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 소월 언니의 몸엔 핏자국이 가득했었다... 설마... 그 피... 소월 언니가 다쳐서 묻은 게 아니라 대표님의 것이었던 거야?경찰이 물었다.“소민아 씨, 더 하고 싶은 말 있어요?”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득 신이랑이 떠오른 그녀가 말했다.“저 제 친구랑 몇 마디 얘기 나눠도 될까요?”“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전엔 소민아 씨와 친구분 모두 풀려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이 일이 두 사람과 관련이 없다는 걸 증명해 주어야만 나갈 수 있습니다.”소민아의 머릿속엔 기성은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오직 기성은 만이 당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그녀는 정말 자신이 신이랑을 위험에 빠뜨릴 줄은 몰랐다.그녀가 기성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린 지 1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소민아는 인내심을 갖고 한번 또 한 번 반복해 걸었다.마지막으로 그 번호에 걸었을 땐 이미 전원이 꺼진 상태가 되어버렸다.분명 기성은도 대표님이 다친 일이 그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소민아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누군가 제 결백을 증명해 주어야만 나갈 수 있는 거예요?”“이번 건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저흰 성세 그룹 사람이 직접 와 두 사람이 이번 일과 확실히 관련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줘야만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소민아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바깥에 서 있는 저 사람은 성세 그룹의 편집장이에요, 소설 을 쓴 작가님이기도 하고요. 저 사람은 절대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몸도 좋지 않은데 먼저 보내면 안 될까요? 전 계속 여기에 있을게요.”옆에 있던 여경이 보내온 서류를 훑어보고는 말했다.“이 일은 저희가 처리할게요.”옆 유치장.여우림은 소식을 듣고 경찰서에 달려와 신이랑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뒤 그를 유치장에서 빼냈다.신이랑이 형사에게 물었다.“민아 씨 상황은 어떤가요?”“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우림은 그 말을 끝으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얼마나 기다렸을까. 아침부터 시작된 기다림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이어져가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경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가 설득했다.“신이랑 씨, 이렇게 기다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여자친구분이 신이랑 씨 건강을 걱정하고 있어요.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도 집에 돌아가세요.”신이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계속 이렇게 기다리는 건... 휴. 됐어요! 그럼 음식이라도 좀 드세요.”얼마 후 그녀가 경찰서 안에서 빵과 따뜻한 물을 들고 나왔다.물이 담겨 있는 컵을 감싸니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그의 손에 따스한 온도가 전해졌다.눈을 내리뜨니 차갑고 무거운 무언가가 속눈썹에서 느껴졌다. 쌀쌀한 날씨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다 보니 서리가 내려앉은 것이다.신이랑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가로등 아래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그는 들고 있던 물이 차갑게 식어버린 뒤에야 다시 내려놓았다.마지막으로...신이랑은 핸드폰을 꺼내 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문밖에 홀로 서 있는 그의 얇은 뒷모습은 너무나도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몇 초 뒤, 전화기 너머로 두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10년 전 이후로 처음 연결된 통화였다.남자는 애써 흥분한 감정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신이랑이 입을 열었다.“도움을 청할 일이 하나 있어서요...”“그래...”얼마 후.“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시간이 있으면 이쪽으로 와. 어쨌든 난 네 아버지잖아. 네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들 난 자랑스럽게 생각해.”신이랑은 아무런 감정 없이 차갑게 한 글자만 내뱉었다.“네.”“다음 주 월요일 시간 되면 우리 가족 같이 밥 한 끼 먹자. 장소는 네가 정해.”“그럴 필요 없어요. 이번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상대방이 한동안 침묵하자 신이랑이 다시 말했다.“다음번엔 꼭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전화를 끊고 난
소민아는 신이랑의 차에 올라탔다. 똑같이 경찰서 문 앞에 정차되어 있던 검은색 승용차 안에서 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그들의 꼭 맞잡은 두 손까지도 그는 똑똑히 보았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소피아가 어두워진 기성은의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기 비서님, 소민아 씨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들어가실래요?”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에 기성은이 직접 여기까지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대표님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하여 성세 그룹이 직격탄을 맞은 이 혼란한 시점에 소민아에게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기성은은 차가운 얼굴로 액셀을 밟아 경찰서를 떠났다.소민아는 밤새 휴식하지 못했던 탓에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신이랑도 차 속도를 늦추었다. 아파트 단지 아래 도착한 뒤 조심스레 그녀를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소민아는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신이랑이 침대에 눕히고 신발을 벗겨주자 그녀는 이불 속으로 쏙 파고 들어갔다.신이랑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하루종일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 옆 서랍 안에서 진통제 한 통을 꺼내고 이미 차가워진 물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다음 날, 소민아는 오후 한 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거실에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자신이 신이랑의 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침대 옆 정연하게 개어진 깨끗한 옷 위 쪽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새 옷이니까 깨면 갈아입고 나와서 밥 먹어요.]다정한 그 한 마디를 본 순간 마음속에서 따스함이 피어올랐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민아는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늘 혼자였기에 외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때로 익숙해진 상태였다.처음으로 이런 대접을 받아보니... 기분이 꽤나 좋았다.소민아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신이랑이 입으려고 샀던 옷이라 그녀가 입으니 사이즈가 조금 커 긴 소매를 말아 올렸다.
소민아는 핸드폰을 들고 방에서 나갔다. 본래 낯설었던 곳이 어느새 점점 더 제집 같이 익숙해졌다. 그녀는 방을 나서며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이랑 씨, 밥 먹고 나서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기 비서님이 절 찾으시네요.”신이랑이 그녀에게 삼계탕을 떠주며 말했다.“아침에 내가 말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그러고 나서 나랑 같이 회사 가요. 아직 시간 많아요.”“그래요.”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방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도 신이랑의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했다.회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는 두말없이 기성은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밖에 다다른 뒤 잠시 고민하고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요.”지금 비서팀에는 직원이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대표님이 결혼식 기념으로 직원들에게 휴가를 준 것이다.소민아가 들어간 뒤에야 기성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내 전화 왜 안 받았어요?”“배터리가 없었어요. 밤에 이랑 씨가 충전해줘서 그나마 빨리 확인할 수 있었어요.”그 말에 기성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떨구고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같이 있었어요?”소민아가 대답했다.“그건 제 사생활이에요. 기 비서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기 비서님,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거예요?”“대표님은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해 중환자실에 계세요. 내가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거기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민아 씨밖에 없어요.”“하지만 전 송 부대표님의 비서예요.”기성은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이제부턴 아니에요. 송 부대표님한테는 내가 얘기할게요. 이번 결혼식에서 있었던 일은 민아 씨가 똑바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대표님은 의식을 되찾으면 분명 민아 씨한테 그 죄를 물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조금이나마 속죄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그 말에
기성은은 펜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10분 줄 테니까 서류 가져와요. 내가 사인할게요.”“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소민아는 몸을 홱 돌려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녀는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서류를 기성은의 눈앞에 내밀었다.기성은이 빠르게 사인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알아서 인수인계해요. 인사팀 쪽엔 내가 말해둘게요. 내일부턴 아래층에 출근하면 돼요.”소민아는 그를 더 화나게 만들려는 듯 쏘아붙였다.“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기성은은 그녀에게 더는 눈길을 주지 않고 서류 페이지를 넘겼다.“나가요. 갈 때 문 닫는 거 잊지 말고요.”소민아는 나가며 일부러 문을 닫지 않았다. 그때 마침 들어오고 있던 소피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은 마치 드디어 속 시원히 꺼지는구나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소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눈을 까뒤집고는 소피아의 어깨에 몸을 부딪쳤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소피아는 분노가 잔뜩 실린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소민아는 종이 박스를 들고 와 자신의 물건을 모두 안에 집어넣었다.사무실에서 나선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물이 흘러나와 손등으로 슥 닦았다. 그녀는 등 뒤에서 기성은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모두 눈에 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소피아가 품 한 가득 서류를 안고 들어왔다.“기 비서님, 오늘 사인해야 할 서류입니다.”기성은은 그 한 무더기 서류 속에서 한참 동안 무언가 찾다가 말했다.“중동 석유 그룹과 개발했던 프로젝트에 관한 건 어디에 있어요?”소피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송 부대표님의 부하직원이 가져갔어요. 부대표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저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회사에 대표님이 안 계시니 부대표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거 비서님도 아시잖아요.”기성은의 눈동자에 날카로움이 번뜩였다.“송시아 핑계 대지 말아요. 됐어요. 나가
얼마 후, 단톡방이 또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빅뉴스예요. 오늘 인사팀 쪽 누군가가 흘린 소식인데요, 기 비서님이 사직서를 내셨대요. 다들 사표를 수리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대요.][뭐라고요? 기 비서님이 사직한다고요? 흑흑흑... 내 남신님이 떠난다고요? 그럼 회사 밖 여자들이 또 들러붙을 거잖아요. 짜증 나요. 어떻게 하면 제 남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요?][기 비서님이 언제부터 당신 남자가 된 거예요? 당신 남자는 남편이겠죠!][난 누구처럼 지조 없는 여자가 아니에요. 왜 관심도 없다가 이제 와 내 남자를 빼앗으려 하는 거죠?][가정이 있는 아줌마는 이만 입 닫으시죠. 정말 걱정이에요. 성세 그룹은 휘청거리고, 기 비서님은 사직서를 내시다니요! 세상에,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요.]...신이랑이 외근을 마치고 편집팀에 돌아왔다. 사무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여자를 본 그가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예요?”소민아가 한 통 한 통 반복적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야속한 통화음만 들려올 뿐이었다.“누구한테 전화하는 건데요?”소민아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말했다.“기성은이 사직서를 냈대요. 알고 있었어요?”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금방 들었어요.”소민아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 그랬을까요? 그것도... 하필 제가 부서이동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떠나버렸어요. 회사에 정말 큰일이 생긴 걸까요?”신이랑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씨, 우리 구르미 시리즈는 성세 그룹에서 단독으로 분리된 독립적인 회사예요. 성세 그룹의 상황이 어떻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어요. 또한... 그건 회사 기밀이에요. 일반적으로 쉽게 외부에 흘리지 않아요.”“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기성은 본인만 알고 있겠죠.”“안 되겠어요. 저 꼭 똑똑히 알아야겠어요. 대체 왜 제가 부서 이동하자마자 기성은이 사직서를 냈는지 말이에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소민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신이랑이
소민아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 깃들었다.“내가 떠나고 나면 내 자리는 민아 씨 것이에요. 송시아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 회사에서 떵떵거리며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도 민아 씨 건드리지 못해요.”소민아가 그가 보내온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제가 그 자리에 앉는다는 거예요? 기성은 씨...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예요? 또 날 체스 위에 말처럼 쥐고 흔들려는 거죠?”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핸드폰과 연결된 차 스크린에 발신자 이름과 번호가 떴다.“...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 해외에 나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회사 일은 나랑 상관없어요. 내려요!”소민아는 스크린에 쓰여진 주가은이라는 이름을 보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밀려와 당장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대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고 싶었지만 알 길이 없었다.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꼬치꼬치 캐묻겠는가?소민아가 차에서 내리고 기성은이 멀리 몰고 갔을 때, 신이랑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괜찮아요?”소민아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그 후 일주일 내내 소민아는 회사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 소피아가 그녀를 대신해 송시아의 비서직을 맡았다.소민아는 가끔 비서팀 사무실을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가장 안쪽 아무도 없는 공허한 방을 쳐다보곤 했다.그는...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소민아도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와 협업해 편집 일을 하고 있었다.회의실 안. 편집팀 직원들이 한창 회의를 하고 있었다.“를 쓴 작가한테 연락이 안 닿아요. 지금 촬영팀에서 이미 카메라 테스트까지 마친 상태란 말이에요. 이런 장르물은 세세한 부분까지 작가랑 상의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이 일은 원래 하수빈 씨가 맡았는데 지금 출산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에요.”신이랑이 물었다.“언제부터 연락이 안 된 거예요?”“이제 2주가 다 되어갑니다.
“고마워요. 나 먼저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문자 할게요.”“몸조심해요.”소민아는 검은색 가죽 가방을 들고 무릎까지 오는 짙은 색 코트를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래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비서팀 직원과 하하호호 웃으며 걸어오고 있는 소피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소민아는 못 본 척 지나가려 했으나, 그녀 앞에서 거들먹거릴 기회를 그냥 지나쳐 보낼 소피아가 아니었다.소피아가 소민아의 길을 막아섰다.“아직도 회사에 다니는지는 몰랐네요. 짤린 줄 알았는데... 쯧쯧... 그래도 10층 편집장님 아래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이네요!”소민아는 소피아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 신발, 그리고 시계까지 모두 성세 그룹에서 갓 발표한 몇천만 원짜리 신상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비서팀 직원들의 월급은 고작 몇백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고가의 물건을 살 수 있겠는가.소민아가 고개를 떨구고 피식 웃고는 날카롭게 일침했다.“그런가요? 부비서장 자리에 앉자마자 몇천만 원짜리 액세서리도 서슴없이 사는 누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서계향 씨... 스폰서라도 생긴 거예요?”“그 입 닫아요!”소민아가 입을 막고 쿡쿡 웃어댔다.“참, 깜빡했네요. 서계향은 예전 이름이었죠. 지금은 소피아고요. 내 정신 좀 봐. 아래층으로 부서를 바꾸니 잊어버렸네요.”“우리 귀한 사모님은 그만큼 마음도 넓으실 테니까 작은 일로 저와 싸우진 않으시겠죠? 그럼 전 이만 갈게요.”소피아의 본명은 서계향이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감히 내 앞에서 저렇게까지 기고만장하다니.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너부터 치워버릴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소민아!’소민아는 익숙한 길로 차를 몰고 한 오피스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그녀가 이 일을 맡은 건 그 작가 외에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소민아는 주소에 적힌 집 앞에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