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포는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완부옥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봉구안이 이토록 단호하게 흑포를 제거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오백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잡은 적인데 이대로 죽여버리다니!정녕 그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일까?완부옥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봉구안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어색하게 말했다.“멋진 검술이었어!”소환은 가끔은 그녀보다도 잔인한 사람이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흑포의 시신을 힐끗 보았다.그 먼 길을 달려 이곳에 온 이유가 놈을 죽이기 위함인데 놈의 꼬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녀의 복수에서 원수를 죽이는 게 진실보다 먼저였다.하물며 이렇게 입이 무거운 상대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니 차라리 빨리 처단하는 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었다.봉구안은 뒤돌아서 완부옥에게 말했다.“놈의 오장육부를 도려내고 시체는 남강의 성문에 걸어두어 모두에게 알리도록 해. 만약 놈의 시체를 거두러 오는 놈이 있으면 다 죽여!”완부옥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나한테 맡겨.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거든.”봉구안은 마지막으로 흑포의 시신에 눈길을 돌렸다. 그가 감옥에서 말했던 죽음이 곧 생이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 떠올랐다.그가 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두고볼 것이다!흑포를 죽였으니 완부옥은 저택에서 축하연을 열었다.제대로 된 식사는 정말 오랜만인 오백은 입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었다.완부옥은 흑포를 죽인 후에도 소환의 표정이 좋아지지 않았음을 주목했다.그녀는 술을 들고 봉구안의 옆으로 가서 직접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왜 안 마셔? 오늘 그믐날이야.”“취할까 봐?”“취하면 내 친히 보살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마셔.”완부옥은 말하는 동시에 봉구안에게 추파를 던졌다.그 말을 들은 봉구안은 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술잔을 밀어놓고 솔직히 말했다.“흑포가 죽었으니
“장군! 급보입니다! 장미 아가씨께서 치욕을 당해 자결하셨으니 속히 경성으로 복귀하여 큰아가씨 대신 혼인하라는 노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남제(南齊)의 변경, 준마가 금방 녹은 시냇물을 힘차게 밟으며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말을 탄 봉구안(鳳九顏)이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다. 흰색 소복에 검은 머리를 대충 비녀로 틀어 올린 그녀의 주변으로 귀티 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녀와 동생 봉장미는 쌍둥이였지만 이 시대에 여자 쌍둥이가 태어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깥을 떠돌며 자랐다.성품이 온화한 봉장미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여인이 아니었다.봉구안은 누가 그처럼 순수하고 착한 동생을 해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게 누구든, 범인의 가죽을 발라내서 개 먹이로 줄 것이다!호위대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애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장군, 벌써 강행군으로 말 두 마리가 죽었습니다. 전방에 객잔이 있으니 가서 좀 쉬고…”봉구안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따라오지 못할 거면 군영으로 꺼지거라! 이랴!”‘멍청한 놈들,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그녀의 어깨에 짊어진 것은 봉씨 가문 백여 명의 목숨이었다.호위대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상대는 북대영(北大營)에서 가장 빠르고 신출귀몰하기로 소문난 봉 장군이었다!그렇게 7일 후, 황성.봉가에서 일국의 황후가 나왔다는 것은 지고무상한 영광이었다.백성들은 천자의 혼인식을 구경하러 분분히 거리로 나왔다.하지만 영친 대오가 도착했지만 새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구경꾼들이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봉가의 장녀는 얼마 전에 산적들에게 끌려갔다가 봉가의 친위대가 출동하여 겨우 구해왔다고 들었는데 순결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찌 일국의 황후가 될 수 있단 말이오?”“봉가의 여인들은 참 팔자도 좋소.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 아니오. 이런 든든한 집안이 우리 남제를 지켜주고 있어서 우리가 이런 태평 성세에 살고 있는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던 봉구안은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봉가에는 이득이 될 게 없었다.황귀비는 봉가의 여식이 이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만약 봉장미의 대신인 그녀의 순결이 증명된다면 이 음모를 피해갈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필히 황귀비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만약 대체품 신분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황실을 기만한 중죄이며 봉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전방을 주시하며 창을 휘두르던 손으로 얼굴에 연지를 곱게 발랐다.사부께서는 그녀에게 병법과 관료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셨다.사부의 부인인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에는 첩이 득실대는 귀족가의 뒷방에서 살아남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니 겸허히 배웠지만 그걸 쓰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녀는 뒷방에 갇혀 살림이나 하면서 서방을 섬기는 여자보다는 이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는 게 꿈인 사람이었다.그런데 결국 돌고 돌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태감과 그가 데려온 궁중 여관은 기세등등하게 봉 부인을 압박했다.“부인, 이건 황귀비 마마의 명령일세. 감히 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태감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듯이 물었다.‘너희가 아무리 권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깃털이 다 뽑힌 봉황은 닭보다도 못한 법이야!’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음침한 얼굴로 봉 부인을 추궁했다.“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럼 날 너무 원망하진 마시게!”곧이어 그가 손짓하자 뒤를 따르던 궁중 시위대가 나섰다.봉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봉가의 저택에서 법도를 무시한 채, 이런 무례한 일을 벌이다니!궁중 시위대가 봉 부인을 제압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봉씨 가문은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이름까지 올렸다. 그런데 그런 가문의 여식인 내가 순결을 의심받는 날이 오다니.”
자녕궁(慈寧宮), 태후의 처소.봉가의 일을 전해들은 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계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작년 생일 연회에서 봉장미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그런데 오늘 일은 꽤나 영리하게 대처했군. 능연(황귀비 이름: 凌燕)의 측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내가 그 아이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태후의 최측근인 계 상궁은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생활한 사람으로 후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태후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며 말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편애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 황후께서 아무리 영리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영소전과 대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에 황귀비가 또 소란을 부릴 수도 있겠군요.”계 상궁은 어린 황후에게 딱히 거는 기대가 없었다.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자네 말도 맞아. 수완(琇琬,태후의 조카딸)이 입궁했을 때도 그랬지. 황상은 그 아이의 처소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능연 그 요물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황상을 자기 처소로 불러갔었지.”“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가 안타깝구나. 고모로서 아무 도움도 못 주고.”계 상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폐하는 애증이 분명한 분이고 아직까지 후궁에서 황귀비를 대적할 비빈은 나온 적이 없지요. 황후께서도 아마 오늘 밤에 독수공방하게 될 것 같군요.”태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태후는 황제의 생모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황제를 길러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성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영비를 향한 그의 집착과 죄책감은 전부 대체품인 능연에게로 갔다.선황의 유언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황후의 자리도 진작에 황귀비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길시가 되자 봉구안은 금자수를 수놓은 혼례복에 황후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에 올리고 옥석으로 장식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옥으로 된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십보 걸을 때마다 뒤를
황제가 오기로 되어 있으니 봉구안은 마지못해 다시 치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상이 긴장한 탓인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세 번째로 두피에서 통증이 느껴졌을 때, 봉구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가 있거라.”스승님 밑에서 변장술을 익힐 때 단장하는 법도 많이 익혔기에 그녀는 손쉽게 머리를 원래대로 복구했다.연상은 그녀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마마, 제가 한 것보다 더 예쁘네요.”그렇게 그들이 황제를 맞을 준비까지 다 마쳤을 때, 밖에서 전갈이 왔다.“마마, 황귀비마마께서 두통이 재발했다고 하여 폐하께서는 영소전으로 가셨사옵니다.”연상은 입만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하필 황제가 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두통이 재발하다니!황귀비의 뻔한 수가 엿보였지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황귀비 얘기가 나오자 죽은 동생 봉장미가 떠올랐다.‘장미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언니가 복수해 줄게!’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파악해야 하는 법.황귀비는 장기간 독보적인 총애를 받아왔으니 신변에 분명 무예가 강한 호위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한편, 자녕궁.태후는 염주를 손에 쥐고 더듬으며 화를 삭히고 있었다.“혼인 첫날밤에 서왕을 신랑 대역으로 세웠다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황상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벌일 때까지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궁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소인은 정말 몰랐사옵니다.”황제가 유아독존에 제멋대로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태후의 말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대로 가다 가는 천하 백성들에게 태후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고 비난 받을 판이었다.태후는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서럽고 무기력함에 빠졌다.“내 비록 황상의 생모는 아니지만 현명한 군왕으로 가르치려고 노심초사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 모습을 본 시종들은 태후가 안타깝고 황제가 불효하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소식
봉구안이 신혼방으로 돌아오자 아까까지 잔뜩 인상을 쓰며 싫은 티를 내던 최 상궁은 싱글벙글 웃으며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일렀다.그러고는 감개무량해서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그동안 황귀비를 제외하고 폐하께서는 한 번도 다른 비빈들에게 밤시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마가 그 선례를 깨신 거예요!”연상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최 상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궁에서 여자의 지위는 황제의 총애와 비례한다지만 존귀한 황후마저 거기에 포함될 줄이야.봉구안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최 상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연상이만 남고 다들 나가 있거라.”내전이 조용해지자 연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오시기로 한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긴 하나, 이렇게 되면 황귀비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부인께서는 저희에게 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하셨사온데….”“어머니께서 장미에게도 그러라고 가르쳤더냐?”봉구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이런 교육 방식을 찬성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는 배로 갚고 원수도 배로 갚으라고 가르쳤고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유감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사실 봉 부인도 봉가에서 전해져 내려온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쳤다.봉가는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과문이었기에 유독 딸에게는 요구가 엄격했다.악기, 바둑, 그림, 서시 모든 방면에서 봉가의 딸은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가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 좋은 명성을 유지해야 했다.장미는 서신에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고 하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매번 했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봉장미처럼 유순한 사람이 입궁하여 황후가 되었다면 주변의 시달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연상은 봉부의 하인들 중에서 봉구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주변을 경계하다가 다가가서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마마, 저희를 예의주시하는 사
소리를 들은 연상은 바로 내전으로 달려왔다.“마마, 무슨 일이시옵니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가!”사내의 목소리에 연상은 크게 당황하며 사람을 부르려 하였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태감이 급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낮은 소리로 호통쳤다.“멍청한 것, 폐하가 안에 계신데 이 무슨 소란이더냐!”연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폐하?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던 그 폭군?’침실 안.사내는 한손으로 봉구안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비수를 잡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봉구안을 내려다보았다.봉구안은 상대를 던져버리려다가 황제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주변이 어두워서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에게서 진동하는 살기는 진짜였다.“황후,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한 살기가 진동하고 있었다.평범한 여자였다면 지레 겁을 먹고 우물쭈물했겠지만 봉구안는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태연히 답했다.“그 일이 있은 후로 살기 위해 비수를 항상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일부러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녀는 봉장미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말투까지는 모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딱딱했다.마치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설명을 들은 사내는 크게 코웃음치고는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몸을 일으켰다.봉구안은 어슴푸레한 달빛을 빌어 용포를 풀어헤친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다.그는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비수를 요리조리 돌리며 관찰했다.침실 안에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뒤에 사내의 동향을 주시했다.이때, 사내는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댔다.봉구안은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어차피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었고 예상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솔직히 폭군에게 첫날밤을 바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방법이 더 나았다.적어도 치욕스럽게 사내의 밑에 깔리지 않아도 되니까.봉구안은 하얀 치마자락을 찢어 손수건 대신 침대에 받쳤다.그리고 한손으로는 치마자락을 들고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이미 하기로 한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그냥 전장에서 부상당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어차피 어릴 때부터 수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녀였다.곧이어 그녀는 칼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그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봉구안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보았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고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챙그랑!말을 마친 그는 비수를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어차피 네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 짐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렇게까지 해가며 황후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더 이상 멍청한 짓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면 짐이 영소전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짐을 만나겠다고 거기까지 찾아오지 말란 말이다.”봉구안은 이를 악물었다.폭군은 그녀가 관심을 끌려고 찾아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하기 싫은 걸음을 한 것이었다.어차피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강조한 것도 일부러 그녀를 농락하기 위함일 것이다.참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이런 방식이 당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소용 있을지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하지.’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바라고 입궁한 게 아니니 오히려 그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봉구안은 신속히 옷섶을 여미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폐하,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총애를 바라지 않겠습니다.”“폐하께서 황귀비를 애정하시는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신첩 앞으로 귀비를 친자매처럼 여기고 폐하를 대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귀비를 대할 것이옵니다.”그
흑포는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완부옥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봉구안이 이토록 단호하게 흑포를 제거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오백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잡은 적인데 이대로 죽여버리다니!정녕 그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일까?완부옥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봉구안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어색하게 말했다.“멋진 검술이었어!”소환은 가끔은 그녀보다도 잔인한 사람이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흑포의 시신을 힐끗 보았다.그 먼 길을 달려 이곳에 온 이유가 놈을 죽이기 위함인데 놈의 꼬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녀의 복수에서 원수를 죽이는 게 진실보다 먼저였다.하물며 이렇게 입이 무거운 상대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니 차라리 빨리 처단하는 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었다.봉구안은 뒤돌아서 완부옥에게 말했다.“놈의 오장육부를 도려내고 시체는 남강의 성문에 걸어두어 모두에게 알리도록 해. 만약 놈의 시체를 거두러 오는 놈이 있으면 다 죽여!”완부옥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나한테 맡겨.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거든.”봉구안은 마지막으로 흑포의 시신에 눈길을 돌렸다. 그가 감옥에서 말했던 죽음이 곧 생이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 떠올랐다.그가 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두고볼 것이다!흑포를 죽였으니 완부옥은 저택에서 축하연을 열었다.제대로 된 식사는 정말 오랜만인 오백은 입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었다.완부옥은 흑포를 죽인 후에도 소환의 표정이 좋아지지 않았음을 주목했다.그녀는 술을 들고 봉구안의 옆으로 가서 직접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왜 안 마셔? 오늘 그믐날이야.”“취할까 봐?”“취하면 내 친히 보살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마셔.”완부옥은 말하는 동시에 봉구안에게 추파를 던졌다.그 말을 들은 봉구안은 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술잔을 밀어놓고 솔직히 말했다.“흑포가 죽었으니
밀집된 토용들을 보고 있자니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그들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봉구안을 향해 푸른 눈을 번뜩이며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한 마리가 공중에 몸을 솟구치더니 석벽을 타고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그것들은 이미 일반적인 토용이 아니라 표피가 울퉁불퉁하게 부어 있었는데 딱 봐도 강한 독성을 갖고 있었다.봉구안은 신속히 해독약을 먹고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두 시진 후, 동굴 밖.오백은 조바심에 속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혹시라도 소장군이 위험에 처했을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그가 주저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소장군!”다급히 다가가던 그는 눈앞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봉구안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후방을 경계했다.봉구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안에 사람은 없었다.”오백이 물었다.“그럼 이 피는….”그는 그제야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설마 토용입니까? 소장군, 토용이 정말 안에 있어요?”“그래.”봉구안은 토용들을 모조리 죽였다.다행인 점은 그것들은 아직 천수와 같은 극독물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살아서 나오긴 힘들 것이다.그녀는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고는 오백에게 분부했다.“여길 지키고 있거라. 내 어디 다녀와야겠다.”“예!”봉구안은 완부옥을 찾아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자초지종을 들은 완부옥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남강 백성을 살해한 놈들이 천용회 사람이라고?”“동굴 안에서 수많은 시신을 발견했어. 아마 천수를 제련하는데 쓰였겠지. 남강 여인들의 죽음은 충독 때문이었다. 아마 그것도 독성을 제련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거야.”봉구안이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여전히 남방의 습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완부옥은 뜨거운 차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일단 알겠으니까 목부터 축이고 남은 건 나한테 맡겨. 만약 천용회 잔당들이 일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놈들이 살아서 남강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야!”봉구안은 뜨끈한 차를
10일 후, 남제의 변방.오백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소장군, 지금 돌아가도 늦지 않습니다.”그는 봉구안이 냉혈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정과 의리를 굉장히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돌아갈 집이 있는데 굳이 방랑할 이유도 없었다.아무도 소장군의 고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흑포의 말처럼 이미 천용회는 이미 그녀를 오랜 시간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미 가면 아래 맹 소장군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었고 지금의 황후가 바로 맹성주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천용회는 이미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고 이제 곧 그들의 교주가 출관할 거라고 했다.맹성주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놈들이고 소환이라는 신분은 과거 천용회를 쑥대밭으로 만든 인물이니 아마 그쪽에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나중에 천용회가 복수를 한답시고 달려든다면 봉구안 주변 인물들도 화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봉구안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도 봉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황제에게도 그랬다. 매정하게 떠났지만 그건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사실 그녀가 진심으로 떠나고 싶었다면 황궁의 시위들은 그녀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굳이 만 천하에 황제와 황후가 감정싸움으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오백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봉구안은 항상 겉으로는 하나만 보여주고 뒤에서 묵묵히 열을 하는 사람이었다.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한 그마저도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그가 보기에 봉씨 가문과 절연하고 황제와 그 난리를 피운 수는 너무도 과했다.하지만 그녀는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단 한번이라도 그는 소장군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를 바랐다.오백이 말했다.“폐하께 천용회가 소장군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만 설명하면 폐하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그분이 천용회를 소탕하실 텐데 왜 굳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시려는 겁니까?”봉구안
소욱은 문 앞에 서서 내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마치, 저 문을 열지 않으면 그의 황후가 여전히 안에 있다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연상의 소리를 들은 그가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너마저도 버리고 갔단 말이냐.”연상은 목소리에 힘이 없는 그를 보고 가슴이 쓰렸다.사랑의 아픔이 이리도 지독하다니.소욱이 영화궁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이, 서재의 상소문은 쌓여만 갔다.그 일을 전해들은 영비는 직접 영화궁으로 찾아왔다.하지만 황제는 창가에 서서 멍하니 마당의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궁인들 말로는 그는 이미 이곳에 하루를 서 있었다고 한다.이제 저녁식사를 할 시간인데도 그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명을 내렸다.연상은 영비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영비가 어서 황제를 모시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황제가 여기 있으니 모든 게 불편했다.소욱의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마음이 많이 안 좋으신 것 압니다. 하지만 이제 놓아주기로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야지요.”“황후는 이미 떠났는데 이리 옥체를 돌보지 않으신다면…”“네 아이, 짐의 아이가 아니다.”그는 바깥을 바라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영비의 눈가에 당황함이 스치더니 곧이어 무릎을 꿇었다.그녀는 무서웠던 그날이 떠올랐는지 호흡마저 거칠어졌다.“폐하께서 출정을 나가시기 전날 밤에 많이 취하신 상태로 자진궁에 돌아가셨습니다. 신첩은 폐하를 밤새 보살폈고요.”“날이 밝은 후 신첩은 자진궁을 나가다가… 어떤 자에게 나쁜 일을 당했습니다.”소욱은 과정을 따지지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침묵만 지켰다.영비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그자는 미혼향을 사용했습니다. 신첩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냉궁에 누워 있었지요.”“나중에 그자를 찾아서 제 손으로 죽여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요.”“신첩 역시 여인입니다. 결백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이
봉 부인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너… 뭐라고 했니? 집에 안 가? 그럼 어딜 가려고!”봉 대인은 치미는 화를 못 이겨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겠어? 거기에 돌아가려는 거겠지!”거기란 맹씨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천하는 크고 하늘과 땅을 집으로 간주하며 살겠습니다. 예전처럼 저 같은 딸은 없다고 생각해 주세요.”말을 마치 그녀는 바로 등을 돌렸다.그렇게 단호하고 결연할 수가 없었다.등 뒤에서 봉 대인의 욕설과 봉 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이런 불효녀 같으니라고! 좋아! 어디 나가서 죽든 상관 안 하마!”“나리, 그만하세요!”“뭘 그만해! 일국의 황후 자리를 내치고 떠돌이 생활을 하겠다잖아! 내가 저걸 애당초 물에 빠뜨려 죽였어야 했어!”심장이 안 좋은 봉 대인은 가슴을 붙잡고 통탄했다.“나리! 나리!”봉 부인은 잽싸게 약을 꺼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봉 대인은 떠나는 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불효막심한 것 같으니라고!’황궁 십리 밖.누군가가 봉구안의 앞을 막았다.그녀를 따르던 오백이 검을 빼들었으나, 상대는 공손히 그녀에게 예를 행했다.“봉 낭자, 장공주께서 한번 뵙자고 하십니다.”장공주는 봉구안을 송별하기 위해 정자에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황후를 보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황후가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에 기뻤다.둘은 정자에 마주앉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밖에서 대기했다.“소장군, 한잔 하시게.”장공주는 술 한잔을 따라 봉구안에게 건넸다.봉구안은 습관처럼 술잔을 가져가서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장공주는 준비한 가야금을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내 소장군을 위해 한곡 연주하겠소.”봉구안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먼 길을 떠나야 합니다.”장공주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어딜 이리 급하게 가시오? 혹여 내 도움이 필요하진 않소?”자리에서 일어선 봉구
소욱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모습이었다.그의 옷매무새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도 아무렇지 않게 하나로 묶은 모습이었다.그의 입술은 푸른빛을 띄고 있었는데 마치 큰 병을 앓고 일어난 사람처럼 생기 한점 없었다.유사양은 그의 옆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반면 진한길은 침착하게 황제를 위해 화살을 건넸다.소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폐하, 아니되옵니다!”뭇 비빈들이 봉구안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죽음을 두려워하는 녕비는 처음에 나설 생각이 없었지만 몰려오는 다른 비빈들에 의해 등 떠밀려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그녀는 짜증이 몰려왔다.사실 가장 짜증 나는 사람은 황제였다.“폐하! 봉장미를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녕비가 목을 놓아 소리질렀다.모용선도 평소의 온화한 목소리 대신,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군주의 약속은 천금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폐하, 이혼 교지를 내리신 마당에 지금 약속을 번복하시려는 겁니까?”가빈은 소욱의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폐하, 신첩이 이렇게 빌게요! 황후마마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누각 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소욱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슉!화살이 날아와 그녀의 등 뒤로 뻗은 길에 꽂혔다.황제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다시 화살을 뽑아들었다.진한길은 황제가 황후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이건 어쩌면 황후를 대신해 자신이 무정한 군주라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하기 위한 의식일 수도 있었다.또 어쩌면 그만의 특별한 작별 방식일지도 모른다.봉구안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작별 예를 행했다.“소인, 남제의 태평성세와… 폐하의 안녕을 기원합니다.”말을 마친 그는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갔다.넓은 복도는 백보도 채 가지 않아 끝이 났다.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올 때와 사뭇 달랐다.누각 위.소욱은 공터
황제는 그날 이후로 병을 앓았다.태의는 고뿔에 걸렸다고 말했으나 소욱은 정무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그렇게 12월이 되던 어느 날, 이혼 교지가 드디어 내려졌다.연상은 기쁨에 겨워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드디어 떠나실 수 있겠네요!”그녀는 진심으로 황후를 위해 기뻐했다.전에 황제의 행실을 보고 황후가 평생 이 궁에 구금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그녀였다.다행히도 황제는 결국 생각을 바꿔 황후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폐후가 아닌 이혼이라는 점이었다.역사를 통틀어 황제와 이혼한 황후는 없었다.연상과는 달리, 최 상궁은 구슬피 울었다.“마마,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왜 굳이 궁을 떠나시려는 거예요!”최 상궁은 복도에 주저앉아 오열했다.지나가던 궁인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듣지도 않았다.내전 안.봉구안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교지를 빤히 바라보았다.평화로운 이별, 그녀가 바라던 상책이었다.이렇게 되면 봉씨 가문과 연상을 비롯한 궁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소욱과 그녀는 이제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는 것을 만 천하가 알게 될 것이고 이는 황후의 실종보다는 귀찮은 일들을 덜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녀는 마음을 억누르는데 도가 텄을지도 모른다.봉구안의 짐은 많지 않아서 보따리 하나로 해결되었다.일각이 지난 후, 그녀는 출궁 준비를 마치고 교지를 들고 영화궁을 나왔다.영화궁 밖, 진한길이 굳은 표정을 하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황후를 본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인 감히, 마마께서 생각을 돌리시기를… 청합니다.”이는 그가 처음으로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청한 일이었다.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길은 전방에 있다.”그러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잠깐의 동요는 있었지만 그걸 위해 평생을 헌신할 자신도 없었다.진한길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을 바라보며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욱은 황후를 꽉 안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황후, 짐은 너를 속이지 않았다. 영비의 아이는 짐의 것이 아니었어. 증거를 찾았다. 네가 못 믿을까 봐. 이제 짐은 드디어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짐을 떠나지 말거라.”말을 마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궁인들에게서 확보한 증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봉구안은 멍하니 있다가 그의 손을 밀쳐냈고, 그 순간 종이에 적힌 진술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을바람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종이가 흩날렸다.소욱은 급급히 진술서들을 줍다가 표정이 굳었다.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들어 진술서들을 버리고 눈앞의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붉어졌다.그는 여전히 갈린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짐의 결백 여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냐.”봉구안은 진술서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굳이 이런 일을 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폐하와 영비 때문에 떠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지금까지도 소욱은 그녀가 왜 떠나려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소욱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알고 있었다. 네가 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짐이 아닌 단회욱이었더라면 넌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지.”“짐은 영비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초조해졌었다. 짐이 진짜로 그 아이를 품었고 그 일 때문에 네가 떠날까 봐.”“너에게 그 일을 숨길까 생각도 했었다. 아니면 진실을 다 조사한 후에 너에게 얘기할 생각이었지.”“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너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그 증거를 찾았는데… 너는 전혀 동요가 없구나.”그는 그제야 그들 사이에 이미 미래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너무 급한 마음에 최 상궁의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소욱은 가까이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그녀는 진실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한참이 지난 후,
악몽에서 깬 소욱은 더 이상 잠들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침상을 내린 그는 옷을 걸치고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에 도착한 소욱은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멍하니 밖에서 방 문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이면 황후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그가 들어가야 할지 주저하던 사이에 최 상궁이 다가왔다.최 상궁은 황후화 황제가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황후께서 말은 그렇게 하셔도 사실은 그냥 폐하께 서운한 일이 있어서예요. 소인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고, 황후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폐하와 영비마마께서…”소욱은 이상을 찌푸리며 최 상궁에게 물었다.“황후가 영비 때문에 화가 났단 말이냐?”최 상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황후께서 평소에 폐하를 얼마나 생각하시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를 변방까지 운송했겠어요? 폐하께서 출정을 떠나신 동안, 마마께서는 폐하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가 돌아오시고 황후마마는 갑자기 돌변하셨죠. 이혼을 제기한 것도 그 시점이고요.”“만약 폐하께서 정말 과거의 일을 신경 쓰신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지요. 폐하, 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영비마마의 침전으로 가신 그날 밤, 황후마마도 그곳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신 후, 표정이 안 좋으셨지요.”소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가 장락궁에 머문 그날 밤이라면 흑포가 탈옥한 날이었다.아마 흑포 때문에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최 상궁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으로 돌아오기 전, 남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후는 멀쩡했다.그녀가 돌변한 건 궁으로 돌아온 후, 영비가 한때 회임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그날 서재에서 그는 영비를 시켜 자신과 영비가 합방한 적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게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조촐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어쩌면 황후는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영비가 그와 짜고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오해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