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나라와 비교하자면, 북연의 병사들은 훨씬 용맹하였다.이번 전투는 무려 보름 이상 이어졌다.연나라 태자는 ‘화룡’이 파괴된 이후로 마음이 흐트러져 전쟁을 지휘하는 데 있어 전혀 체계가 없었다.그는 다른 이의 조언조차 용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의 쾌감에만 몰두하였다.겉보기엔 북연군이 진지를 굳건히 지키는 듯하였으나, 실상은 매일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이에 반해 남제는 대체로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전투가 날이 갈수록 길어지자, 소욱조차도 눈에 띄게 초조함을 보였다.북연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이번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한편, 남제 황궁에서는 진왕이 또 다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그는 여러 사람을 동원하였으나, 황후의 밀실 통로를 끝내 찾지 못했다.남방으로 꾸준히 양식이 운반되는 것을 보고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찾아라! 땅이라도 뒤엎어서 남은 양식을 전부 찾아내라!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들이 정말 땅굴로 운반한 것이란 말인가!!”진왕은 히스테릭하게 분노하며 외쳤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점점 초라해지고 있었다.…10월 말.북연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그 와중에도 연나라 태자는 미쳐 날뛰며, 병사들에게 진천뢰를 몸에 묶고 남제군을 향해 자폭하라 명령하였다.그 순간,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칙서와 함께 황궁의 고수들이 나타나, 연나라 태자를 강제로 결박하여 마차에 던져 넣었다.“태자 전하, 무례를 용서하소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진천뢰를 몸에 묶은 병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로 칙서를 낭독하는 환관을 바라보았다.한 신참 병사는 두려움에 떨며 흐느꼈다.“흑흑… 드디어 폐하께서 깨어나셨구나. 이 칙서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야…”그가 처음 전장에 나섰는데, 이런 광기의 군주를 만나다니, 누가 이런 상황을 예상했으랴.연나라 태자는 마차에 실린 후에도 끊임없이 외쳤다.“이 몸을 당장 풀거
남방, 군영 안.소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서를 봉구안에게 건넸다.“연나라 황제의 글씨가 제법 괜찮구나.”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강서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길 원했다.그러나 봉구안은 문서를 흘긋 보고는 담담히 물었다.“폐하, 전쟁이 끝났사옵니다. 언제 귀경할 계획이시옵니까?”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그와 황후 간의 혼인 계약은 1년으로 정해져 있었다.이번 전쟁으로 인해 이미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으나, 황후가 그의 곁을 지켜준 덕분에 그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연나라 황제의 강서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연태자의 목숨까지 요구했을 터였다!황성.객잔에서 진왕의 호위가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나으리… 북연이 항복하였습니다!”이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어야 했다.그러나 진왕에게 있어 이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이렇게 끝난단 말인가…”끝난 것은 단지 전쟁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황제에 대한 꿈도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진왕은 이를 갈며 후회했다.“그 내기 따위에 집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문득 깨달은 듯, 그는 호위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내가 어리석었구나. 양식을 탈취하려고만 하였거늘… 차라리 황궁을 바로 공격했어야 했다!”호위는 그의 점점 험악해지는 표정을 보고 불안에 떨었다.“나으리, 폐하께서 곧 돌아오십니다. 차라리 서주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진왕은 그제야 표정이 풀리더니, 곧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야겠다. 소욱이 곧 돌아오겠구나. 내가 무엇을 하려 해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그는 차마 황제를 시해할 수도 없었다.황후가 숨긴 양식조차 찾아내지 못한 무능한 자들이 어찌 황제를 시해할 수 있으랴!모두 쓸모없었다!진왕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짐을 챙겨라. 서주성으로 돌아간다!”호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그의 주군이 충동적이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만약 연태자 같은 군주
봉구안은 소욱을 뒤로한 채 검은 옷을 입은 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죽음의 계곡 바깥까지 나아갔다.그녀는 마침내 그와 맞닥뜨렸고, 힘을 써서 그의 넓은 검은 옷을 잡아당겨 벗겼다.그러나 그는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검은 옷을 입은 자는 몇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다시금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중, 봉구안은 그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점을 발견하였다.‘그 자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바로 그날 천수지독의 주인임이 분명했다!봉구안의 눈에 살기가 짙게 피어올랐고, 그녀의 공격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그러나 그 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체 너를 황후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맹 소장군이라 불러야 할까?”“단회욱이 자신의 목숨으로 너의 운명을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 밤 너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익숙한 이름을 들은 순간, 봉구안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그가 단회욱의 이름을 아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정체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 틈을 타 검은 옷을 입은 자는 뒤로 물러나더니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소를 지었다.“보아하니, 너는 단회욱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봉구안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어서 말하거라…!”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쳐왔다.그림자는 그녀를 껴안고 빙글 돌았고, 봉구안이 뒤를 돌아보니, 소욱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쳤다.“걱정했다.”소욱은 차갑게 말했다.그제야 봉구안은 검은 옷을 입은 자 외에 또 다른 인물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그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훨씬 젊어 보였다.그는 나뭇가지 위에 가볍게 몸을 얹고,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달빛 아래 그의 흰옷은 눈부시게 빛났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마치 흥미로운 연극을 보고 있는 듯했다.그가 두 번째 화살을 쏘려 하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그를 단호하게 꾸짖었다.“물러가거라!”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어둠
소욱의 팔 상처는 깊지 않아 살갗만 약간 벗겨진 정도였다.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가 진짜 아파하는지, 아니면 연기인지 봉구안은 금세 분간할 수 있었다.지금은 전자였다.봉구안은 곧바로 군의관을 불러들였다.그러나 소욱은 여전히 강한 척하며 말했다.“짐은 아무렇지도 않다…”군의관은 그의 맥을 짚고,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봉구안은 군의관을 움켜쥐고 단호히 물었다.“그 화살은! 제대로 보았느냐?”군의관은 잠시 얼어붙었다.“화, 화살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사옵니다…”봉구안은 그를 놓아주고 소욱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소욱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고 있었다.이마와 목덜미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숨기려 했지만, 제왕의 위엄이 손상될까 걱정되는 기색이 역력했다.군의관이 더 있어 봐야 무용하다고 판단한 봉구안은 그를 물러가게 했다.군의관이 나가자, 소욱은 고개를 들어올렸다.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려 있었다.“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그가 이제 믿을 수 있는 이는 봉구안과 진한길뿐이었다.봉구안도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그는 분명 중독되지 않았는데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러던 중 봉구안은 문득 남강의 여자들이 죽어갔던 일이 떠올랐다.그녀는 소욱을 향해 불쑥 물었다.“전하, 저를… 원하십니까?”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봉구안의 눈빛은 엄숙하고 단호했다.그 어떠한 정욕적 뉘앙스도 없었다.“제가 의심하기로, 전하께서는 남강의 여자들처럼 진단이 어려운 독에 중독된 것이옵니다.”소욱은 몸속에서 밀려드는 격통을 참고 있었다.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듯 목이 타들어 갔다.“화살에 독이… 있었던 것이로구나…”소욱이 힘겹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하옵니다.”그녀는 바로 진한길을 불러들이고 당부했다.“폐하를 잘 지키시오!”진한길은 사태를 파악하지
이 순간, 완부옥은 혈기가 잔뜩 끓어올랐다.그녀는 소환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평소에는 입으로만 희롱하며 진정으로 강제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이번에 그녀는 은혜를 빌미 삼아 소환을 곁에 붙잡아두려 했는데, 뜻밖에도 소환이 정말로 응한 것이다.“너…”완부옥은 침을 삼키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그러나 봉구안이 허리띠를 풀고 옷깃을 여미자, 그녀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가슴싸개?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에, 여인이었던 것이다!완부옥의 얼굴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 아니, 어찌…”봉구안은 가짜 목젖을 떼어내고 태연히 인정했다.“맞아. 사실 난 여인이었어.”완부옥은 몸이 굳어져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여인… 네가 여인이라니!”그녀의 손은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봉구안은 다시 옷을 정돈하고 진지하게 강호의 예를 올려 사죄했다.그녀가 진실을 고백한 것은 완부옥의 요구 때문만이 아니었다.완부옥의 진심 어린 집착을 깨닫고 더 이상 그녀를 속이며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여러 번 자신이 완부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완부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제야 그녀가 완전히 체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너와 나는 오랜 벗이었지. 너에 대한 나의 진심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그러나 짐짓 너를 기만하여 오해를 안긴 것은 내 잘못이 맞아.”“오늘 내가 여인임을 밝힌 것은 용서를 바라서가 아니야. 단지, 네게 무의를 빌리기 위함이지.”“일이 끝난 뒤 마땅히 매를 맞을 테니, 지금 당장은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봉구안은 완부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완부옥이 이 기만을 용서할 리는 없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완부옥은 뻣뻣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리고 가짜 목젖을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네가 여인이라니, 정말…”갑자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잘됐구나!”“??!!”완부옥의 웃음소리는 매우 기괴했다.그 소리에 봉구안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구원하려면 저 진천뢰를 먼저 해결해야 해. 특히 그 죽화총까지도…”이를 생각하며 이 장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조묘안.마 대인이 갑자기 방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폐하, 폐하께서 저희를 전부 속이셨군요! 무슨 새 황제라니, 사실은 조정에 있는 반란군들을 끌어내려 하셨던 거죠?”방금 그는 소식을 들었다. 성 안에서 이미 다수의 대신들이 체포되었는데, 모두 태자를 옹립하려 했던 자들이었다.그리고 천옥의 내부 첩자들 역시 체포되었다.심지어는 그날 바로 참수된 자도 있었다.소욱은 냉혹한 눈빛으로 먼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마 대인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너무 저희를 얕보셨습니다.”“폐하께서 죽인 자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곧 교주가 북연군을 이끌고 남제를 공격할 것입니다!”“오늘 밤, 폐하께 잊을 수 없는 하루를 선물해드릴 것입니다. 폐하의 형제들과 비빈들을 하나하나 죽여버릴 것입니다!”“저희를 속인 대가가 어떤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말을 마치며 그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과 후궁들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밤하늘 아래 칼날이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왕자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외쳤다.“폐하!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제발요!”조묘 밖.이 장군은 정병들과 함께 근처 풀숲에 숨어 있었다.그는 오늘 밤 습격을 준비하며 먼저 문을 지키는 반란군을 기습해 기절시키고, 그 후 몰래 잠입해 반란군을 일망타진하려 했다.위험이 따르지만, 이렇게 해야만 했다.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이 장군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반란군도 이미 정보를 입수해 서둘러 움직이려는 듯했다.이로 인해 문을 지키던 반란군들까지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상황은 더욱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이 장군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호위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장군, 저쪽에서 누군가 옵니다.”이 장군은 즉시 손짓하며 명령했다.“숨어라!”그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자, 달빛 아래 우아한 자태의 여인들이 허리를 살랑이며 천천히
“너희들, 누구냐!”모용란의 두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고통과 불굴의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쳤다.그 무리의 우두머리는 칼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내며 말했다.“우리 주인의 성은 소씨이시다.”소...모용란은 그 순간 무엇인가를 떠올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너희들, 혹시 폐하의 은위병인 것이냐?”황제의 곁을 지키는 은밀한 경호대, 은위병.그래서, 황제가 이들을 보낸 것인가?아니, 그럴 리 없다.이들이 자신이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설마, 황제가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해둔 건가!그렇게 생각하자, 모용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녀는 마 대인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했지만, 이미 손이 없어진 그녀에게는 그럴 방법이 없었다.사당.이 장군이 매일 식사를 준비해 사당에서 이리 떨어진 곳에 두면, 그 음식은 반란군이 가져갔다.황제가 갇힌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선성의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주국공은 비밀리에 선성으로 귀환했다.북연과 남제 사이에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신방 안반란군의 감시를 받는 곳에서, 식사는 비빈들에게도 배급되었다.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태후가 직접 음식을 분배했는데, 원래라면 여기서 가장 신분이 높은 태황태후에게 우선적으로 배급되어야 했다.하지만, 태후가 음식을 건네자마자, 녕비가 그걸 낚아챘다.“고모님, 먼저 드세요! 남은 건 저와 언니가 나눠서 드리겠습니다!”태황태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태후는 태황태후를 잠시 바라보다가 길을 막으려는 장공주에게 말했다.“어머니, 이러다 정말 쓰러지십니다…”장공주와 녕비는 좌우에서 태후를 부축하며 한쪽으로 데려갔다.녕비는 돌아보며 태황태후를 힐끗 쏘아보았다.‘죽어버린 늙은 할망구! 왜 굶어 죽질 않는 거야!’“아무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맨날 불평만 해대고, 그래도 먼저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생사가 걸린 일 앞에는 본래 모두가
갑작스레 나타난 새 황제를 마주하자, 마 대인은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정면으로 나섰다.더는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욱 황제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당장 교서를 작성하여 진정한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십시오!”그는 부하들에게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외쳤다.“이 아이야말로 소욱 황제의 친아들입니다. 며칠 전, 이미 황제 폐하와 재회를 했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왕이 단호히 꾸짖었다.“건방지다! 황위 계승이 어찌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단 말이냐!”서왕의 호통에 이어 이 장군이 분노하며 꾸짖었다.“대담한 환관 놈! 아무 아이나 데려와 황실 자손이라니, 우리를 바보로 아느냐!”병사들 역시 웃음과 비아냥으로 덧붙였다.“환관 놈아, 저 아이는 네 양자가 아니냐!”마 대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너희들 모두 믿지 않는구나! 좋아, 그렇다면 소욱 황제를 저 세상으로 보내겠다! 서왕 전하, 이 장군, 두 분께서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이 곳 조묘에는 제가 미리 진천뢰를 설치해두었습니다…”그 순간, 새 황제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사당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선황 폐하! 신은 폐하께서 맡기신 뜻을 잊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황위에 오르는 날이 폐하께서 소장군과 황천길을 떠나는 날이라 하셨지요. 소자, 이제 폐하를 정중히 배웅해드리겠습니다!”그는 당황하여 펄쩍 뛰며 긴 손가락을 흔들며 외쳤다.“애송이! 너! 잡것! 그 입 닫지 못하겠느냐! 어떻게 감히 황… 아니, 황제 폐하를 저주한단 말이냐! 서왕, 이 장군, 이런 불효한 새황제를 너희들이 인정한단 말이냐? 설마 너희들이 소욱 황제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냐!”서왕은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이 모든 것이 선황 폐하의 뜻이오. 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네.”마 대인은 얼굴이 자주빛으로 물들며 울부짖었다.“아아…!”도대체 이 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진동하는 천둥 같은 소리의 폭발음이 들리자, 왕자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갑자기 왜 폭발한 거야!”“폐하께서 동반 자결을 하려는 게 분명해! 우리를 함께 묻으려는 거라고!”“아니야! 누가 됐든 제발 나를 내보내라!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단 말이다!”궁중에 갇혀 있던 후궁들도 서로를 끌어안고,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했다.그때, 조묘 대문 밖에서는 마 대인이 숲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나와라! 너희를 이미 다 봤다!”그러나 숲속에 숨어있던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마 대인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방금 들은 폭발음, 너희도 들었겠지? 다시 나오지 않으면, 이 안의 모두를 죽여버릴 것이다!”마 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장군이 앞으로 나섰다.“이 망할 환관 놈!”달빛 아래에서 마 대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교만하게 말했다.“오, 이게 누구십니까? 이 장군 아니십니까!”“여기서 큰절을 올립니다!”“장군님, 폐하께서 몇몇 왕자들과 국사를 논하고 계신 중이라, 저는 태황태후의 명으로 여길 지키고 있습니다.”“장군님께서 이렇게 군사를 이끌고 오시다니… 설마 반란이라도 일으키실 생각이십니까?”이 교활한 자가 도둑이 매를 들고 도둑 잡으라 외치는 모습에, 이 장군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개졌다.“퉤! 천하의 뻔뻔한 놈 같으니! 네놈들 같은 반역자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내 칼에 죽게 될 것이다!”마 대인은 태연하게 목소리를 길게 늘렸다.“장군님, 제가 분명히 말했지요? 태황태후의 명이라구요. 그런데도 이렇게 몰아붙이시다니, 과연 누가 반역자인지 궁금하군요!”이 장군은 주먹을 꽉 쥐고, 눈에 살기가 가득 찼다.옆에서 참모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장군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방금 터진 진천뢰는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일 겁니다.”이 장군은 참모의 조언을 받아들여 잠시 물러섰다.현재 이곳의 상황은 이미 서왕에게 보고한 상태였다.황제를 구출하기 위한 방법은 철저히 논의해야 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조묘는 반란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그들의 진영에는 수많은 진천뢰가 심겨져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위험 구역을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편, 묘 안에 갇힌 왕족들은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내가 뭐라 했더라? 관여하지 말자고 했지! 그런데 굳이 나를 끌고 왔단 말이야!”“그래, 맞다! 애초에 태황태우께서 태자를 책봉하겠다길래 우리가 뭘 하러 왔냐고! 결국 지금처럼 반란군에게 갇히다니, 이게 무슨 치욕인가!”그들은 평소 황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한 방에 몰려 있으니 아주 우스운 꼴이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유일한 침대는 제일 고집이 센 숙왕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바닥에 눕는 수밖에 없었다.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곧장 소문으로 퍼졌고, 당일에 이미 서왕도 소식을 접했다. 서왕은 즉시 명을 내려, 궁중에 남아 있는 내통자를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이 노력을 지휘할 이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이 장군은 병력을 거느리고 조묘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급히 구출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적정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썼다.역시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엄밀히 따지면, 태황태후와 여러 왕들의 친위병 수가 반란군보다 훨씬 많았다. 평소 같았다면 이 정도의 난동은 금세 진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꼴이었다.“정찰대를 보내라!” 이 장군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병이 돌아왔다.“장군! 조묘 안팎에 진천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이 장군의 표정이 즉각 무겁게 변했다.진천뢰라니... 그렇다면, 친위병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단을 내렸다.“좌우의 병력은 물러나라.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적을 자극하지 말라!”군대의 중심인 중군은 주력 병력이었으며, 병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장군은 정예로 이루어진 부대로 신중하게 접근하려 했다.조묘 안에서는 이미 날이 어두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 대인이 날쌘 동작으로 발을 뻗어 그 진천뢰를 걷어차 버렸다. 덕분에 내시들이 진천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그는 입을 벌린 채 소리쳤다.“다들 조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죽고싶다고해서 마음대로 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그렇게 쉽게 죽일 줄 아셨습니까?”그야말로 모두 미쳐버렸다!황제를 포함한 모두가 조묘 내에 있는 방에 갇혔다.태황태후와 후궁들은 한 방에 갇혔고, 태황태후의 얼굴은 어두운 빛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나는 정말 몰랐다. 영비가 반역자들과 손을 잡을 줄이야…”그녀는 끊임없이 후회와 자책으로 중얼댔지만, 이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은 녕비의 화를 돋구었다.녕비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태황태후를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태황태후마마! 그만 좀 하십시오!”“뭘 그렇게 무고한 척하십니까! 마마께서 나쁜 놈들을 도와주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겠어요? 병드신 지도 오래됐는데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계신 것입니까!”태황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평소 자신에게 공손하던 후궁이 이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다니.“너, 감히… 무례하다!”태후는 녕비를 품에 안으며 그녀를 감싸안았다.“태황태후마마, 녕비도 너무 놀라셨기에 실언을 한 것뿐입니다.”“흐흑…” 방 구석에서 한 후궁이 엉엉 울면서 말했다.“나, 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출궁할걸… 궁궐의 경비가 철저하다더니, 어떻게 반역자들이 우릴 이렇게 끌고 갈 수 있는 건가요!”현비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겁먹지 마세요. 이 일도 지나갈 겁니다. 폐하께서 방법을 찾아주실 거예요.”장공주는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죽어 마땅한 모용란! 천룡회와 손을 잡고 멩 소장군을 죽이다니!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야!”태후가 막으려 했지만, 장공주는 벌떡 일어나 태황태후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분노하며 외쳤다.“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죠! 그렇죠? 맹
왕가의 조묘는 장엄하고 위엄 있는 장소였지만, 현재는 반역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놓으시오... 제발! 날 만지지 마시오!”한 후궁이 땅바닥에 눕혀진 채 발버둥치며 울부짖고 있었다.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할수록 반역자들의 태도는 더욱 오만해졌다.갇혀 있던 우리 안에서 장공주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그 여인을 건드리지 마라! 어서 나를 풀어주거라! 나는 장공주다!”장공주는 생각했다. 만약 맹 소장군이 여기에 있다면, 그도 반드시 자신을 희생해서 이들을 구했을 것이다.궁녀로서 살아가는 이들은 황제에게서 외면받으며 이미 충분히 불쌍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하다니, 참으로 가증스러웠다.태후는 딸의 외침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장공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딸을 꼭 끌어안았다.한편으로는 옆에 있는 녕비도 품에 안으며,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마 대인은 음침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공주를 끌어내라!”장공주는 황제의 친누이였다.태후의 마음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안 돼!누구도 그녀의 딸을 건드릴 수 없다!태후는 죽을 각오를 다지려던 찰나,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그들을 전부 죽인다 해도, 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소욱의 반응은 극도로 냉정했다.그의 시선은 멀리, 먼 곳을 향해 있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너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내가 황위를 포기하기를 바란다면, 소환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녕비는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들었느냐! 폐하께서 얼마나 무정한지!”“우리가 왜 폐하를 위해 고통받아야 하느냐! 너희들은 참으로 어리석구나!”그녀의 외침이 있은 후, 조금 전까지 땅바닥에 억눌려 옷이 거의 벗겨질 뻔했던 후궁이 기운을 쥐어짜며 악을 질렀다.“맞아! 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냐!”“그들은 궁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단 한 번도 황제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었다!”“폐하께서
이 말이 떨어지자, 원래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람들은 이젠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하지만 소욱만은 침착하고 태연했다.황제로서, 태산이 무너져도 얼굴을 바꾸지 않을 정도의 평정심을 가져야 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아에게 독을 쓴 이유가 다 있었군…”“첫째는 소환을 제거하기 위해서, 둘째는 주국공을 선성에서 떠나게 만들어 선성을 무주 상태로 만들려 한 것이군. 천룡회, 너희는 정말로 일석이조로 움직였구나.”마 대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폐하께서는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이 빠릅니다.”“하지만 아쉽게도… 이제야 눈치 채신 게, 너무 늦었군요!”그는 냉정한 표정으로 바뀌며 말했다.“북연 대군이 남제를 공격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지금 즉시 태자를 책봉하고, 퇴위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북연군은 신호를 보면 즉시 철수할 것입니다.”“하지만 만약 그러지 않으신다면… 남제가 위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지금 선성이 무주 상태가 되면서, 남제는 이미 둘로 나뉘었습니다. 북부와 서부의 대군이 지원을 올 수 없으니, 북연군은 중부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황성을 직격할 수도 있죠! 폐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태황태후는 분노하여 외쳤다.“무엄하다! 북연이 너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주었기에, 너는 감히 네 나라를 이렇게 배신하느냐!”태자 책봉과 퇴위는 분명히 다르다.그들이 이런 계획까지 품고 있을 줄이야!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모용란을 노려보았다.“란아! 너도 이들과 한패란 말이냐!”모용란은 고통스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답했다.“고모님, 원망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것도 모두… 아이를 위해서입니다.”마 대인은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태자 전하, 미래의 남제의 군주께 인사드립니다.”아이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마 대인을 바라보았다.마 대인은 다시 일어나 소욱을 바라보며
조묘 밖은 모두 태황태후의 친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 병사들은 선제께서 그녀에게 남겨준 군사였다.태황태후는 차마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지만, 오늘만큼은 황제를 압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황제가 무정하고 무리한 짓을 먼저 시작했으니, 그녀는 깊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태황태후의 늙고 주름진 얼굴에는 결연한 기색이 드리워졌다.“황상, 오늘 네가 태자를 세우지 않으면, 할미는 절대로 네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이어 왕자들에게 말했다.“너희들도 모두 나와 뜻을 같이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남제를 지키기 위함이다!”모든 신하와 왕자들도 황제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만큼은 태황태후의 편을 들었다.“저희도 동의합니다. 태황태후께서 옳으십니다! 황제 폐하, 태자를 세우십시오!”이때 무용하게 보였던 모용란이 아이의 손을 잡고 용감히 앞으로 나왔다.그녀는 두려움 없이 황제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폐하, 태황태후께서 이렇게 하시는 건 모두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폐하께서 불귀산에 가시겠다는 고집을 부리시면, 그 어른께서 어찌 마음 편히 계실 수 있겠습니까?”“우리 아이를 태자로 세우기만 하신다면, 폐하께서 더 이상 근심하실 일도 없을 것입니다.”“폐하…”그녀는 황제 가까이 다가선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폐하, 폐하의 생모께서 왜 돌아가셨는지 기억하시지요?”“만약 태자를 세우지 않으신다면…”“제가 그 진실을 온 천하에 폭로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이 한 방은 사정없이 내리쳐져 모용란이 몇 걸음 뒤로 밀려났고, 속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 보였다.“어머니!” 아이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며 두려움에 떨었다.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서려 있었고, 소욱을 향해 증오 어린 눈길로 노려보았다.이때 마 대인이 나서서 모용란을 지켰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황제 폐하, 소인은 폐하께서 빨리 결단을 내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