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화창한 날씨를 보고 있으니 송시아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우리 내기 하나 할래요? 그 결혼식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아닐지?”“그건...”소민아가 말했다.“부대표님,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설마 소...”그녀는 소월 언니라는 네 글자를 마저 내뱉지 않고 이내 말을 바꾸었다.“장소월 아가씨가 도망칠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설마요! 대표님과 사모님 사이 감정이 얼마나 두터운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요. 또한... 두 분은 이미 혼인신고까지 하셨는데 이제 와 도망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두 분은 분명 평생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송시아가 들고 있던 죽을 내려놓았다.“인시윤 씨와 대표님이 어떻게 이혼했는지 잊었어요? 그깟 종이 쪼가리 일뿐인 혼인신고서 찢으면 그만이에요. 대표님이 마음만 먹으면 성세 그룹 안주인 자리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거든요.”“전연우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하필이면 그 여자를 선택하다니!”장소월과 전연우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 하늘이 이미 정해주었다. ‘장소월, 이번 생에도 그 운명과 맞서려 하는 거야?아무리 노력해도 너희 두 사람은 안 돼.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이토록 너여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걸까?저번 생에도 그랬고, 이번 생에도...너희가 결혼한다는 그 2월 14일 네 기일이었잖아!만약 그날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면, 장소월... 넌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야.전연우는 잠시 너와 결혼할 뿐, 결국엔 날 선택할 거야. 널 한번 버린 사람인데 두 번을 못 버리겠어?’소민아는 회사에 돌아온 뒤에도 힘없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코너를 돌다가 기성은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그녀는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이마를 살짝 만지고는 머리도 들지 않은 채 지나갔다.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앞 똑바로 보고 다녀요.”“네.”기성은의 시선이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머물렀다. 옆에 있던 소피아가 끼어들었다.“매번 송 부대표
기성은이 옆에 있던 컵을 들어 올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는 소민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송시아와 오랜 시간 붙어있더니 다른 사람 생각을 읽을 줄도 알고. 좋아요! 영리해졌네요!”소민아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지금 누굴 조롱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똑똑히 알려줄게요. 당신은 내 상사이긴 하지만 난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나한텐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까요.”“오. 사람으로 날 짓누를 줄도 아네요?”“똑같이 월급 받는 처지인데 기 비서님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절 얕잡아 보는 거예요? 전 소나 말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매일 그렇게 못살게 굴면 어떻게 버텨요!”기성은이 이마를 찌푸렸다. 목소리도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만하면 됐어요.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요. 나 바빠요...”“컥컥컥...”기성은이 주먹으로 입을 막고 연속 기침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조금 쉰 것 같았다.소민아는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생각에 잠겼다. ‘저 자식 감기에라도 걸린 건가?됐어. 오지랖 부릴 필요 없어. 저 사람 옆엔 엄연히 비서가 있잖아? 주가은도 있고!’소민아는 진지한 얼굴로 의자를 끌고 기성은의 옆에 가 앉았다.그녀는 송시아가 병원에서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기성은에게 알려주었다.“... 송시아는 왜 결혼식이 정상적으로 진행될지를 걸고 저와 내기를 하자고 했을까요? 설마 자기가 신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니면 사람을 불러 망쳐놓으려고?”“절대 대표님의 전 부인은 아니어야 할 텐데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겠죠. 인시윤은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으니까 결혼식 현장에 나타날 리는 없어요. 또한... 예식장에 수많은 경호원들을 배치할 예정이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범죄자를 감시하는 줄로 알 거예요.”기성은의 날카로운 눈빛에 소민아는 자신이 말을 잘못한 줄로 여기고 겁먹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기성은은 이번엔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 다만 한
소민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소월 언니...”그녀는 송시아와 기성은과의 대화 내용을 모두 장소월에게 말해주었다.핸드폰 너머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약 30초 뒤, 장소월이 입을 열었다.“민아 씨, 좀 복잡한 일이 있긴 해요.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현아를 찾아가요. 현아는 강지훈 옆에 있으니까 안전할 거예요. 전연우는 극단적인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현아가 강지훈을 시켜 민아 씨를 보호하면 전연우도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그러니까... 소월 언니, 정말 떠나시려는 거예요?”장소월은 서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방을 나섰다.“민아 씨, 이번 일은 모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민아 씨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민아 씨는 그냥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 돼요.”몇 분 뒤, 전연우는 어느새 방에서 나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누구랑 통화하는 거야?”핸드폰 너머 소민아는 전연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두말없이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민아 씨야... 결혼식에 관해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했더라고.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어. 네 목소리가 들리니까 전화 끊은 것 같아.”“넌? 일 다 처리했어?”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내가 맡은 일은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게 막는 거야. 그날 적잖은 하객들을 맞이해야 할 거야. 우리 사모님이 고생 좀 해야겠어.”전연우는 이번 기회에 그녀가 도망칠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전연우는 서울에서 더 많은 경호원들을 동원해 그녀를 지키려 하고 있다.장소월 또한 전연우의 말뜻을 완전히 알아차렸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날은 절대 평화롭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결혼식 날이 다가올수록 장소월의 마음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오늘 이 열두 시가 지나면, 내일 결혼식이 시작된다.밤 열두 시.불안감에 휩싸인 사람이 어떻게 그녀뿐이겠는가.서재 안, 농후한 담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어느새 재떨이엔 담배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촬영 감독들이 모두 도착했다. 장소월은 화장대 앞에 앉아 한 시간이 넘도록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사모님, 평소 피부 관리 어떻게 하시길래 이렇게 좋은 거예요?”장소월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그 위 생기있게 반짝거리는 빨간 입술... 화려한 웨딩드레스까지 입으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강림한 선녀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성세 그룹 안주인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결혼식 날이었지만, 장소월은 기대보단 불안함이 훨씬 더 컸다. 그의 웨딩드레스 취향은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비록... 전생엔 결혼식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직 혼인신고서 한 장만이 그녀가 전연우의 와이프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었다.약혼식도 간단한 드레스만 입고 지인 몇 명과 조용히 진행했었다.지금 이 성대한 결혼식에 비교하면, 전생의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몰래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 하나 없이 텅 비어있는 눈빛을 보고는 그녀가 결혼식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고 여기며 말했다.“사모님, 긴장되시면 저희랑 얘기 나눠요. 오늘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아세요? 대표님께서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난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장소월이 거울을 보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이미 내뱉은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더는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오늘 들러리를 맡은 소현아가 커튼을 열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소월아, 소월아... 어때? 예뻐?”장소월은 거울 속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예뻐. 현아는 뭘 입어도 예쁘지.”소현아는 최근 줄곧 강지훈과 함께 있었다
장소월은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손등에 떨어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그림 그리느라 사부님 고생 많이 하셨겠네.”“할아버지께선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고 하셨어. 하지만 이번엔... 나와 할아버지 모두 네가 한 번쯤은 오로지 너 자신만을 위해 살길 바라.”“너한텐 결혼 생활에 속박되는 것보다 넓은 곳에서 자유를 즐기며 사는 게 더 어울려.”“만약 떠나고 싶다면...”장소월이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허이준, 난 이제 못 떠나.”그 말 이후 기나긴 침묵이 내려앉았다.소현아가 먹을 것을 한가득 안고 들어왔다.“소월아, 소월아... 와봐, 내가 맛있는 거 갖고 왔어.”침대에 널려있는 간식을 보니 장소월은 사색에 잠겼다. 모두 그녀가 예전 좋아하던 것들이었다.“이것들 다 어디에서 가져온 거야?”소현아가 문을 가리켰다.“옆방 네 화실에서 가져왔어. 장롱 안에 간식들이 꽉 차 있던데?”설마 전연우가 그녀를 위해 준비해둔 건가?그런데 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은경애가 소현아의 뒤를 쫓아 들어왔다.“아이고, 세상에. 이 간식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소현아는 감자 칩 한 봉지를 뜯으며 은경애를 노려보았다.“그래도 먹을 건데요? 소월이는 아주머니처럼 깍쟁이가 아니거든요!”“괜찮아요. 먹게 놔둬요.”장소월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현아야, 강지훈... 너한테 잘해줘?”소현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그럭저럭... 나한테 맛있는 걸 줄 때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장소월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아래층에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은경애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어머, 함이 왔나 보네요.”은경애는 급히 방으로 돌아가 별이를 안았다.마당으로 고급 차량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소민아는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지름길로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전연우는 정장을 차려입고 평소보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손에 꽃을 든 채 들
“소월 언니, 언니가 떠나든 남든 전 언니가 행복하길 바라요.”“그래요.”그녀는 정말 현아 언니를 찾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회사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 말이다.전연우는 들러리들이 고생한다며 통 크게 한 사람당 몇천만 원이나 되는 봉투를 쥐여주었다.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소민아였으나, 이번엔 무엇 때문인지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별이는 장소월의 옆에 앉아 고개를 빼꼼 내밀고 헤헤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개 자라지 않은 이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장소월은 손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별이의 얼굴은 그녀의 어릴 때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만약 그녀가 불임이 아니었다면, 만약 전연우가 보육원 앞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니라면, 장소월은 별이가 정말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전연우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장소월은 그의 검은색 구두를 보자마자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전연우가 천천히... 그녀의 면사포를 들어 올렸다. 오랜 세월 간절히 아내로 원했던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아름다움에 정신이 혼미해졌다.예쁘다는 말로 형용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이 떨려왔다.전연우는 그녀의 아래턱을 살짝 들어 올려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너무 예뻐.”장소월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전연우는 직접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그때, 별이가 돌연 벌떡 일어나 장소월의 어깨를 잡고는 그녀 얼굴에 뽀뽀를 했다.“엄마... 엄청 예뻐요...”옹알이 같은 흐릿한 발음의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평소의 전연우라면 별이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껴 매서운 눈총을 날렸을 테지만, 지금 그는 아이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신부를 안아 아래층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운전기사가 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장소월은 차 안에 앉아 마지막으로 남원 별장을
장소월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전연우가 말했다.“저녁에 너한테 줄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분명 좋아할 거야.”그녀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천추 산장에 도착하자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레드카펫이 끝없이 깔려있었다. 이번 결혼식은 서울의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 모두 걸음을 멈추고 줄지어 통과하는 백여 대의 고급 차량을 지켜보고 있었다.또한 오늘 서울 모든 곳의 대형 스크린에 두 사람의 결혼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감탄을 자아냈다...성세 그룹 대표 전연우는 첫 번째 사모님과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결코 이와 같이 행하지 않았었다.오늘 주례는 한의준이 맡았다. 장소월이 제기한 요구라 전연우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아무도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없어 물 흐르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인정아가 씩씩거리며 결혼식 현장에 뛰어들려 했지만, 문 앞 경호원들에게 막혀버렸다.“청첩장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감히 날 막아? 비켜서! 난 전연우를 만나야 해! 지금 당장 만나야 한다고!”경호원의 이마가 깊게 찌푸려졌다.“사모님,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강제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에 신고해 구치소에 가두고 결혼식이 끝나서야 풀려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너희들이 감히!”“저희도 대표님의 분부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부디 저희들을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인정아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때 남자 한 명도 몰래 함께 차에 타고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안 됩니다, 사모님. 지금 천추 산장은 경계가 너무 삼엄합니다. 배달원으로 위장해 들어가려 해도 안 되더라고요. 입구 하나하나 모두 경호원들이 막고 있어요.”그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결혼식이 끝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인정아가 이마를 짚고서 말했다
90퍼센트가 마취제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액체는 단 몇 방울만으로도 건강한 성인 남성으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할 수 있다.이 와인은 전연우를 위해 사전에 준비해둔 것이었다.장소월은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우아한 색감의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전연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정치계와 금융계 모든 거장들이 만연에 웃음을 띤 채 그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했다...전연우는 그 사람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이어갔지만, 장소월은 그저 말 못 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그렇게 한 테이블씩 인사를 하던 도중, 두 사람의 피부가 저도 모르게 맞닿았다. 장소월은 그의 몸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술 때문이다.전연우는 확실히 적잖게 술을 마셨다. 반면 장소월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차로 술을 대신했다. 드디어... 귀찮은 절차가 모두 끝이 났다.장소월은 새벽 네 시에 깨어난 뒤로 전연우가 만들어준 국수 한 그릇 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방에 돌아오니 배고픔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전연우는 기성은이 가져온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기성은이 중요하다며 서류 하나를 내밀자 그는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 머리를 꾹꾹 눌렀다.“그건 다음에 얘기해. 바깥 상황은 어때?”옆에서 느릿느릿 밥을 먹고 있는 장소월을 보니 기성은은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끝내 참을 수밖에 없었다.아직 또렷한 정신이 남아 있는 전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몸이 약간 휘청거려 기성은에게 지탱하며 바깥으로 나갔다.희미하게나마 그들의 목소리가 장소월의 귀에도 들어왔다.기성은이 오늘의 일을 전연우에게 보고했다.“CCTV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발견되지도 않았고요. 경호원들도 모두 저희 사람들입니다.”전연우는 두통이 또 발작한 것 같았다.“그래도 경계를 풀어선 안 돼. 기억해. 그 누구도 이 건물에 접근하게 해선 안 돼.”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가봐.”“네,
“아니요. 저희가 새로 고용한 요리사 딸입니다. 와이프가 전 재산 다 훔쳐서 도망갔다고 하더라고요. 돈 한 푼 없이 저희 가게에 와서 일자리를 구하길래, 딱한 마음에 거둬서 일을 시키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요리 솜씨는 정말 일품입니다. 저녁에는 바깥에 나오기 싫으신 손님들을 위해 야식 배달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가정식 요리는 뭐든 다 가능합니다.” “아기 안아 보셔도 돼요.” 장소월은 손목을 만지작거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팔이 안 좋아서요. 떨어뜨릴까 봐 겁나요.” “아... 엄마...” “안아...” 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이름이 뭐니?” “태명은 월이라고 하더라고요. 밤에 태어나서 대충 그렇게 지었대요.” 월이라고? 정말 우연인 걸까? 띵. “국수 나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장소월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리사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뒷모습이 그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장소월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피어올랐다. “아가씨, 국수 나왔습니다.” “저... 저 안 먹을래요.” 장소월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황급히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이봐요. 아가씨, 돈도 이미 내잖아요.” 장소월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앞만 보고 뛰어갔다. 사장이 쫓아 나가 보니, 그녀는 한 민박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참나, 내가 이 가게를 10년 넘게 운영해왔지만, 요리사 보고 도망가는 사람은 처음이야.” 사장은 투덜거리며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냄비를 씻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보며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당장 저 국수 조금 전 아가씨한테 갖다 줘. 국수가 불어서 내 가게 체면 떨어지면, 월급 제대로 못 받을 줄 알아.” 강용은 장소월을 찾아 나서려던 참에 막 국숫집에서 돌아온 그녀를 발견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래?”
전연우는 깨어났고, 아무런 탈 없이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그의 뉴스가 쉴 새 없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전연우가 성세 그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사 전체를 기성은에게 넘겼다는 소식도 포함되어있었다! 처음에는 강용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성세 그룹...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짓밟고 올라선 그 자리를 지금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고? 그렇다면 과거 그가 했던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장소월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강용은 그녀를 데리고 옆으로 빠져나와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더는 그놈 생각하지 마! 지금 삶이야말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네가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데! 설마 다시 그놈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 장소월은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얼른 돌아가자. 우리가 오랫동안 안 보이면 현아 걱정할 거야.” 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전연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공포, 두려움, 안도감, 그리고 안타까움... 그녀는 전연우가 아니다. 당시 그녀는 분명 전연우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어쩌면 전연우의 말처럼, 그녀는 영원히 약해빠진 마음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나약함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불안한 한 달이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장소월은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을까 봐 두려워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소현아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고, 병원 검사 결과 이란성 쌍둥이로 판명되었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 모두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식사량도 점점 늘어났다. 소현아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위층에서 허둥지둥 뛰어 내려왔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강용, 소월이가 없어졌어.” 강용은 즉시 소파에서
장소월은 장을 보러 시장에 나갔다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강용은 이미 부엌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동안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용이 직접 요리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전에 했던 말 때문인지,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이런 평온한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계속 그녀 곁에 있는 것은 강용에겐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강용이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보고 싶으면 가까이 와서 봐.” “그렇게 몰래 훔쳐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 손에 들고 있던 식재료를 내려놓자, 강용은 자연스럽게 받아들고 씻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계속 그녀 곁에 머물 생각인 걸까?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됐어. 그런 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강용이 팔을 걷어 올려 팔뚝을 드러내며 말했다. “장소월, 경고하는데 또다시 날 버리고 떠날 생각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런 적 없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야.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장소월은 간단하게 몇 가지 요리를 했다. 현아는 임신한 몸이라 충분한 영양을 보충해줘야 하기에 족발과 백숙도 준비했다.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척박한 환경에서 이런 재료를 구했다는 건 여간 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남원 별장. 전연우는 회사 일에 완전히 손을 떼고 모두 기성은에게 일임했다. 서재에서 전연우가 별이를 무릎에 앉히고 글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별이는 벌써 세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성은이 물었다. “대표님, 돌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이는 전연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 이토록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느낌... 장소월은 처음이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선 강용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를 향해, 장소월은 심호흡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언제 왔어? 소리도 없이!” 강용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바람 때문에 문이 열렸더라고.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 “그럼 현아는?” 강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걔 걱정은 안 해도 돼. 돼지처럼 쿨쿨 자고 있어.” 장소월의 말투가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용!” “알았어, 알았어. 최대한 참아볼게. 하지만 말인데,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정말 아이까지 낳게 하려고? 나중에 결국 우리 둘 중 한 명이 키울 거잖아. 소현아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장소월이 말했다. “그 아이는 현아의 목숨, 더 나아가 소씨 가문의 운명까지 구할 수도 있어.” 강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강지훈은 전연우보다 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이야. 전연우라면 어쩌면 살아남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강지훈은 가차 없이 죽여버릴 거야. 그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살길을 열어주지 않거든. 혹시 어느 날 현아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쩌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용서해줄지도 몰라.” “하지만 강지훈이 아예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건데? 소현아와 배 속 아이 모두 화를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도 했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어. 강지훈이 현아를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면 현아를 해치지 않을 테고, 아이는 더더욱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어쨌든 그 아인 강지훈의 핏줄이잖아.” “강지훈은 승부욕이 센 사람이라 전연우와 겨루는 걸 좋아해. 전연우에겐 아이가 있는데 그 사람에겐 없잖아. 그래서 좀 더 확신하게 된 거
남원 별장 버려진 창고 안, 전연우는 눈앞 당황함에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너도 무서운 건 있는가 보네.” 이곳은 예전 장소월이 갇혀 있던 곳이다. 그 오랜 시간 얼마나 외롭게 버텨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있음에도,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전생의 기억들이 그가 장소월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소월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그녀의 사랑을 함부로 짓밟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렸었다. 그녀가 혼자 외롭게 병들어 죽어간 그 순간에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숨을 거둔 순간 그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8년의 결혼 생활 동안,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한 번, 또 한 번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제 그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돌아왔다. 지금의 송시아를 포함해 과거 그녀의 등에 칼을 꽂은 놈들 모조리 그의 손으로 직접 제거할 생각이었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 했던 거 아니었어? 목적을 달성했는데 기쁘지 않아?” 송시아의 주위엔 험악한 인상의 건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전연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어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신 애초부터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날 감쪽같이 속인 거고요? 난 당신한테 최선을 다했어요. 전연우 씨... 내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 “또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송시아... 전생에 쓰던 그 더러운 수법이 이번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전생... 그 단어가 전연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송시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말도 안 돼. 당신까지 환생했을 리 없어.” 남자는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는지 모를 강용이 갑자기 나타나 시선을 내리깔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소월은 소현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밥 먹고 있어.” 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가서 그릇이랑 젓가락 갖춰놓을게.” 장소월이 문 앞까지 걸어 나가자 강용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그건 너무 위험해. 강지훈이 세상 곳곳을 뒤져서 소현아의 행방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현아에, 그 아이까지 계속 곁에 두는 건, 우리 위치를 드러내는 꼴밖에 안 돼. 너... 설마 다시 잡혀가고 싶은 건 아니지?” “그 외에 우리한테 다른 방법이 있을까? 나는 현아가 서울로 돌아가 강지훈에게 잡혀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강지훈은 그 사람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거든! 절대 현아의 아이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어쩌면 현아까지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몰라.” “강용, 강지훈이든 그 사람이든 모두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놈들 말 한마디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 저항할 수 없으니,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현아는 바보가 아니야, 그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일 뿐이지. 누군가 천천히 가르쳐 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현아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강용이 되물었다. “소현아 때문에 다시 잡혀가게 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두려운 건, 나 한 사람으로 인해 너희 모두 위험에 빠지는 거야. 강용... 나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5년 전부터 계속 생각해 왔어, 내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하지만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사실 그녀가 낙일 마을에 간 이유는 강영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머리가 정말 정상은 아니네. 그렇게 심심하면 병원에나 가봐.” 강용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고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소현아는 슬픈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용, 왜 이 아이를 싫어하는 거야? 규영과 미경은 분명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규영과 미경도 내 좋은 친구 거든. 그 두 사람이 나를 속일 리는 없어.” “강용 너까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나도 필요 없어.” 그때 잠에서 깬 장소월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소현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실은 강용이 부엌으로 들어간 뒤부터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 장소월은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소현아에게 다가갔다. “현아야... 무슨 일이야?” 소현아는 장소월의 목소리를 듣고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월아, 강용이 내 배 속에 있는 이 아이 싫대. 이제 나도 싫어. 지워버릴 거야.” 장소월은 미간을 찌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리 와, 우리 이야기 좀 하자.” 강용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정원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현아야, 너 강용 좋아하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소월이 너도 좋아해.” 장소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나랑 너처럼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감정도 있어. 그건 평생을 변함없이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현아는 어때? 네 마음은 어느 쪽인 것 같아?” 소현아가 대답했다. “난 강용과 평생 함께 살고 싶어. 현아는 강용을 좋아하지만, 강용은 현아를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내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싫대. 현아는 너무 슬퍼.”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틀림없이 강지훈의 핏줄이다. “그럼 강지훈은? 너 그 사람 좋아하는
소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간신히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평소 까불까불 장난기 많고 히죽거리기만 하던 사람이 예고도 없이 돌연 사납게 돌변한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에 황급히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 속에 숨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강용이 강지훈과 같은 사람일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면, 강지훈은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히곤 했었다. 강용은 예전 장소월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주변 환경에 꽤나 익숙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신선한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사 왔다. 사막 근처라 물가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쌌다. 특히 물은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강용은 민박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방음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여 위층에 잠들어 있는 장소월을 깨울까 염려되어 말이다. 집에 들어가 보니 또다시 소현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강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현아는 소파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가서는 입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속삭였다. 강용은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한 솜씨로 야채를 씻고 다듬었다. 허리를 굽혀 찬장 아래에 있는 기름을 꺼내려다가 뒤에 있는 여자를 발견한 그가 말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을 텐데?” 소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확실하게 세어봤어. 지금은 네 걸음이나 떨어져 있어.” 그 말에 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라는 말도 너한테는 과분하네.” 강용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장소월에게 줄 삼계탕을 요리하는 데에 집중했다.소현아는 줄곧 말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음식이 거의
세 사람은 근처 민박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장소월은 불안한 마음에 문밖 가게 앞에 서 있는 소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강용, 현아 좀 살펴봐 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강용은 팔짱을 낀 채, 귀찮다는 듯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정말 성가시단 말이야. 애초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어.”장소월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됐어. 체크인 마치고 현아랑 같이 주변 좀 돌아봐. 나는 먼저 올라가서 쉴게.” “난 너만 신경 쓸 거야. 쟤는 내 알 바 아니야.” “강용,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잊었어?” “소현아는 지금 임신한 상태라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 이왕 데려오겠다고 결정했으면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도 했고. 하지만... 내가 하루 종일 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소현아가 꽃 세 송이를 들고 다가왔다. “소월아, 소월아... 이것 봐, 내가 방금 산 꽃이야. 예쁘지?” 장소월은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예쁘네.” 소현아는 들뜬 얼굴로 강용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강용,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강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 바빠. 가고 싶지 않아. 너...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소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장소월에게 일렀다. “소월아, 소월아, 강용이 나한테 화냈어.” 장소월의 입꼬리가 위로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그만해, 애도 아니고. 강용, 잠깐 현아랑 놀아주고 있어. 난 너무 피곤해서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장소월은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강용은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을 프런트에 올려놓고 말했다. “나도 가서 짐 풀어야겠어.” “강용, 나랑 같이 놀기로 했잖아.” 이곳은 총 3층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방, 3층은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침 방도 3개가 구비되어 있고,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도 있어 세 사람이 살기엔 적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