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생들은 그들인 소은영이 우는 것을 보더니 하나같이 교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며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이에 교수는 점점 더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고 소은영은 상당히 초조해졌다.교수는 평소와 달리 표정을 풀지 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공부는 안 하고 친구 사귀기에만 여념이 없었나 보군요.”소은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교수님 저는...”그때 수업이 끝나는 소리가 울리고 교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이번만큼은 확실히 화가 난 듯했다.유가람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은영을 보더니 어깨를 토닥였다.“괜찮아, 신경 쓰지 마. 교수님이 너 질투해서 그러는 걸 거야. 아니면 갱년기라도 왔거나.”그때 안시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야, 그보다 너희들 오늘 게시판에 붙어있던 여자 사진 봤어? 속옷만 입은 사진에다 원조교제에 부정입학 클럽 죽순이 같은 게 잔뜩 적혀 있는 그거. 그 여자 누군지 알아?”유가람이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누군데?”“은영이 남자 친구 뺏으려고 했던 여자!”“그 여자였어? 어쩐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예쁜 얼굴로 한다는 짓이 고작 그거야? 더러워.”유가람은 혀를 끌끌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니까. 돈에 미친 거지.”“너무 그러지 마. 그 사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소은영은 두 사람을 말리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은영야,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무슨 그런 여자까지 다 이해하려고 들어? 그런 애들은 동정할 필요가 없어. 야, 우리 그러지 말고 어차피 오후에는 수업 없으니까 걔 미행하는 거 어때? 수업 끝나고 무슨 짓을 하는지 확실히 찍어서 게시판에 붙여두는 거야.”“좋은 생각이야. 그 여자 좋아하던 남자애들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실체를 똑똑히 보여주는 거지. 남 애인 건드리는 년은 당해도 싸.”유가람과 안소이는 의기투합하며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얘기했고 소은영은 점점 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만약 두 사람이 김하린과 박시
소은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유가람의 팔을 끌어당겼다.“됐어. 그만해.”하지만 유가람의 시선은 여전히 김하린에게 있었다.한편 김하린은 소은영을 아직 보지 못했고 마침 그녀 뒤에 자리가 있는 걸 확인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그렇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인 채 밥을 먹는 소은영을 발견했다.유가람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김하린의 길을 막았다.“나 알아요?”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김하린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없었다.“당연히 모르죠. 원조교제 하는 사람을 지인으로 두지는 않아서요.”일부러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려버렸다.오늘 오전 게시판 사건이 이미 퍼질 대로 퍼져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나 있었다.김하린은 딱히 화를 내지 않았고 계속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유가람은 이때다 싶어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학교 명예를 생각해서 그냥 자퇴하면 안 되나? 정말 수준 떨어져서 같이 못 다니겠네. 어차피 이 학교도 남 도움으로 들어온 거 아닌가?”“그러니까 말이야. 이 일이 기사화되면 어차피 그쪽 학교 못 다녀. 그때 가서는 도움을 준 윗분한테도 감사가 들어갈 건데 그냥 조용히 나가지?”안소이도 옆에서 거들었다.하지만 날뛰는 두 사람과는 달리 소은영은 초조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하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소은영을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은영은 김하린이 누군지 알고 있을 텐데 그녀의 친구들은 하나도 전해 들은 게 없는 듯했다.소은영은 그녀의 따가운 시선에 결국 조용히 친구들을 말렸다.“가람아, 소이야, 증거도 없이 사람을 그렇게 막 몰아세우지 마...”“은영아, 너는 가만 있어.”유가람은 정의를 구현하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남의 남자한테 꼬리치고 어떻게든 돈을 뜯어 내보려고 눈에 불을 켜는 년은 이렇게 대놓고 얘기해주지 않으면 평생 버릇 못 고쳐.”“하?”남의 남자한테 꼬리치고 어떻게든 돈을
한태형은 차가운 눈길로 유가람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혐오와 경멸이 가득 어려 있었다.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듯해 소은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유가람의 앞에 섰다.“가람이가 일부러 이런 건 아니에요. 전부 다 오해예요.”“내가 너한테 말할 기회를 줬었나?”한태형이 싸늘한 얼굴로 대꾸하자 소은영이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유가람은 대놓고 김하린의 편을 드는 그를 보며 질투를 참을 수가 없었다.“하, 이제는 선배님도 꼬신 거야?”“선배님, 옆에 있는 그 여자 남 애인이나 뺏는 그런 여자예요. 원조교제까지 하는 여자라고요!”유가람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한태형의 시선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유가람은 그 눈빛에 금세 입을 꾹 닫고 몸을 덜덜 떨었다.“내가 여자는 안 때리는데 거기서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것 같거든?”김하린은 무서워하는 유가람을 보며 말했다.“친구를 위해 나서기 전에 제대로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니면 나중에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될 테니까.”그 말뜻을 모르는 유가람은 미간을 찌푸렸고 소은영은 식은땀을 흘렸다.김하린은 말을 마친 후 한태형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한태형은 이대로 넘어가는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아 가는 길 소은영 일행을 힘껏 노려보았다.“왜 네가 자리를 피하는데?”밖으로 나온 그가 물었다.김하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거기서 계속 있어봤자 뭐해. 그리고 난 일 크게 키우기 싫어. 내가 학교 다닌다는 거 박시언의 할머니가 아시면 난 끝장이야.”“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겠다고? 넌 그딴 소리를 듣고 분하지도 않아?”그 말에 김하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이곳에 다니는 집안이 괜찮은 애들 중에서 내가 박시언의 아내라는 거랑 김씨 가문 장녀라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저런 소시민의 말이 뭐가 중요해.”한태형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식당에 있던 학생들은 평생을 노력해
소은영은 그 말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그냥 허세 부린 거 아닐까? 그보다 빨리 밥 먹자. 나 배고파.”유가람은 금세 의혹을 내려놓고 다시 밥을 먹었다.하지만 옆에 있던 안소이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소은영의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유가람처럼 멍청하지 않았다.“오늘 저녁 아까 얘기했던 미행 잊지 마?”안소이는 다시 그 화제를 꺼냈다.“그래! 미행해서 빼도 박도 못 할 증거를 잡는 거야. 한태형한테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확실히 알려주고 말겠어.”소은영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아까의 일도 있어 미행은 접을 줄 알았는데 안소이가 적극적으로 제안을 해왔다.“은영아, 너도 우리랑 같이 갈 거지?”안소이는 일부러 그녀를 떠보듯 물었다.그러자 소은영은 애써 미소를 지며 답했다.“당연하지, 약속했잖아. 같이 가.”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웃음에 안소이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소은영이 그들에게 뭔가 속이는 게 있는 건 확실한 듯 보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감이 서질 않았다.어느덧 저녁이 되고 유가람은 김하린의 뒤를 무섭게 쫓았다. 그리고 그 뒤로 안소이와 소은영이 따랐다.소은영은 박시언이 김하린을 데리러 오지는 않을까 싶어 무척이나 초조했다.“내가 알아봤는데 저 여자 기숙사에 안 산대.”안소이의 소식통은 언제나 정확했다.“그럼 자취하는 건가?”유가람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긴 기숙사 비용이 다른 대학교에 비해 어마어마하니 무리는 아니지. 원조 교제해서 받은 돈은 얼굴 관리하는데 다 썼을 테니 집값이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어?”안소이는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그녀의 말을 거들지 않았고 대신 소은영이 입을 열었다.“가람아, 그렇게 말하지 마. 생활고에 시달려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잖아.”그 말은 소은영도 김하린이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는 걸 믿고 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이에 안소이의 마음이 조금 흔들리려던 찰나 유가람이 말을 내뱉었다.“은영아, 넌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 어떻게 아직도 그 여
“죄송하지만 외부인은 철저한 신원 확인이 필요합니다. 또한, 집주인의 허가가 있어야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경비원은 좀처럼 물러서 주지 않았다.“친구 좀 만나겠다는데 대체 무슨 신분 확인이 필요하죠? 말했잖아요. 방금 들어간 애가 내 친구라고!”“그 친구분의 직접적인 허가가 없으면 들여 보내줄 수 없습니다.”경비원의 말투에 점점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이곳에는 부자들만 거주하고 매일 그런 사람들만 상대했던 터라 경비원은 일반인과 부자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유가람은 몇 번의 거절에 씩씩거리더니 결국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가는 길, 안소이는 여태 입을 꾹 닫고 있다가 드디어 자신의 의혹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그 여자 대체 뭐지? 일반인은 절대 저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들었어. 그 여자 정말 원조교제 하는 거 맞기는 해?”“너 그게 무슨 뜻이야? 원조교제가 아니면 그 여자가 뭐 부잣집 딸내미라도 된다는 소리야? 부잣집 아가씨가 뭐가 모자라서 남의 애인을 뺏어?”유가람은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다.안소이는 그 말에 일리가 있어 다시 입을 닫았다.“이제 미행할 사람도 없는데 우리도 이만 돌아가는 게 어때?”그때 소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래야지 뭐.”유가람은 아쉬운 듯 입을 삐죽거렸다.오늘 파렴치한 여자의 모든 것을 다 파헤쳐 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그 시각, 김하린은 고층 창문으로 세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마침 그때 경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방금 김하린 씨 친구라는 분들이 찾아왔는데 들여보낼까요?”“아니요. 앞으로 또 찾아오면 바로 내쫓아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방안에서 서도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그냥 보낼 거야?”“아니면? 아래로 내려가서 입씨름이라도 하고 올까?”김하린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시간도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았다.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전생에 박시언의 마음을
다음날 학교로 가보니 소은영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강의실 앞에 서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어제 일로 더 이상 소은영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김하린은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언니!”소은영이 그녀를 다급하게 불러세웠다.김하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냉랭하게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죠?”소은영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어제 일은 정말 미안해요.”소은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이었다.“가람이가 언니한테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언니를 조금 오해한 것 같아요.”“은영 씨도요?”김하린은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꼭 소은영의 생각을 다 꿰뚫어 보는 듯했다.소은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해요. 어제도 제가 옆에서 그만하라고 했던 거 보셨잖아요... 저는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주려고 했는데...”김하린은 잘도 연기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뭐라고 또 얘기할지 궁금해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러자 소은영이 갑자기 두 손을 잡아 오더니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화 안 났어요. 이만 수업 들어가요. 어제 일은 시언이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그 말에 소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하린은 말을 마치고 강의실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그때 소은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안소이를 발견했다.안소이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다.그녀는 소은영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고는 찾으러 나왔다가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소은영은 그녀를 발견하더니 채 1초도 되지 않아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김하린의 다리를 꼭 붙잡으며 빌었다.“부탁이에요. 저와 제 친구들한테 손대지 말아 주세요!”이에 김하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갑자기 들려온 애처로운
안소이의 의심에 소은영의 얼굴은 단번에 굳어버렸다가 곧바로 다시 억울한 얼굴로 돌아갔다.“소이야, 거짓말이라니. 난 너희한테 거짓말한 거 없어.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소은영은 어느새 눈가가 빨갛게 변해버렸다.“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안소이는 곧 있으면 울어버릴 듯한 소은영을 보더니 그녀의 두 손을 맞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셋은 베프니까 절대 서로한테 거짓말해서는 안 돼. 알겠지?”“당연하지. 절대 그럴 일 없어.”소은영은 아이처럼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이제 올라가자.”안소이는 소은영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올랐다.소은영은 안소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졸업하기 전까지 유가람과 안소이에게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부터 대학 생활은 끝일 테니까.계단을 올라 강의실 쪽으로 가니 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유가람은 사람들 틈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보였지만 키가 작아 좀처럼 들어가지 못했다.“무슨 일 났어?”안소이가 다가와 물었다.“학생회가 지금 강의실 안에 와 있어.”“학생회? 학생회가 여긴 왜?”안소이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반면 소은영은 뜨끔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제 게시판에 붙여진 사진 때문에 찾아왔다나 봐.”유가람은 흥미진진한 한 듯 한껏 들떠있었다.그녀는 소은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도 모른 채 신나서 얘기했다.“학교 명예를 더럽힌 죄로 내쫓으려는 거 아닐까?”안소이는 미간을 찌푸렸다.“만약 그런 거라면 여기가 아니라 그 여자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 말에 유가람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동조했다.“그러게? 왜 여기로 왔지? 아래층으로 가야 하는데?”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소은영에게로 향했다.그러자 소은영은 두 사람이 의심하려 들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혹, 혹시 우리가 어제 한태형을 건드려서 한태형이 학생회를 보낸
‘미치겠네 진짜. 여기 서서 뭐 한다고 계속 버티고 서 있어!’“마음대로 해. 난 먼저 갈 거야.”소은영은 결국 혼자 도망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막 한걸음 내디디려던 찰나 뒤에서 한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은영, 회장이 너 찾아!”그 말에 소은영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강의실에서 학생회장이 걸어 나와 소은영을 불러세웠다.“너 잠깐 거기 서봐.”소은영은 잔뜩 뻣뻣한 몸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네? 저, 저요?”“그래, 너. 너 기숙사 방 번호 317맞지?”소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유가람은 네 룸메고?”“네, 네... 맞아요.”소은영은 옆에 있는 유가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그러자 학생회장의 시선 또한 그녀에게로 향했다.“네가 유가람이야?”유가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학생회장은 손에 든 제보서를 들어 보여주며 얘기했다.“네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교내 질서를 어지럽히고 여학생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말을 마친 그는 합성된 노출 포스터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거 네가 한 거 맞아?”그 말에 유가람은 처음에 멍하니 있다가 다급하게 해명했다.“아니에요! 전 이런 짓 한 적 없어요. 진짜예요!”“조사한 결과 얼굴은 합성이고 이 포스터에 적혀 있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 여학생에게 어떤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저급한 행동은 학교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야, 알아?”유가람이 억울한 얼굴로 다시 한번 해명하려는데 옆에 있던 소은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가람아, 어떻게 이런 짓을 해? 네가 나를 위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건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남의 얼굴을 막 합성하면 안 되지. 이건 범죄야.”유가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은영을 바라보았다.이건 그녀가 한 짓이 아니었다.그때 옆에 있던 안소이가 입을 열었다.“이거 가람이가 한 거 아니에요. 계속 함께 있어서 아는데 가람이는 이런 거 게시판에 붙이려는 움직임도 없었고 그
“김하린,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박시언은 소은영을 보호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김하린은 귀찮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할머니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기 싫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박시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뭐 어쩔 건데?”“강한 그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놔.”박시언한테서 사과받기란 불가능했다. 그저 입으로 하는 사과보다 실질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박시언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다고? 그래.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사진 보여주면 되지. 네가 은영 씨를 만나기 위해 속인 걸 알면 무슨 반응일까?”김하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난 상관없어. 오히려 은영 씨가 등록금과 생활비가 끊긴 마당에 할머니가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네?”소은영은 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맞아, 협박하는 거.”김하린은 별로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었다. 어차피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 충분히 협박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대표님...”소은영은 박시언을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박시언은 소은영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하고 싶은데?’“강한 그룹이 본 손해를 두 배로 갚아줘. 그리고 이제부터 강한 그룹을 건드려서는 안돼.”“알았어.”김하린은 그가 소은영을 위해 흔쾌히 대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은영이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더 불쌍해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지금 바로 진행해. 오늘 내로 결과를 봐야겠어.”“김하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난 늘 이런 사람이었어.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김하린의 차가운 모습에 박시언은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회사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소은영은 그의 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다 저의 잘못이에요.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언니한테 약점이 잡히지도 않았을 텐데... 저 때문에 잃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김하
“이놈이 정말 얍삽하더라고. 처음에는 경쟁사에서 한 짓인 줄 알았잖아. 요 며칠 얼마나 많은 회사에서 투자를 철수했는지 몰라. 내가 끈질기게 한 사람을 잡고 물어봤더니 그제야 박시언이 한 짓이라고 하더라고. 강한 그룹에 투자하는 사람은 걔 박시언을 무시하는 거라고 하면서!”강한나가 흥분할수록 김하린의 얼굴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박시언이 어떤 성격인 줄 알았지만, 소은영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강한나가 강 씨이긴 해도 서호철의 손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강한 그룹을 건드렸다는 것은 서호철을 건드린 거나 다름없었다. 박시언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강한나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잠깐만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김하린은 전화를 끊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박시언과 소은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지만 인제 와서 보니 자신이 너무 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시언은 강한나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김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얼마 가지도 않아 박시언이 소은영을 위해 커피를 사다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은영이 박시언을 끌어안는 틈을 타 김하린은 핸드폰으로 이 모습을 찍어놓았다.몰카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김하린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면서 도발하고 있었다.박시언은 김하린의 핸드폰을 뺏어오고 싶었지만 김하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쇼핑몰에 사람도 많아서 대놓고 뺏을 수도 없었다.소은영은 박시언의 팔뚝을 잡으면서 김하린을 향해 애원했다.“언니, 저는 이미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저희 대표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요?”“그래? 그러면 넌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소은영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김하린이 질문했다.“돈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 거 아니고? 아니면 불쌍한 모습을 시언이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내가 A대 가기 싫은 거 가지고 협박하지 마. 난 이혼하면 그만이야. 어디 서로 물어뜯어 보자고!”김하린은 박시언이 고자질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박시언은 김씨 가문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챙기려면 이 사실을 비밀로 해야 했다.박시언은 결국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데?”“거래해. 내가 할머니한테 좋은 말하는 대신 너도 같이 연기를 해야 해.”“연기를 해?”박시언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겨우 그거야?”“다른 사람이 봤을 때 넌 완벽한 남편이 되어야 해. 내 의견을 따르고, 내 체면까지 살려줘야 할 것이야. 그리고 적당히 내 편도 들어주고,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얼마나 쉬워. 너한텐 손해 볼 일도 아니잖아.”김하린은 굳이 돌려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김씨 가문 쪽에서는 박시언의 연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며칠 전 최미진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박시언은 김하린이 더욱 싫어졌고, 좋은 남편인 척하기에는 불가능했다.박시언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래.”김하린은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마를 정리하면서 말했다.“할머니더러 저녁 식사하러 오시라고 해. 내가 직접 요리할 거야.”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니 앞에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인척해야 할머니가 너를 풀어줄 거 아니야.”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박시언은 그녀의 속을 훤히 뚫어보는 듯했다.김하린은 별로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오후, 이도하가 최미진을 픽업해 왔고, 김하린은 한창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시언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고, 애써 서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인 척했다.이 장면에 최미진이 흐뭇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식사하는 동안에도 박시언은 친절하게 김하린의 앞에 음식을 짚어주었고, 때로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최미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할머니, 저 내일 쇼핑하고 싶은데
최미진은 박시언을 늘 엄하게 대했고, 박시언은 회초리를 피할 수조차 없었다.최미진이 젖 먹던 힘으로 때린 나머지 박시언의 몸이 시퍼렇게 멍들기 시작했다.김하린은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다. 박시언은 이를 꽉 깨문 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결국 회초리가 부러지고, 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래도 사과 안 할 거야?”박시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김하린은 박시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맞고도 사과하지 않는 걸 보니 절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김하린이 말했다.“할머니, 화 푸세요. 저는 사실 시언이를 탓한 적 없어요. 얼른 의사 선생님이나 불러와야겠어요.’김하린의 이해 넓은 모습에 최미진은 그제야 화가 가라앉는 듯했다.박시언의 할머니로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박시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아까는 그저 김하린의 화를 풀어주려고 연기한 것이다.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하린아, 이제부터 할머니가 시언이를 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약속할게. 그년은 이제부터 우리 박씨 집안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해. 이 집안의 안주인은 너야.”김하린은 그저 웃을 뿐이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박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날이 어두워지고, 최미진은 결국 이도하더러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라고는 이곳을 떠났다.김하린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난 박시언은 싫증난 표정으로 말했다.“김하린, 연기 다했어?”김하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시언이 또 이어서 말했다.“이혼을 핑계로 할머니더러 은영이를 쫓아내게 해? 정말 대단해. 내가 너 우습게 봤어.”“마음대로 생각해.”김하린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마침 의사 선생님이 도착했고, 김하린이 말했다.“이따 약 바르실 때 너무 살살하실 필요 없어요. 박 대표님은 가죽이 두꺼워서 아파하지도 않아요.”의사 선생님은 고개 숙여 박시언의 눈치만 볼
차에 올라타자마자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니까 이따 좀 부드럽게 말씀하세요.”김하린이 살며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언제 집에 오셨어요?”“오후요.”김하린이 예상했던 대답이었다.최미진이 지금까지 난리 치는 바람에 이도하가 이제야 픽업하러 온 것이다.성격이 불도저 같은 최미진은 절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이쯤이면 소은영은 이미 최미진한테 쫓겨났을 것이다.집에 도착했을 때 집 문은 열려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최미진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유미란이 서 있었다.마지막에야 박시언이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방안에는 소은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짐은 다 쌌어요?”“네. 사모님.”유미란이 트렁크 하나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이거 다 은영 씨 짐입니다.”최미진이 물었다.“도하 씨, 이 중에 시언이가 산 물건들이 어떤 거예요?’이도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계속 은영 씨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기 때문에...”최미진이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이것들 전부 시언이가 사준 거란 말이에요?”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미진이 유미란에게 말했다.“전부 버려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한테 오늘부터 소씨 가문과 연을 끊겠다고 말씀드리세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저희 도움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할머니!”박시언이 미간을 찌푸렸다.“은영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예요.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언제 돈을 벌어서 A대 등록금을 낼 수 있다고 그러세요!”“금융 전공이잖아. 그럴 능력도 못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괜히 후원해 준 거나 다름없어!”최미진이 냉랭하게 말했다.“그리고 네가 후원해 줘서 지금까지 우리 박씨 가문에서 뭐 섭섭하게 해준 거 있어? 독립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더는 그런 사람한테 후원해 줄 필요도 없어.”최미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보았다.“하린아,
해성의 환경미화원이 출동한 덕분에 김하린이 구매한 오염 구역이 슬슬 정리되기 시작했다. 몇 달만 지나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김하린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도 했다.허가증이 내려온 덕분에 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자금이 충분했다.저녁, 배주원은 김하린이 한상 차린 테이블 위에 자료 하나를 올려놓더니 감탄하면서 말했다.“고작 보름 동안 몇십억 원의 투자를 받다니. 하린아,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서도겸이 말했다.“자금이 충분하니까 완공 전에 다른 사업에 투자해도 되겠어.”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응. 그래서 이미 일부 자금으로 소소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어.”“소소한 투자?”서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몇백억 원이 나간 걸 봐서는 소소한 투자가 아닌 것 같은데?”김하린은 몇백억 원을 빼내 간 걸 서도겸이 알고있는 줄 몰랐다.처음부터 서도겸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요 며칠 박시언과 티격태격하느라 많은 일들을 서도겸에게 맡겼기 때문에 서도겸을 속일 수도 없었다.“얼마? 몇백억 원?”강한나는 마시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무슨 투자를 하는 데 몇백억 원씩이나 들어?”‘이건 소소한 투자가 아닌데...’김하린이 말했다.“김씨 가문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어요.”“뭐라고?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를 매수했다고?”배주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럴 리가! 넌 김씨 가문의 큰딸인데 너희 집 명의로 된 프로젝트도 돈으로 사야 해?”김하린은 최근에 매수한 프로젝트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부 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부동산 프로젝트와 투자 진행 상황이었다.배주원이 말했다.“어떤 건 수익이 나지도 않고, 어떤 건 심지어 손해를 보고 있는데 이것들 사서 뭐하려고?”“저가로 매수해서 괜찮아. 나중에 값이 오를 거야.”“지금 상황을 봐서 언제 값이 오르겠어!”김하린은 배주원이 나중에 값이 오를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생에 박시언이 이
김하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났고, 소은영은 박시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언니가 홧김에 한 말일 거예요. 마음에 두지 말고 화 푸세요.”박시언이 손을 빼버리자 소은영은 멈칫하고 말았다.이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회사에 처리할 거 있으니까 공부하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대표님...”박시언을 잡으려고 했지만 가차 없이 떠나버렸다.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던 유미란은 소은영을 향해 콧방귀를 꼈다.‘부부싸움 하는 것 가지고,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알았나 봐?’유미란의 표정에 소은영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김하린은 학교 맞은편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고, 점심이 되자 강한나가 방문했다.강한나가 흥분하면서 말했다.“정말 박시언한테 이혼하자고 말했어? 대답했어?”김하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대답 안 했어요.”“그러면 대답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 내 개인 변호사한테 이혼서류를 준비하라고 할게. 재산을 전부 뺏어서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리자고!”흥분한 강한나는 지금 바로 김하린을 끌고 변호사 사무실로 가고 싶었다.김하린이 고개를 흔들었다.“아마도 이혼 못 할 거예요.”“왜?”강한나가 멈칫하더니 말했다.“이혼할 마음이 있었으면 제가 먼저 말 꺼낼 필요도 없이 진작에 저랑 이혼했겠죠.”“그렇긴 한 데... 그런데 왜...”강한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처음부터 서로 이용하려고 맺어진 혼인이었어요. 박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아직 서로 이용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이혼하면 안 되는 거고요. 시언이 할머니께서도 저를 손주며느리로 엄청나게 예뻐해 주셔서 은영 씨 하나 때문에 저랑 이혼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김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집을 나서면서 일부러 유미란 앞에서 이혼을 언급한 것이다.유미란은 예전부터 최미진을 모셔 온 사람이라 이 소식을 꼭 알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소은영은 바로 더 빌리지에서 쫓겨날 것이었다.강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모님! 이제야 오셨네요!”유미란이 이 정도로 반기는 걸 보니 아주 서러운 모양인 것 같았다.“아주머니, 시언이 집에 있어요?”“네! 집에 계세요!”유미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그런데 소은영 씨도 있어요...”유미란은 소은영 생각에 이를 꽉 깨물었다.김하린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저 최미진이 왔다 갔는데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할머니를 등질 정도로 은영 씨를 좋아하나 봐.’도어락에 지문을 갖다 댔을 때 불일치라는 알림이 떴다.그러자 유미란이 말했다.“어젯밤 도련님께서 돌아오자마자 비밀번호를 전부 바꾸라고 하셨습니다.”유미란이 대신 새로 바꾼 비밀번호를 눌러서야 김하린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박시언은 거실에서 소은영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열애 중인 커플처럼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켁! 켁!”유미란이 마른 기침하면서 박시언에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 오셨습니다.”유미란은 일부러 ‘사모님’을 강조해서 말했다.박시언은 그제야 고개 들어 김하린을 낯선 사람처럼 차갑게 쳐다보았다.“누가 우리 집 들어오라고 했어?”박시언의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대표님, 왜 화를 내요. 언니가 물건 챙기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소은영이 김하린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언니, 까먹고 챙기지 않은 물건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직접 오실 필요도 없이 제가 택배로 보내드렸을 텐데.”김하린은 소은영을 냉랭하게 쳐다보고는 박시언에게 말했다.“오늘 회사 안 갔어?”박시언이 피식 웃었다.“네가 뭔데 날 감시해?”“내가 감시하는 게 아니라 도하 씨가 너 연락 안 된다고 전화 왔었거든. 출근하라고 말하러 온 것뿐이야.”김하린의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박시언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바빠. 시간 없어.”김하린은 한창 박시언의 수업을 받고있는 소은영을 보면서 말했다.“이래서 시간이 없는 거야?”소은영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언니, 제
서도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김하린이 말했다.“과일 고르는 솜씨가 우리 집 아주머니보다도 나아.”서도겸이 피식 웃었다.차마 하나하나 먹어보면서 고르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윙-안방에서 미세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오자 강한나가 말했다.“누구 핸드폰이 울리는데?”이들은 서로 쳐다만 볼 뿐이다.배주원이 말했다.“내 핸드폰은 진동모드가 아니야.”서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한나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했다.“내건 여기 있어.”김하린은 그제야 어제 이도하의 전화를 끊고 귀찮은 마음에 진동모드로 바꿔놓은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갔다.윙-발신자는 다름아닌 이도하였다.김하린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이도하는 김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네요.”“무슨 일 있으세요?”“대표님께서 어제 온 저녁 찾으셨어요. 서도겸 씨와 함께 클럽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요. 오늘은 출근도 안 하셨고요. 혹시 대표님 연락되시면 출근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저를 찾았다고요?”김하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거지? 내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잖아.’핸드폰을 확인하자 정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있었다. 하지만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박시언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사모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 대표님께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혹시나...”“알았어요. 고마워요. 도하 씨.”김하린은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직접 전화하기로 했다. 전화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냉랭한 기계음이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는 통화 중입니다.”김하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박시언에게 문자를 보냈다.[어제 술을 마시느라 못 봤어. 날 찾았어?]문자를 보내자마자 갑자기 뜨는 차단 알림에 김하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박시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