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첫 번째로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가니 어디가 그녀의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본래 한 줄씩 앉았지만 이제 짝꿍과 함께 두 사람이 앉게 된 것이다. 장소월은 하나하나 찾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운도 없이 그녀의 짝꿍이 되었을까.장소월의 자리는 항상 마지막 줄이었다. 하여 뒤쪽에 가서 살펴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자리는 변하지 않았고 책상 위 물건도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라면 책상 서랍 안에 분홍색 편지가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봉투 위 하트 안에 그녀의 이름까지 쓰여있었다.장소월은 책가방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많은 남자아이들의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는 남학생들은 모두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호되게 당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감히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남학생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장소월은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전연우와 결혼했고 그 후 그녀는 매일같이 새벽까지 일 때문에 바쁜 전연우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하여 그녀는 매일 밤 그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그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아주 단조로웠다. 장소월은 연애의 설렘을 종래로 느껴본 적이 없다.지극히 일반적인 손을 잡고, 함께 영화를 보는 등...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다.장소월은 편지를 뜯어보지 않고 책 속에 끼워 넣었다.그녀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어쩌면 주인 없는 빈자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8시 30분.책상에 엎드려있던 장소월의 귀에 시끌벅적거리며 교실에 들어오고 있는 학생들의 소리가 들렸다. “저 뒤에 앉은 학생 누구야?”“세상에, 장소월 아니야?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왜 다시 돌아온 거지?”“왜긴 왜겠어. 쫓겨나온 거겠지.”“불길해.”“모르면 말이나 하지 마. 아무도 널 벙어리라고 하지 않으니까!”장소월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그녀의 입꼬리가 차갑게 위로 곡선을 그렸다.“그리고.
백윤서가 망설인다는 건 그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걸 의미한다.오 아주머니는 그녀의 집에서 많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빨래, 청소 등...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음식도 먹을 수 있다. 때문에 절대 쉬이 아주머니를 보내줄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이 몇 번 기침을 하자 백윤서는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소월아, 말을 하면 목이 더 아플 테니까 하지 마. 내가 약을 사 올게! 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일단 따뜻한 물을 마셔.”백윤서는 재빨리 책가방을 내려놓고는 바깥으로 달려나가 뜨거운 물을 받았다. 교실마다 정수기가 놓여있었는데 그 아래엔 일회용 컵도 준비되어 있었다.“소월아, 물 마셔.”“일단 놔. 나 아직은 마시고 싶지 않아.”“그럼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양호실에 가서 약을 받아올게.”“그럴 필요 없어. 곧 괜찮아질 거야. 어젯밤 충분히 쉬지 못해서 그래.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백윤서는 장소월의 옆에 붙어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월아, 오빠와 함께 나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 설마 오빠가 널 혼낸 거야? 그래서 병이 난 거고?”백윤서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장소월은 이를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백윤서는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이 단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전연우만 생각하면 악몽이 떠오른다.그녀가 못마땅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알고 싶으면 전연우한테 직접 물어봐. 난 어젯밤 일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말하고 싶지 않아.”백윤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젯밤 일이 찝찝하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젯밤 집에 돌아온 전연우의 얼굴은 너무나도 어두웠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그녀는 전연우가 또다시 장소월 때문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오전 첫 두 교시 모두 수학 수업이었다.장소월은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백윤서는 장소월의 시험지를 가지러 그녀의 자리로 갔지만 그때 장소월은 이미 교실에서 나가 양호실로 향하고 있었다. 백윤서가 가져다주었던 물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처음 그 상태였다.백윤서는 식은 물을 버리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넣었다. 그 후 책상 위 시험지를 본 순간 다섯 개의 선택문제 중 두 문제의 답이 자신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백윤서는 B와 C를 선택했지만 장소월은 두 문제 모두 A를 선택했다.‘내가 틀린 건가?’백윤서는 자신의 답을 의심했다.백윤서는 같은 반 2등이자 반장인 성윤선을 찾아갔다. 장소월이 2등까지 올라오기 전에도 성윤선은 항상 1등이었다.하지만 장소월이 1등이 된 이후엔 그녀와 많은 성적 차이가 났다. 성윤선은 항상 1반에 가고 싶어 했지만 지금 정도의 성적이라면 별로 가망이 없다.기말시험 기간 단시간 내에 성적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말이다.대기업 가문 딸이 근본도 모르는 시골 촌뜨기에게 밀리다니,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백윤서가 다가가 물었다.“윤선아, 마지막 두 개 선택문제에서 어떤 걸 선택했어?”성윤선이 두꺼운 안경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시험도 다 끝났는데 뭣 하러 답을 확인해. 그리고 너 수학과 대표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그녀의 말투엔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지만 백윤서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저번 내 성적은 네 성적보다 낮았었잖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성윤선은 책상 위의 펜을 필통에 넣으며 말했다.“4번 문제는 몇 번 계산한 끝에 A를 선택했고 5번 문제는 잘 몰라서 그냥 제일 답에 가깝다고 생각한 B를 선택했어.”“그래? 답이 좀 다르네. 알았어... 난 이제 선생님의 사무실로 갈게.”그때 성윤선이 백윤서의 손에 쥐어져 있는 시험지를 발견했다.“이거 장소월의 시험지야? 부정행위로 시험에서 1등을 한 거잖아. 그런 사람은 앞으로
성윤선은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갖고 왔다.“그럼 내가 볼게.”...바닥 위 눈이 아직 녹고 있는 중이라 날씨는 너무나도 으스스했다. 나뭇잎 위에 앉아있던 이슬이 바람에 밀려 장소월의 코끝에 내려앉았다. 장소월은 너무 추워 부들부들 떨었다.장소월은 스카프 안에 목을 쏙 집어넣은 채 양호실에 도착했다. 체온을 재보니 37.8도였다.의사가 말했다.“미열이 있어. 다른 아픈 곳은 없어? 콧물도 나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요.”“약을 줄 테니까 잠시 기다려. 며칠 먹어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병원에 가보도록 해.”“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장소월은 약봉지를 교복 호주머니에 넣은 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돌연 그녀의 앞에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누군가가 나타났다.“안... 안녕.”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1미터80의 키에 두터운 살집을 가진 건장한 몸집의 남학생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며칠 감지 않았는지 잔뜩 떡져있었다. 장소월이 물었다.“무슨 일이야?”그가 장소월을 향해 빙그레 웃고는 쭈뼛거리며 말했다.“헤헤... 넌 너무 예뻐! 너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하하하하...”그때 옆쪽 농구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모르는 학생 한 무리가 그곳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장소월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시험이 곧 다가오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아?”“난 괜찮아. 우리 아버지가 석유 회사 회장이라 성적으로 대학에 붙지 못한다면 돈으라로도 넣어준다고 했거든. 내 여자친구가 되어줘. 돈은 네가 얼마를 원하든 다 줄 수 있어. 또한 앞으로 간식은 다 내가 사줄게, 예쁜 옷도 사주고...”“미안해. 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장소월이 그를 거절한 건 그의 외모나 어리숙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녀가 다른 일에 신경 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학교엔 예쁜 여학생들이 많아. 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남학생이
그는 수업 시간이 거의 다가올 때까지 장소월을 물고 늘어져서야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담임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사무실에 가니 부담임이 서랍에서 무언가 찾고 있었다.“앉아!”장소월이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갖고 와 앉았다.부담임이 지원서를 한 장 꺼냈다.“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오지 않은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소월아.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부담임 채서연은 6반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강만옥이 학교를 떠난 뒤 이어 6반을 맡은 것이다. 예전에도 거의 모든 일들은 채서연이 도맡아 했었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의 권세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하게 대했다. 최소한 강만옥처럼 다른 마음을 품고 장소월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장소월이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선생님, 왜 절 부른 거예요?”채서연이 장소월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학생들은 거의 모두 지원서 작성을 마쳤어. 저번 내가 직접 너희 집에 가기도 했었는데 사람이 없더라고. 이렇게 학교에서 만날 기회도 흔치 않으니 지금 지원서를 써. 우리 반은 너를 제외하고 모두 다 완성했거든. 교감 선생님도 계속 날 재촉하고 있어.”“이번 중간시험을 마치고 학부모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도 네 아버님은 오지 않으셨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꽉 잡고 있었다.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장해진은 이렇듯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때로는 자신이 정말 그의 친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전연우에 대한 마음이 도리어 훨씬 더 크다. 하여 그녀는 심지어 장해진의 친자식은 자신이 아니라 전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선생님은 네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네 운명은 네 손에 달렸다는 걸 기억해야 해. 이렇게 집안 지시대로 움직이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넌 예뻐서 선생님도 많이 좋
그렇다면 전연우도 더는 장해진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에게도 별다른 행동을 가하지 못할 것이다.그 순간 장소월은 무언가 깨달았다.예전 그녀는 서울시의 울타리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줄곧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에 갇혀 전연우에게만 의지한 채 살았다. 하여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도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고 지식은 더더욱 부족했다.이건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렇게 장소월은 선생님과 함께 서울대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졸업 전, 반드시 장해진 몰래 해외 교환 학생으로 나가 3,5년 정도 지난 뒤 다시 돌아올 것이다.장해진이 그녀의 경제 래원을 끊는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그녀는 이미 홀로서기 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올 때쯤 장해진은 이미 자신의 딸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어쩌면... 장해진은 이미 죽고 장씨 집안은 전연우의 손에 넘겨졌을 수도 있다.이곳 상황이 어떻든 그녀는 아마 플로리다나 로마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전생에서 채 선생님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전생에서 일어난 일은 현생에서도 무조건 반복되지는 않는다.아마... 그녀의 운명은 이미 바뀌었을 것이다.백윤서도 장소월의 방해가 없으면 이렇게 평온히 살아가다가 전연우와 결혼해 아이를 낳을 것이다.그녀는 3년을 더 참아내야 한다...전생에서 십여 년의 고통도 참아냈는데 고작 3년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장소월이 교실로 돌아왔을 땐 수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마지막 줄은 본래 텅 비어있었는데 지금은... 강용 등 학생들이 에워싸고 있어 아주 시끄럽고 복잡해 보였다.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누군가 자신의 책상에 손을 댔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번 수업 때 썼던 곱게 정리했던 공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른 반으로 옮겨질 것이다.이건 그녀가 담
“나 다른 반에 갈 거야.”장소월이 덤덤히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수기 쪽으로 가 물을 받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교실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그중 누군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부정행위로 1반에 간다고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1반은 공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3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거야.”“내 생각도 그래. 1반에 가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다니. 진짜 가소롭다니까!”“차라리 죽기보다 못해!”그 말을 들은 서민정은 씩씩거리며 장소월을 위해 반박했다.“소월이가 부정행위한 걸 너희들이 봤어? 너희들 조금 전 분명 소월이의 수학 시험지를 봤잖아! 모든 문제의 답은 정확했어! 너희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죄 없는 다른 사람을 헐뜯는 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매한가지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게 그렇게 배가 아파?”그녀의 수학 시험지?장소월의 시선이 강용의 앞자리에 앉은 백윤서에게로 향했다.백윤서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른 반으로 갈 테니 그들과 부딪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말이다.서문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의 물건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장소월!”백윤서가 일어서며 그녀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짝꿍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상관하지 마. 곧 수업 시작해.”허철이 책상에 발을 걸고 몸을 뒤로 기대고는 방서연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방서연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허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진짜 1반으로 가는 거야?”방서연이 어깨를 슥 올렸다가 내렸다.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시끄러워!”잠에서 깨어난 강용이 소리를 지르자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시선이 깨끗이 정리된 장소월의 책상에 향했다.강용은 뒷발로 의자를 뻥 찬 뒤 주먹으로 문을 힘껏 내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용아, 너 어디에 가는 거야? 곧 수업 시작해!”
장소월은 네모 모양으로 박힌 대리석을 밟으며 걸어갔다.이제 눈은 모두 녹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니 또다시 기침이 새어 나왔다.그녀는 도서관에 들어가 항상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지금은 오직 서울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만이 해외 교환생 자격을 얻게 된다. 이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이다.혹여 장해진이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딸이 혼약을 맺는 도구를 넘어서 장씨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재일 가능성도 있다.커다란 창문 넘어 또다시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청순했다...시험지 몇 장을 푸니 배가 고파왔다. 핸드폰을 보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그때 돌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소월아, 나 널 위해 생일 선물을 준비했어. 네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장소월은 전연우의 충고 때문에 강영수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나누었던 대화기록을 모두 삭제하기까지 했다.그녀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알아봤어야 했다.강영수,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적어도 장소월은 그를 구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생명이 끝나지 않게 목숨을 구해준 건 그녀의 이번 생에서 가장 행운스러운 일이다.강영수는 그녀에게 크나큰 따뜻함을 주었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그녀와 이야기를 나눠주었고, 매번 그녀가 괴로워할 때면 나타나 위로해줬으며, 그녀와 함께 전시회에 가기도 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비밀까지...전연우는 마음이 좁고 어두우며 극히 지독하다. 예전 장해진과 함께 지하 세계 일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강영수는 이제 겨우 다리를 치료했다. 아무리 대단한 서울 명문 집안인 강씨 가문 자제라고 해도 전연우는 아무도 모르게 강영수의 다리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