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말에 변석환이 의식적으로 성연신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아이의 아버지라면 자신 말고는 성연신밖에 더 있겠는가.이 처음 보는 남자는 또 어떻게 된 걸까. 설마 시연 씨가 성연신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남자와 아이를 양육했던 것인가.이상한 생각이 잠깐 뇌리를 스치자 그는 재빨리 머리를 저었다.말도 안 돼. 어떻게 시연 씨가 아이를 셋이나 낳을 수 있겠어. 몸매도 얼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잖아.변석환은 잠시 마음을 다잡은 뒤 아버지를 응시했다.“아버지, 똑바로 말해주세요.”“이보다 어떻게 더 똑바로 말합니까?”성연신이 피식 웃더니 김민수를 그의 앞에 세웠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이 사람과 임시연 씨에게 아이가 있다고요. 올해로 다섯 살. 다만... 임시연 씨가 아이를 버렸죠.”“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이가 있는 건 그쪽이겠죠. 그쪽이 시연 씨 버린거고.”성연신을 바라보는 변석환의 눈에 경멸과 증오가 가득했다.무책임했던 그에 대한 경멸, 그리고 시연 씨에게 못되게 대한 것에 대한 증오.성연신이 그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냉소가 가득했다.“쯧쯧, 멍청이를 키우셨네요.”변요석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순진해도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너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아이이다.“임시연과 아이를 낳은 사람은 성연신이 아니라 네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다.”“석환아, 네가 단순하고 정의로운 건 알아. 어렸을 적부터 선량하고 온화했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악의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드러내지 않는단다.”“검은 속내를 말이야. 너도 알아야지, 이제.”청천벽력 같은 말이 변석환의 가슴을 후벼팠다.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모든 진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그... 그게 아니라...”곁에 서 있던 임시연은 이미 똑바로 서 있질 못하고 변석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다급하게 해명하려는 그녀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절, 절
김민수는 사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임시연이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두었다.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는 확실히 봐야 했다. 임시연이 딸을 버리고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신단에서 끌어내려진 낭패한 그녀의 모습을 꼭 보아야 했다.더욱이는 그 옛날 그녀를 좋아하던 자신이 얼마나 눈이 멀었던지를 확실히 실감해야 했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자신이었으니.임시연을 위해 바친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었다.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업보가 돌아온 것이다.임시연이 더 미쳐 발광할수록 김민수는 더 신이 나서 웃었다.웃다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허리까지 굽혀가며 웃어도 멈출 수 없게 배를 잡고 웃었다.심지안이 그런 김민수를 한참 응시하더니 탄식했다.젊은 나이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미숙해서 이렇게 반평생을 망친 사람이다.만일 김민수와 임시연이 서로 몰랐다면 그는 평범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까.“복수까지 다 해놓고 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요?”성연신이 칠흑같이 검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불쑥 말을 걸어왔다.마치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주의하는 것처럼.심지안은 왠지 그의 눈빛이 어색해 고개를 저은 뒤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뭔 상관이에요.”성연신이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씩 웃었다.“왜요. 전 상관하면 안 돼요?”“당연히 안 되죠. 가족도 아닌데 상관할 자격 없어요.”그가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그렇게 될 수도 있죠.”“정중히 거절할게요.”임시연이 김민수에게 주먹질하고 발로 차며 날뛴 바람에 그의 옷이 찢어졌다.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소리를 꽥꽥 질렀다.“나 사랑한다며! 왜 하필 지금 다 망치려고 드는 건데!”왜 하필 왕실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인 지금!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인 왕후가 되기 직전인 지금 이러느냔 말이다.김민수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네가 먼저 사람 시켜서 나 죽이려고 했잖아. 제일 악독한 사람은 너야.”“쓸데없는 새
이러한 변명에 가까운 대답은 변석환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으로 와닿았다.“그동안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고요? 결국은 내게도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거잖아요?”심지안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강렬한 눈빛으로 ‘당신 아드님이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변요석은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심지안과 자꾸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임시연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은 듯, 다시 눈에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변석환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배 위에 얹었다.“아니에요, 맹세코 이 아이의 아버지는 당신이에요,석환 씨! 제가 먼저 석환 씨를 속인 건 인정해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비밀 조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 사랑만큼은 진심인 것을 알아주세요.”“진심? 하하하...”변석환은 크게 웃으며 김민수를 향해 삿대질하며 물었다.“당신도 같은 변명에 넘어갔던 거예요?”“네, 한 마디도 다르지 않네요.”김민수가 먼저 말했다.임시연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김민수를 신경 쓰지 않고 변석환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저으며, 눈물 가득한 얼굴로 애원했다.“그렇지 않아요. 제 마음속에는 석환 씨밖에 없었어요.”임시연을 보는 변석환의 눈빛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쳤다. 하지만 변석환은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키울게요. 내일 당장 궁에서 나가세요.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어야 해요.”변석환의 단호한 한마디에 임시연은 마지막 카드를 잃은 셈이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심지안은 이 드라마틱한 상황이 끝나자,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다. 심지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했다. 문 앞까지 걸어갈 무렵, 하인 한 명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세움 주얼리.심지안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분주하게 물건들을 옮기는 모습을 보았다. 그중 몇 명은 그녀의 부서 직원이었다.이 모습을 본 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근무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이죠?”직원들이 심지안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심 이사님, 드디어 오셨군요.”심지안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무슨 일이 있었나요?”“저희 모두 해고당했습니다.”“누가 해고한 건가요? 제 할아버지인가요?”심지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지난 기자회견 이후로 회사 일에 손을 뗐어. 직원을 해고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 할아버지가 개입했을 리가 없잖아.’“아닙니다. 성동철 어르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침 일찍 세움 그룹 주식을 매입한 계약서를 들고 나타나서는 저희를 모두 해고했습니다.”심지안은 깜짝 놀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회사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 이사회 주주들뿐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절대로 주식을 팔 리 없으니, 직원들이 언급한 그 사람이 이사회 주주들에게서 지분을 사들였을 가능성밖에 없었다.‘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이사회 주주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들인데, 한두 명도 아니고 전부가 배신했을 리 없어. 이건 배신이 아니라 위협이야!’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됐고, 더 깊은 두려움에 빠졌다.심지안은 주먹을 꽉 쥐며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고 나서 직원에게 물었다.“그 사람 지금도 회사에 있나요?”“네, 고 이사님께서 지내시던 사무실에 있습니다.”직원이 빨개진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심 이사님, 저는 세움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저를 남게 해주세요.”“저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일 때부터 3년 동안 일해왔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제가 제일 딱한 처지입니다. 아이들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르신들도 있
심지안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그야말로 모두의 기선을 제압했다.“하 대표님이요? 들어본 적조차 없는데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매끄러운 턱선을 자랑하며 두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세움 주얼리는 우리 성씨 가문이 일으켜 세운 거예요. 성씨 가문 사람 외에 세움 주얼리 주인 자리에 어울릴 사람은 없죠.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꺼이 기다린다면 그건 나의 교양과 관대함 때문이란 것을 알아둬요. 반면,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게 한다면 그건 분명한 무례함이겠죠. 당신 같은 아랫사람들이 대신 결정할 자격은 없어요.”“뭐라고요? 감히 우리 하 대표님께 무례를 범하다니...”경호원은 얼굴빛이 변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는 이 여자가 이렇게 날카로운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자 심지안이 무심하게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미안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하 대표가 누군지 몰라요. 혹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역할 놀이에 빠진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불법 침입일지도 모르죠.”“이봐요, 지금 우리 하 대표님을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하는 거예요?”“아니라는 증거 있어요?”“...”‘이걸 어떻게 증명해? 제정신인 사람에게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니? 이건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게 틀림없어.’심지안의 맑은 눈에는 약간의 광기가 어려있었다.“증명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당장 경호원을 불러 이 불법 침입자들을 쫓아내세요.”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들은 이러한 상황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터라, 심지안의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너도나도 자원해서 경호팀에 연락하려고 나섰다.“심지안 씨, 듣던 대로 카리스마 넘치시네요.”사무실 문이 열리자, 생각보다 젊은 남자의 모습이 사람들 시야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고청민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표정은 담담했다.심지안은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 처음 보는 사이임을 확신했다.“당신이 보
심지안은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한 후, 고청민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저녁 9시.도로가 막혀서 심지안이 장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넓은 정원은 이 순간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가정부들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정원에 있는 산차화 나무가 꽃을 피워 그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심지안은 꽃 한 송이를 따서 꽃병에 꽂았다.그녀는 목욕하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보안실로 갔다.“아가씨,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보안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심지안을 보고 모니터링 화면 앞 의자에서 서둘러 일어났다.“별일 아니에요. 혹시 오늘 고청민 씨가 외출한 적은 없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이 보안실은 성동철이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임시로 설치한 것으로, 고청민이 또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아니요, 도련님은 하루 종일 사당에 있었어요. 심지어 밥도 안 먹었어요.”고청민에게 식사를 차려주고, 하루 종일 그를 모니터링 했던 직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심지안은 실시간 모니터링 화면을 확인했고, 직원의 말처럼 고청민은 사당에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사당은 휑해 보일 만큼 넓었고, 문 앞은 조용했다.고청민은 얇은 옷을 걸치고 사당 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살이 빠진 탓에 야윈 직각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달빛이 그의 몸에 비추어져, 머리 위의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보였고, 그는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심지안의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어떤 감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함께 힘든 시간을 이겨냈던 그 5년 동안의 기억이 뇌리에 계속해서 떠올랐다.여유가 생길 때마다 심지안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려고 했다. 그녀는 애써 고청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고청민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에서
심지안은 눈동자가 흔들렸고 긴 속눈썹은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전보다 무거워졌다.“정말 청민 씨가 이 상황을 만든 거예요?”“제가 뭘 했다는 거죠?”고청민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제가 하지웅에게 세움의 지분을 사들이게 지시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지안 씨, 아무리 제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을 직시하세요.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당에 갇혀 있었는지 지안 씨도 알잖아요... 물론, 꼭 이 사단을 만든 장본인을 찾아서 책임을 물으려 한다면, 할 말 없어요.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죠, 제가 할아버지의 힘에 두손 두발 들고 이사회에서 퇴출당했다는 것으로요. 아쉽게도 저는 뜻이 있어도 힘이 없네요.”심지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이렇게 과민반응 할 필요 없어요. 그저 물어봤을 뿐이니까요...”‘과민반응?’고청민은 양손을 머리 뒤로 넘기며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심지안에게 물었다.“내가 과민반응 하지 않아야 할 상황이라는 건가?”고청민은 단지 성씨 가문에 입양되었다는 이유로 자기가 무례한 취급을 당해도 된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또한, 그도 세움의 성공에 크게 이바지했기에, 이렇게 기생충 취급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청민은 성씨 가문의 성공이든, 세움의 성장이든, 자신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청민과 심지안은 어릴 적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난 모인 것을 걸었는데, 왜 결국엔 이런 처지가 된 걸까? 지안 씨를 잃은 것도 모자라, 세움도 잃을 순 없어.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된 건 할아버지와 심지안의 선택이야.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해.’“난 청민 씨가 진실만을 얘기했길 바랄게요. 할아버지가 청민 씨를 사당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에요. 청민 씨가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다른 계획이 있으실 거예요.”심지안은 고청민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에 나
예외 없이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답은 안동명의 말과 똑같았다. 심지어 심지안을 문밖에서 거절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심지안은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다녔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피곤해진 그녀는 차 안에 주저앉았고, 맑고 반짝이던 눈길은 피곤함으로 가득 찼다.‘정말로 청민 씨의 소행일까?’심지안은 고청민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자기 자신을 속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한참이 지나고 차창을 통해 바라보니, 길 건너편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전체가 천천히 조용해지고 있었다.심지안은 자리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미간은 계속 찡그려져 있었다.“웅웅... 웅웅...”진동 소리가 적막을 깼다.심지안은 천천히 눈을 떠서 휴대폰을 보니 성연신이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성연신이 그녀에게 놀이공원에 놀러 가자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심지안은 이마를 가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답장을 보냈다.[우주야, 미안해. 내일은 엄마가 아주 바빠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 나중에 꼭 같이 가줄게, 이해해 줄 수 있어?]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연신의 전화가 걸려왔다. 심지안은 피곤함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성연신은 흠칫했다.“어디예요?”심지안은 주변의 쇼핑몰 건물을 보고, 현재 위치를 말했다. 그러자 성연신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심지안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통화 종료 효과음을 들으며 작게 중얼거렸다.“무슨 매너야... 전화를 걸어놓고 말도 하지 않은 채 끊어버리다니?”심지안은 휴대폰을 옆자리에 던져두고, 최근 일어난 일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아무리 고민해도 고청민 말고 진짜로 누가 이사회에서 주식을 양도하게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청민은 학부 시절부터 세움의 경영에 참여했기에, 세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