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연은 살짝 뒤에서 장소월을 따라갔다.“소월 아가씨는 장씨 가문의 큰따님으로서 더 강경한 태도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아가씨를 이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가 쉽게 손해를 봅니다.”오 집사는 역시 예리했다. 그를 속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소월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 집사님 말씀이 맞습니다.”“도련님도 저도 소월 아가씨가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자신을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 순간 장소월은 가슴이 조여 왔다.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설마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걸까?백윤서는 사이드미러로 장소월이 고급 카이엔에 타는 것을 보았다. 그 차의 번호는 네 자리 모두 1로 되어 있었다. 이런 차는 서울에서 아무나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기성은이 운전석에 타자 백윤서가 물었다.“소월이는 우리랑 같이 안 가요?”기성은은 안전벨트를 매고 대답했다.“소월 아가씨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가셨어요. 윤서 아가씨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그럼 부탁드려요, 기사님.”“당연한 일인걸요.”장소월이 백윤서만큼 철이 들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연우도 걱정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차는 20분 정도 달렸고, 시간은 벌써 거의 6시 30분이 되어갔다. 이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졌다. 장소월은 조용한 거리를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 집사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거의 도착합니다. 곧 알게 될 거예요.”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한 곳에 멈췄다.운전기사가 차 앞쪽을 돌아서 조수석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오부연이 말했다.“소월 아가씨, 이쪽으로 쭉 걸어가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그들은 야시장과 광장 거리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서울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많은 곳이다.장소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에서 내렸고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녀는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제야 장소월은 야외 광장 레스토랑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은 조명 아래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부드러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멀리서도 그의 손등의 문신과 옷깃 아래에 숨겨진 문신을 볼 수 있었고, 눈매는 온화하고 훤칠한 몸매에 꼿꼿이 서 있었으며, 풍채가 아름다운 데다 동작 하나하나에 타고난 고귀함이 배어 있었다.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사람들 속에 서 있어도 시선이 그에게 가장 먼저 쏠리게 한다.이때 웨이터가 와서 말했다.“강 선생님이 기다리시는 손님 맞으시죠? 이미 자리를 예약해 두었으니, 저를 따라오세요.”장소월은 손에 화려한 색의 장미 다발을 들고 걸어갔다. 작은 룸처럼 유리로 덮여 있는 작은 공간을 보았고, 유리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었다.눈이 내리는 날이면 밖의 설경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잠시만 기다리세요. 강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소월아.”맑은 실루엣이 그녀의 뒤에서 나왔고, 등을 지고 있던 장소월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달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보았고, 그 순간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그는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웨이터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장소월의 마음은 왠지 저절로 긴장되었고, 이 순간 그녀는 강영수가 매우 잘생겨 보였다. 장소월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그는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사실, 그녀는 이미 짐작했었다... 병원에서 그가 치료받는 동안 장소월은 그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전에는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걸까?오늘 아파서 그런 걸까?“어... 나... 고마워...”장소월은 한참을 참다가 마침내 그 단어를 내뱉었다.남자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리고 총애하는 눈빛으로 말했다.“감기 걸리겠다. 안으로 들어가자.”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구한 강영수라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은 거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지나가는 커플들을 지켜보았는데, 둘 사이는 너무 조용했고 분위기는 기이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그때야 그녀는 무심코 물었다.“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강영수는 고개를 들었고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눈 밑으로 스쳐 지나갔다. “교통사고 때문이야.”그는 간결하게 대답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앞으로는 운전할 때 조심해.”강영수는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 뱉었다.“알았어.”장소월의 오지랖 넓은 습관이 또 도졌다.“나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었는데 다리는 아프지 않아? 아니면 우리 어디 좀 앉아 있자! 혹시 몸이 불편하면 꼭 바로 말해줘.”강영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좋아.”장소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영수, 넌 왜 모든 것에 좋다고 대답해!’장소월은 감히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지 못하고 몸을 돌려 한 곳을 가리키며 뻣뻣하게 말했다.“나 저거 먹고 싶어.”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노점에는 산타할아버지 모양으로 조각된 탕후루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장소월은 이런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가자, 내가 사줄게.”강영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는데, 그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그는 뒤에 있는 장소월의 당황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얼굴은 뜨거웠다.두 번의 생을 살았다.장소월은 강영수가 그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녀는 그것을 콕 집어 언급하지도 않았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애매하게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는데, 전연우든 장해진이든 상관없이 가장 큰 장애물은 장소월 자신이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너무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감히 이 진심 어린 감정을 다시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감히 그와 같은 진심을 내보일 수 없었다...아마도 그녀에 대한 강영수의
“뭐?”그 말을 하자마자 장소월은 강영수가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 벨벳 상자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초승달 모양의 멋진 흰색 목걸이를 꺼냈고 얇은 은 사슬은 빛나는 별처럼 보였다.그는 서서히 다가왔고 장소월은 그를 밀어냈다.“안 돼. 이건 너무 비싸서 난 받을 수 없어.”강영수는 처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소월아, 이 목걸이는 내가 직접 디자인하고 준비한 선물이야. 오늘은 네 생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해. 우리가 아직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거절하지 마, 알았지?”목걸이는 흠잡을 데 없이 정말 아름다웠고, 누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그의 시선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장소월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하지만 난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상관없어. 오늘 네가 와준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장소월의 깃털 같은 속눈썹이 떨렸고, 그녀는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동의했다.강영수는 항상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모든 일은 천천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경고했지만... 마음속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영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라고 생각했다.그는 몸을 숙여 직접 그녀를 위해 이 목걸이를 걸어주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긴 머리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는 가까이서 그녀의 눈처럼 희고 섬세한 목을 볼 수 있었고, 마치 백조 같았다. 그 외에 그녀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딸기 향은 그를 사로잡았다.장소월은 매우 예민했고, 아마도 자기 보호 의식 때문에 누군가가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생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뜨거운 숨결이 목에 닿자 장소월은 다소 당황한 듯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다... 다 됐어? 좀 춥네.”“됐어.”강영수는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그녀의 가슴 앞에 있는 초승달은 어둠 속에 있을 때 그를 비추는 빛줄기 같았다.그 빛줄기
전연우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까지 쓰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강영수의 인맥을 이용해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어떨까?그러면 서울에서 매년 실시하는 유학생 선발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더 좋을 것 같았다.“영수야...”장소월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강영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나...”장소월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눈 부신 빛이 번쩍였다.“위험해요. 대표님 조심하세요!”신준수는 재빨리 핸들을 돌렸고 오부연은 조수석 위쪽 손잡이를 꽉 잡았다.장소월은 몇 톤이나 되는 대형 트럭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충돌하려는 순간 장소월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강한 손이 그녀를 끌어당겨 장소월을 그의 몸 아래로 보호했다.강영수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괜찮아, 무서워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진정제 같았고, 장소월은 그의 가슴에 눌려 있었다. 그녀는 강영수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들었다.사실... 그도 두려웠던 것이었다...분명히 그도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그도 전연우처럼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보호했다.장소월은 어렸을 때 티베탄 마스티프 한 마리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전연우가 목숨을 걸고 그녀를 보호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도 개에게 물려서 지금도 팔에 깊은 이빨 자국이 남아 있다.그때 전연우의 품에서 장소월은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는데 평소와 같이 평온하고 매우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었다.전연우는 무슨 일을 하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그를 함부로 위협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전생에서 서울 사람 모두가 서울이 아무리 크게 변해도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전연우가 가장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그의 아내 전씨 부인이라는
그 차에 가까이 다가가자 백윤서는 장소월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있었지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오빠, 차 세워요. 저기 소월이 있어요.”장소월은 차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익숙한 번호판을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차 앞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고, 장소월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지만 발이 땅에 닿자마자 온몸의 힘이 빠졌다.신준수는 재빨리 소화기를 꺼내 연기를 껐다.강영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장소월의 상태를 확인했다.“어디 다친 거 아니야? 일어날 수 있겠어?”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났지만 강영수가 그녀를 잘 보호해 줬다. 장소월은 겁이 나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뒤에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생각하자 장소월의 마음은 결코 진정되지 않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오부연은 이마에 묻은 피를 닦고 말했다.“소월 아가씨가 많이 놀랐겠어요.”강영수의 눈가에는 차가운 살의가 번쩍였다. 그러나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장소월을 달래주었다.“이젠 괜찮아.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테니 무서워하지 마. 자, 내 손잡고 일어날래?”장소월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안 다쳤지?”강영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난 괜찮아.”다행이다.그가 괜찮아서 다행이다.장소월은 그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지만 다리에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녀는 일어서자 강영수의 표정이 약간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야? 너 다리 다친 거 아니야? 바지 올려 봐, 다리 보자.”강영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괜찮아, 걱정하지 마.” 신준수가 말했다.“별장 측에 연락했으니 곧 차를 보내줄 거예요. 대표님,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그와 오부연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강영수의 다리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고, 그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신준수는 절대 그를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오늘은 소월 아가씨의 생일이
“아까 돌진해 오는 차를 봤어?” 신준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잘 못 봤습니다.”강영수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럼 가서 조사해. 사흘 안에 범인을 잡아 와.”신준수가 말했다.“네, 대표님.”백윤서가 다가와서 장소월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소월아, 너 괜찮아? 연우 오빠와 같이 집에서 네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도우미 아줌마가 아니었으면 연우 오빠랑 나 둘 다 몰랐을 거야. 지난번에는 네 생일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선물을 준비했어.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오지 않아서 너무 아쉬웠어. 다음에 꼭 생일 파티를 준비해 줄게.” 장소월은 차가운 표정으로 손을 빼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오빠랑 언니, 먼저 돌아가요!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장소월은 전연우가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우리 집 일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맡기겠어. 소월아... 너 아버지께서 했던 말씀 잊었어? 밖에서 사고 나면 오빠한테 말하라고 했잖아. 너랑 윤서는 먼저 차에 타. 난 강 대표님이랑 얘기 좀 나누고 집으로 보내줄게.”전연우의 목소리는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후의 고요함 같았다.그는 장소월에게 다시 개인적으로 강영수를 만나면 그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강영수는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제가 소월이를 돌려보낼 테니 전 대표님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전연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소월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월아, 오빠 말 들어, 응?”장소월은 강영수의 뒤에서 한 발짝 나와 말했다.“영수야... 난 오빠랑 같이 먼저 집에 갈게.”장씨 집안에 있는 한, 그녀는 전연우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강영수의 눈빛에는 어둠의 흔적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집에 도착하면 나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 마.”장소월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윤서 너는 먼저 올라가서 쉬어.”백윤서는 전연우를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장소월을 쳐다봤다.“오빠, 소월이 방금 사고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너무 나무라지 마요.”백윤서는 전연우와 장소월이 단 둘이 있는 것이 싫었다. 가끔 그녀는 전연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동안 그녀에게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백윤서는 한 번도 전연우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안전감이 없었다.백윤서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은경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 말을 더듬었다.“그... 그럼 저도 올라가 보겠습니다?”전연우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자 은경애는 깜짝 놀라 바로 뒤돌아 서서 도망갔다.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차갑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장소월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야?”전연우가 그녀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뿜었다. 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표정일지 알 것 같았다.방금 전 강영수가 그녀를 걱정해 줄 때 옆에서 짓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기분을 자유자재로 통제했다.“잊지 않았어요.”장소월은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나는 땀을 닦았다. 그녀는 불안해서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설명했다.“오늘은 오 집사님이 데리러 오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기회에 영수한테 말하려고 했어요.”“오빠, 저는 오빠가 말한 대로 다 했어요. 뭘 더 해야 하는 거죠?”“머리 들어.”그는 명령을 내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전연우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어디서 들통났는지 알아? 소월아... 난 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게 싫어!”그녀와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고,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그녀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뭘 좋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