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에 평정과 함께 엄숙함이 깃들었다.“소환, 나는 동의할 수 없소.”“알고 있소. 자네가 양연삭을 찾고 싶은 마음이 급하다는 것을 말이오. 하지만 자네는 자네의 동료들을 믿어야 하오. 범진과 그들이 지금 북연에서 양연삭의 흔적을 찾고 있지 않소? 염추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오.”“단지 양연삭을 끌어내기 위해 염추의 마공이 점점 더 강해지게 놔둔다면,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클 것이오.”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억제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더군다나, 그녀의 목숨을 살려둔다면, 그녀에게 참혹하게 희생당한 무림맹 동료들을 볼 면목이 있겠소? 우리가 그녀를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소?”봉구안은 그의 말을 다 들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죽은 사람들이오.”“염추의 만간성법은 이미 2단계에 돌입하였소. 앞으로는 더 이상 사람을 붙잡아 수련할 필요가 없소.”동방세는 그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늦지 않았소. 염추를 죽이기만 한다면 늦었다고 말할 수 없소.”봉구안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진정하시오.내가 염추를 죽이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아니오.”“다만, 잠시 그녀를 남겨둬야 하오. 지금 그녀를 죽인다 한들, 이미 희생된 사람들을 되살릴 수는 없소.”“그녀를 죽이기 전에, 그녀가 가진 모든 가치를 다 쓰는 것이 왜 나쁘겠소?”동방세는 잠시 평정을 되찾고 물었다.“자네는 어떻게 하려는 것이오?”봉구안은 가늘고 깊은 눈빛으로 대답했다.“염추는 자신의 출생을 모르오. 그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연삭을 죽이고자 하오.”“지금 자네와 내가 힘을 합친다 해도, 양연삭을 이길 수 없소. 그렇다면, 염추를 끌어들여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소?”동방세는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자네는 그들 부녀가 서로를 죽이게 하려는 것이오? 소환, 자넨 정말 독하구려.”봉구안은 이어
오후, 봉구안 일행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염추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가는 길에 동방세가 날짜를 헤아리며 말했다."염추를 당장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혼자 그 자를 만나 양연삭을 없앨 큰 계책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그대의 여동생이 11월에 시집을 간다던데, 지금이 벌써 10월 말이니 그대는 북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오?"봉구안의 여동생 장미의 혼례는 11월 말로 예정되어 있었고,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동방세의 말대로, 염추의 일은 굳이 자신이 함께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그때, 어둠 속을 자유롭게 오가는 은육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봉구안에게 상기시켰다."마마, 폐하께서 먼저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마마의 혼례복도 서둘러 제작 중이니, 황성으로 돌아가 치수를 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동방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지었다."소환, 참으로 바쁘구려. 한쪽은 북쪽이고, 한쪽은 남쪽이라니, 이제 선택은 그대 몫이오."봉구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우선 북쪽으로 가겠소."이것은 장미의 대혼례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완부옥 일행이 북연에서 양연삭의 행방을 조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그들과 빠르게 합류하려면 북방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혼례복의 치수라면, 자신이 직접 잴 수도 있고, 치수를 적어 소욱에게 전달하면 될 일이었다. 꼭 황성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동방세는 그녀의 대의를 중시하는 결단에 감탄하며 말했다."소환, 그대의 혼례는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어 치르는 듯하구려.""폐하께서 그대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소."봉구안은 말 위로 올라타며 담담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양연삭을 죽이고 나서야 마음 편히 혼례를 치를 수 있소.""그렇지 않으면, 대혼례조차 평온하지 않을 것이오."지금의 양연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와 같았다.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변수를 만나기 마련이었다.그날 밤, 은육이 다급하게 봉
쾅!그날 밤, 관군들이 모용란의 저택을 포위하고 대문을 부수며 들이닥쳤다.그 시각 모용란은 막 쉬려던 참이라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소리쳤다.“감히 민가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어디서 이런 짓을!”그러나 관군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말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가마에 실었다.그렇게 그녀는 황궁으로 압송되어 어전 안으로 끌려갔다.어전 안에는 서왕도 있었다.모용란은 손이 뒤로 묶인 채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되었고,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은 두려움과 억울함으로 가득했다.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폐하…”황제 소욱은 책상 뒤에 앉아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마치 살신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모용란, 소군주를 사사로운 복수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너였느냐?”모용란은 즉각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폐하, 오해십니다. 저는 줄곧 저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서왕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마마, 이제 그만 죄를 인정하십시오.”모용란은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저 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폐하, 저는 소군주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그녀의 시선은 서왕에게 고정되었지만, 서왕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혹시 제가 모든 증거들을 다 없애버렸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그리도 저를 믿으셨습니까?”순간 모용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서왕은 소욱을 향해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영비마마는 실로 독한 심보를 가졌습니다. 폐하께서 소아를 지나치게 사랑하심을 질투하여 사람을 사주하여…”“전하! 지금 저를 모함하려 하는 것입니까!”모용란은 더 이상 얌전하게 굴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서왕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소욱은 그녀의 날뛰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진한길에게 명령했다.“저 입을 막아라!”“예!”관군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을 틀어막자, 모
서왕은 오늘 모용란과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임했다.그는 그녀가 정신이 나간 채로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먼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폐하, 마마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은 신입니다!”“처음 마마께서 공주마마를 해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마마의 폐하에 대한 집착이 이미 광기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습니다.”“마마가 분명 폐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해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찌됐든 이를 막아야 했습니다.”“우리 삼형제의 오래된 정을 생각하고, 의원이 그저 정신 질환이 있을 뿐이며 치료하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기에…”“저는 마마를 제 저택에 감금한 후 매일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경계를 풀었지만, 결국 제가 외출한 틈을 타 의원을 유혹해 자신의 족쇄를 풀게 했고, 의원과 호위병들을 다치게 한 후 도망쳤습니다.”서왕의 설명을 들은 소욱은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다.그는 서왕이 이렇게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러나 모용란이 저지른 끔찍한 짓을 생각하면, 서왕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소욱은 모용란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가 소아에게 저지른 일이 얼마나 잔인한지!모용란은 그의 눈에 비친 살기를 감지하고, 눈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폐하! 저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어찌 서왕과 복령의 말만 믿으십니까?”“제가 폐하께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폐하, 제발 믿어주세요… 전 정말 그런 적 없습니다!”소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낯설다는 생각만이 들었다.예전에 정의롭고 올곧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잔혹하고 냉혈한 인물만 남아 있는가?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그는 스스로 판단할 것이었다.더구나, 차라리 잘못된 사람을 처벌하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놓쳐선 안
소군주는 병세가 위중하여, 새벽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봉구안은 말이 많지 않았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소욱에게 계획을 전했다.“염추를 이용해 양연석을 대적하는 일은 동방세 혼자면 충분합니다.”“장미는 곧 혼인을 앞두고 있어, 저는 북방으로 가서 장미의 혼례를 준비할 예정입니다.”“그전에 천지설산에 잠시 들를 생각입니다.”천지설산은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소욱은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짐이 이미 사람을 보내 약재를 가져오도록 했다…”봉구안은 능숙한 태도로 그를 설득하며 말했다.“천지설산은 제가 이전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실 길이 어렵지 않습니다.”“그저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눈보라에 갇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뿐입니다.”“제 체력이 어떤지는 폐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 체력이라는 말에, 소욱은 잠시 딴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지금은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이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즉시 허리에 검을 차고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따라 일어나 그녀의 팔을 잡았다.“잠깐 기다려라. 어찌 널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있겠느냐.”“절대 그럴 순 없다…”봉구안은 그를 돌아보며 굳건한 눈빛을 보냈다.“폐하께서 제게 언제나 믿음을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소욱의 눈매가 살짝 차가워졌다.“그건 다르다.”그들은 이제 곧 혼인을 앞두고 있었고, 그는 그녀가 어떤 위험도 겪는 것을 원치 않았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폐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과연 확실히 자욱화를 구해올 수 있다고 보십니까?”“폐하, 말씀은 안 하셔도, 소군주에 대한 죄책감을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마치 제가 장미를 위해 죄책감을 느꼈던 것처럼요. 제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교먹이 그만 장미를 해치고 말았습니다.”“폐하께서 지금 느끼시는 마음을 제가 깊이 이해합니
자욱화는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자생하며, 그것을 채집하려면 특히 조심해야 했다.길을 안내한 사냥꾼은 봉구안에게 특히 눈사태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눈사태가 나면 모두 끝장입니다.”오백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그의 목은 처음엔 얼어붙는 듯 차가웠고, 이후에는 불타는 듯 뜨거웠다.광활한 설산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봉구안도 인간이었다.이틀간의 등반 끝에 그녀의 체력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눈썹 위에는 서릿발이 서렸고, 눈앞은 점점 더 흐려졌다.설산의 정상,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은 칼날 같았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치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다.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리 보이는 자욱화를 바라보며 봉구안은 몸이 떨리고 손이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하지만 소군주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떠올리며, 그녀는 결연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놀라운 의지가 이 순간 터져 나왔다.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하늘은 그녀를 돕지 않았다.저승의 문턱에서 생명을 빼앗으려는 그녀에게 하늘은 분노로 응수했다.정상에 강풍이 몰아치며 눈보라가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그 바람은 마치 파도가 물고기를 휩쓸듯이 그녀를 흔들었다.봉구안은 눈 속에서 휘청거리며, 몸이 계속 뒤로 밀려났다.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그녀는 눈을 찔러대는 눈발 속에서 버텼다.귀가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바람의 울부짖음이었다.마치 설산이 자욱화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봉구안은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손에 두툼한 천을 감았음에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오백은 그런 봉구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저렸다.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체력이 바닥난 그는 몇 번을 시도해도 다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길을 안내하던 사냥꾼이 오백을 붙잡으며 손짓으로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그때서야 오
발 아래, 시체가 널려 있었다.호위병들은 산에 올라 봉구안을 먼저 내려보냈지만,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그들은 봉구안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모두 자객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자객들도 절반 이상 죽은 상황이었다.남은 스무 명이 봉구안과 오백을 포위했다.봉구안의 눈앞이 겹쳐 보이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 와중에 오백의 절규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소장군, 어서 도망가세요!”봉구안은 뼈저리게 느꼈다.그들은 도망칠 수 없었다.아니, 아마 처음부터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을 것이다.그녀를 천지설산으로 유인하고, 체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 암살하려는 계획…봉구안의 호흡이 무거워졌다.칼을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겨우 지탱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똑, 똑…선홍빛 피가 그녀의 입에서 스며 나와 떨어졌다.“소장군!” 오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남아 있는 자객들도 다소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그들은 이 소환이라는 여인이 이렇게 죽이기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쾅…설산 높은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고, 곧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눈사태다!”눈사태의 속도는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마치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듯, 거대한 눈덩이가 굴러내려오며 점점 커졌다.솟구치는 눈이 마치 안개처럼, 또 광풍과 폭우처럼 몰아쳤고, 거대한 흰 짐승처럼 빠르게 달려와 금세 사람들을 삼키고 매장시킬 기세였다.자객들이 눈사태에 정신을 뺏긴 틈을 타, 오백은 봉구안을 끌고 달아나려 했지만, 손바닥에 갑자기 옥패 하나가 쥐어졌다.봉구안이 빠른 말투로 그에게 당부했다.“그 안에 기밀이 있다. 폐하께 꼭 전해주렴! 어서 도망쳐…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오백은 그녀의 명령을 무조건 따랐다.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달렸고, 왜 따로 도망쳐야 하는지
오백은 갑자기 달려가 소욱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폐하, 소장군은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분명 살아계실 거예요…”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소장군은 알았다.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그는 분명 남았을 터였다.그녀는 그가 빨리 떠나도록 하기 위해 옥패에 기밀이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오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의 본능적인 복종과 책임이었다.소장군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그가 이렇게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소욱은 무자비하게 그를 차버리며,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얼굴은 겨울의 차가운 냉기보다 더 차갑고, 살기가 가득했다.“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해.”그는 아직 그녀와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리가 없다!그는 그녀를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천옥.모용란은 건초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며,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마 대인이 그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전했다.“마마, 계획은 성공했습니다.”“천지설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소환이 죽었다 합니다.”모용란은 그 말을 듣자, 텅 빈 눈빛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정말 죽었다고?”마 대인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눈사태입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소환을 찾으러 궁을 떠났습니다.”모용란의 표정이 급격히 놀라움에 가득 차 올랐다.“폐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셨다고?!”마 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모용란은 곧바로 일어섰다.그녀는 그 감옥 문을 붙잡고, 소리쳤다.“폐하께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마 대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마마, 저는 오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모용란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감옥 문을 잡고, 마 대인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어서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
황제는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무백관을 훑었다.“과인이 황성을 비운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대들은 더욱 해이해졌구나.”문무백관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정에서 명하여 각지에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 했거늘. 과인이 묻겠다. 너희는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대부분의 신하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사건 수사는 지방 관아의 일 아닌가.그들은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그중 몇몇 관료만이 그나마 성의를 보이며 대답했다.“폐하, 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약쟁이 사건은 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 천용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약쟁이로 구성된 군단이 실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폐하,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동산국이 비밀리에 약쟁이를 양성하고 있으며, 병력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약쟁이 독도 동산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소욱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약쟁이 사건은 백성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도 관련된 일이다. 너희 가문의 안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느냐.”꾸짖음을 들은 관료들은 줄줄이 엎드려 스스로 죄를 청했다.“부끄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소욱은 그들을 곧장 벌하지는 않았다.대신 명을 내렸다.“과인이 너희들에게 직접 수사하라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약쟁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다면 스스로 고하라. 훗날 과인이 직접 밝혀낸다면 그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며 구족이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그중 몇몇은 속삭였다.“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봉구안이 약쟁이의 본거지가 황성에 있을 것이라 단언한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제 전역의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설명했다.“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야 그들도 허점을 보입니다.”“이번에 문제가 생긴 도시들. 그 위치와 거리로 계산해 보면, 명령이 어디에서 내려졌는지 역산할 수 있어요.”지도 위에는 이미 여러 곳의 약쟁이 거점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최근 발생한 약쟁이의 운송 경로와 이동 시간, 중간에서 방향을 바꾼 흔적까지 더하면 본거지가 어느 지역인지 대략 짚어낼 수 있었다.이런 판단력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봉구안은 시간과 거리의 계산만으로도 적의 주둔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그래야 곧장 본진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이라니… 정말 그곳인가.”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죽산진을 들렸다.황성으로 돌아가기 전 소탁을 보기 위함이었다.보아하니 소탁은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어 실명에 위험까지 있었다.소욱은 그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맡기기로 했다.이 작은 죽산진에서는 명의라 할 만한 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자객의 습격을 떠올린 소탁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형인 소욱을 걱정하며 말했다.“약쟁이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선 이번 여정 내내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결국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자신의 상처보다 제왕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봉구안은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소탁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그녀가 물었다.“열무신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소탁은 고개를 저었다.“그 자객을 쫓아 한참을 달아났습니다. 호위들도 따라잡지 못했지요. 혼자서 움직였으니, 살아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도중에 남긴 흔적이라도 있다면 좋겠습니다.”봉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그 닭장수들은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그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 닭들을 거래한 뒤, 그걸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습니다.”“누가 높은 값을 제시하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열무신은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들이 실토한 이상 그는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마침 소탁과 마주쳤다.소탁은 내내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소탁은 성품이 부드럽고 인자했다.이런 고문이나 심문 같은 일은 애초에 잘하지 못했다.황제가 곁에 붙여준 암위들도 제법 실력은 있었지만, 닭장수들을 떨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열무신은 달랐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지옥불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맑은 날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존재감 하나로 공포를 자아냈다.소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저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군요.”열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손에 묻은 피를 닦고, 수건을 바닥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잔챙이들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닭장수 몇 명을 잡아봤자 소용없었다.열무신의 마음엔 짙은 짜증이 피어올랐다.약쟁이의 수법은 치밀하고 조심스러웠다.겹겹이 함정을 깔아놓은 듯,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둡게 눈을 떴다.속이 타들어갔고, 분노를 쏟아낼 데도 없었다.소탁은 그의 좌절과 혼란을 읽고 조심스레 말했다.“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 집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고 길을 나서시지요.”그의 말 뜻은, 강주로 돌아가 황제와 황후에게 상황을 전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권하는 것처럼 들렸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이런 와중에도 밥이 넘어간단 말입니까.”소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제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