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업 시간이 거의 다가올 때까지 장소월을 물고 늘어져서야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담임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사무실에 가니 부담임이 서랍에서 무언가 찾고 있었다.“앉아!”장소월이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갖고 와 앉았다.부담임이 지원서를 한 장 꺼냈다.“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오지 않은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소월아.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부담임 채서연은 6반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강만옥이 학교를 떠난 뒤 이어 6반을 맡은 것이다. 예전에도 거의 모든 일들은 채서연이 도맡아 했었다.장소월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의 권세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평등하게 대했다. 최소한 강만옥처럼 다른 마음을 품고 장소월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장소월이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선생님, 왜 절 부른 거예요?”채서연이 장소월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학생들은 거의 모두 지원서 작성을 마쳤어. 저번 내가 직접 너희 집에 가기도 했었는데 사람이 없더라고. 이렇게 학교에서 만날 기회도 흔치 않으니 지금 지원서를 써. 우리 반은 너를 제외하고 모두 다 완성했거든. 교감 선생님도 계속 날 재촉하고 있어.”“이번 중간시험을 마치고 학부모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도 네 아버님은 오지 않으셨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꽉 잡고 있었다.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장해진은 이렇듯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때로는 자신이 정말 그의 친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전연우에 대한 마음이 도리어 훨씬 더 크다. 하여 그녀는 심지어 장해진의 친자식은 자신이 아니라 전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선생님은 네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네 운명은 네 손에 달렸다는 걸 기억해야 해. 이렇게 집안 지시대로 움직이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넌 예뻐서 선생님도 많이 좋
그렇다면 전연우도 더는 장해진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에게도 별다른 행동을 가하지 못할 것이다.그 순간 장소월은 무언가 깨달았다.예전 그녀는 서울시의 울타리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줄곧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에 갇혀 전연우에게만 의지한 채 살았다. 하여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도 좁은 시야를 갖고 있었고 지식은 더더욱 부족했다.이건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렇게 장소월은 선생님과 함께 서울대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졸업 전, 반드시 장해진 몰래 해외 교환 학생으로 나가 3,5년 정도 지난 뒤 다시 돌아올 것이다.장해진이 그녀의 경제 래원을 끊는다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그녀는 이미 홀로서기 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올 때쯤 장해진은 이미 자신의 딸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어쩌면... 장해진은 이미 죽고 장씨 집안은 전연우의 손에 넘겨졌을 수도 있다.이곳 상황이 어떻든 그녀는 아마 플로리다나 로마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있을 것이다.전생에서 채 선생님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전생에서 일어난 일은 현생에서도 무조건 반복되지는 않는다.아마... 그녀의 운명은 이미 바뀌었을 것이다.백윤서도 장소월의 방해가 없으면 이렇게 평온히 살아가다가 전연우와 결혼해 아이를 낳을 것이다.그녀는 3년을 더 참아내야 한다...전생에서 십여 년의 고통도 참아냈는데 고작 3년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장소월이 교실로 돌아왔을 땐 수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마지막 줄은 본래 텅 비어있었는데 지금은... 강용 등 학생들이 에워싸고 있어 아주 시끄럽고 복잡해 보였다.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누군가 자신의 책상에 손을 댔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번 수업 때 썼던 곱게 정리했던 공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른 반으로 옮겨질 것이다.이건 그녀가 담
“나 다른 반에 갈 거야.”장소월이 덤덤히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정수기 쪽으로 가 물을 받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 교실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그중 누군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정말이야? 부정행위로 1반에 간다고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1반은 공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3일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거야.”“내 생각도 그래. 1반에 가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다니. 진짜 가소롭다니까!”“차라리 죽기보다 못해!”그 말을 들은 서민정은 씩씩거리며 장소월을 위해 반박했다.“소월이가 부정행위한 걸 너희들이 봤어? 너희들 조금 전 분명 소월이의 수학 시험지를 봤잖아! 모든 문제의 답은 정확했어! 너희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죄 없는 다른 사람을 헐뜯는 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매한가지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게 그렇게 배가 아파?”그녀의 수학 시험지?장소월의 시선이 강용의 앞자리에 앉은 백윤서에게로 향했다.백윤서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후 다른 반으로 갈 테니 그들과 부딪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말이다.서문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장소월은 자신의 물건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장소월!”백윤서가 일어서며 그녀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짝꿍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상관하지 마. 곧 수업 시작해.”허철이 책상에 발을 걸고 몸을 뒤로 기대고는 방서연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방서연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허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진짜 1반으로 가는 거야?”방서연이 어깨를 슥 올렸다가 내렸다.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시끄러워!”잠에서 깨어난 강용이 소리를 지르자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의 시선이 깨끗이 정리된 장소월의 책상에 향했다.강용은 뒷발로 의자를 뻥 찬 뒤 주먹으로 문을 힘껏 내리치고는 밖으로 나갔다.“용아, 너 어디에 가는 거야? 곧 수업 시작해!”
장소월은 네모 모양으로 박힌 대리석을 밟으며 걸어갔다.이제 눈은 모두 녹았지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니 또다시 기침이 새어 나왔다.그녀는 도서관에 들어가 항상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지금은 오직 서울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만이 해외 교환생 자격을 얻게 된다. 이건 그녀의 유일한 기회이다.혹여 장해진이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딸이 혼약을 맺는 도구를 넘어서 장씨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재일 가능성도 있다.커다란 창문 넘어 또다시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청순했다...시험지 몇 장을 푸니 배가 고파왔다. 핸드폰을 보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그때 돌연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소월아, 나 널 위해 생일 선물을 준비했어. 네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장소월은 전연우의 충고 때문에 강영수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와 나누었던 대화기록을 모두 삭제하기까지 했다.그녀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알아봤어야 했다.강영수,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적어도 장소월은 그를 구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의 생명이 끝나지 않게 목숨을 구해준 건 그녀의 이번 생에서 가장 행운스러운 일이다.강영수는 그녀에게 크나큰 따뜻함을 주었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그녀와 이야기를 나눠주었고, 매번 그녀가 괴로워할 때면 나타나 위로해줬으며, 그녀와 함께 전시회에 가기도 했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비밀까지...전연우는 마음이 좁고 어두우며 극히 지독하다. 예전 장해진과 함께 지하 세계 일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강영수는 이제 겨우 다리를 치료했다. 아무리 대단한 서울 명문 집안인 강씨 가문 자제라고 해도 전연우는 아무도 모르게 강영수의 다리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수업은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장소월은 이제 감기가 거의 나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코가 조금 막히는 것 외 한결 나아졌다.다행인 건 장해진은 그녀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여섯 시 무렵, 장소월은 학교 문을 나섰다. 그때 백윤서와 기성은을 만났다.기성은과 백윤서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를 발견할 때까지 기성은은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로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성은이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장소월 또한 그에게로 걸어가 말했다.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기성은은 전연우의 충실한 부하직원이다. 전생에서 바로 그가 이혼합의서를 그녀에게 전해줬었다.“정 집사님이 안 계셔서 제가 대신 윤서 아가씨를 모시러 왔어요. 왔던 김에 소월 아가씨도 함께 모시려고요. 제 기억으론 두 분은 같은 반이었던 것 같은데 왜 소월 아가씨는 더 늦게 나온 거예요?”전연우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기성은은 이제 웬만한 일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처리한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하더라도 절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장소월은 정 집사에게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전연우가 떠나라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기성은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대체 무슨 목적일까?아무튼 그녀는 절대 기성은의 차에 앉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오빠는 비서님에게 백윤서를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제가 아니라요.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아요. 죄송하지만 전 혼자 버스를 타고 갈게요.”기성은이 살짝 이마를 찌푸리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소월 아가씨, 최근 서울은 뒤숭숭해 혼자 다니면 위험이 닥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변고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 차에 오르십시오.”그 말투는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단호했다.백윤서는 장소월보다 몇 배는 더 착하다. 장소월의 까칠하고 막무가내인 성격은 몇 년이 지나도 변할 줄을 모른다. 하여 그녀를 대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만약 전연우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그 역시
오부연은 살짝 뒤에서 장소월을 따라갔다.“소월 아가씨는 장씨 가문의 큰따님으로서 더 강경한 태도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아가씨를 이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가 쉽게 손해를 봅니다.”오 집사는 역시 예리했다. 그를 속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소월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 집사님 말씀이 맞습니다.”“도련님도 저도 소월 아가씨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 순간 장소월은 가슴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설마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백윤서는 사이드미러로 장소월이 고급 카이엔에 타는 것을 보았다. 그 차의 번호는 네 자리 모두 1로 되어 있었다. 이런 차는 서울에서 아무나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기성은이 운전석에 타자 백윤서가 물었다.“소월이는 우리랑 같이 안 가요?”기성은은 안전벨트를 매고 대답했다.“소월 아가씨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가셨어요. 윤서 아가씨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럼 부탁드려요, 기사님.”“당연한 일인걸요.”장소월이 백윤서만큼 철이 들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연우도 걱정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차는 20분 정도 달렸고, 시간은 벌써 거의 6시 30분이 되어갔다. 이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졌다. 장소월은 조용한 거리를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 집사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거의 도착합니다. 곧 알게 될 거예요.”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한 곳에 멈췄다.운전기사가 차 앞쪽을 돌아서 조수석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오부연이 말했다.“소월 아가씨, 이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그들은 야시장과 광장 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서울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많은 곳이다.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에서 내렸고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는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제야 장소월은 야외 광장 레스토랑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은 조명 아래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부드러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멀리서도 그의 손등의 문신과 옷깃 아래에 숨겨진 문신을 볼 수 있었고, 눈매는 온화하고 훤칠한 몸매에 꼿꼿이 서 있었으며, 풍채가 아름다운 데다 동작 하나하나에 타고난 고귀함이 배어 있었다.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사람들 속에 서 있어도 시선이 그에게 가장 먼저 쏠리게 한다.이때 웨이터가 와서 말했다.“강 선생님이 기다리시는 손님 맞으시죠? 이미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니, 저를 따라오세요.”장소월은 손에 화려한 색의 장미 다발을 들고 걸어갔다. 작은 룸처럼 유리로 덮여 있는 작은 공간을 보았고, 유리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눈이 내리는 날이면 밖의 설경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잠시만 기다리세요. 강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소월아.”맑은 실루엣이 그녀의 뒤에서 나왔고, 등을 지고 있던 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달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보았고, 그 순간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그는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웨이터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장소월의 마음은 왠지 저절로 긴장되었고, 이 순간 그녀는 강영수가 매우 잘생겨 보였다. 장소월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그는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사실, 그녀는 이미 짐작했었다... 병원에서 그가 치료받는 동안 장소월은 그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전에는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걸까?오늘 아파서 그런 걸까?“어... 나... 고마워...”장소월은 한참을 참다가 마침내 그 단어를 내뱉었다.남자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총애하는 눈빛으로 말했다.“감기 걸리겠다. 안으로 들어가자.”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구한 강영수라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은 거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지나가는 커플들을 지켜보았는데, 둘 사이는 너무 조용했고 분위기는 기이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그때야 그녀는 무심코 물었다.“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강영수는 고개를 들었고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눈 밑으로 스쳐 지나갔다. “교통사고 때문이야.”그는 간결하게 대답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앞으로는 운전할 때 조심해.”강영수는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뱉었다.“알았어.”장소월의 오지랖 넓은 습관이 또 도졌다.“나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었는데 다리는 아프지 않아? 아니면 우리 어디 좀 앉아 있자! 혹시 몸이 불편하면 꼭 바로 말해줘.”강영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좋아.”장소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영수, 넌 왜 모든 것에 좋다고 대답해!’장소월은 감히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지 못하고 몸을 돌려 한 곳을 가리키며 뻣뻣하게 말했다.“나 저거 먹고 싶어.”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노점에는 산타할아버지 모양으로 조각된 탕후루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장소월은 이런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가자, 내가 사줄게.”강영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그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그는 뒤에 있는 장소월의 당황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얼굴은 뜨거웠다.두 번의 생을 살았다.장소월은 강영수가 그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녀는 그것을 콕 집어 언급하지도 않았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애매하게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는데, 전연우든 장해진이든 상관없이 가장 큰 장애물은 장소월 자신이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너무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감히 이 진심 어린 감정을 다시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감히 그와 같은 진심을 내보일 수 없었다...아마도 그녀에 대한 강영수의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총괄 비서? 그녀와 소피아가?그녀는 성세 그룹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더러 소피아와 총괄 비서 자리를 두고 다투라니.비서팀엔 능력 있는 비서들이 수두룩한데 왜 하필 그녀를 불러들인단 말인가.소피아도...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년간 회사에 다니며 꽤 많은 인맥을 쌓았을 것이다.이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경 송시아의 머릿속엔 갖은 교활한 생각이 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소피아는... 어쩌면 처음부터 송시아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예전 회사에서의 음침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소민아가 송시아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소피아는 이미 안에 앉아있었다. 다들 소민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소민아가 말했다.“송 부대표님, 찾으셨어요?”소파에 앉아있던 송시아는 손을 휘저어 옆에 있던 간병인을 내보냈다.“사소한 일일 뿐이니 긴장하지 말아요. 일단 앉아요.”소민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소피아는 깍듯하게 송시아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부대표님, 목마르시죠? 물 마시세요.”송시아는 옅은 웃음만 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오는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깔끔하고 정교했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잔뜩 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 짐작하고 있을 거예요. 기 비서가 돌연 사직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어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 예전 비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비서직을 맡고 있어요. 나에게 있어 두 사람 모두 회사 내 가장 뛰어난 직원이죠. 혹시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요? 아니면 대담하게 스스로 이 자리에 앉고 싶다고 나서지 않을래요?”소민아는 소피아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한 송시아의 눈빛
“앞당겨졌다고요? 주말로 결정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준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이런 옷차림으로 가면 실례 아닐까요?”신이랑이 점차 속도를 줄여 신호등 앞에 멈추었다. 그는 긴장감에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뭘 입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민아 씨 자체니까요. 그냥 편하게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아요.”“네.”회사에 도착한 뒤, 신이랑과 소민아는 연이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회사 직원들은 이제 그다지 의아해하지 않았다.하지만 소민아에 관한 루머들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몰랐다.필경 그녀는 얼마 전 제 입으로 기성은과 사귄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비서팀을 떠난 뒤로는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와 신이랑 편집장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소민아는 회사 뒷담화 방에서 꽃뱀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몰래 소민아가 결국 두 사람 중 누구에게 갈지에 대해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지금은 신이랑에게 건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번 내기를 위해 꽤 많은 돈을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소민아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신이랑의 비서로서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일련의 계약서들을 처리했다.소민아가 서류 몇 장을 신이랑에게 내밀었다.“몽크 만화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계약서예요. 이랑 씨 사인이 필요해요.”신이랑은 서류를 받은 뒤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오늘 민아 씨가 할 일은 날 도와 원고를 봐주는 것과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본을 보고 수정 의견을 내주는 거예요.”신이랑이 옆에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 내부 자료를 열어주었다. 안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 대본들이 가득했다. 이는 모두 구르미 시리즈에서 수정과 편집을 거듭한 것들이었다.소민아는 순간 수치심이 들었다. 부서를 옮긴 이후로 그녀는 줄곧 신이랑의 사무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간식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심지어 물까지도 신이랑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