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거 아니야? 너희 두 사람은 원래 한 쌍의 바퀴벌레야.”“너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심지안이 비꼬는 듯이 대답하자 강우석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흐트러진 정장까지 더해져서 그 모습이 매우 비참해 보였으며 심연아와의 약혼식은 순조롭지 못했던 것 같았다.“우리 엄마가 나에게 남겨준 혼수를 되찾으려는 거야.”“네가 이미 가져갔잖아?”“내가 언제 가져갔는데?”“연아가 너에게 비단 상자를 건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강우석은 심지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녀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건 강 씨 가문의 재산을 얻기 위한 발악이라고 여겼다.“우리 엄마가 나한테 고작 그 물건만 남겨줬을 거 같아?”흠칫하던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그럼 뭐가 더 있는데?”“제발 머리를 좀 굴려봐.”심연아는 그녀에게 혼수를 돌려준 게 아니라 그녀를 모욕했던 것인데 멍청한 강우석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럼 말해봐. 연아가 너에게 돌려주지 않은 게 또 뭐가 있어?”강우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많아. 걔가 지금 목에 걸고 있는 그 백옥 목걸이도 포함이야. 진심으로 알고 싶으면 돌아가서 직접 물어봐.”심지안의 대답에 강우석이 잠시 머뭇거렸다.“네 물건만 돌려주면 앞으로 우리를 더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심지안은 강우석의 자신감이 너무 우스웠다.“그래, 네가 우리 엄마가 남긴 혼수를 전부 나한테 돌려줄 수 있다면 내가 약속할게.”“알겠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넌 반드시 우리 삼촌 곁에서 떠나야 해.”“그건 네 삼촌한테 가서 말해. 그 사람이 나한테 떠나라고 하면 떠날게.”“너!”“내가 뭐? 일단 심연아한테 가서 내 혼수나 가져오고 나서 나한테 조건을 걸어. 안 그러면 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심지안은 잔뜩 화가 난 강우석을 뒤로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시장에서 이것저것 많이 산 심지안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고 저녁 여덟 시가 되자 성연신이 집에 들어섰다. 현관
두 눈이 마주치자 성연신은 그제야 병원에 며칠 입원한 심지안이 전보다 조금 마른 것을 발견했다.“아 참, 오늘 장학수 변호사가 저에게 수임료를 안 받고 사건을 맡아준다고 했는데 혹시 연신 씨가 저 대신 돈을 지불할 거예요?”“네.”마음이 착잡한 심지안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금액이 너무 커서 못 돌려줘요. 장학수 변호사한테 괜찮으니까 제 사건은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말 좀 해줘요. 수임료가 낮은 변호사 찾아볼게요.”“안 갚아도 돼요.”“안 돼요. 연신 씨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연신 씨 돈을 너무 많이 썼어요. 160억은 제가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거예요.”심지안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녀는 숙모가 되고 싶은 거지 돈을 버는 기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지안 씨가 3년 안에 부용 그룹 디렉터가 되고 5년 안에 전 구역 관리자가 되면 160억이 조금 힘들긴 해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에요.”고개를 들어 심지안을 빤히 쳐다보던 성연신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하자 심지안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그 정도로 저한테 자신 있어요?”“전 평범한 직원들에게 더욱 많은 격려를 줘요. 그것도 힘들면 이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해요. 돈을 다 갚을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도 가능해요.”적어도 심지안이 해준 요리는 삼키지 못할 만큼 맛이 없진 않았다.이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심지안이 폭탄 발언을 했다.“전 가사도우미 말고 연신 씨 와이프 할래요.”반찬을 집던 성연신의 손이 멈칫했고 고개를 돌려 심지안을 쳐다보았으며 너무 노골적인 시선에 심지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왜… 왜요?”“꿈꾸는 걸 좋아하나 봐요.”심지안은 괜한 기대를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저녁을 먹은 뒤, 베란다에서 옷을 널고 있던 심지안에게 진유진이 전화를 했고 다급한 목소리로 심지안에게 대학교 동창 단톡방의 문자를 확인하라고 했다.어리둥절한 심지안이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평소에 대화가 없는
밝은 불빛 아래, 성연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지안 씨에게 저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에요?”흠칫하던 심지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화가 난 성연신이 핸드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려고 하자 심지안이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하지 마요. 신고를 하면 연신 씨 이모부가 알게 될 거예요.”멈칫하던 성연신은 그제야 심지안이 말한 이모부가 오지석이라는 걸 깨달았다.“알면 뭐 어때요? 지안 씨는 피해자예요. 못 본 척하고 계속 이렇게 숨을 거예요?”“그게 아니라 연신 씨가 걱정돼서 그래요. 만에 하나 오지석 그 사람이 소문이라도 내면 성 씨 가문 사람들이 연신 씨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어찌 됐든 심지안은 명의상에서 성연신의 와이프였기에 그녀는 자신의 일 때문에 성연신까지 피해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본인 문제부터 잘 해결하고 다른 사람을 신경 써요.”“네?”깜짝 놀란 심지안은 평소에 냉정해 보이는 성연신이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모습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15분 뒤, 저번에 주관민 사건을 맡았던 경찰들이 찾아왔고 이를 보자 전전긍긍하던 심지안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그때 당신 주관민은 증거 불충분으로 경찰서에 며칠 동안 잡혀 있다가 바로 풀려났고 사건은 아직도 조사 중이었기에 경찰들은 심지안을 기억하고 있었다.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전문 기술자를 불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 캡처 사진을 지워버렸지만 최초 유출자가 암호 설정을 철저하게 설치했기에 IP를 추적하려면 시간이 몇 시간 걸렸다.경찰들은 늦어도 내일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하면서 심지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고 그들이 무조건 유출자를 잡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성연신을 곁으로 따로 불러서 신신당부했다.“저번에 현장을 둘러본 결과, 와이프분도 피해자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남편으로서 마음이 불편하신 건 저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와
심연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누가 그래? 심지안이 그래?”“맞는지 아닌지 대답부터 해. 내가 지금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강우석이 다정한 말투로 말하자 심연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대꾸했다.“우리 미래를 위했다면 넌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거야.”“왜 그래?”강우석은 심연아의 눈물을 보자 다급하게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심지안이 너에게 내가 자기 엄마가 남겨준 혼수를 빼앗았다고 얘기한 거야?”“응, 그 혼수만 돌려주면 심지안은…”잠시 머뭇거리던 강우석이 말을 꺼내자 심연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으며 대꾸했다.“넌 심지안 말을 믿으면서도 내 말은 안 믿는구나. 네 눈엔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은 여자야? 남의 유산까지 탐내는 그런 사람이야?”“아니야, 오해야. 난 그런 뜻이 아니라…”“그만해. 난 우리가 약혼까지 했고 혼인을 앞둔 사이라서 당연히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넌 나 몰래 심지안에게 찾아간 거야. 내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거야.”강우석은 심연아의 말에 당황했다.“울지 마.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어제 심지안에게 찾아간 건,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그랬던 거야.”“경고? 경고하러 간 거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나에게 따지는 건 뭔데?”심연아가 처량하게 웃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고 설명할수록 오해가 쌓이자 강우석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머리를 잡아당겼다.“너도 서로를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날 이렇게 못 믿고 있잖아. 어제 약혼식 때문에 나도 지금 너무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나는데 좀 나를 이해해 주면 안 돼?”강우석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우당탕 소리와 함께 뭔가 바닥에 떨어진 듯했으며 심전웅이 바닥에 널브러진 조각들을 발로 차며 언짢은 표정으로 강우석을 째려보았다.“약혼식은 두 집안의 일이야. 짜증 나고 기분 나쁜 건 너뿐만이 아니야. 아침부터 싸우러 온 거면 우린 더 듣고 싶지 않아. 연아야, 당장 집에서 내보내.”심연아도 실망한 표
”그쪽은 저를 누나라고 불러야 돼요.”심지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주원재의 기름진 머리는 레게 머리로 바뀌어서 전보다 더 불량소년 같았으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넘 앳된 얼굴이었기에 나이는 스무 살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안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심지안은 순간 심연아가 어린아이를 꼬신 건지 아니면 주원재가 취향이 독특한지 알 수가 없었다.“누나라고 부르면 연락처 주실 거예요?”“여기저기 남동생을 두는 습관이 없습니다. 얼른 나가세요. 저희 일해야 해요.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나요.”말을 끝낸 심지안은 고개를 숙여 계속 문서 정리에 집중했고 아이를 달래듯 주원재를 보내려 했으며 누군가에게 이렇게 무시를 당한 경험이 없는 주원재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난 성인이라 아버지가 관여하지 못해요. 얼른 연락처나 줘요. 내가 또 기분이 좋아지면 그쪽에게 차도 한 대 선물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심지안은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꾹꾹 눌렀으며 연락처를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연하를 남자로 본 적도 없었지만 더군다나 심연아와 놀아나는 사람은 멀쩡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심지안은 못 들은 척하며 일에 집중했고 늘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주원재는 화가 슬슬 치밀어 올랐지만 조용히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심지안의 완벽한 이목구비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옆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화가 풀렸으며 심지안의 관심을 받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바로 이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주원재를 불렀다.“도련님, 대표님 오셨어요. 얼른 나오세요.”그 말을 들은 주원재는 화들짝 놀라더니 고양이를 본 쥐 마냥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그 모습에 부용 그룹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심지안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지만 타인의 회사에서 실례인 거 같아서 부용 직원들에게 조용하라고 손짓을 했다.이내, 부용 그룹과의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대리가 걸어 들어왔고 심지안 등 사람들과 한데 모여 앉아 프로젝트 방안에 대해 의논하
이 순간, 장학수는 너무도 경악스러웠다. 그가 알고 있는 성연신은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특히 영웅놀이에 대해서는 늘 콧방귀를 뀌던 사람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여자분을 위해 나선 것도 모자라서 본인이 돈이 많고 젊은 데다가 잘생긴 것까지 인정한 셈이었다.‘영웅놀이를 위해 부끄러운 것도 잊은 건가? 아니지! 저 여자가 설마 심지안인가?’장학수는 성연신과 심지안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심지안과 주원재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잘빠진 몸매에 이목구비까지 훤칠했으며 싸늘하고 도도한 눈빛에는 큰 감정의 변화도 없이 주원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몸을 흠칫 떨던 주원재는 건들거리던 태도를 거둔 채 아버지를 만났을 때보다 더 깍듯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연… 연신 도련님,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주원재의 말에 심지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저 사람 알아요?”주원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흥신 그룹 대표 주혁재가 건물에서 걸어 나와 주원재를 확 밀치더니 환한 미소로 성연신을 반겼고 성연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 뒤, 시선은 여전히 주원재에게 꽂혀 있었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에게 작업을 걸다니.“장 변호사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장학수를 발견한 주혁재가 반가운 듯 물었고 장학수가 웃으며 대답했다.“오늘 시간이 좀 남아서 사건에 대해 의논하러 왔습니다.”“아, 그럼 제가 도움이 되진 못하겠네요. 회사 법무팀 직원을 불러드릴게요.”주혁재는 그제야 요즘 회사에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그는 변호사 여러 명을 찾아봤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해서 큰돈을 들여 장학수에게 부탁했던 것이다.주혁재의 말에 그의 곁에 있던 여비서가 장학수를 데리고 들어갔고 주혁재는 곁에 있던 성연신을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성 대표님, 저희도 들어가시죠?”성연신은 느긋하게 주원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발견한 주혁재가 주원재를
심지안이 두 눈을 깜빡이며 궁금증이 가득 담겨있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했다.“나한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한 건 내가 그 사람 집 도우미이기 때문이에요.”한 지붕 아래 함께 살지만 부부 사이 애정은 없고 해야 할 가사노동만 남아있으니 도우미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서인수는 어안이 벙벙했다.“도우미라고요?”“네. 왜요? 안 믿겨요?”부자들은 도우미를 뽑을 때 그 조건이 꽤 높다는 걸 서인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지안은 그 기준을 훌쩍 넘겨버릴 정도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런 경우는 결코 흔치 않다...그녀는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흥신 그룹 회장으로 하여금 직접 마중 나오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분명 범상치 않을 거라 생각했다.훤칠한 키, 준수한 얼굴, 모두를 압도하는 분위기, 그리고 훌륭한 인품까지 갖춘 인물이다.아쉽지만... 저 선남선녀 커플은 이대로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왜 주원재 씨한테 번호를 주지 않은 거예요? 그분과 좋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퇴근 후 도우미를 할 필요도 없잖아요.”이재성은 팀 내 나이가 가장 많은 직원이었는데 회사에 들어온 지 5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부팀장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연히 팀장으로 승진할 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심지안에게 밀려 물러나게 된 것이다.때문에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투덜거리며 꼬투리를 잡기가 일쑤였다.심지안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난 주원재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주원재 씨의 아버지는 흥신 그룹 회장님이에요. 그 집안에 시집만 간다면 한평생 일할 필요도 없이 편히 호의호식할 수 있잖아요. 이거야말로 여자들의 로망 아닌가요?”서인수가 약간 못마땅한 듯 말했다.“모든 여자들이 전업주부를 희망하는 건 아니에요.”“쳇. 명문가에 시집갈 게 아니라면 부용 그룹엔 왜 다니는 거예요.”대기업엔 조건 좋은 남성 자원이 풍부하니 출근을 한다는 핑계로 입사해 남편감을 찾는 선례가 적지 않음을 누구든 알고 있다.“그래서 이재성
심지안이 반신반의하며 다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잠시만요. 전 아직 부르지 않았는데요.”“그러니까요. 제가 마침 잘 온 거죠.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게요.”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놀라움에 살짝 벌어졌다.“절 바래다주려고 일부러 오신 거예요?”“네.”심지안의 얼굴에서 점점 짙어져 가는 의심을 감지한 진현수가 잠시 멈칫하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이 부근에서 진찬우와 밥을 먹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진찬우가 인스타를 보던 중 지안 씨도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발견했고요.”“그랬군요...”심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깊어진지라 차를 잡기 어려울 것 같아 가는 길에 모셔다드리려고 왔어요.”“저까지 데려다주면 열두 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도착할 거예요.”“괜찮아요. 요즘 잠이 잘 안 와서 늦게 잠들거든요.”이렇게까지 말하니 심지안도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중정원.성연신이 원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원이는 별장을 나서자마자 땅에 엎드려 숨을 헐떡이며 귀여운 반항을 하고 있었다.오늘 밤 이미 다섯 바퀴를 돌았다. 더 이상 산책하다간 녹초가 되어버릴 것이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연신은 그런 원이의 상태를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더더욱 다그쳤다.“매일 그렇게 많이 먹더니 3킬로나 쪘잖아. 운동해서 살 빼야지.”오늘은 심지안이 원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미 밤이 깊어졌는데도 심지안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무슨 회식을 다섯 시간이 넘게 한단 말인가?보광 그룹 이사 회의도 그렇게 오랫동안 하지 않는다.부용 그룹은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데에만 능하다.원이는 헐떡거리기만 할 뿐 고단함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너희 두 발 달린 짐승들의 다툼에 왜 날 끌어들이는 거야!’성연신이 원이와 함께 열 바퀴를 돌았을 때, 드디어 한 줄기의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차가 문 앞에 멈춰 선 뒤 심지안이 안에서 내렸다.성연신의 차가운 얼굴에 부드러움이 피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