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채린 씨 말이 맞네요.”정욱이 옆에서 보기에도 고청민이 심지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표님이 심지안과 얽힌 지 5년, 고청민이 심지안을 쫓아다닌 시간도 적지 않지...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한 사람에게 낭비하지 않았을 거니까.’“그러니까 성연신 씨 말대로라면, 제가 하지웅을 꼬시는 것은 오히려 고청민을 도와주는 셈이겠네요?”민채린은 성연신을 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청민이 세움 그룹을 하씨 집안에 넘길 리는 없었다. 세움 그룹이 성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 조금 일찍 돌려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리 고청민과 의사를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만약 고청민이 허락하면 그녀도 동의할 의향이 있었다.“몇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성연신은 민채린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민채린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유진과 정욱도 일을 보러 떠났다.시간이 지나 성우주의 방과 시간이 되었고, 그는 방과 후 활동을 마친 후 저녁 8시 반쯤 연구소에 도착할 예정이었다.정말로, 8시 반이 막 지나자마자, 치료실 문이 열리고 작은 그림자가 조용히 들어왔다.성우주는 귀족 학교의 교복을 입고, 목에는 파란 넥타이를 맸으며, 얼굴은 귀엽고 앳된 모습으로 마치 드라마에서 나온 어린 스타 같았다.그는 심지안이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졌지만,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심지안의 링거 맞은 손을 잡았다.“엄마, 우주 왔어요. 아빠가 곧 깨어날 거라고 했어요. 제가 ‘호’ 하고 아픈 곳에 마법의 바람을 불어줄게요, 그러면 안 아플 거예요.”맑은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지만, 애써 강한 척하며 너무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엄마가 꿈속에서 울음 섞인 소리를 듣고 걱정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었다.성연신은 가슴이 찌릿했고, 큰 손으로 성우주의 작은 머리
“아빠가 엄마에게 해 준 것처럼, 나도 할 수 있어요.”성우주는 지난 5년 동안 엄마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채워주고 싶어 했다. 만약 심지안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감동해서 울컥했을 것이다.분명 심지안이 엄마로서 우주에게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해야 할 일이었지만, 우주는 너무나도 어른스럽고 이해심이 깊어서 자신이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성우주를 '이해심이 깊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성연신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연구소의 규정에 따르면 병실마다 밤에는 단 한 명의 보호자만 상주할 수 있다고 해. 아빠는 엄마를 도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음식도 먹일 수 있지만, 우주는 아직 힘이 너무 약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없잖아. 억지로 하려다 보면 엄마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성우주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침대에 누워있는 심지안을 바라보며 결국 타협했다.“그러면 아빠가 꼭 엄마를 잘 돌봐주세요. 저는 내일 다시 올게요.”성연신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내일? 지안 씨가 깨어난다면 이 녀석은 헛걸음하게 될 거야.'그러나 곧 심지안에게 ‘자극적인’ 행동해야 그녀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된가는 생각에 성연신의 눈빛은 더 깊어졌다. 자극적이면서도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다.오래 생각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성연신은 병실 문을 잘 닫고 심지안을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심지안이 과거에 특정한 행동에 큰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했다...큰 손을 천천히 그녀의 엉덩이에 올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지안 씨, 미안해요...”말을 마치고 손을 높이 들었다가 강하게 내리쳤다.“짝!”그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심지안은 예쁜 얼굴을 갑자기 찌푸리고, 입술을 불만스럽게 오므렸다. 비록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그녀의 강한 불만이 느껴졌다.성연신은 효과가 있음을 보고 내심 기뻤다. 이어서 큰 손으로 심지안의 엉덩
심지안은 원래 성연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두근 뛰었다. 특히 방금 두 사람이 그렇게 친밀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참, 정말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인제 와서 발뺌하는 건, 마치 다 해놓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여우 같았다!“에헴... 저는 괜찮아요.”심지안은 불편한 듯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땀이 좀 나서 몸이 끈적끈적할 뿐이었다.성연신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불을 잘 덮어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엄 교수를 불러올 테니까, 우선 움직이지 말고 좀 쉬어요.”“네”심지안은 고분고분 대답하고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진료실 안은 따뜻한 조명의 빛이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었고,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은 부드럽고 편안하며, 약간의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매우 익숙한 냄새였다.심지안은 이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의 시트와 베개가 모두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성씨 가문의 주방에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아... 잠깐, 이거 성연신이 쓰던 거잖아.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집에서 이불까지 가져온 거야?’심지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연신 씨가 언제부터 이렇게 세심했던 거지?’“심지안 씨, 대표님이 연구소와 병원이 비슷하다고 하시면서, 기본 제공되는 이불이 깨끗하지 않고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해서 특별히 집에서 가져오라고 하셨어요.”정욱이 언제 문 앞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설명해 주었다.“대표님께서는 지안 씨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안 된다고 걱정하셨어요. 지안 씨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심지안은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저에게 진 빚이 있으니, 잘해주는 게 당연하죠.”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맞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 지안 씨 곁
심지안은 눈을 깜빡였다.“당연히 제 본가인 성씨 가문으로 가죠.”성연신의 눈에는 잠시 어둠이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그는 심지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요.”‘그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건 당연해. 그때 난 정말 나빴으니까.’“기사님께서 운전해 주면 돼요.”성연신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185cm나 되는 훤칠한 키와 태평양같이 넓은 어깨는 심지안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성연신이 내려다보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운전 실력을 따라올 수 있겠어?”어느 때나 어디서나 성연신은 심지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녀의 생명은 그의 생명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까지 헌신할 수 없었다.심지안은 그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무언의 웃음을 지었다....성씨 가문의 장원.성동철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성연신과 심지안은 함께 들어가 이틀 동안 엄 교수를 찾아가 최면술에 대해 치료받은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성동철은 얘기를 들으면서 미간을 찌푸렸고, 심지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겉으로는 담담하게 몇 마디 했지만, 그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후회가 내포되어 있었다.‘고청민... 내가 잘못 키웠어.’성동철은 스스로가 잘못 키운 것을 탓하며, 모든 에너지를 회사 경영에 쏟느라 사춘기 시기의 감정적 결핍을 간과했던 것을 후회했다.“지안아, 정말 고생 많았구나. 할아버지가 널 지켜주지 못했어.”수많은 말이 짧은 몇 마디로 요약되었지만, 심지안만이 할아버지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미안해하고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일부러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두 팔을 벌리고 성동철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치맛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매 순간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보세요,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성동철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고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됐다, 아무 일
심지안은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할아버지...”“어서 타, 같이 가자.”성동철은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심지안은 일단 의문을 잠시 뒤로 미루고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차 안은 고요했다. 그녀는 여러 번 할아버지에게 성연신과 어떻게 한 차를 타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 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하씨 집안에 도착하기 10분 전, 성동철은 그동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회색빛 감도는 눈동자에는 한 줄기의 맑은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이 녀석과 재결합할 거야?”“아니에요.”심지안은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해명했다.“재결합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봤어. 이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다 허락할 거야.”성동철은 나이가 들었기에 휴대폰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가끔 인터넷을 통해 제경에서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곤 했다.성연신과 심지안이 재결합을 공식 발표하면서 인터넷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들의 합사진이 대대적으로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진을 커플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소식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웠다.하지만 성동철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 꼭 자신이 계획한 대로만가는 것이 최선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예로부터 딸을 가진 집안에서는 딸이 잘못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 그의 딸이 바로 그 생생한 예였다. 그래서 그는 외손녀가 남자를 고르는 문제를 신중하게 대하길 바랐고 평생의 행복을 망치지 않기를 바랐다.특히 심지안과 성연신의 이전 관계가 이미 산산조각이 났었기 때문에, 그는 심지안을 백지와도 같은 고청민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무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동철은 고청민을 너무 신뢰했고, 고청민의 성장 과정을 간과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을 초래했다.그도 신이 아니기에, 자녀의 연애 문제에 있어서 지
하지원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진지하게 답례품을 나누어 주며,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예의 바르고 다정하게 대했다. 들려오는 축복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녀 같은 수줍은 모습을 보였다.하지원은 성동철을 보자 매우 공손하게 그를 상석에 모셨다. 심지안과 성연신은 비교적 평범한 대우였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무시하지는 않았다.성동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청민은 어디 있어요?”“위층에서 쉬고 있습니다.”하지원은 숨기지 않았다.“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내려오지 않겠다고 했어요.”성연신은 순간 민채린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사실 관심 없었다. 하지만 심지안은 진실을 알아야 했고, 성동철에게 알려야 했다.성동철의 얼굴색이 변했다.“많이 아픈 거예요?”하지원이 망설이며 대답했다.“네, 그런데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청민 선배가 직접 할아버지께 말하고 싶어 해요.”성동철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러자 심지안이 위로하며 말했다.“할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가 우리를 초대한 만큼, 분명히 만나려고 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그래.”연회장의 조명은 부드러운 빛을 띠며 그녀를 비추었고, 마치 온몸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작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고청민은 2층의 유리창을 통해 심지안을 바라보며 이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오래도록 멈춰있던 그의 심장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심코 창백한 손가락을 꼬집었다.‘역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마음을 숨길 수 없네, 심장이 다시 뛰잖아...’방 안을 계속해서 걸어 다니던 하지웅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로 세움 그룹을 전부 돌려줄 거야?”“응.”“그러면 대체 왜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운 거야? 나까지 끌어들여서 말이야, 결국 헛수고잖아!”하지웅은 고청민에게 다가가 눈빛에 독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서두르지 않는 그의 태도에는 모든 존재에 대한 경멸이 느껴졌다.하지웅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청민의 옷깃을 움켜쥐고 세게 조였고, 전례 없는 모욕감에 그만 참지 못하고 다른 손을 들어 거칠게 주먹을 날렸다.여전히 학창 시절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고청민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모든 과목에서 1등을 차지했고, 덕분에 하지웅은 아무리 노력해도 2등이었다. 분명 한 개 등급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너무 다른 대우를 받았고, 결국 그의 여동생조차도 고청민을 좋아하게 되었다.졸업 후 하지웅 일가는 해외로 이주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풀릴 때쯤, 하지원의 병세가 심각해져 치료받기 위해 귀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때마침 고청민이 찾아와 협조를 약속하면 결혼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하지웅은 그의 제안에 응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동의했다.“왜 그렇게 화를 내?”고청민은 무심하게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애초에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았어야지, 내가 두 손으로 세움 주얼리를 떠먹여 줘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는 주제에...”하지웅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닥쳐!”고청민은 말을 이어가지 않고 은색 카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여기 7천만 원 들어있어.”“고작 이 돈으로 나를 떼어내려고?”“생각 좀 해봐, 난 사람한테 빚지고 사는 성격이 아니야. 네가 가업을 전부 팔았을 때도 거의 이 정도였을 뿐이야. 거기에 10억을 더 얹어줬으니 만족해. 하지원은...”말하는 내내 고청민의 눈빛에서 아무런 감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지원이는 소원대로 나랑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겠어?”“지원이한테 잘해주지 않을 거잖아!”하지웅은 고청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너야말로 왜 네 것도 아닌 것에 집착해야 해? 성동철에게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면
심지안은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아니요. 가족들과 함께 왔어요.”그녀의 도자기 같이 빛나는 피부와 초롱초롱한 눈동자,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본 남자는 흥분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그녀에게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다른 뜻이 아니라 그냥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그는 하씨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 주로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오늘은 하지원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잠깐 귀국했던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외국 여자들과의 자유분방한 일상에 질려 국내에서 이성 친구를 사귈 목적을 갖고 오기도 했다.“저는 남편이 있습니다.”심지안은 성연신을 방패 삼아 솔직하게 말했다.능글맞은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하룻밤만 나랑 같이 있어 주면 4천만 원을 줄게요. 남편이 모르게 해줄 거예요.”“4천만 원?”심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그 돈으로는 제 속눈썹 한 가닥 살 수 없을 텐데요?”“알았어요. 싫으면 싫은 거지, 왜 잘난 척이에요? 참나...”능글맞은 남자의 눈에는 하지웅이 하씨 가문에서 가장 능력 있고 부유한 사람으로 보였고, 하지웅 주변 친척들의 재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심지안과 가족들이 왔다는 것은 그 가족들도 하씨 가문을 알고 있다는 뜻이니 친척일 확률이 높았다.“잘난 척한 거 아닌데요?”심지안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야말로, 돈도 없는데 왜 허세를 떨어요?”능글맞은 남자는 4천만 원을 당장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 돈으로 고작 하룻밤을 보내는 건 아깝다는 생각에 얼굴을 찡그렸다.“지안아, 오랜만이야!”낯설지만 어렴풋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심지안은 그 목소리를 찾아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세 글자를 뱉어냈다.“강우석?”강우석은 건너편에서 심지안을 발견하고 다가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도 하지웅 씨를 알아?”“어... 좀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하나? 넌? 하지웅 씨와 어떻게 알아?”“같이 사업을 했었던 사업 파트너였어.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