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석은 바깥 홀을 지나면서 신문에서만 보던 진릉의 여러 인물들을 보았고, 심지어는 시장까지 밖에 있는 걸 보아 이 안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하여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임지석의 긴장한 모습과는 달리 최서준은 태연하게 앉아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장내의 많은 사람들도 그들을 발견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4대 무림 가문은 대부분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만 둘은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게 당연했다.“한씨 가문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안쪽 홀에서 문지기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하자 곧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한씨 가문 가주님을 뵙습니다!”안방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말했다.“다들 앉으세요.”미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한씨 가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는 도중 최서준을 발견한 여자는 눈빛이 티 나지 않게 번뜩였다.그녀는 다름 아닌 한씨 가문 한초성의 고모였다.최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다소 의외였던 건 이곳에 한초성은 없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아직도 대외적으로는 ‘실종 상태’인 것 같았다.한씨 가문 가주가 막 자리에 앉는데 문지기가 다시 말했다.“조씨 가문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노인이 들어왔다.“조씨 가문 가주님을 뵙습니다!”사람들이 일제히 외치는데 또다시 말이 들렸다.“엄씨 가문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사람들은 다시 한번 일제히 외쳤다.“안녕하십니까, 엄씨 가문 가주님.”손씨 가문 손성운의 생일인 만큼 다른 세 가문도 모두 자리에 도착했다.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고 시간은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한 노인이 홀에 나타났는데 예순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건장한 체격, 머리는 언뜻 백발이 보였고 키는 5척을 넘지 않았지만 형형하게 번뜩이는 눈빛은 제법 위엄이 있었다.노인의 등장에 안쪽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사람이 바로 전설 속
“저 엄명휘가 엄씨 가문을 대표하여 삼백 년 된 하수오 한 뿌리를 드리며 손씨 가문 가주님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합니다!”“세상에, 300년 된 하수오는 실로 보기 드문 물건이잖아. 그걸 엄씨 가문이 가져왔어.”“300년 된 하수오는 수명을 연장해 주는 효능이 있다던데, 명약 중의 명약이라고!”사람들은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더니 엄씨 가문에 더 있는지 궁금해하며 모두 입을 모아 물었다.“저희 조씨 가문에서 300년 된 하수오를 구매할 의향이 있습니다!”“여기 엄씨 가문 사람도 필요해요. 가격은 얼마든지 제시하시죠!”...세상에 오래 사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지 않겠나.3대 가주가 모두 일어나서 젊은이에게 물었다.“됐어, 두 어르신들. 이건 서두르지 말고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고.”손성운이 나서서 상황을 안정시켰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생일 축하 현장은 한순간 경매장으로 변했을 것이다.손성운의 말을 듣고 조씨 가문 가주와 엄씨 가문 가주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현장은 순간 조용해졌다.사람들은 한씨 가문의 생일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한씨 가문의 미인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상석에 앉아 있던 손성운도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이런 자리에서 고작 한씨 가문 따위가 손성운 생일잔치에 선물 하나 없이 왔다고?손성운의 눈이 번뜩였다.보아하니 한씨 가문은 더 이상 진릉에 머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한씨 가문은 어떻게 된 거야, 왜 아직도 선물을 드리지 않지?”“설마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내가 볼 땐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한씨 가문과 손씨 가문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고 오래전부터 들었는데 그게 진짜였나 봐!”“손씨 가문과 거래하지 않을 거면 여긴 왜 왔을까,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것 아니야?”“저런 분들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거지.”사람들이 작게 수군거렸고 최서준 옆에 있던 임지석도 그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한씨 가문 미친 거 아니야
손씨 가문 손성운은 종사 6단계에 도달해 모두를 압도했고 무술 협회 회장인 형까지 있었다.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해 내키지 않았지만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소리를 지른 손성운은 자신의 생일 연회라는 것을 떠올리며 정말로 화를 낸다면 피 튀기는 싸움으로 번질 것을 알았기에 결국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한씨 가문 성의는 고맙게 받지!”손성운이 이를 악물고 말하자 곧바로 손씨 가문의 부하가 선물을 받으러 나왔다.“저 진릉 시장이 장대천의 서예를 드리며 손씨 가문 가주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진릉 재벌가 양씨 가문에서 별장 한 채를 드립니다.”...이윽고 줄줄이 높으신 분들의 선물 공세가 이어지며 조금 전 불쾌함을 지워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긴 것 같아도 안채의 사람들은 혹시라도 나중에 불이익이나 화를 당할까 봐 어느새 한씨 가문이 있는 쪽을 멀리하고 있었다.“자네가 선물을 드릴 차례네.” 손 집사가 조용히 최서준 옆에 나타나 웃으며 말했다.“서두를 것 없습니다. 아직 올 사람이 남아서요.” 최서준도 웃으며 대답했다.손 집사는 잠시 당황했다. 아직 올 사람이 남았다니, 대체 누가?“자네 스승도 오늘 오시나?”최서준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고 옆에서 임지석은 이미 생일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손 집사님, 집사님 이름으로 드릴까요, 아님 제 이름으로 드릴까요?”손 집사는 임지석의 손에 들린 선물을 흘깃 쳐다보더니 경멸의 눈빛으로 말했다.“이건 됐네, 올라가서 창피나 당하지.”알고 보니 임지석은 손 집사가 최서준의 화염 수정에 애착을 갖는 것을 보고 자신도 오늘 평범한 수정 하나를 준비한 것이었다.피서옥을 담당하는 손 집사는 눈썰미가 예리했기에 한눈에 알아봤다.이 수정은 바깥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이곳에선 길가의 잡초와 다를 바 없었다.바로 그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손씨 가문 저택 앞에 갑자기 온몸을 감싸는 긴 갈색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났다.
“세상에, 저분이 비밀 조직 무술협회 회장님인가요? 전설적인 인물을 오늘 드디어 뵙네요.”“실물을 보긴 했는데 어쩐지 다음 순간 바로 저 얼굴을 잊어버릴 것 같네.”“그래, 나도 그렇게 느껴져. 신기하다,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야.”“그건 당신들이 아직 몰라서 그래. 손 회장님은 이미 설명할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르러서 진릉에는 저분을 상대할 사람이 없어. 게다가 태허결 수련 공법은 따라올 자가 없으니 너희 같은 보통의 수련자들은 손 회장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지.”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이었다.“형님, 오늘 간만에 시간을 내주셨는데 형제들끼리 술 한 잔 기울이자고요.”손성운은 손성호에게 인사를 건네며 상석을 비웠다.“오늘은 자네 생일이니까 난 신경 쓰지 말게. 잠깐 앉아 있다가 갈 테니까.”손성호는 자신의 형제에게도 이와 같은 어투로 말했다.친형이 무자비한 수련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손성운은 자연스레 익숙해져 있었다.손씨 가문이 오늘날 번창하기까지는 바로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혼자 힘으로 일궈낸 것이었다.손씨 가문의 진정한 주인은 단 한 명, 손성호였다....“드디어 왔군!”최서준은 손성호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뭐?” 손 집사는 순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누가 왔다고?”최서준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손 집사뿐 아니라 옆에 있던 임지석까지 급히 최서준을 끌어당겼다.“최서준,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진릉시의 진정한 왕이야. 제발 미쳐도 때를 봐가면서 미쳐, 나까지 엮이게 하지 말고. 아직은 생일 선물을 드릴 때가 아니야, 나중에 다시...”“잠깐, 이름이 뭐라고? 최서준”손 집사는 그제야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손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최서준이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무술 협회에서 현상금을 내건 사람인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지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최서준은 걸음을 옮겨 손성호 앞을 막아 나섰다.순식간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최서준 네가 감히 겁도 없이 여기 나타나? 보아하니 손항준도 네놈이 죽였구나.”손성호가 말하기도 전에 손성운이 물었다.“죽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손항준은 내 손에 죽지 않았지.” 거짓말이 아니었다.손항준의 진짜 죽음은 진실을 말하려다 몸의 금기를 건드린 탓이었기에 자살이라고 할 수 있었다.“그럼 내 아들은 어딨어?”조씨 가문과 엄씨 가문도 이 틈을 타 물었다.최서준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차갑게 바라보기만 했다.“최서준, 오늘은 내 생일 잔치야. 할 말 있으면 오늘이 지나고 해.”최서준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손성운은 돌아서서 말했다.최서준은 무심하게 웃었다.“말했잖아, 목숨 가지러 왔다고.”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대에 손성호가 대꾸했다.“말해, 너희 쪽 사람들 다 어디 있어. 당장 부르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널 한 방에 죽여버릴 테니까.”손성호가 굳은 표정으로 주위 기운을 감지했지만 누구도 없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남양의 도강 전투 이후 유재충과 여경훈까지 남양에서 죽자 손성호는 곧바로 최서준 배후의 사람들이 한 짓이라고 단정 지었다.그렇지 않고서야 갓 승급한 무술 종사 혼자서 무슨 수로 그들을 상대한단 말인가.“하하하, 고작 무술 7단계 수련자가 한방에 날 죽인다고?”최서준은 웃음을 터뜨리다가 말했다.“맹목적인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우물가에 앉아 하늘만 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손성호, 오늘은 당신뿐만 아니라 손씨 가문 전체가 한성 보육원의 목숨값을 치러야 할 거야!”“우리 무술 협회 장로들은 어디 있느냐!” 이 말을 들은 손성호 역시 격분하여 폭발적인 소리를 내뱉었다.그 순간 조씨 가문의 가주, 엄씨 가문의 가주, 손성운과 한씨 가문 미인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자식 잡아!” 손성호는 명령을 내렸고 이 기회를 이용해 최서준의 배후에 있는 종파를 끌어내려는 수작이었다.조씨와 엄씨 가문 가주들은 앞으로 나섰지만 한씨 가문 미녀는 제외였
최서준은 날아오는 조씨 가문 가주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죽음을 자초하는군!”이윽고 그는 똑같이 주먹으로 맞받아쳤다.쾅-공기의 흐름이 안쪽 홀의 테이블과 의자를 모두 뒤집으며 사람들을 뒤흔들었다.그들이 제대로 서 있기도 전에 소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렸다.퍽, 퍽, 퍽...“다 끝났어, 조씨 가문 가주의 위압적인 힘에 지는 건 시간 문제야.”“그래, 남양의 최 대가가 감히 조씨 가문 가주와 주먹을 맞대다니. 이건 죽어도 이름을 날릴 테니.”“맞아, 영광스러운 죽음이지. 4대 무림 가문의 다른 가주였어도 조씨 가문의 저 힘에 압도당하면 마찬가지로 질 거야. 그런데 최 대가의 힘이 4대 가주들과 대등하다니 무서운 일이야!”경기장 밖에서 수군거리는 것과 달리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던 조씨 가주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주먹이 맞붙고 그는 의아함이 들었다.대체 천강패의권을 수련한 자가 누구란 말인가.주먹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조씨 가주는 빨리 이곳 전장을 벗어나고 싶었다.상대인 최서준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들러붙어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수십 차례의 대치로 이미 손가락 마디뼈가 부러졌다. 별것 아닌 부상이었지만 맞붙은 상대는 부상은 말할 것도 없고 옷자락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조씨 가문 가주는 진작 자신이 최 대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다만 한번 나선 이상 멈추기가 어려웠다.어떠한 대가를 치르기 전까지 전장에서 벗어나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바로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워밍업은 끝났어. 이제 그만 죽어!”원기를 이용한 최서준의 주먹은 조씨 가문 가주의 눈에 천강패의권보다 더 천강패의권 같았다. 도저히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어딜 감히!”“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최 대가가 오랜 시간 조씨 가문 가주와 싸워도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는 거지?”“설마 남양의 최서준이 조씨 가문 가주보다 실력이 월등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기 결과를 지켜보다가 탄식을 내뱉었다.진릉에서 무술 협회 회장이 나섰다는 건 곧 끝을 의미했다.그런데 이번에는 무술 협회장뿐 아니라 손씨 가문 가주까지 가세하니 실로 두렵기 그지없었다....“내 손아귀에 있는 사람을 살리려 하다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최서준은 날아오는 손씨 가문 형제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최서준은 그 틈에 방어 차원에서 묵직한 주먹을 날리는 등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그런데 그는 정작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리더니 주먹으로 조씨 가문 가주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해 얼굴 전체가 함몰되었다.조씨 가문의 가주는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렸는데 최서준 옆으로 청록색 빛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조씨 가문 가주의 주먹은 손가락뼈부터 시작해 손목 팔뚝까지 서서히 무너져 버렸다.청록색 빛 그림자는 조씨 가문의 마지막 주먹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팔 전체를 부숴버리고 손씨 가문 형제의 합동 공격도 막아냈다.보이지 않는 파문이 퍼져나가자 안쪽 홀에는 무술 수련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이 충격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모두 부서져 안쪽 홀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바깥 홀에 있던 사람들도 진작 모습을 감췄다.무술 수련자들도 이미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이미 거기까지가 한계였고 더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 주고받는 공격에 그들까지 부상을 당할 것이 뻔했다.“오늘부터 진릉에 조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서준은 손씨 가문 형제의 가운데 서서 차갑게 말했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조씨 가문 가주가 저렇게 죽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그러게, 남양 최 대가의 힘이 조씨 가문 가주를 죽이고 손 회장 형제의 공격까지 막아낼 정도로 강할 줄이야.”“오늘 이 전투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며 우리 모두 역사의 증인이야!”그 말에 다들 들뜨기 시작했다.더 이상 최서준이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말은 나오지 않았고 거듭
“쳇, 이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사람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지 말고 내가 직접 남양으로 달려가서 널 죽였어야 했어!” 손성호는 이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며 섬뜩하게 말했다.“진짜 당신이었네!” 이 말을 들은 최서준은 급격히 살기에 휩싸였다.단지 떠본 것뿐이었다. 손항준이 수상하다고 손씨 가문 전체가 그런 건 아닐 테니까. 그런데 확인해 보니 역시나 손씨 가문 위아래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이곳 전체에 퍼져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사람의 살기가 이토록 짙을 줄이야.뼛속까지 사무치는 증오심이었다.최서준의 머릿속에는 한성 보육원의 형제자매들이 떠올랐고 더 나아가 원장의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이 떠올랐다.이 모든 비극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었다.이윽고 그는 몸을 휙 움직여 손씨 가문 사람들 곁에 나타났고 상대는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렸다. 또다시 휩쓸며 지나다니는 곳마다 손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아버지, 살려주세요!”“최서준, 난 그때 그 사건에 찬성하지 않았어!”“네 형제들을 죽인 건 가주야!”“나도 어렸어, 나도 어린애였다고!”“미안해요, 최 대가.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여기 모인 사람들은 손성운이나 손성호의 직계 후손들이었다.최서준은 자비를 구하는 이들의 호소를 못 들은 척했다.세상을 떠도는 사악한 악귀처럼 나타나는 곳마다 목숨을 거두어갔다.“최서준, 죽여버릴 거야!” 손씨 가문 두 형제의 마음도 순간 분노로 가득 찼다.두 사람은 최서준의 뒤에 따라붙었지만 그저 쫓아다닐 뿐 자신의 후손들이 연이어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절망적이야?” 손씨 가문 사람들 뒤에 최서준의 모습이 나타났다.“화가 나?” 말하며 그는 어느새 이미 다른 곳에 나타나 있었다.“그래, 그런 느낌이야.” 최서준의 잔영이 보일 때마다 손씨 가문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진다는 걸 의미했다.서서히 수십 명에 달하던 손씨 가문 사람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