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뺨을 맞은 심지안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그게 뭐 어때서요? 집에 가서 소송 준비나 하세요. 법원에서 곧 연락이 갈 거예요.”“뭐라고? 법원?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엄마가 남긴 재산 가로챌 생각 하지 마세요. 끝까지 소송할 거니까 단 한 푼도 가질 생각 말아요. 아빠는 그럴 자격 없어요.”심지안은 엄마를 언급하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집어삼켰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심전웅의 냉혈한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고 엄마의 일생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화가 난 심전웅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고분고분하던 심지안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뒤에 그 늙은이가 있어서 이렇게 날뛰는 건가?’“아빠, 화 푸세요.”심연아는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심지안을 설득했다.“지안아, 아빠한테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해.”“쳇.”심지안은 바보를 쳐다보듯 심연아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왜? 두 사람이 합심해서 우리 엄마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것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그때 당시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아서 위임장대로 재산을 나한테 넘겨준 거잖아.”법적으로 심전웅은 제2의 상속자이지만 법적으로 심지안의 부친인 그가 조금만 방법을 쓴다면 심지안은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지 죽은 건 아니잖아.”심지안은 차갑게 그녀를 쏘아붙였다. 내심 마음에 찔렸던 심연아는 시선을 피했고 심전웅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 그만 싸우세요. 중요하게 하실 얘기가 있잖아요.”‘그래, 중요한 일을 깜빡하고 있었어.’심전웅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심지안을 쳐다보았다.“너랑 주원재 아는 사이지? 그럼 주원재 아버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겠네?”말끝마다 그녀에 대한 경멸이 가득 담겨있었다. 얼핏 봐도 심전웅이
그 말에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는 알고 있어요?”엄마가 생전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해 그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심전웅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고 싶으면 주혁재를 찾아가 봐.”말을 마치고 심전웅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심연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편의점을 나온 뒤, 심연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아빠, 정말 지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거예요?”“지안이 엄마가 나한테 시집왔을 때는 이미 집안과 인연을 끊은 상태였어.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지는 잘 알고 있지.”심전웅은 그녀의 목에 걸린 백옥 목걸이를 쳐다보았다.“이 목걸이를 가지고 남쪽 옥석 거리로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이건 심지안의 어머니가 그한테 말해준 것이고 심지안이 나중에 크게 되면 그녀한테 알려주라고 하면서 당부한 말이었다. 그 말에 심연아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그 집안이 주얼리 사업을 하던 집안인가요?”‘그럼 엄청 부자라는 말 아니야?’심전웅은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냥 조그마한 가게일 뿐이야. 구멍가게 수준이니 사업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그날 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성연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심지안이 구석에 머리를 숙인 채 무릎 위에 턱을 괴고는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옆에서 보니 그녀의 긴 속눈썹은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녀는 마치 버려진 고양이처럼 구석에 숨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성연신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청소팀 일이 그렇게 힘들었나? 일이 너무 힘들어서 저리 축 처져 있는 건가? 내일은 기획팀으로 다시 보내야겠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괴롭힌다고 오해할 거 아니야.” 그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위로하려 했지만 본의 아니게 또 독한 말만 내뱉었다.“이제 고작 하루 하고 이렇게 지친 거예요?”몸이 얼어붙어 있던 그녀가
그녀는 허겁지겁 얼굴을 가리고는 이를 악물며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이 인간 진짜, 관심은커녕 독설만 퍼붓고 있다니!’성연신은 서재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장학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장학수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지안 씨 사건 일찍 개정할 수는 없어?” 성연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그 말을 듣고 장학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설마 그 여자 좋아하는 거야?”미간을 찌푸리던 성연신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불쌍해 보여서 그러는 거야.”그 말에 장학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가 알고 있는 친구 성연신은 비즈니스의 귀재라고 불릴 만큼 사업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연애 쪽으로는 머리가 트지 않은 바보였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게 연민에서 비롯된다는 걸 모르는 건가?’친구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던 장학수는 비서한테 스케줄 표를 가져오라고 했다. 잠시 후, 스케줄 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안 돼, 제일 빨라도 7월이야. 더는 앞당길 수가 없어. 법원이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시간 맞춰야 하고 법원에 서류 제출해서 심사하는 데도 시간이 걸려.”성연신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풀었다.“보통 사건 하나 맡는데 수임료 얼마 받아?”“보통은 20억에서 40억 정도 받는데 어려운 사건이면 100억에서 200억 가까이 받을 때도 있어.”“100억 줄게. 지안 씨 사건 이번달 중순으로 처리해 줘.”장학수는 고개를 저었다.“돈이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판사랑 사이가 좋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200억 줄게.”“야... 우리가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지금 나한테 돈지랄하냐?”“400억.”“스읍.”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던 장학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좋아. 근데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달 중순은 불가능해.
속마음을 들킨 심지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럴 리가요. 좀 오버하긴 했지만 보광 중신에 대한 나의 마음은 진심이에요.”그 말에 성연신은 피식 웃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광 중신에 대해 진심이라고? 나한테 진심이겠지. 바보 같은 여자. 나한테 그렇게 잘 보이고 싶은 건가? 이젠 볼 기회도 더 많아졌으니 아마 속으로 엄청 기뻐할 거야.”사실 이런 여인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는 심지안이 싫지는 않았다. 만약 앞으로 그녀가 고분고분하다면 그녀한테 마음을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자 진유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어떻게 됐어? 이사는 언제 할 거야? 회사 동료가 집을 세놓고 싶다고 하던데. 우리 집하고도 가까워. 아니면 그냥 우리 집에 있어. 남자친구 안 오니까 걱정하지 말고.”심지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당분간 여기서 지내려고. 이사 안 하기로 했어.”“뭐? 무엇 때문에?”“그 사람한테 신세 많이 졌는데, 그냥 이대로 떠나기가 좀 그래서.”그리고 그 사람 말대로 두 사람은 이미 계약서까지 썼고 결과가 어떠하든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전화 맞은편에서 진유진은 한동안 침묵했다.“너 설마 성연신 씨한테 미련이 남은 거야?”그녀의 말에 심지안은 벌컥 화를 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그 사람보다는 나아.”“하하하, 그런 말 하지 마. 그래도 한 기업의 대표잖아. 잘생기고 능력도 있고. 성연신 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미련이 남았다면 그냥 있어. 할아버지도 너한테 잘해주신다며.”“왜 자꾸 그 사람이랑 날 엮는 건데?”예전에 그녀를 따르던 남자들을 보며 진유진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고 그들의 결점들만 콕 끄집어냈었다. “성연신 씨는 능력 있잖아. 내 친구가 부자 사모님 되면 나도 친구 덕 좀 보면서 잘 먹고 잘살려고.”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심지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그만 놀려. 재벌 집 며느리
멈칫하던 주원재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처음에는 누나가 성 대표님과 아는 사이인 줄 몰랐죠. 너무 예뻐서 말로 좀 꼬셔보려고 했는데 이제 알았으니까 더는 그런 태도로 누나를 대할 수는 없죠.”성연신이 아니어도 그의 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서서 그를 혼낼 것이다.주원재의 말에 심지안은 머릿속이 복잡했고 왠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그녀의 추측대로 성연신 때문이었다.한편, 전화를 끊은 주원재는 심연아와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하여 심지안에게 보내주었고 현모양처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심연아가 주원재에게 보낸 노골적인 문자들을 보며 심지안은 갑자기 강우석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심지안은 그저 우연히 심연아가 주원재에게 꼬리를 치는 걸 발견했을 뿐, 심연아에게는 들키지 않은 남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마지막 카톡 내용을 캡처해서 보낸 주원재는 누군가의 명함을 심지안에게 추천했다.“이분이 꽤 유명한 기자인데 누나가 혹시 이것들을 심연아 약혼남에게 보내고 싶지 않으면 이 사람에게 보내세요.”“주 대표님께서 주원재 씨가 이렇게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걸 보면 화내지 않을까요?”“에이, 저는 빠져나오려면 식은 죽 먹기지만 심연아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거예요.”주원재 말이 맞았다. 빠져나오기 힘든 것보다 더 골치 아픈 건 결혼이 무산되고 너무나 많은 이익 관계가 얽혀 있는 강 씨 가문과 심 씨 가문이 더 이상 비즈니스 합작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밤새 뒤척거리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심지안은 일부 캡처 사진을 심연아에게 보냈다.이튿날, 성연신은 약속대로 심지안을 기획팀에 안배했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은 기획팀은 부용 그룹에서 겪었던 기싸움은 전혀 없었다.심지안의 직속 상사는 임신 5개월이 된 임산부였으며 다정한 모습에 모성애까지 넘쳐 보였지만 업무 처리에 있어서 만큼은 깔끔하고 완벽했다.뿐만 아니라 보광 중신은 심지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업무가 수많은 산업 영역을 포함하고 있
한참 뒤, 성연신은 그제야 노트북에서 시선을 돌려 덤덤한 표정으로 문서를 훑어보다가 문서 마지막 페이지에 익숙한 듯 사인을 했다.“딱히 문제가 없네요. 이대로 진행하세요.”고개를 끄덕인 심지안이 손을 뻗어 문서를 건네받은 뒤,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그럼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하지만 그녀가 문을 나서기도 전에 밖에서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버렸고 기세 등등한 채, 화려하게 치장한 한 여인이 높은 힐을 신고 나타났으며 온몸에는 유명 디자이너가 맞춤 제작한 명품들을 걸치고 있었다.여인의 뒤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닌 보디가드 네 명이 떡하니 서있었으며 그 모습에 흠칫 놀란 심지안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성연신, 네 할아버지한테서 네가 이미 결혼했다고 들었어! 가짜지? 거짓말이지?”홍교은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성연신을 쳐다보며 서글픈 표정으로 울먹거렸고 성연신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경고했다.“당장 꺼져.”“싫어! 지금 당장 말해줘! 너 결혼 안 했다고 말하라고!”구석에 있던 심지안은 도화살이 넘치는 성연신의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삐죽거렸고 성연신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표정으로 홍교은을 보며 대답했다.“그래, 말해줄게. 나 결혼했어. 더 물어볼 말이 있어?”그의 말에 홍교은은 번개라도 맞은 듯, 자리에 굳어버렸고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물었다.“어떤 여자야?”홍교은의 질문에 흠칫 놀란 심지안은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홍교은과 불필요한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사무실을 나서려고 움찔거렸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성연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심지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저 여자야.”순식간에 몸이 굳어버린 심지안은 성연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고 홍교은은 그제야 사무실에 조용히 숨어있던 심지안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경계심에 찬 눈빛으로 심지안을 노려보았다.학생처럼 보이는 듯한 옷차림에 20대 초반인 듯 어려 보였으며 청순한 외모에 길게 뻗은
”당장 그 더러운 입 다물지 못해요?”화가 잔뜩 난 홍교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심지안이 성연신의 품에 안겨 있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입을 찢어버렸을 것이다.“말 가려서 해. 내 와이프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성연신은 홍교은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저 여자에게 너무 관대한 거 아니야?”“내가 내 와이프한테 관대한 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분노가 차올라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홍교은은 싸늘하게 굳은 눈빛으로 심지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대체 어떤 더러운 수단으로 성연신을 꼬신 거예요?”홍교은은 어렸을 때부터 일편단심으로 성연신을 좋아했고 성연신은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지만 두 가문 관계가 돈독했기에 그녀에게 매몰차게 대하지는 못했으며 오늘처럼 이렇게 대놓고 그녀 앞에서 다른 여자를 지키는 것도 처음이었다.“수단은 쓴 적이 없어요. 전 단지 연신 씨에게 연락처를 물어봤을 뿐인데 연신 씨가 갑자기 결혼하자고 얘기하더라고요. 아마도 저에게 첫눈에 반했나 봐요.”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심지안은 전혀 화도 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물론 그녀가 먼저 성연신에게 다가간 건 맞지만 딱 한 번뿐이었고 결혼 얘기는 성연신이 먼저 꺼낸 게 분명했다.그러니 심지안이 거짓말을 한 게 전혀 아닌 셈이다.“진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거야?”화가 나서 얼굴까지 일그러진 홍교은은 고개를 돌려 성연신을 쳐다보며 물었고 성연신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들썩거리며 대답했다.“그러니까 이만 꺼져줄래?”성연신의 대답에 숨을 크게 들이마신 홍교은은 폭발하기 직전이었으며 그 모습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몸을 벌벌 떨었다.홍 씨 가문의 아가씨는 불같은 성격으로 여태껏 성격을 참고 이곳에 서있는 건 단순히 성연신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성연신을 꽉 껴안고 있던 심지안도 홍교은이 혹시라도 화를 낼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고 심지안의 걱정을 눈치챈 성연신은 머뭇거리다가 손으로 심지안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면서 말없이 위로해 주었다.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홍교은
”진짜 몰라요?”심연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몰라서 그러니까 말해봐요.”“주원재 씨 아버지와 심지안 관계가 남달라요.”“어떤 점이 남다른 거죠?”“아직도 모르겠어요? 주원재 씨의 아버지가 주원재 씨를 통해 심지안을 알게 된 거 아닌가요?”심연아가 단호하게 묻자 주원재가 이불을 거둬내며 눈을 비볐다.“맞아요.”그의 아버지인 주혁재가 빠른 눈치로 심지안과 성연신이 연인 사이라는 걸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는 끝까지 심지안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집착했을 것이다.하지만 심연아는 주혁재가 심지안을 알게 된 과정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심연아는 끝내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전 심지안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지안이 성격을 잘 알고 있어요. 전에 지안이가 한 늙은 남자의 차에 타는 걸 봤거든요. 지안이 사회관계가 좀 복잡해요.”“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제대로 말해요.”어리둥절한 주원재가 이상한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금관성에서 부유한 가정이라면 나이가 많은 기사 한 명은 다들 있을 것이다.“주원재 씨 아버지랑 심지안 관계가 불순하다고요.”다급해진 심연아가 대놓고 말하자 흠칫하던 주원재는 순간,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역시 여자는 잘 골라서 즐겨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조금 멍청하더라도 눈치는 빨라야 하는 법이다.전화기 너머 주원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타격받았다고 생각한 심연아가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이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주원재를 위로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일단 어떻게든 이 일을 주원재 씨 어머니가 알게 만들어서 어머니가 심지안을 상대하게 해요. 그래도 제 체면을 봐서 지안이를 너무 혼내지는 말아요. 어찌 됐든 제 동생인데 나이가 어려서 이런 잘못을 저지른 거 같아요.”“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주원재는 자신의 여동생조차 모함하는 심연아가 너무 악독해 보였다.“주원재 씨 왜 저에게 욕을 하세요? 아무리 제 동생이 싫어도 그렇지 저까지 미워하는 건 아니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