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집된 토용들을 보고 있자니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그들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봉구안을 향해 푸른 눈을 번뜩이며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한 마리가 공중에 몸을 솟구치더니 석벽을 타고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그것들은 이미 일반적인 토용이 아니라 표피가 울퉁불퉁하게 부어 있었는데 딱 봐도 강한 독성을 갖고 있었다.봉구안은 신속히 해독약을 먹고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두 시진 후, 동굴 밖.오백은 조바심에 속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혹시라도 소장군이 위험에 처했을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그가 주저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소장군!”다급히 다가가던 그는 눈앞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봉구안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후방을 경계했다.봉구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안에 사람은 없었다.”오백이 물었다.“그럼 이 피는….”그는 그제야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설마 토용입니까? 소장군, 토용이 정말 안에 있어요?”“그래.”봉구안은 토용들을 모조리 죽였다.다행인 점은 그것들은 아직 천수와 같은 극독물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살아서 나오긴 힘들 것이다.그녀는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고는 오백에게 분부했다.“여길 지키고 있거라. 내 어디 다녀와야겠다.”“예!”봉구안은 완부옥을 찾아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자초지종을 들은 완부옥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남강 백성을 살해한 놈들이 천용회 사람이라고?”“동굴 안에서 수많은 시신을 발견했어. 아마 천수를 제련하는데 쓰였겠지. 남강 여인들의 죽음은 충독 때문이었다. 아마 그것도 독성을 제련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거야.”봉구안이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여전히 남방의 습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완부옥은 뜨거운 차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일단 알겠으니까 목부터 축이고 남은 건 나한테 맡겨. 만약 천용회 잔당들이 일을 벌이고 있는 거라면 놈들이 살아서 남강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야!”봉구안은 뜨끈한 차를
흑포는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완부옥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봉구안이 이토록 단호하게 흑포를 제거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오백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잡은 적인데 이대로 죽여버리다니!정녕 그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일까?완부옥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봉구안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어색하게 말했다.“멋진 검술이었어!”소환은 가끔은 그녀보다도 잔인한 사람이었다.봉구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흑포의 시신을 힐끗 보았다.그 먼 길을 달려 이곳에 온 이유가 놈을 죽이기 위함인데 놈의 꼬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그녀의 복수에서 원수를 죽이는 게 진실보다 먼저였다.하물며 이렇게 입이 무거운 상대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니 차라리 빨리 처단하는 게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었다.봉구안은 뒤돌아서 완부옥에게 말했다.“놈의 오장육부를 도려내고 시체는 남강의 성문에 걸어두어 모두에게 알리도록 해. 만약 놈의 시체를 거두러 오는 놈이 있으면 다 죽여!”완부옥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나한테 맡겨.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거든.”봉구안은 마지막으로 흑포의 시신에 눈길을 돌렸다. 그가 감옥에서 말했던 죽음이 곧 생이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 떠올랐다.그가 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지 두고볼 것이다!흑포를 죽였으니 완부옥은 저택에서 축하연을 열었다.제대로 된 식사는 정말 오랜만인 오백은 입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었다.완부옥은 흑포를 죽인 후에도 소환의 표정이 좋아지지 않았음을 주목했다.그녀는 술을 들고 봉구안의 옆으로 가서 직접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왜 안 마셔? 오늘 그믐날이야.”“취할까 봐?”“취하면 내 친히 보살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마셔.”완부옥은 말하는 동시에 봉구안에게 추파를 던졌다.그 말을 들은 봉구안은 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술잔을 밀어놓고 솔직히 말했다.“흑포가 죽었으니
남제의 경내에 도착하자, 봉구안과 오백은 먼저 한 여관을 찾아 들러 음식을 주문하였다.두 사람은 가면을 쓴 채 길가 쪽 자리에 앉았다.여관의 하인은 이에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는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러 갔다.오늘 이 여관은 몹시 떠들썩하여 옆자리의 몇몇 사람이 한담을 나누기 시작하였다.“작년 황성에서 있었던 그 일, 다들 들어보았소?”“무슨 일을 말하는 거요?”“모르시오? 작년에, 황제와 황후가 이혼을 한 일 말이오!”“오오, 생각났소. 그때 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지…”“내 말이, 그 황후라는 사람은 참으로 교만하고 사사로이 문제를 일으키는구려! 보통의 여인들이야 삼종사덕을 지켜야 하거늘, 하물며 일국의 황후가 되어 감히 황제를 공개적으로 나무랐다니! 그것도 무슨 ‘육고’라 하였던가? 자기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니 황제가 벌을 내린 게 무엇이 그리 큰 죄란 말이오?”“그러게 말이오. 내 생각엔 그런 여자는 차라리 버리는 게 나았소!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내치신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오!”“맞소! 봉가네 여식들은 이제 혼인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오. 이런 꼴로 집안을 망신시켰으니, 결국 손해 보는 건 본인이 아니겠소. 내게 그런 딸이 있다면 차라리 때려죽였을 것이오. 집안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 말이오!”뚱뚱해 보이는 한 남자가 교만한 표정으로 말하였다.“그렇다면 이 시기에 내가 봉가에 가서 혼사를 제안한다면 어찌되겠소? 절호의 기회 아니겠소?”주변의 사람들이 서로 눈짓하며 이내 크게 웃으며 동조하였다.“이보시오, 그대라면 우리가 성심껏 지지할 것이오!”“봉가에서 틀림없이 막대한 사례금을 내걸 것이오. 하하, 그들의 딸이 이미 아무도 원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오.”그 남자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우쭐해졌다.“당연하지 않겠소! 나는 첫 혼사라오! 내가 봉가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면 잘 길들여보겠소. 자네들도 곧 보게 될 것이오!”오백은 이 말들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는 갑자기 자리에
봉구안은 타인의 일에 개의치 않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게 봉구안과 오백은 북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며칠 후, 그녀와 오백은 관아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무지 말을 타고 갈 수 없어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관아 앞을 가득 메운 것은 이혼을 청하러 온 사람들이었다.길가에는 구경꾼들과 장사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은 관아 앞에 모인 여인들을 손가락질하며 입방아를 찧었다.“쳇!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여자들! 감히 관아까지 와서 이혼을 청하다니!”“맞아!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지. 우리 같은 여자들까지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는군.”“남자들이 집안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어찌 저리도 분별없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어!”“황제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원… 관아에서는 여자가 이혼을 청하면 반드시 접수를 받아들여야 한다네.”한 채소장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이게 다 황후가 나쁜 본을 보여서 그런 거야! 여자가 이혼을 청하다니, 부부의 도리가 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그 말에 옆에 있던 여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정상적인 여인이라면 이혼을 청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 내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그러던 중, 한 사람이 지나가며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듣자하니, 이혼을 청하는 여인 중 남편의 과오가 확인되면, 여인은 혼인 때 가져온 혼수를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정에서 삼십 냥의 은자까지 하사한다고 하더군.”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까짓 푼돈을 바라고 저런 짓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나!”그 말을 들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위정자의 행위는 언제나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오백이 이를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소장군, 폐하께서 왜 이런 명을 내리셨는지 아십니까?”그러자, 봉구안은 맑은 눈빛으로
남제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안비’를 시행하였다. 이는 전국 인구를 철저히 조사하여 출생과 사망 인원뿐만 아니라 여섯 살부터 여든까지의 신체 조건, 용모 등을 상세히 기록하는 일이었다.한 달여 전, 사민관이 입궐하여 전년도 몇 달간의 안비 순찰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이로써 남제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냈다.미혼 남녀 중, 여자의 수가 남자에 비해 현저히 적어, 열 명의 남자 중 겨우 한 명만이 혼인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더구나 일부 남자들은 첩을 들이는 일이 흔하여, 대다수의 남자는 아예 혼인 상대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국경을 지키는 병사들 중에서도 미혼자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이대로 가면, 앞으로 20년 안에 남제는 징집할 병사를 잃게 될지도 모를 터였다…이에 소욱 황제는 국고를 대대적으로 열어서라도 민간에서 이혼풍을 일으키려 하였다.더 많은 여성이 다시 혼례를 준비하게 함으로써 혼인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물론, 이는 합당한 이유였지만, 황제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사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다.그는 막 황후를 잃은 터였고, 어찌 다른 이들의 행복을 그냥 두고 볼 수 있었겠는가?쉭!또 하나의 날카로운 화살이 발사되어 허수아비의 목을 꿰뚫었다.옆에 있던 서왕은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폐하, 폐하께서 폐비마마를 이토록 마음에 두셨다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야 합니다.’…만수궁.태황태후는 민간에서 얻은 비방으로 만든 약을 영비에게 먹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폐하께서 가장 아끼는 이는 너다. 이전에 네가 사고를 당한 틈에 저 황귀비와 봉장미가 끼어들었을 뿐,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폐하 마음엔 다른 이가 들어올 리 없다.그러니 네가 해야 할 일은 몸을 조리해 하루빨리 황자를 낳는 것이다.”영비는 약을 다 마시고, 온화하면서도 순종적인 미소를 지으며 약간의 부끄러움을 띤 채 고개를 숙였다.“예, 할마마마.”태황태후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폐하께서 바쁘셔서 비록 널 궁으로
“맹성주? 북대영의 맹 소장군 말씀이십니까?”남자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맹 소장군은 무공이 대단하다고 들은 바 있었다.면사를 쓴 여인의 눈에 살기가 스치더니, 이내 남자에게 차분히 말했다.“맹성주를 죽이기만 하면, 교주께서 반드시 숙부님을 용왕로 봉하실 것입니다.”“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남자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여인은 손에 낀 구슬 팔찌를 살짝 흔들었다.청아한 방울소리가 맑게 울리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것은… 도련님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입니다.”남자는 갑자기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혹시 공자의 부상이 맹성주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그는 교주의 유일한 아들이 다섯, 여섯 해 전에 큰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그동안 범인을 찾지 못했기에 누가 범인인지 늘 궁금했던 차였다.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그렇습니다. 그 자가 바로 맹성주입니다.”“이건 저희 둘 사이의 비밀로 하십시다.”“교주께서 출관하시기 전에 맹성주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때는 아무도 숙부님과 흑룡왕 자리를 다툴 수 없을 것입니다.”남자는 놀라고 감격하여 여인에게 공손히 절하며 말했다.“염 낭자는 실로 영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교주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우리 모두 공자의 복수를 위해 맹성주를 처치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교주께서 직접 명하지 않으신 것인지…”여인은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태도를 바꾸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교주께서는 교주의 뜻이 있으신 법!”남자는 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곧바로 공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에 불타올라,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불렀다.“가자, 반드시 내 뜻을 이루고 오리라!”여인은 자리에 남아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이때, 병풍 뒤에서 한 부하가 나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교주께서는 단회욱과 5년 약조를 맺으셨사온데, 염 낭자께서 이렇게 유천을
봉구안은 평소 무예에 열중하느라 꽃과 나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예전의 자유각은 온통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뿐이었으나, 오늘 들어서니 화려한 꽃과 푸른 버들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가지 끝에는 참새 떼가 지저귀며 앉아 있어 무척이나 활기찼다.마당에서 일하던 시녀 채월이 먼저 봉구안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환한 얼굴로 말했다.“소장군, 돌아오셨군요!”채월은 그녀가 면사와 남자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금세 알아보았다.그녀는 급히 손에 든 비를 내려놓고 봉구안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봉구안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장미는 어디에 있느냐?”채월은 차를 따르며 대답했다.“송 신의께서 아가씨를 데리고 뒷산으로 꽃을 채집하러 가셨습니다.”봉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꽃을 채집한다고?”고독한 남녀가 함께하는 일이 마땅치 않다.비록 송려의 인품을 매우 신뢰하고 있더라도 말이다…말을 마치기도 전에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봉구안이 일어나 바라보니, 송려와 장미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장미의 머리 위에는 꽃으로 엮은 화관이 얹혀 있었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 미소는 꽃보다도 더 아름다웠다.송려는 평범한 베옷을 입고 손에는 꽃을 담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온화하게 장미를 바라보고 있었다.봉구안은 금동옥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을 보며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그 순간, 송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집 안에 서 있는 봉구안을 발견했다.순간적으로 그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소, 소장군?”송려는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무의식적으로 장미와 거리를 두었다.…전당.송려는 머리를 숙이고 죄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미안하오, 소장군. 나는… 나는…”그는 목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한쪽은 오래된 친구요, 한쪽은 마음을 품은 여인.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봉구안은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송려는 마음
맹 부인이 납치되었다. 범인은 한 통의 서신을 남겼는데, 반드시 소장군 본인이 직접 열어볼 것을 요구하였다.봉구안이 장군부에 도착했을 때, 스승은 정청에 앉아 얼굴 가득한 걱정으로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책을 고심하는 모습이었다.“스승님...”“이 편지, 네가 한 번 보거라.” 맹건은 그녀에게 서신을 건네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신은 이미 뜯겨 있었다. 봉구안은 서둘러 편지를 펼쳐 그 내용을 확인했다.요지는 다름 아닌, 그녀가 단신으로 오양산에 와야만 맹 부인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제가 가겠습니다!” 봉구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맹건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막았다.“냉정해지렴! 부인이 납치당했으니, 나라고 더 걱정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이렇게 무턱대고 가다간, 적들에게 너마저 넘어갈 뿐이다.”맹건은 전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인물로, 이는 명백히 봉구안을 노린 덫임을 간파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서신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아마도 천룡회 잔당들의 짓일 것입니다.”맹건은 고개를 끄덕였다.“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더욱 조급해할 필요 없다. 너도 이미 서신으로 알리지 않았더냐? 나와 부인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북방에 충분한 인원을 배치해둔 것도 알고 있다만...”봉구안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제 계획은 적을 유인해 섬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께서 이렇게 그들에게 잡혀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을 지키도록 보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그녀가 이렇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며 화를 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맹건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가운 표정과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우리는 적을 맞을 준비를 충분히 했다. 하지만 적들 또한 바보는 아니지. 그들이 빈틈을 파고든 것은 불가피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지 않느냐. 원망하고 탓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지금은 적들을 어떻게 격파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