을 갚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녀의 빚은 이미 깨끗이 갚았다.그녀가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했던 그 날...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남천 그룹까지 평소라면 30분 정도밖에 걸리
전연우가 오늘 파티에 그녀를 부른 건 그녀와 파트너로 함께하고 싶은 건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윤서는 긴장된 마음에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순식간에 가슴속에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간 것이었다. 파티에 빈손으로 참석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작은 선물은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었다.그저 겉으로만 친구일 뿐이니 고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선택한 스카프가 가격표를 보니 20만 원이나 되었다. 그녀는 구매를 취소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이미 점원이 가격표를 뜯은 뒤라 되돌릴 수 없었다.다행히 장해진이 준 카드가 있어 절반 정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그래도 10만 원이다.장소월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지끈거렸다.남원 별장.방 안에 들어간 그녀는 인시윤의 생일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옷방 서랍을 열어보니 하얀색 박스가 하나 있었고 안엔 마침 그녀가 찾던 드레스가 들어있었다.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올블랙 드레스...이 옷이면 괜찮을 것이다.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라 많은 옷을 준비하진 못했다. 모두 한물간 디자인이라 그녀의 마음에조차 들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눈엔 어떻겠는가.이 옷은 아주 심플하면서도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아니라 언제든 예쁘게 입을 수 있었다.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과연 그녀에게 어울릴까?“한 번 입어볼까?”장소월은 재빨리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 더 말랐다면 가슴 부분이 빈약했을 것이고 조금 더 살집이 있었다면 부담스럽게 팽팽해졌을 것이다.이런 매혹적인 그녀의 몸매를 보고 그 누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여덟 시 반.파티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인시윤이 2억이 되는 고액의 드레스를 입고 최근 대세 남자 연예인과 함께 커플 댄스를 추며 파티의 포문을 열었다.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정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거나
춤을 마친 뒤 인시윤은 도우미가 건네준 외투를 받고는 인정아의 곁으로 걸어갔다.“엄마.”살짝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본 인정아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 생일인데 왜 별로 안 즐거워 보이지?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초대했잖아. 아가, 표정 풀어. 엄마랑 같이 삼촌들한테 인사하러 가자.”인시윤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졌다.“저 안 가면 안 돼요? 전 친구들과 놀고 싶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저만 보면 온갖 질문을 쏟아내요. 정말 너무 지겨워서 짜증 나요.”파티장엔 음악을 틀었고 인시윤의 목소리도 크지 않아 인경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됐어. 이것도 앞으론 익숙해질 거야. 후계자는 후계자답게 행동해야지.”두 모녀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인시윤은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인씨 가문 사업가들을 만나러 향했다.이번 파티에 강씨 가문은 초청하지 않았다.“엄마, 오빠는 오지 않겠대요?”인경아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수는 최근 강한 그룹을 인계받고 있어서 바쁜가 봐. 그러니까 될수록 귀찮게 하지 마. 엄마가 이미 말했으니까 바쁘지 않으면 올 거야.”예전엔 그 집에서 강영수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럴 자격도 없다.그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다!드디어, 인시윤이 전연우와 마주 섰다.인경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당신이 우리 시윤이를 구해줬다면서요?”검은색 정장을 입고 곧게 서 있는 전연우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웠다.“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인경아가 다시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시윤아, 감사 인사는 제대로 했어?”그녀의 말투는 부드럽고 예의 있고 차분했으나 그 안엔 확연한 거리감이 담겨있었다.이렇듯 능력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시윤이의 곁에 두고 유용하게 쓰는 게 좋을 것이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장해진의 사람이다.때문에 분명 더럽고 비열
이미 아홉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어 파티가 끝났을지도 모른다.이번 파티는 인씨 집안 별장에서 진행되었다.장소월이 문 앞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자 그는 곧바로 그녀를 안내했다.“아가씨의 친구분이시면 이 길을 따라가세요. 끝까지 가면 보일 겁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경비원은 장소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 집 아가씬데 여태껏 한 번도 오지 않았단 말인가?장소월은 외투를 걸치고 경비원이 말한 방향으로 걸어갔다.파티장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이미 한 번씩 인사를 마쳤다.뒷마당에선 한창 수영장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다!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다. 그녀는 힘 빠진 몸을 의자에 축 늘어뜨렸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힘들어 죽겠어... 그 변태 같은 영감들한테 왜 인사를 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왜겠어? 집안 재산을 상속받기 위함이지!”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허철이 말했다.인시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난 이미 말했어. 앞으로 재산, 회사... 모두 다 오빠한테 주고 싶다고! 난 그냥 오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면 돼! 나같이 예쁜 여자가 뭣 하러 엄마처럼 힘들게 살겠어. 안 그래?”허철이 말했다.“돈 많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인시윤은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쳐다보았다.“봤어?”“뭘?”“장소월 말이야! 설마 안 온 걸까?”허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장소월도 불렀어? 너 미쳤어? 장소월을 왜 불러! 나 걔랑 절교했잖아!”인시윤이 이마를 찌푸리고 허철을 툭 두드렸다.“너와 장소월 사이의 일은 관여하지 않을게. 하지만 앞으로 감히 내 앞에서 장소월을 욕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허철이 말했다.“이봐, 아가씨... 장소월이 어떤 앤지 몰라? 왜 그런 애와 친구로 지내려고 해? 너 친구가 부족
그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악마처럼 고소해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쁜 놈! 이게 재밌어?!”장소월은 접질린 발목을 부여잡았다. 너무 아파 눈물까지 질끈 나왔다.강용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어떻게 재미없겠어? 장소월... 네가 이렇게 바보 같은데!”장소월은 이곳에서 강용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강용의 집안은 이곳에 초대될만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역시 강용과 마주치면 좋은 일이 없다.장소월은 통증 때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검은색이라 얼룩이 선명하지는 않았다.“운도 없이 널 만났네.”그녀는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등 뒤에서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장소월은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강용의 부름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앞으로 더 가면 길이 없어. 너 어디로 가려는 거야?”장소월은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어쩐지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더라니.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강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린 길인 걸 알면서도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몸을 돌린 뒤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좁은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장소월이 그를 지나치려한 순간, 돌연 그가 몸을 움직였다. 깜짝 놀란 장소월은 중심을 잃고 그의 어깨에 축 늘어졌고 그는 한 팔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너 뭐 하는 거야! 날 놔줘! 강용!”장소월이 아등바등 그의 등을 내리쳤다.3층은 아직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큰 유리창 너머에 서 있는 남자는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지만 그 눈빛엔 말 못할 냉담함이 담겨있었다.“저와 손을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얼마를 원하든 다 줄게요.”인경아가 말했다.“영수야, 그 프로젝트를 갖고 싶다면 내가 줄게.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돼.”강영수는 그녀의 말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떠오른 강영수가 진봉에게 말했다.“인씨 집안 사람에게 파스를 갖고 정원으로 가보라고 해.”“네.”진봉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강영수의 분부대로 도우미에게 파스를 쥐어 보냈다.수영장에선 한창 뮤직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머지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 허철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강용? 어깨에 여자를 안고 오네?이제 이렇게 화끈하게 논다고? 설마 벌써 첫 거사를 치른 거야?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은 허철은 더더욱 놀랐다.“헉!”장소월의 목소리는 변하긴 했어도 충분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강용은 그녀를 의자에 던져버렸다.“젠장, 너무 무거워. 돼지 같아. 너 좀 적게 먹지 그래?”“네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잖아!”그때 위가 뒤집히는 고통이 밀려오더니 이어 그녀는 오늘 먹은 모든 것들을 깡그리 토해냈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을 먹지 않았다. 위가 경련하는 듯한 통증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야! 장소월! 너 내 몸에 토하면 죽을 줄 알아!”허철은 눈을 감은 채 보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너무 역겹다.강용은 그녀가 거의 다 토해내자 그녀의 뒷목을 잡아 올리고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너 거기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얼른 꺼져! 나 너무 괴롭단 말이야.”허철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이게 내 탓이야?”“꺼져!”허철은 어쩔 수 없이 바닥의 토사물을 치웠다.그때 도우미 한 명이 파스를 쥐고 걸어왔다.“아가씨, 혹시 파스 필요하세요?”장소월은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전 가져다 달라고 한 적 없어요.”도우미가 말했다.“어떤 남자분이 아가씨에게 드리라고 했어요. 아가씨가 발목을 삐었다고요.”장소월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 확실히 발목을 접질렸어요. 하지만 저한테 준 거 아닐 거예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옆에 있던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