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화는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자생하며, 그것을 채집하려면 특히 조심해야 했다.길을 안내한 사냥꾼은 봉구안에게 특히 눈사태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눈사태가 나면 모두 끝장입니다.”오백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그의 목은 처음엔 얼어붙는 듯 차가웠고, 이후에는 불타는 듯 뜨거웠다.광활한 설산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봉구안도 인간이었다.이틀간의 등반 끝에 그녀의 체력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눈썹 위에는 서릿발이 서렸고, 눈앞은 점점 더 흐려졌다.설산의 정상,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은 칼날 같았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치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다.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리 보이는 자욱화를 바라보며 봉구안은 몸이 떨리고 손이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하지만 소군주의 목숨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떠올리며, 그녀는 결연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놀라운 의지가 이 순간 터져 나왔다.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나 하늘은 그녀를 돕지 않았다.저승의 문턱에서 생명을 빼앗으려는 그녀에게 하늘은 분노로 응수했다.정상에 강풍이 몰아치며 눈보라가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그 바람은 마치 파도가 물고기를 휩쓸듯이 그녀를 흔들었다.봉구안은 눈 속에서 휘청거리며, 몸이 계속 뒤로 밀려났다.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그녀는 눈을 찔러대는 눈발 속에서 버텼다.귀가에 들려오는 것은 오로지 바람의 울부짖음이었다.마치 설산이 자욱화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봉구안은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손에 두툼한 천을 감았음에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오백은 그런 봉구안을 바라보며 가슴이 저렸다.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체력이 바닥난 그는 몇 번을 시도해도 다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길을 안내하던 사냥꾼이 오백을 붙잡으며 손짓으로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그때서야 오
발 아래, 시체가 널려 있었다.호위병들은 산에 올라 봉구안을 먼저 내려보냈지만, 몸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그들은 봉구안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모두 자객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자객들도 절반 이상 죽은 상황이었다.남은 스무 명이 봉구안과 오백을 포위했다.봉구안의 눈앞이 겹쳐 보이고,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 와중에 오백의 절규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소장군, 어서 도망가세요!”봉구안은 뼈저리게 느꼈다.그들은 도망칠 수 없었다.아니, 아마 처음부터 이 모든 게 함정이었을 것이다.그녀를 천지설산으로 유인하고, 체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 암살하려는 계획…봉구안의 호흡이 무거워졌다.칼을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겨우 지탱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똑, 똑…선홍빛 피가 그녀의 입에서 스며 나와 떨어졌다.“소장군!” 오백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남아 있는 자객들도 다소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그들은 이 소환이라는 여인이 이렇게 죽이기 어려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쾅…설산 높은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모두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고, 곧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눈사태다!”눈사태의 속도는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마치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듯, 거대한 눈덩이가 굴러내려오며 점점 커졌다.솟구치는 눈이 마치 안개처럼, 또 광풍과 폭우처럼 몰아쳤고, 거대한 흰 짐승처럼 빠르게 달려와 금세 사람들을 삼키고 매장시킬 기세였다.자객들이 눈사태에 정신을 뺏긴 틈을 타, 오백은 봉구안을 끌고 달아나려 했지만, 손바닥에 갑자기 옥패 하나가 쥐어졌다.봉구안이 빠른 말투로 그에게 당부했다.“그 안에 기밀이 있다. 폐하께 꼭 전해주렴! 어서 도망쳐… 절대 뒤돌아보지 말거라!”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오백은 그녀의 명령을 무조건 따랐다.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달렸고, 왜 따로 도망쳐야 하는지
오백은 갑자기 달려가 소욱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폐하, 소장군은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 분명 살아계실 거예요…”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소장군은 알았다.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그는 분명 남았을 터였다.그녀는 그가 빨리 떠나도록 하기 위해 옥패에 기밀이 있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오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의 본능적인 복종과 책임이었다.소장군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그가 이렇게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소욱은 무자비하게 그를 차버리며,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얼굴은 겨울의 차가운 냉기보다 더 차갑고, 살기가 가득했다.“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해.”그는 아직 그녀와 혼례를 올리지 못하였다.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리가 없다!그는 그녀를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천옥.모용란은 건초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며, 예전의 고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마 대인이 그녀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전했다.“마마, 계획은 성공했습니다.”“천지설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소환이 죽었다 합니다.”모용란은 그 말을 듣자, 텅 빈 눈빛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정말 죽었다고?”마 대인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눈사태입니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소환을 찾으러 궁을 떠났습니다.”모용란의 표정이 급격히 놀라움에 가득 차 올랐다.“폐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셨다고?!”마 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맞습니다.”모용란은 곧바로 일어섰다.그녀는 그 감옥 문을 붙잡고, 소리쳤다.“폐하께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마 대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마마, 저는 오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모용란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감옥 문을 잡고, 마 대인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잡았다.“어서
천지설산은 한 달 동안 봉쇄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황제의 친위병들이 매복에 걸려 모두 사망했으며, 친히 나서 충성스러운 시체를 찾고, 충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썼다고 전해졌다…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 다 지나 있었다.천지설산의 눈은 더욱 두텁게 덮였다.왕이 없는 나라는 하루도 있을 수 없었다.바로 그때, 서왕이 황제를 찾아왔다.진한길은 서왕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제발 폐하를 설득해 주십시오!”서왕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만약 죽은 사람들이 그저 호위병들뿐이라면, 황제께서 이렇게 모든 일을 내팽개쳐두고 국사를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그래서 진한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소환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눈사태로 인해 죽은 사람은 바로 소환이었던 것이다.서왕은 하얗게 덮인 설산을 바라보며, 온화한 눈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진한길에게 물었다.“폐하께서는 정녕 소환을 사랑한 것이냐?”서왕과 황제는 깊은 정을 나눈 사이었다. 진한길은 잠시 고민한 후, 사실대로 대답했다.“전하, 사실 소환은 여인입니다. 폐하께서는 소환을 후궁으로 세울 계획이었습니다.”“소환이 천지설산에 온 이유는, 그곳에서 자주 피는 자욱화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간단한 몇 마디가 서왕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첫째는 그토록 무서운 ‘천영귀살’이 여성이라는 사실이었으며, 둘째는 폐하께서 소환을 후궁으로 세우려 했다는 사실이었다.폐하께서 그토록 좋아했던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니…서왕은 멀리 바라보며, 눈 속에 이해의 빛을 띠우고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진한길은 천막을 가리켰다.“폐하께서는 어젯밤에 밤새 눈을 파헤쳤고, 지금은 잠시 쉬고 계십니다.”최근 황제는 소환을 찾기 위해 낮에는 쉴 틈 없이,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몸이 견딜 수 없을 터였다!진한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상황
서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소욱은 먼저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의는 그가 풍한에 걸려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반드시 충분히 치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그래서 서왕은 황제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사이, 그를 강제로 궁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천지설산은 매우 추워서, 황제가 오래 머물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황제가 떠나고 나서, 수백 명의 호위병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진한길은 그들에게 지시하며 말했다.“소환의 시체를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라.”그는 이렇게 눈이 쌓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오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개자식! 진한길! 당장 꺼져!”진한길은 오백의 기분을 이해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황제의 친위대로서 황제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그는 더 이상 황제가 시신을 찾으려다 병을 앓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황제가 떠난 후, 텐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황제가 강제로 떠나자, 오백은 눈앞이 아득해졌다.그는 눈 속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눈산을 바라보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다.“아…” 그는 주먹을 눈 속에 내리쳤고, 그 상태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었다.“계속 사람을 찾아라.” 앞에서 은육의 낮고 무게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육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은육은 오백에게 무표정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는 오백이 소환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자신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자욱화를 가지고 돌아가다가 한 무리의 습격을 받아, 오백보다 더 늦게 돌아왔다. 그는 소환의 부탁도 황제의 신뢰도 저버린 것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빨랐다면, 황제에게 상황을 미리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텐데 말이다……봉구안의 사건은 오백이 이미 북방으로 전신을 보냈다.현재
황성, 궁내.어의의 침과 약을 맞은 뒤, 소욱의 몸은 점차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기력이 매우 쇠약해졌다. 마치 영혼을 잃은 듯, 정기와 기운이 사라진 모습이었다.누가 봐도, 황제의 이번 병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자녕궁.태후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 황상은 며칠 전 급히 궁을 나섰는데, 어찌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이냐?”계 상궁은 알지 못했다.녕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고모님, 폐하께서는 자식도 없으시니, 만약 정말로…”“입을 다물어라!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태후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녕비는 입술을 깨물었다.“고모님, 제가 듣기 어려운 말을 한 것 알지만, 폐하께서 지금 이 상황이라면 저희는 대비를 해야 합니다.”“네 말이 맞다.” 장공주가 밖에서 걸어 들어오면서 말이 먼저 들렸다.태후는 마치 의지가 생긴 듯, 긴장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공주 네가 왔구나!”장공주는 자리에 앉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전조의 소문이 들끓고, 여러 세력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어마마마, 저희는 이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물고기처럼 되지 않겠지만, 대비는 미리 해둬야하지 않겠습니까?”태후는 장공주를 보고, 다시 한 번 녕비를 바라보았다.“너희들… 아이고! 황상은 그저 풍한에 걸린 것이지, 대란을 일으킬 일은 없다.”장공주는 고개를 저었다.“어마마마, 풍한에 걸린 것도 사실이고, 정신을 잃은 것도 사실이라 들었습니다.”“폐하께서는 그런 상태로 미친 듯이 행동하시는데, 한 순간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방금 자진궁에서 왔는데, 황제께서 미친 듯이 사람을 죽이겠다 하였습니다.”“심지어, 모용란도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또, 심지어… 할마마마를 궁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무슨 말이냐?!” 태후는 마지막 말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장공주는 태후의 손을 잡고 말했다.“어마마마, 저도 무섭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마
봉구안이 생명을 걸고 되찾은 자욱화. 소군주가 그것을 사용한 후, 일단 생명의 위협은 없었다.소욱은 아무 표정 없이 침대 옆에 서서, 이 소군주를 보았다.그녀는 이제 정기와 기운이 가득 차서, 침대에 앉아 약을 한 모금씩 마시고 있었다.그녀의 미소는 순수하고 달콤했다.“오라버니, 정말 대단해요! 오라버니께서 신약을 찾아와 제 병을 고쳐주셨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전혀 아프지 않아요!”진한길은 등이 차갑게 식어갔다.그는 소군주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황제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일은, 소환을 천지산에 보내준 일이었다.주국공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황제 폐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자욱화를 되찾은 자, 그 자를 직접 만나 뵙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주국공!” 진한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국공의 말을 끊어야 했다.소욱은 마치 죽은 물처럼 얼굴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눈빛에는 한 점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그는 그저 조용히 소군주를 바라보았다.소군주는 예리한 눈빛으로 황제의 머리카락 사이에 은회색이 몇 가닥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나이가 한참 더 들어버린 것처럼 보였다.심지어 그녀의 아버지께서도 그리 많은 흰머리를 가진 적은 없었다.역시, 황제가 되면 그만큼 고생이 많구나.“소아야.” 소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거칠었다. “너는 꼭 잘 살아야 한다.”그녀가 살아야만, 봉구안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라버니, 꼭 그렇게 할게요! 나중에 저는 소환 오라버니처럼 큰 영웅이 될 거예요!”그때, 밖에서 소식이 들려왔다.“황제 폐하, 천옥에서 온 소식입니다! 영비마마께서 납치되셨습니다!”소욱은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없었다.모용란이 구출되었다는 소식도, 그는 단지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이었다.“그렇군.”며칠 후. 수왕의 아들이 명령을 받고 궁에 들어왔다.
마 대인은 웃으며 예를 갖춰 말했다.“마마, 이 아이는 마마께서 낳으신 황자마마이십니다.”모용란은 눈빛을 잠시 흐리며 그를 되물었다.“그때 그 아이는 결국 지키지 못했다. 분명 유산되었을 텐데…”“또한, 나는 황제 폐하와 절대 사사로운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마 대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마마, 이 아이는 마마께서 낳으신 황자마마가 맞습니다.”“지금부터라도 그리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이 아이의 출생을 누구로 정하느냐에 따라, 이 아이의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이죠.”모용란의 눈빛은 매우 날카로웠다. 예전의 온순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설마 이 아이를 이용해 복국을 하려는 것이냐?”“황제 폐하는 결코 그리 쉬운 분이 아니시다.”“절대 쉽게 양보하지 않으실 것이다.”“폐하는 분명 이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어찌 출처가 불명한 사생아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느냐!”마 대인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그것은 마마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황성.봉가 저택.봉 대인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이전에 황제는 분명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대체 왜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일까?황제가 봉구안을 향한 마음을 접은 것일까? 아니면 봉구안이 또 다시 입궁하는 것을 거절한 것일까?여러가지 가능성을 떠올리자 봉 대인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조만간 봉구안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꼭 물을 것이라 다짐하였다!만약 전자라면 황제는 왜 그녀와의 혼인을 깨뜨린 것일까?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봉 대인이었다……그날 조정 회의.봉 대인은 온통 그 어리석은 딸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그때 갑자기, 옆에서 한 사람이 털썩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간언을 시작했다.“폐하! 절대로 안 됩니다! 대군들은 성을 지키고 적을 막기 위한 군사입니다. 어떻게 강호 사람을 찾기 위해 군을 동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
군막 안.서왕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앉아 있었고, 군의가 그의 상처에서 독을 빼내고 있었다.예리한 단검을 손에 쥔 군의가 상처를 살피자, 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두꺼운 수건을 꽉 깨물었다.그 모습을 본 완부옥이 눈썹을 찌푸렸다.“이미 독화살을 뽑아냈는데, 왜 또 칼을 드는 거죠?”호위 유화가 대신 답했다.“군의께서 남아 있는 독을 빼려면 살을 도려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완부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살을 도려낸다고? 군의가 혹시 적국에서 온 첩자가 아닐까요?”그녀의 말에, 군의의 손이 떨렸다.“부인, 어찌 그런 망언을!”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을 깨물며 눈빛으로 완부옥에게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그러나 그녀는 군의를 밀어내고 서왕의 상처를 살폈다.피부가 갈라지고, 독이 퍼지며 상처 주변이 검게 변해 있었다.흔한 여인이라면 얼굴을 돌리며 기겁했을 터였다.그러나 완부옥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게 그렇게 심각한 건가? 별거 아니네.”그 말에 유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부인,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군의께서 말하길 어서 전하의 몸을 도려내 독을 빼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완부옥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독을 빼는 방법이 꼭 살을 도려내는 것뿐인가?”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군의는 그것을 보며 해독약이라고 생각했다.유화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그러나 항아리가 열리자, 그들이 본 것은 해독약이 아니었다.완부옥은 맨손으로 뚱뚱하고 하얀 벌레 하나를 꺼내더니, 서왕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군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전하! 조심하십시오! 저것은 독충입니다!”유화도 경악하며 외쳤다.“부인,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시끄럽다!”완부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한번만 더 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군의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남강의 독충은 맹독입니다! 부
대하 사국 연합군이 묵성을 함락시키려 진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묵성은 조유관과 똑같이, 텅 비어 있었다."말도 안 돼!"단춘은 차마 현실을 믿지 못했다.이 짧은 시간 동안,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그들이 모두 감주로 이동한 것일까?그때, 정찰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보고 드립니다! 장군! 묵성에 적군이 없습니다!"연합군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니..."묵성은 한때 인구가 많은 번화한 도시였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듯했다.연합군은 묵성에 주둔했지만, 밤이 되자 몰아치는 한파와 함께 불길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병사들은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끓이려 했지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어.’주군이 모여 있는 대장막 안.장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단춘을 바라보았다."단 장군, 이건 분명 남제의 계략입니다!""우리가 이미 두 번이나 빈 성을 마주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더욱이, 우리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보충하려 했으나, 기대와 달리 얻은 것은 없습니다!""장군!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내일도 계속 진군하시겠습니까?"단춘의 표정은 냉랭했다.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묵성이 비어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감주로 이동했을 것이다.""그러나 감주에 적의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그는 고개를 들어 정찰병을 바라보았다."북연은 어떤가? 북부 연합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지?"정찰병이 빠르게 답했다."장군! 북부 연합군은 이미 풍양까지 진격했습니다.""풍양은 작은 군현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박주를 넘어가면, 그다음은 곧바로 선성입니다!"회의실은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북연군의 속도는
이촌은 그야말로 유령 마을이 되어 있었다.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연합군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북연 황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지막 생존자를 끌어오라 명령했다.화살에 맞은 병사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끌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분명 이곳입니다! 바로 이 마을에서 기습을 당했습니다!”하지만 북연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귀신조차 보이지 않는구나.”조사에 나섰던 정찰병들도 나섰다.“폐하,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북연 황제의 손이 힘껏 말고삐를 쥐었다.“찾아라.”병사들은 마을 곳곳을 수색했지만, 백성은커녕 전날 죽은 병사들의 시신조차 사라져 있었다.그 순간,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쌓인 눈이 빠르게 대지를 덮으며 모든 흔적을 삼켰다.북연 황제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행군을 계속한다.”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남제의 백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임현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원래라면 사람이 넘쳐나야 할 곳,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병사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이건 이상하다. 아무리 전쟁이 나도, 이렇게까지 흔적 없이 사라질 리가…”“설마, 남제 황실이 모든 백성을 대피시킨 건가?”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마련이었다.이는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정찰병들이 조사한 결과, 십 리 안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북연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정찰병을 보내라.”이튿날 새벽.한 정찰병이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폐하, 확인된 바에 따르면 남제 황실은 일찍이 백성들을 남쪽으로 대피시켰습니다!”“그들이 향하는 곳은… 선성입니다!”선성.남제의 전략 요충지이자, 철벽 방어를 자랑하는 도시.이곳만 함락하면, 남제 황궁까지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북연 황제는
동방이 함락된 데 이어, 이번에는 북방까지 무너졌다.끝없는 위기였다.조정 대신들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궁중 곳곳에서는 남제가 정말 끝장나는 것이냐는 말이 오갔다.그러나 용상에 앉은 소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는 남제의 황제,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질 수 없었다.조정이 파한 후, 문무백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된 일인가! 북방이 무너졌다니!”“연합군은 어디까지 쳐들어온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황후마마께서 그토록 신중하게 군을 이끌었음에도 동부를 지키지 못했으니, 서부와 남부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겠군.”혼자의 힘으로 십여 개국의 연합군을 막는 것은 결국 무리였던 것일까.많은 대신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황궁 안.궁궐 안에도 불안감이 퍼졌다.후궁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했다.그들은 조묘의 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성이 무너지고 적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요.”“북연은 호랑이 같은 나라라더니…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입니다.”그녀들은 북연과 대하의 야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포로가 된다면, 그들에겐 지옥보다 더한 운명이 기다릴 터였다.자녕궁.자녕궁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녕비는 잔뜩 겁에 질린 채 태후에게 물었다.“고모님… 남제는 정말 망하는 겁니까?”태후는 이미 곳곳의 정보를 통해 전황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평성대에는 꽃이 피지만, 난세에서는 한낱 들풀에 불과하구나…”“내가 널 지키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어서 이 병을 받거라… 들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거라.”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작은 약병을 녕비의 손에 쥐어주었다.그 의미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녕비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약병을 쥔 채, 눈을 뗄 수 없었다.“고모님…”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처롭게 미소 지었다.“내가 너를 궁에 들인 것은 잘못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