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 시체가 널려 있었다.호위병들은 산에 올라 봉구안을 먼저 내려보냈지만,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그들은 봉구안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모두 자객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자객들도 절반 이상 죽은 상황이었다.남은 스무 명이 봉구안과 오백을 포위했다.봉구안의 눈앞이 겹쳐 보이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 와중에 오백의 절규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소장군, 어서 도망가세요!”봉구안은 뼈저리게 느꼈다.그들은 도망칠 수 없었다.아니, 아마 처음부터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을 것이다.그녀를 천지설산으로 유인하고, 체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 암살하려는 계획…봉구안의 호흡이 무거워졌다.칼을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겨우 지탱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똑, 똑…선홍빛 피가 그녀의 입에서 스며 나와 떨어졌다.“소장군!” 오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남아 있는 자객들도 다소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그들은 이 소환이라는 여인이 이렇게 죽이기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쾅…설산 높은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고, 곧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눈사태다!”눈사태의 속도는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마치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듯, 거대한 눈덩이가 굴러내려오며 점점 커졌다.솟구치는 눈이 마치 안개처럼, 또 광풍과 폭우처럼 몰아쳤고, 거대한 흰 짐승처럼 빠르게 달려와 금세 사람들을 삼키고 매장시킬 기세였다.자객들이 눈사태에 정신을 뺏긴 틈을 타, 오백은 봉구안을 끌고 달아나려 했지만, 손바닥에 갑자기 옥패 하나가 쥐어졌다.봉구안이 빠른 말투로 그에게 당부했다.“그 안에 기밀이 있다. 폐하께 꼭 전해주렴! 어서 도망쳐…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오백은 그녀의 명령을 무조건 따랐다.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달렸고, 왜 따로 도망쳐야 하는지
오백은 갑자기 달려가 소욱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폐하, 소장군은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분명 살아계실 거예요…”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소장군은 알았다.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그는 분명 남았을 터였다.그녀는 그가 빨리 떠나도록 하기 위해 옥패에 기밀이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오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의 본능적인 복종과 책임이었다.소장군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그가 이렇게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소욱은 무자비하게 그를 차버리며,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얼굴은 겨울의 차가운 냉기보다 더 차갑고, 살기가 가득했다.“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해.”그는 아직 그녀와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리가 없다!그는 그녀를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천옥.모용란은 건초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며,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마 대인이 그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전했다.“마마, 계획은 성공했습니다.”“천지설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소환이 죽었다 합니다.”모용란은 그 말을 듣자, 텅 빈 눈빛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정말 죽었다고?”마 대인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눈사태입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소환을 찾으러 궁을 떠났습니다.”모용란의 표정이 급격히 놀라움에 가득 차 올랐다.“폐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셨다고?!”마 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모용란은 곧바로 일어섰다.그녀는 그 감옥 문을 붙잡고, 소리쳤다.“폐하께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마 대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마마, 저는 오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모용란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감옥 문을 잡고, 마 대인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어서
천지설산은 한 달 동안 봉쇄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제의 친위병들이 매복에 걸려 모두 사망했으며, 친히 나서 충성스러운 시체를 찾고, 충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썼다고 전해졌다…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 다 지나 있었다.천지설산의 눈은 더욱 두텁게 덮였다.왕이 없는 나라는 하루도 있을 수 없었다.바로 그때, 서왕이 황제를 찾아왔다.진한길은 서왕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제발 폐하를 설득해 주십시오!”서왕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만약 죽은 사람들이 그저 호위병들뿐이라면, 황제께서 이렇게 모든 일을 내팽개쳐두고 국사를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진한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소환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눈사태로 인해 죽은 사람은 바로 소환이었던 것이다.서왕은 하얗게 덮인 설산을 바라보며, 온화한 눈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진한길에게 물었다.“폐하께서는 정녕 소환을 사랑한 것이냐?”서왕과 황제는 깊은 정을 나눈 사이었다. 진한길은 잠시 고민한 후, 사실대로 대답했다.“전하, 사실 소환은 여인입니다. 폐하께서는 소환을 후궁으로 세울 계획이었습니다.”“소환이 천지설산에 온 이유는, 그곳에서 자주 피는 자욱화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간단한 몇 마디가 서왕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첫째는 그토록 무서운 ‘천영귀살’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으며, 둘째는 폐하께서 소환을 후궁으로 세우려 했다는 사실이었다.폐하께서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니…서왕은 멀리 바라보며, 눈 속에 이해의 빛을 띠우고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진한길은 천막을 가리켰다.“폐하께서는 어젯밤에 밤새 눈을 파헤쳤고, 지금은 잠시 쉬고 계십니다.”최근 황제는 소환을 찾기 위해 낮에는 쉴 틈 없이,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몸이 견딜 수 없을 터였다!진한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상황
서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소욱은 먼저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의는 그가 풍한에 걸려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반드시 충분히 치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그래서 서왕은 황제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사이, 그를 강제로 궁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천지설산은 매우 추워서, 황제가 오래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황제가 떠나고 나서, 수백 명의 호위병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진한길은 그들에게 지시하며 말했다.“소환의 시체를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라.”그는 이렇게 눈이 쌓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오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 진한길! 당장 꺼져!”진한길은 오백의 기분을 이해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황제의 친위대로서 황제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그는 더 이상 황제가 시신을 찾으려다 병을 앓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황제가 떠난 후, 텐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황제가 강제로 떠나자, 오백은 눈앞이 아득해졌다.그는 눈 속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눈산을 바라보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다.“아…” 그는 주먹을 눈 속에 내리쳤고, 그 상태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었다.“계속 사람을 찾아라.” 앞에서 은육의 낮고 무게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육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은육은 오백에게 무표정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는 오백이 소환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자욱화를 가지고 돌아가다가 한 무리의 습격을 받아, 오백보다 더 늦게 돌아왔다. 그는 소환의 부탁도 황제의 신뢰도 저버린 것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랐다면, 황제에게 상황을 미리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텐데 말이다……봉구안의 사건은 오백이 이미 북방으로 전신을 보냈다.현재
황성, 궁내.어의의 침과 약을 맞은 뒤, 소욱의 몸은 점차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기력이 매우 쇠약해졌다. 마치 영혼을 잃은 듯, 정기와 기운이 사라진 모습이었다.누가 봐도, 황제의 이번 병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자녕궁.태후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황상은 며칠 전 급히 궁을 나섰는데, 어찌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이냐?”계 상궁은 알지 못했다.녕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고모님, 폐하께서는 자식도 없으시니, 만약 정말로…”“입을 다물어라!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태후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고모님, 제가 듣기 어려운 말을 한 것 알지만, 폐하께서 지금 이 상황이라면 저희는 대비를 해야 합니다.”“네 말이 맞다.” 장공주가 밖에서 걸어 들어오면서 말이 먼저 들렸다.태후는 마치 의지가 생긴 듯, 긴장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공주 네가 왔구나!”장공주는 자리에 앉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전조의 소문이 들끓고, 여러 세력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어마마마, 저희는 이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물고기처럼 되지 않겠지만, 대비는 미리 해둬야하지 않겠습니까?”태후는 장공주를 보고, 다시 한 번 녕비를 바라보았다.“너희들… 아이고! 황상은 그저 풍한에 걸린 것이지, 대란을 일으킬 일은 없다.”장공주는 고개를 저었다.“어마마마, 풍한에 걸린 것도 사실이고, 정신을 잃은 것도 사실이라 들었습니다.”“폐하께서는 그런 상태로 미친 듯이 행동하시는데, 한 순간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방금 자진궁에서 왔는데, 황제께서 미친 듯이 사람을 죽이겠다 하였습니다.”“심지어, 모용란도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또, 심지어… 할마마마를 궁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무슨 말이냐?!” 태후는 마지막 말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장공주는 태후의 손을 잡고 말했다.“어마마마, 저도 무섭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마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성, 궁내.어의의 침과 약을 맞은 뒤, 소욱의 몸은 점차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기력이 매우 쇠약해졌다. 마치 영혼을 잃은 듯, 정기와 기운이 사라진 모습이었다.누가 봐도, 황제의 이번 병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자녕궁.태후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황상은 며칠 전 급히 궁을 나섰는데, 어찌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이냐?”계 상궁은 알지 못했다.녕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고모님, 폐하께서는 자식도 없으시니, 만약 정말로…”“입을 다물어라!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태후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고모님, 제가 듣기 어려운 말을 한 것 알지만, 폐하께서 지금 이 상황이라면 저희는 대비를 해야 합니다.”“네 말이 맞다.” 장공주가 밖에서 걸어 들어오면서 말이 먼저 들렸다.태후는 마치 의지가 생긴 듯, 긴장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공주 네가 왔구나!”장공주는 자리에 앉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전조의 소문이 들끓고, 여러 세력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어마마마, 저희는 이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물고기처럼 되지 않겠지만, 대비는 미리 해둬야하지 않겠습니까?”태후는 장공주를 보고, 다시 한 번 녕비를 바라보았다.“너희들… 아이고! 황상은 그저 풍한에 걸린 것이지, 대란을 일으킬 일은 없다.”장공주는 고개를 저었다.“어마마마, 풍한에 걸린 것도 사실이고, 정신을 잃은 것도 사실이라 들었습니다.”“폐하께서는 그런 상태로 미친 듯이 행동하시는데, 한 순간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방금 자진궁에서 왔는데, 황제께서 미친 듯이 사람을 죽이겠다 하였습니다.”“심지어, 모용란도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또, 심지어… 할마마마를 궁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무슨 말이냐?!” 태후는 마지막 말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장공주는 태후의 손을 잡고 말했다.“어마마마, 저도 무섭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마
서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소욱은 먼저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의는 그가 풍한에 걸려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반드시 충분히 치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그래서 서왕은 황제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사이, 그를 강제로 궁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천지설산은 매우 추워서, 황제가 오래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황제가 떠나고 나서, 수백 명의 호위병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진한길은 그들에게 지시하며 말했다.“소환의 시체를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라.”그는 이렇게 눈이 쌓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오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 진한길! 당장 꺼져!”진한길은 오백의 기분을 이해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황제의 친위대로서 황제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그는 더 이상 황제가 시신을 찾으려다 병을 앓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황제가 떠난 후, 텐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황제가 강제로 떠나자, 오백은 눈앞이 아득해졌다.그는 눈 속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눈산을 바라보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다.“아…” 그는 주먹을 눈 속에 내리쳤고, 그 상태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었다.“계속 사람을 찾아라.” 앞에서 은육의 낮고 무게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육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은육은 오백에게 무표정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는 오백이 소환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자욱화를 가지고 돌아가다가 한 무리의 습격을 받아, 오백보다 더 늦게 돌아왔다. 그는 소환의 부탁도 황제의 신뢰도 저버린 것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랐다면, 황제에게 상황을 미리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텐데 말이다……봉구안의 사건은 오백이 이미 북방으로 전신을 보냈다.현재
천지설산은 한 달 동안 봉쇄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제의 친위병들이 매복에 걸려 모두 사망했으며, 친히 나서 충성스러운 시체를 찾고, 충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썼다고 전해졌다…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 다 지나 있었다.천지설산의 눈은 더욱 두텁게 덮였다.왕이 없는 나라는 하루도 있을 수 없었다.바로 그때, 서왕이 황제를 찾아왔다.진한길은 서왕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제발 폐하를 설득해 주십시오!”서왕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만약 죽은 사람들이 그저 호위병들뿐이라면, 황제께서 이렇게 모든 일을 내팽개쳐두고 국사를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진한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소환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눈사태로 인해 죽은 사람은 바로 소환이었던 것이다.서왕은 하얗게 덮인 설산을 바라보며, 온화한 눈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진한길에게 물었다.“폐하께서는 정녕 소환을 사랑한 것이냐?”서왕과 황제는 깊은 정을 나눈 사이었다. 진한길은 잠시 고민한 후, 사실대로 대답했다.“전하, 사실 소환은 여인입니다. 폐하께서는 소환을 후궁으로 세울 계획이었습니다.”“소환이 천지설산에 온 이유는, 그곳에서 자주 피는 자욱화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간단한 몇 마디가 서왕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첫째는 그토록 무서운 ‘천영귀살’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으며, 둘째는 폐하께서 소환을 후궁으로 세우려 했다는 사실이었다.폐하께서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니…서왕은 멀리 바라보며, 눈 속에 이해의 빛을 띠우고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진한길은 천막을 가리켰다.“폐하께서는 어젯밤에 밤새 눈을 파헤쳤고, 지금은 잠시 쉬고 계십니다.”최근 황제는 소환을 찾기 위해 낮에는 쉴 틈 없이,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몸이 견딜 수 없을 터였다!진한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상황
오백은 갑자기 달려가 소욱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폐하, 소장군은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분명 살아계실 거예요…”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소장군은 알았다.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그는 분명 남았을 터였다.그녀는 그가 빨리 떠나도록 하기 위해 옥패에 기밀이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오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의 본능적인 복종과 책임이었다.소장군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그가 이렇게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소욱은 무자비하게 그를 차버리며,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얼굴은 겨울의 차가운 냉기보다 더 차갑고, 살기가 가득했다.“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해.”그는 아직 그녀와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리가 없다!그는 그녀를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천옥.모용란은 건초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며,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마 대인이 그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전했다.“마마, 계획은 성공했습니다.”“천지설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소환이 죽었다 합니다.”모용란은 그 말을 듣자, 텅 빈 눈빛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정말 죽었다고?”마 대인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눈사태입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소환을 찾으러 궁을 떠났습니다.”모용란의 표정이 급격히 놀라움에 가득 차 올랐다.“폐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셨다고?!”마 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모용란은 곧바로 일어섰다.그녀는 그 감옥 문을 붙잡고, 소리쳤다.“폐하께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마 대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마마, 저는 오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모용란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감옥 문을 잡고, 마 대인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어서
발 아래, 시체가 널려 있었다.호위병들은 산에 올라 봉구안을 먼저 내려보냈지만,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그들은 봉구안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모두 자객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자객들도 절반 이상 죽은 상황이었다.남은 스무 명이 봉구안과 오백을 포위했다.봉구안의 눈앞이 겹쳐 보이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 와중에 오백의 절규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소장군, 어서 도망가세요!”봉구안은 뼈저리게 느꼈다.그들은 도망칠 수 없었다.아니, 아마 처음부터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을 것이다.그녀를 천지설산으로 유인하고, 체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 암살하려는 계획…봉구안의 호흡이 무거워졌다.칼을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겨우 지탱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똑, 똑…선홍빛 피가 그녀의 입에서 스며 나와 떨어졌다.“소장군!” 오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남아 있는 자객들도 다소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그들은 이 소환이라는 여인이 이렇게 죽이기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쾅…설산 높은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고, 곧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눈사태다!”눈사태의 속도는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마치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듯, 거대한 눈덩이가 굴러내려오며 점점 커졌다.솟구치는 눈이 마치 안개처럼, 또 광풍과 폭우처럼 몰아쳤고, 거대한 흰 짐승처럼 빠르게 달려와 금세 사람들을 삼키고 매장시킬 기세였다.자객들이 눈사태에 정신을 뺏긴 틈을 타, 오백은 봉구안을 끌고 달아나려 했지만, 손바닥에 갑자기 옥패 하나가 쥐어졌다.봉구안이 빠른 말투로 그에게 당부했다.“그 안에 기밀이 있다. 폐하께 꼭 전해주렴! 어서 도망쳐…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오백은 그녀의 명령을 무조건 따랐다.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달렸고, 왜 따로 도망쳐야 하는지
자욱화는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자생하며, 그것을 채집하려면 특히 조심해야 했다.길을 안내한 사냥꾼은 봉구안에게 특히 눈사태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눈사태가 나면 모두 끝장입니다.”오백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그의 목은 처음엔 얼어붙는 듯 차가웠고, 이후에는 불타는 듯 뜨거웠다.광활한 설산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봉구안도 인간이었다.이틀간의 등반 끝에 그녀의 체력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눈썹 위에는 서릿발이 서렸고, 눈앞은 점점 더 흐려졌다.설산의 정상,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은 칼날 같았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치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다.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리 보이는 자욱화를 바라보며 봉구안은 몸이 떨리고 손이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하지만 소군주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떠올리며, 그녀는 결연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놀라운 의지가 이 순간 터져 나왔다.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하늘은 그녀를 돕지 않았다.저승의 문턱에서 생명을 빼앗으려는 그녀에게 하늘은 분노로 응수했다.정상에 강풍이 몰아치며 눈보라가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그 바람은 마치 파도가 물고기를 휩쓸듯이 그녀를 흔들었다.봉구안은 눈 속에서 휘청거리며, 몸이 계속 뒤로 밀려났다.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그녀는 눈을 찔러대는 눈발 속에서 버텼다.귀가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바람의 울부짖음이었다.마치 설산이 자욱화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봉구안은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손에 두툼한 천을 감았음에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오백은 그런 봉구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저렸다.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체력이 바닥난 그는 몇 번을 시도해도 다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길을 안내하던 사냥꾼이 오백을 붙잡으며 손짓으로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그때서야 오
소군주는 병세가 위중하여, 새벽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봉구안은 말이 많지 않았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소욱에게 계획을 전했다.“염추를 이용해 양연석을 대적하는 일은 동방세 혼자면 충분합니다.”“장미는 곧 혼인을 앞두고 있어, 저는 북방으로 가서 장미의 혼례를 준비할 예정입니다.”“그전에 천지설산에 잠시 들를 생각입니다.”천지설산은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소욱은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짐이 이미 사람을 보내 약재를 가져오도록 했다…”봉구안은 능숙한 태도로 그를 설득하며 말했다.“천지설산은 제가 이전에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실 길이 어렵지 않습니다.”“그저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눈보라에 갇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뿐입니다.”“제 체력이 어떤지는 폐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 체력이라는 말에, 소욱은 잠시 딴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지금은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이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즉시 허리에 검을 차고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따라 일어나 그녀의 팔을 잡았다.“잠깐 기다려라. 어찌 널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있겠느냐.”“절대 그럴 순 없다…”봉구안은 그를 돌아보며 굳건한 눈빛을 보냈다.“폐하께서 제게 언제나 믿음을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소욱의 눈매가 살짝 차가워졌다.“그건 다르다.”그들은 이제 곧 혼인을 앞두고 있었고, 그는 그녀가 어떤 위험도 겪는 것을 원치 않았다.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폐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과연 확실히 자욱화를 구해올 수 있다고 보십니까?”“폐하, 말씀은 안 하셔도, 소군주에 대한 죄책감을 제가 모를 리 없습니다.마치 제가 장미를 위해 죄책감을 느꼈던 것처럼요. 제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교먹이 그만 장미를 해치고 말았습니다.”“폐하께서 지금 느끼시는 마음을 제가 깊이 이해합니
서왕은 오늘 모용란과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임했다.그는 그녀가 정신이 나간 채로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먼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다.“폐하, 마마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은 신입니다!”“처음 마마께서 공주마마를 해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마마의 폐하에 대한 집착이 이미 광기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습니다.”“마마가 분명 폐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해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찌됐든 이를 막아야 했습니다.”“우리 삼형제의 오래된 정을 생각하고, 의원이 그저 정신 질환이 있을 뿐이며 치료하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기에…”“저는 마마를 제 저택에 감금한 후 매일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고 조금씩 경계를 풀었지만, 결국 제가 외출한 틈을 타 의원을 유혹해 자신의 족쇄를 풀게 했고, 의원과 호위병들을 다치게 한 후 도망쳤습니다.”서왕의 설명을 들은 소욱은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다.그는 서왕이 이렇게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그러나 모용란이 저지른 끔찍한 짓을 생각하면, 서왕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소욱은 모용란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가 소아에게 저지른 일이 얼마나 잔인한지!모용란은 그의 눈에 비친 살기를 감지하고, 눈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폐하! 저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어찌 서왕과 복령의 말만 믿으십니까?”“제가 폐하께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폐하, 제발 믿어주세요… 전 정말 그런 적 없습니다!”소욱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낯설다는 생각만이 들었다.예전에 정의롭고 올곧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잔혹하고 냉혈한 인물만 남아 있는가?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그는 스스로 판단할 것이었다.더구나, 차라리 잘못된 사람을 처벌하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놓쳐선 안
쾅!그날 밤, 관군들이 모용란의 저택을 포위하고 대문을 부수며 들이닥쳤다.그 시각 모용란은 막 쉬려던 참이라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소리쳤다.“감히 민가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어디서 이런 짓을!”그러나 관군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말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가마에 실었다.그렇게 그녀는 황궁으로 압송되어 어전 안으로 끌려갔다.어전 안에는 서왕도 있었다.모용란은 손이 뒤로 묶인 채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되었고,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은 두려움과 억울함으로 가득했다.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폐하…”황제 소욱은 책상 뒤에 앉아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마치 살신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모용란, 소군주를 사사로운 복수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너였느냐?”모용란은 즉각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폐하, 오해십니다. 저는 줄곧 저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서왕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마마, 이제 그만 죄를 인정하십시오.”모용란은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저 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폐하, 저는 소군주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그녀의 시선은 서왕에게 고정되었지만, 서왕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혹시 제가 모든 증거들을 다 없애버렸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그리도 저를 믿으셨습니까?”순간 모용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서왕은 소욱을 향해 몸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영비마마는 실로 독한 심보를 가졌습니다. 폐하께서 소아를 지나치게 사랑하심을 질투하여 사람을 사주하여…”“전하! 지금 저를 모함하려 하는 것입니까!”모용란은 더 이상 얌전하게 굴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서왕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소욱은 그녀의 날뛰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진한길에게 명령했다.“저 입을 막아라!”“예!”관군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을 틀어막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