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 너는 먼저 올라가서 쉬어.”백윤서는 전연우를 흘끗 쳐다보더니 다시 장소월을 쳐다봤다.“오빠, 소월이 방금 사고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너무 나무라지 마요.”백윤서는 전연우와 장소월이 단 둘이 있는 것이 싫었다. 가끔 그녀는 전연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동안 그녀에게 한 말은 무슨 의미일까?백윤서는 한 번도 전연우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안전감이 없었다.백윤서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은경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 말을 더듬었다.“그... 그럼 저도 올라가 보겠습니다?”전연우가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자 은경애는 깜짝 놀라 바로 뒤돌아 서서 도망갔다.거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차갑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장소월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야?”전연우가 그녀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뿜었다. 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표정일지 알 것 같았다.방금 전 강영수가 그녀를 걱정해 줄 때 옆에서 짓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기분을 자유자재로 통제했다.“잊지 않았어요.”장소월은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나는 땀을 닦았다. 그녀는 불안해서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설명했다.“오늘은 오 집사님이 데리러 오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기회에 영수한테 말하려고 했어요.”“오빠, 저는 오빠가 말한 대로 다 했어요. 뭘 더 해야 하는 거죠?”“머리 들어.”그는 명령을 내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전연우는 가볍게 웃었다.“네가 어디서 들통났는지 알아? 소월아... 난 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게 싫어!”그녀와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고,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그녀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뭘 좋
전연우는 온 힘을 다하지 않았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그녀의 고통에서 오는 쾌감을 즐겼다.자비를 구하는 그녀의 울부짖음을 들을 줄 알았지만, 그 어떤 애원도 없었다.이런 그녀를 보며 전연우는 점점 더 짜증이 났다.“뭐야, 이젠 용서를 구걸하지도 않아?”장소월은 전연우가 정말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면 여기서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오늘 밤 일어난 일 때문인지, 그는 그녀가 용서를 구하고 순종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장소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고, 눈은 반짝였다. 눈가에 찬 눈물이 떨어졌다. 가여운 그 모습은 비 오는 날에 망가진 작은 백합 같았다. 꽃잎이 부서진 듯한 그 모습을 누가 보더라도 가슴이 아플 것이다.장소월은 그를 밀쳤다.“나는 죽어도 당신에게 자비를 구걸하지 않을 거야. 전연우, 당신은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갈 거야.”그는 손으로 너무 많은 생명을 죽였다...하늘은 참 불공평하다. 그를 살려두다니.지옥?그는 이미 지옥의 악령이었다.“그럼 난... 너를 지옥에 데려갈 거야.”장소월이 정말 강씨 가문을 넘본다면,그는 그녀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전연우는 도망치려는 장소월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그리고 전연우는 병아리를 드는 것처럼 그녀를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벽에 눌렀다. 그는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거칠게 키스했다.그는 키스하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장소월은 뇌에 산소 부족으로 질식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입술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과 치아 사이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녀는 허둥지둥 대면서 손으로 그의 얼굴과 목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장소월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전연우는 완전히 미쳐버렸다...복도에서 백윤서는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백윤서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텅 비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달빛이 창문을 통해 욕실 문 앞에 쏟아졌다.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공허하고 무감각한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해 귀신 같았다.침대 위에 있는 휴대폰은 밝게 빛났고, 기분 좋은 벨 소리가 끊임없이 방에서 울렸다.발신자는 강영수였다.장소월은 몇 번이고 자동으로 끊어지고 다시 울리는 휴대폰을 지켜보았고, 다시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잠시 후에야 그녀는 걸어가서 전화기의 배터리를 꺼내 옆에 던졌다.초승달 목걸이는 여전히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손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물에 닿지만 않으면 상처가 벌어지지 않았다.아침에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장해진과 강만옥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고, 전연우와 백윤서도 함께 있었다.식탁에서 장해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전연우와 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장해진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점차 회사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전연우에게 넘겨주었고, 대부분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그의 손에 맡겨졌다.장해진은 이제 강만옥에게 집착할 정도로 빠져 있었는데, 그에게 회사를 책임질 여유가 있을까?“저녁에 나와 같이 연회에 가면 인가네 큰 아가씨가 너에게 지난번 일로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네가 직접 선물을 골라봐. 젊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건 그 몇 가지니까 정성 들여 골라.”“네, 아버지.”인가네? 장소월은 어딘가 익숙한 듯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장소월은 죽 반 그릇을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아버지, 저 먼저 학교 갈게요.”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야 장해진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학원에서 모든 수업을 마쳤니?”장소월이 말했다.“3개월 동안 못 다닌 수업은 다 보충했어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성적 떨어지지 않게 노력할게요.”그제야 장해진의 표정이 풀리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 조심해서 다녀와.”장소월이 은경애한테서 책가방을 건네
백윤서는 천천히 안전벨트를 풀었고, 차 문을 여는 순간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오빠,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전연우는 창문을 통해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윤서야, 너 곧 시험이니까 다른 건 생각하지 마.”전연우가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백윤서는 결국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했고 전연우로부터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그가 한 마디만 말해도 그게 어떤 설명일지라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백윤서는 실망한 채 차에서 내렸다.'소월이는 오빠에게 어떤 존재일까?'장소월은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교무실로 가서 담임 선생님을 찾았다.장소월의 서류가 다 넘겨진 후, 그녀는 교실로 돌아와 책상을 정리했는데, 사실 별거 없었고 교과서와 연습 문제 몇 장뿐이었다.이제 곧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조용하던 교실에 장소월이 들어온 순간, 교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헐, 진짜야! 장소월이 정말 왔어?”“봐, 1반 담임 선생님이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장소월 정말 1반으로 가는 거였어!”그중에는 몇몇 조롱하는 말도 들렸다.“아니면 우리 내기를 해서 장소월이 1반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보자.”“난 6만 원 걸게. 3일 버티겠지.”“난 하루라고 봐...”장소월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무시하고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한 선생님, 저 준비됐어요. 가요.”한결은 서울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였고, 그녀의 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모두 엘리트였다.장소월은 1반의 학습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한결은 교과서를 손에 들고 앞으로 걸어가면서 1반의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1반에 오면 1반의 규칙을 준수해야 해. 연애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대학 입시 전 마지막 6개월 동안 공부와 관련 없는 물건들은 학교에 가져오지 마.”“
우등반의 학생들은 각자 복습하고 책을 보느라 바빴고, 하루의 수업은 너무 꽉 차서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장소월은 이런 학습 분위기를 좋아했다.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제운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뛰어난 기업의 자식들이고 좋은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게을리하지 않았다.바로 그때 책상이 흔들리자 장소월은 그녀의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긴 포니 테일을 하고 있었고, 밤색 곱슬 머리였다. 그녀는 장소월과 비슷한 키에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장소월의 가슴 앞에 엎드려 물었다.“얘, 뭘 먹어서 그렇게 커졌어?”“너 오늘 전학 온 학생 맞지? 이름이 뭐더라... 장소월, 맞지!”장소월이 자기소개를 할 때 다른 학생들은 모두 숙제를 하고 있었고, 아무도 장소월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내 이름은 인시윤이야. 우리 친구 하자!”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점심에 밥 먹으러 같이 가자!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인시윤?장소월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익숙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본 걸까?인 씨?오늘 아침 식사할 때 장해진이 언급한 인가네 아가씨가 혹시 인시윤이 아닐까?그녀가 바로 인가네 딸이었어?장해진이 인씨 가문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고 전연우에게 잘 보이라고 당부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굳이 애쓰지 않아도 장해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장해진은 전생에서 죽을 때까지 장소월과 전연우의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들은 장해진이 죽은 후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었다. 결혼식도 없었고, 사회자도 없었고 꽃도 없었다... 혼인 신고 서류만 있을 뿐이었다.장소월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장소월은 왜 인시윤의 말에 동의했을까?사실 방금 장
현재 장소월은 친구도 거의 없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그녀는 심심할 때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며 좋아하는 일을 했다... 대인관계 없이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친구 사이에 의심이나 불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장소월은 인시윤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몰랐다.하지만 장소월은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5호 학생 식당.인시윤이 자주 간다고 말했던 곳은 회전식 샤부샤부 식당이었다.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장소월은 안 매운 국물로 주문했다.인시윤이 주문한 샤부샤부는 매우 매웠고, 장소월은 그 국물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녀는 시금치를 집어 냄비에 넣고 휘저으며 말했다.“소월아, 오늘 우리 집에서 내 생일 파티를 열 예정인데, 알고 있지? 너랑 네 오빠도 초대하고 싶으니까 같이 와!” 냄비 속의 뜨거운 하얀 김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인시윤의 눈은 매우 예뻤다. 길게 째진 눈에 속 쌍꺼풀, 눈을 감았을 때 눈꺼풀 중앙에 아주 작은 점이 있었다.그녀는 독특하게 아름다웠고, 볼수록 더 예쁜 유형이었다. 장소월과는 달랐다. 장소월은 서울 최고 미인인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아 한눈에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예상대로 그녀의 목표는 전연우였다.장소월은 인시윤과 전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두 번의 인생을 산 그녀는 여자를 이해한 경험으로 볼 때 인시윤은 분명 전연우에게 관심이 있었다.“나 초대장도 가져왔어. 저녁 7시 30 분에 꼭 와. 오늘 밤 맛있는 음식 많이 준비할 거야. 아빠가 연예인들도 초대했어. 꼭 와!”장소월은 빨간색 초대장을 보고 말했다.“저녁에 야자가 있어서 갈 수 없을 것 같아.”인시윤은 매운 것을 많이 먹어서 입술이 부어 있었다.“그건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수업이 끝나면 바로 나를 따라 나오면 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당부했다.“아빠가 많은 사업 협력 파트너를 초대했어. 그 꼰대들은 행사 예절에 특별히 신경 쓰기 때문에 올 때
인시윤은 손으로 머리를 바치고 마음속으로 그것들을 기억했다.“알아. 네 오빠가 아끼는 사람이 백윤서라는 거. 서울제2중학교에서 누구한테 맞아서 네 오빠가 이 학교로 전학 보냈다고 들었어.”장소월은 국을 몇 입 먹어보고 아무 맛도 안나 싱겁다고 생각했다. 이 식당은 주변 환경이 좋고 야채도 신선하지만 유일한 나쁜 점은 사골 국물이 잘 끓지 않아 마지막에 풍미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전연우는 이미 집을 나와 백윤서랑 같이 살고 있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백윤서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거야.”장소월은 인시윤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렇게 말했다. 인시윤은 긴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혐오감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 여자애는 너무 가식적이야. 너도 설마... 전연우 좋아하는 건 아니지?”장소월은 바로 부인했다.“그 사람은 영원히 내 오빠야. 나는 내 오빠를 좋아하는 일은 없어.”원래 경계하던 인시윤의 눈빛은 즉시 경계를 풀었고 그녀는 안도하며 가슴을 쳤다.“깜짝 놀랐네. 난 네가 백윤서와 똑같은 줄 알았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나중에 우리가 가족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럼 난 너를 시누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장소월은 담담히 입꼬리를 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시윤에게 전연우의 본모습에 대해 말해야 할까?그녀가 전연우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면 전연우는 이 상황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인시윤은 분명히 상처받을 것이다.그를 사랑하게 되면 점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을 것이다. 결국 황금색 철로 짜인 새장에 갇혀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끝내 구덩이에 빠져 허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만하자. 그녀 자신도 지금 곤경에 처해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을 걱정할까?전연우가 누구와 결혼하든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식사 후 인시윤은 그녀에게 밀크티 한 잔을 더 사주었다.그녀는 뒤에서 누군가 인시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인시윤은 손을 흔들며 말
이제 강용은 장소월을 괴롭히지 않는다!정말 신기한 일이다...강용은 결국 농구에 흥미를 잃고 옆에 있는 물을 집어 들고 곧바로 코트를 떠났다....30 분 안에 수학 문제지를 푸는 건 확실히 어려웠다. 게다가 모두 교과서의 지식을 넘어서는 내용들이었고, 일부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푸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었다.마지막 수업의 종소리가 울리자 한결은 교과서를 닫았다.“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은 인시윤 학생의 생일이니 시윤 학생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오늘은 야자 안 합니다. 대부분 친구들이 인시윤 학생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았죠?”“모두가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요.”인시윤은 반에서 가장 활동적인 학생으로 꼽힌다.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장소월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천만에요.”1반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한결이 나가자마자 인시윤은 장소월의 옆으로 달려가 말했다.“소월아, 가슴 큰 친구야... 이제 그만하고 같이 가자!”인시윤은 정말 그녀를 골치 아프게 했다. 웬 이상한 별명을 붙여줬는지.장소월은 마지막 글자를 쓰고 재빨리 책을 닫았다.“다 했어. 가자.”인시윤이 그녀를 칭찬했다. “문제 정말 잘 풀었네! 어디 보자, 거의 다 정답인데 우리 올림피아드 그룹에 오지 않아서 아쉽다. 어쩌면 우리가 같이 서울대에 붙을지도 모르는데.”장소월은 동작을 멈췄다. “나도... 가도 될까?”“당연하지! 왜 안 돼?”“올해 올림피아드 대회는 총점으로 순위를 매기는데... 제운고랑 서울 2중 애들만 참가하는 거 아니야. 네가 전국 대회에서 10등 안에 들면, 소월아... 이건 가문의 영광이야!”“알았어! 혹시 그룹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해?”장소월의 뒤쪽에 앉은 두꺼운 안경을 쓴 소년의 표정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감정이 감돌았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