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도 그냥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맹 소장군은 군의관 한명과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둘이 혹시 동성애자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잠시 숨을 고른 서왕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소신은 헛소문이라고 봅니다. 그냥 깊은 우정이겠지요.”하지만 소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그 군의관이 이름이 무엇이고 지금은 어디 있느냐?”“소신의 기억에 단씨였던 거로 기억합니다.”익숙한 성씨에 소욱은 천우비침을 떠올렸다.그 군의관이 단씨 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컸다.황제의 생각을 모르는 서왕은 이곳에 온 이유를 꺼냈다.“폐하, 맹교먹이 진짜 맹 소장군이 아닌 사칭범이라면 왜 그 일을 만천하에 알리시지 않은 겁니까?”소욱이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짐에게 다 생각이 있다.”그는 머릿속으로 그 군의관을 생각하고 있었다.서재 밖.진한길은 밖으로 나온 서왕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서왕처럼 뭇 여인들의 흠모를 한몸에 받는 사내마저도 사랑의 고민을 앓고 있다니.서왕이 평소에 궁인들에게 잘해준 것을 봐서 진한길은 그를 위로해 주기로 했다.“전하, 꽃도 각자 피는 계절이 있기 마련입니다.”서왕은 어리둥절했다.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자녕궁.장공주는 평소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친히 향낭을 수놓고 있었다.녕비가 물었다.“언니, 폐하께 드리려고 만드시는 건가요?”향낭에는 하늘을 힘차게 나는 매가 수놓아져 있으니 필이 사내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장공주 신변에 사내가 없으니 녕비는 상대가 황제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장공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아무리 친동생이라지만 남녀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향낭 같은 것을 함부로 선물하겠니?”녕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렇죠? 제가 실언을 하였네요. 그럼 이건…”“황후께 드리려는 거다.”그 말을 들은 녕비와 옆에 있던 궁녀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여인에게 주는 향낭
대전 안에서 아찔한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멍청한 것! 누가 아프단 거야? 누가 정신착란이래? 나 멀쩡하거든?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장공주의 과격한 반응에 못이겨 태후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묶도록 했다.잠시 후, 장공주는 온몸이 묶인 채로 침상에 누워 불편한 자세로 몸부림치고 있었다.“엄마마마, 살려주세요!”태후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소기야, 이게 널 돕는 일이야.”장공주는 어이가 없었다.향낭을 수놓다가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황후… 황후를 찾아가거라!”장공주가 시종에게 명령했다.태후 옆에 서 있는 녕비도 조마조마했다.‘대체 황후를 왜 찾는 거지? 언니가 드디어 미친 건가?’영화궁봉구안은 고대 서적을 펼치며 구미사 도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었다.이때, 안으로 달려온 최 상궁이 숨을 헐떡이며 아뢰었다.“마마! 큰일 났습니다! 자녕궁 쪽에… 장공주께서… 소란을 피우고 있답니다!”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지?”“맹 소장군의 죽음에 너무 상심한 장공주께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태후께서 태의를 불러 진료를 보게 하였는데 공주께서 저항이 심하셔서 밧줄로 묶었다고 합니다.”자초지종을 들은 봉구안은 생각에 잠겼다.장공주는 교먹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기에 상심하여 착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태후는 장공주의 생모이니 정도껏 할 것이고 황후가 나설 이유가 없었다.자녕궁.장공주는 드디어 발악을 멈추었다.그리고 체념한 얼굴로 태의의 진료를 받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태후는 속이 타들어갔다.“소기야, 맹교먹이 죽어서 상심한 건 알겠어. 하지만 너에겐 어미도 있잖니.”녕비도 옆에서 거들었다.“그래요, 언니. 화가 난 걸 털어만 내면 괜찮을 거예요. 저희가 언니를 해칠 리 없잖아요.”장공주는 어이없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잠시 후, 태의가 일어나서 아뢰었다.“태후마마, 소신이 자세히 진료를 본 결과 공주께서는 간열이 일반인보다 높으시지만 다른 이상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하지만 그
그날 밤, 자녕궁.소욱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후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에게 물었다.“뭐가 그리 재미 있어서 하루종일 보고 있는 것이냐?”봉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나화 비단의 구매 명책을 확보하라 지시하였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구미사 도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고는 담담히 말했다.“그냥 흔히 보이는 도안일 수도 있다.”“그럴지도 모르지요.”봉구안이 책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소욱이 물었다.“북대영에 단씨 성을 가진 군의관이 있다고 하더군. 천우비침은 그자에게서 배운 것이냐?”봉구안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소욱은 계속해서 말했다.“짐은 진실만을 원한다. 그자이냐?”봉구안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답했다.“예.”소욱은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단씨 일족의 천우비침은 절대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일반 친구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소욱이 떠보듯이 물었다.“단씨 일족은 반역죄를 저지르고 구족을 멸하는 처벌이 내려진 걸 알고 있느냐? 그 사람이 단씨의 여당이라면 죄인이란 말이다.”봉구안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답했다.“알고 있습니다.”“알면서도 관부에 넘기지 않은 것이냐? 네가 만약 죄인을 숨겨주는 거라면…”“죽었습니다.”봉구안은 아주 평온하게 그에게 말했다.너무 예상밖의 답이라 소욱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봉구안은 전혀 상심하지 않은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천수독에 당해서 죽었지요.”소욱이 흠칫하며 물었다.“네가 말한 친구라는 사람이 그자란 말이냐?”봉구안은 솟구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답했다.“예.”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말했다.“이미 죽은 사람이고 그 사람의 죄를 따지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소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짐은…”그러려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
봉구안이 소욱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단회욱이 그녀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천수독은 원래 그녀를 향해 오고 있었는데 단회욱이 그녀 대신 막아준 것이다.그리고 단회욱은 이미 천우비침의 비적을 그녀에게 줬지만 그녀는 전장을 치르느라 바빠서 절반밖에 습득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중독되어 죽어가는 단회욱을 그녀는 살리지 못했다.그 일로 그녀는 영원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그날 밤, 황궁의 수많은 사람들의 잠자리가 뒤숭숭했다.소욱은 호위들과 밤새 권법을 수련했다.호위들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정비는 내일 있을 황제와의 외출을 기대하며 꼬박 밤을 새웠다.다음 날 아침.정비는 일찍이 짐을 꾸리고 제물을 챙겼다.호송을 맡은 호위가 마차를 끌고 다가왔다.비빈들은 출궁할 때 측문으로 돌아서 나가야 했다.정비는 마차에 오르는 대신 호위에게 물었다.“폐하께선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은 것이냐?”추홍 역시 긴 궁중 복도를 바라보며 황제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호위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정비마마, 어서 차에 오르시지요.”소박한 복장을 입은 정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된다. 폐하께서 아직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내 어찌 먼저 마차에 오르겠느냐?”추홍이 말했다.“마마, 폐하께선 조금 있다가 오시려나 봅니다.”그런 그녀와는 다르게 호위가 말했다.“마마, 폐하께선 저희에게 마마를 호송하라는 지시만 내리셨고 동행하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정비는 순간 당황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호위를 바라봤다.잠시 후, 애써 감정을 추스른 정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폐하께서 정무가 다망하신가 보구나. 괜찮다.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영비의 기일에 소욱이 외출을 안 할 리 없었다.정비가 고집을 피우니 시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갔다. 땡볕 아래에서 두 시진을 버틴 정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황제의 행방을 알아보고 돌아온 호위가 아뢰었다.“마마, 폐하
황제가 직접 봉가 저택에 행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봉가 안팎은 발칵 뒤집혔다.“폐하와 마마를 뵙사옵니다!”봉대인은 가장 앞에 서서 황제를 맞이했고, 그 뒤에는 봉 부인, 첩실인 임이랑, 며느리 주씨,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서자 봉명헌이 줄을 서 있었다.봉명헌은 황제를 몹시 두려워했다.거북이처럼 고개를 움츠리고,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과거 그는 뇌물을 써 관직을 사려다 들켜 엄벌을 받았었다.그때 황제에게 가서 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그 순간 황제의 눈에 서려 있던 혐오와 살기를 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임이랑은 이번이야말로 황제를 직접 뵙는 첫 자리였다.그의 위엄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소욱은 비록 오늘 용포를 입지는 않았으나,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엄이 넘쳐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폐하께서 저희 같은 천한 집에 행차하시다니, 실로 가문의 영광이옵니다!”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봉 대인도 이 순간만큼은 말문이 막혔다.소욱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짐은 그저 황후와 함께 군기감을 시찰하던 길에 들른 것뿐이니, 특별히 신경 쓰지 말거라. 황후의 본가에 잠깐 온 셈이라 생각하거라.”그가 한마디마다 자신을 짐이라 칭하니, 결코 평범한 사위의 방문으로 느껴질 수 없었다.붉은 얼굴로 웃음이 가득한 봉 대인과는 달리, 임이랑의 속마음은 시기로 가득했다.‘황후는 총애를 못 받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는 봉가 저택에 행차까지 하신 거지?’일행은 본청으로 자리를 옮겼다.남녀는 각각 자리하여 앉았고, 봉안진은 군무로 바빠 아직 귀가하지 못했기에 서자인 봉명헌이 봉 대인과 함께 황제를 접대하게 되었다.세 명의 남자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벌을 받는 것 같았다.소욱의 시선이 봉명헌에게 머물렀다.“살이 많이 빠졌구나.”봉 대인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소자가 요즘 책을 벗 삼아 열심히 정진하느라,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옵니다.”봉명헌은 말을 참지 못하는 성
봉명헌은 마치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 입에 올렸다.소욱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가 올리는 술잔을 기꺼이 받았다.그러나 봉구안의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으며, 봉명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칼날이 서려 있는 듯했다.달빛이 버들가지를 비추는 밤, 봉가 저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떠들썩했다.봉안진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멀리서 봉명헌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손님이 왔느냐?” 봉안진은 음식을 나르는 하인에게 물었다.그 하인은 급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모시고 친정을 다녀가셨습니다!”봉안진은 크게 놀랐다.황후가 친정에 온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었다. 심지어 황제까지 함께 오다니…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그는 급히 본청으로 들어섰고, 과연 황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급히 손을 모아 인사드렸다.“폐하, 황후마마께 문안드립니다.”소욱은 술잔을 잇달아 비우며, 눈에는 이미 약간의 취기가 서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유지하며 맑은 표정을 보였다.“오늘은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주씨는 남편을 맞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서방님, 이제야 오셨군요. 아버님과 서방님은 이미 만취하셨습니다. 막내 도련님은 계속 소란만 피웠답니다.”봉명헌은 취기가 오른 채 봉안진을 끌어다가 중간에 앉히며 말했다.“형님, 예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어서 폐하… 아니, 형님께 술을 올리십시오! 오늘은 군신 관계도 없고 폐하도 없으니, 우리는… 가족입니다!”그는 말을 마치자 먼저 황제에게 술을 올렸다.소욱은 술잔을 들려던 찰나, 봉구안이 갑자기 일어섰다.그는 그녀를 자연스레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배불리 먹었사옵니다.”소욱은 그녀의 불쾌함을 감지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그녀가 정청을 나설 때까지 그는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봉명헌은 여전히 술을 권했고, 봉 부인은 폐하가 더 마실 수 없음을 깨닫고 하인들에게 봉명헌을 끌고 나가도록 지시했다.술에 취해
봉구안은 어리둥절했다.그러나 이내, 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단숨에 품에 안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소욱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턱은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고, 고개를 기울이자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귓가와 뺨,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너에게 강하게 나가야 했어야 했다.”말을 마친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그녀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문 밖에 서 있던 진한길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침상의 삐걱하는 소리에 얼굴이 굳어졌다.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그날 밤 달빛은 유난히 밝았으나,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방 안. 침상 위.봉구안은 소욱의 위에 걸터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아래에 눕혀진 소욱은 두 손이 허리띠로 단단히 묶인 채, 차가운 미간 사이로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어서 풀어라!”봉구안은 그의 허리띠를 빌려 손을 묶어둔 뒤, 날렵하게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방금 전 그의 막무가내인 행동에 그녀의 비녀가 약간 흘러내렸지만, 그로 인해 그녀의 기세가 약해지는 일은 없었다.“폐하께서는 술에 취하셨사옵니다. 어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침상을를 벗어났다.방금 전 소욱이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에게 억지로 굴 생각을 한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었다.봉구안은 결코 그렇게 쉽게 당할 여인이 아니었다.그때, 방 안의 촛불이 갑자기 꺼졌다.봉구안은 걸음을 멈췄다.갑작스레 뒤에서 짐승 같은 존재가 나타나 그녀를 덮쳤고, 그녀는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쿵!등이 침상에 닿았다.그녀 위에 소욱이 웅크려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그녀는 위압감을 느꼈다.소욱은 얼굴을 가까이 대며 술 취한 듯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차가운 술처럼 맑고도 매운 기운을 내뿜었다.“다음엔 좀 더 단단히 묶는 걸 배우는 게 좋겠군.”봉구안은 숨이 멎을 듯했다.……깊은 밤.봉안진은 아내 주씨
어젯밤, 소욱은 술김에 주책없이 봉구안에게 억지로 힘을 쓰려 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은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 그의 눈을 한 대 쳤다.이제 그 원흉이 바로 앞에 서 있다. 손에는 껍질을 벗긴 계란이 들려 있었다.눈은 신체의 다른 부위와 달라, 내공으로 멍을 없앨 수 없었다. 봉구안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를 치료했으나, 효과가 더디기만 하였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미 열여섯 개의 계란을 썼건만, 소욱의 눈 주위 멍은 여전히 푸르스름해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소욱은 답답한 마음에 앉아 있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이토록 힘센 여자는 처음 보는구나!”소욱은 어젯밤 그녀의 주먹이 거의 자신의 눈을 멀게 할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봉구안은 계란을 손에 쥔 채 그의 눈 주위에 굴리던 중, 갑자기 손목을 움켜잡혔다.“감히 나에게 방자하게 굴다니, 네가!”소욱은 울분을 토하듯 외쳤다.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였다.“폐하께서 먼저 잘못하셨사옵니다.”소욱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모든 원인은 그 빌어먹을 봉명헌 때문이었다!그가 한 말은 어디서 나온 괴상한 이론이란 말인가!만약 봉명헌이 이를 듣는다면 분명 억울해할 것이다.그가 알려준 이론은 평범한 여인들에게 통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말도 안되는 이론을 봉구안에게 쓰려 했으니…소욱은 애초에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이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욱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계속 해라.”그러나 봉구안은 기어코 굴복하지 않았다.“손이 저려옵니다. 이제 폐하께서 직접 하시지요.”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봉구안은 밤새 잠도 못 자고 그의 눈에 계란을 굴리는 일을 하느라 지쳐있는 상태였다.봉구안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소욱은 마침내 체념하듯 입을 열었다.“어젯밤, 과인은 과음을 했을 뿐이다.”봉구안은 냉정히 쏘아붙였다.“술에 취하셨으면서, 어찌하여 진한길에게
채월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씨께서 송 대부의 청혼을 받아들이신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제가 걱정되는 건 송가가 아씨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요. 나중에 괜히 헛된 기쁨을 누리다가 상처받는 건 결국 아씨일 겁니다.“구안 아씨, 제발 장미 아씨를 설득해 주세요.”채월은 늘 아씨를 위해 애쓰며 마치 친정 식구처럼 한 걸음 더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봉구안은 북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송려가 봉장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때 그녀는 송려에게 먼저 집안 어른들을 설득한 뒤 봉장미에게 고백하라고 경고했었다.그리고 그 당시에는 봉장미가 송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이제 사태가 그녀의 예상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봉구안은 즉시 송려를 찾아갔다.그녀의 추궁에 송려는 솔직하게 시인했다.“나는 이미 결심했소. 봉장미가 아니면 누구도 아내로 맞이하지 않을 것이오.”“일전에 집안 어른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그들은 반대하지 않았소.”봉구안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속마음에는 분노와 의심이 억눌려 있었다.“정말로 사실대로 말했소? 장미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렸소?”송려의 준수한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어색함이 스쳤다.그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아직 말하지 않았소. 하지만 꼭 말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혼인 후에 내가 책임지고 불임이라고 말할 생각이오.”이 말에 봉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하오.”“거짓말로 쌓은 기반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게다가 거짓말은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소. 그뿐 아니라, 그대 자신은 정말로 평생 아이가 없는 것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소?”그녀는 지금 둘이 단지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여겼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이런 애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해 무너지는 법이다.비록 송려가 그녀의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봉구안은
봉구안은 맹 부인을 뵙고 난 뒤 곧장 자유각으로 향했다.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만약 가면을 쓴 채로 들어가면, 아마도 봉장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유각에 들어가기 전, 그녀는 조용히 가면을 벗었다.마당에 들어서자, 봉장미가 그네에 앉아있고, 송려가 옆에서 조용히 그네를 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송려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애틋했다. 이때 봉장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발견했다.“언니!”봉장미는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다.봉구안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받아 안았다.봉장미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고,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얼굴에 간단한 화장으로 그려 넣은 가짜 흉터만 빼면, 두 사람의 모습은 거의 완벽히 닮아 있었다.“언니! 드디어 돌아왔네요!”송려는 뒤에서 이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봉구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크게 놀랐다.더욱 놀라운 건 이 사람의 외모가 소환과 똑같다는 점이었다!하지만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기에, 잠시 생각한 뒤 금세 진실을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소환이 정말 나를 철저히 속였군.’하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소환이 봉장미를 대하는 태도에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봉장미를 만나본 후, 봉구안은 사모의 머뭇거림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이전 북방에 왔을 때와 달리, 봉장미는 이제 기억도, 정신도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어린아이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의 정신은 온전히 제자리를 찾았다.이 모든 것은 송려의 뛰어난 의술 덕분이었다.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봉구안은 송려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말했다.“정말 감사드립니다.”송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적응하지 못하다가 말했다.“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소.”그는 더 묻지 않았다.강호에서 정체를 숨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싶어 한다면, 굳이 파고들 필요가
봉구안이 떠난 지 이틀 뒤, 소욱 역시 황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백성들의 불안을 막기 위해, 그는 남산왕과 여러 장수들에게 구중탑과 양연삭의 일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도록 특별히 당부했다.동방세는 자유로운 협객의 삶을 선택하며 다시 강호로 나섰다.천룡회의 음모로 많은 무림인이 목숨을 잃었기에, 이제 강호에는 더 많은 정의로운 이들이 필요했다.무림맹을 재건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동방세를 맹주로 추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그동안의 일을 겪으며 스스로가 맹주에 적합하지 않음을 절감했고, 더구나 덕으로 원한을 갚을 만큼 대인배도 아니었기에 단호히 거절했다.“무림맹? 필요할 때는 보배요, 필요 없을 땐 썩은 짚단이지.”그는 이를 깨달았다.과거 수환이 왜 부맹주 자리를 죽어도 원치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사람이 있는 곳에는 늘 음모와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강호가 조정은 아니더라도, 세속의 더러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동방세는 차라리 자유로운 협객으로 남길 원했다.그가 맹주를 거절하자, 무림맹은 다시금 무력으로 강자를 뽑자는 의견을 냈다.그리고 보름 뒤, 무림대회가 열렸다.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등장했다.천룡회 교주를 압살했던 염추가 연이어 고수들을 쓰러뜨리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무림인들은 결과를 승복했다.맹주가 여자라 한들, 아무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면 그게 도리였다.그리하여 염추는 새로운 무림맹 맹주로 추대되었다.동방세가 안정과 균형을 중시했다면, 염추는 다소 다른 태도를 보였다.맹주가 되자마자, 그녀는 무림맹의 본거지를 기존의 심가오에서 오양산으로 옮기고, 영향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오양산.염추는 이 익숙한 장소를 바라보며, 과거 교주가 앉았던 자리 위에 당당히 올랐다.밤이 깊고, 대청 안에는 그녀 홀로 남았다.마치 여제의 등극처럼, 그녀의 눈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드디어, 더는 누구 아래에도 억눌리지 않아.”늘 그녀를 따라다니던 부하가 어둠에서 나와 단
“북방으로 가겠다고?”소욱은 봉구안이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자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소욱은 본래 구중탑의 일이 끝나면 봉구안이 자신과 함께 황성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였다.그래서 그녀를 기다리며 떠나지 않았던 것이었다.겨우 단회욱이 숨을 거두기를 기다렸건만, 이제 그녀는 단회욱의 유골을 위해 북방으로 가려 하다니…물론 그녀는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이런 일이 특별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는?그녀는 그를 위해 생각해 준 적이 있었던가?소욱은 제자리에 선 채, 주먹을 조금씩 쥐어갔다.그가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다시 돌아올 것이냐.”봉구안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즉시 답하지 않았다.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몇 초 사이, 소욱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나고 말았다.어둑했던 그의 눈동자는 삽시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는 봉구안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문 뒤에 밀어붙이며 거칠게 물었다.“너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봉구안,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단회욱이 죽기 전에 했던 말 때문인가? 네가 나를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그가 죽자마자 네 마음은 그쪽으로 기울어 버렸어!”봉구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북방에 가는 건 회욱 오라버니 때문만은 아닙니다…”소욱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변명으로 여겼다.그는 들으려 하지 않고 차갑게 몰아붙였다.“네가 바라는 대로라면 황위를 내려놓으란 말이냐!”“좋아, 솔직히 말하지.”“대의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유언을 남기고 황위를 물려줄 수 있다. 하지만, 여인을 위해 천하를 포기하는 건 절대 불가능해!”“나는 너를 위해 끝없이 양보할 수 있지만, 저 흙바닥처럼 낮아질 수는 없지 않겠느냐!”봉구안은 그를 밀쳐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제가 북방에 가는 건 무엇보다도 제 쌍둥이 여동생 봉장미 때문입니다.”소욱은 순간 멍해졌다.장미? 봉장미?그 아이는 이미 죽지 않았던가?혹 그녀의 시신이 북방에 묻혀 있는 걸까?봉구안은 그에게 진실을 말
남산왕부.다음 날, 봉구안은 자신의 방에서 깨어났다.눈을 뜨니 한 시녀가 침대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소 공자, 깨어나셨군요!”왕부의 시녀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녀가 남장을 한 탓에 공자라 부르고 있었다.봉구안은 몸을 일으켜 앉아 이마를 짚으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양연삭이 도망쳤다.누군가 그를 구해간 것이다.분명 그들 눈에 띄지 않은 누군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간단히 세수한 후 소욱을 찾아갔다.소욱은 그녀가 이렇게 일찍 깨어난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내상을 입었으니 충분히 쉬어야 낫는다.”봉구안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곧바로 물었다.“사람을 보내 양연삭을 수색했습니까?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요?”소욱은 담담히 대답했다.“아직 아무런 실마리가 없다. 일어난 김에 아침을 들도록 해라. 양연삭은 중상을 입었으니 큰 일을 벌일 힘도 없을 것이다.”그가 말하는 사이, 눈빛으로 진한길에게 아침상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봉구안은 머릿속이 가득 차 있어, 상 위의 음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옆방.단정과 염추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염추는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네가 날 의심한다고? 단정, 사람이라면 양심은 있어야지. 난 너희들 중 누구보다도 양연삭이 죽길 바란다! 내가 그를 구했을 리가 없잖아!”단정의 의심은 단순히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네가 그렇게 딱 맞춰 나타난 걸 우연이라 믿으라는 거냐? 말해봐, 네가 우릴 몰래 지켜본 게 아니면 뭐겠어?”“예전에도 네가 우리 형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형이 네 도움이 가장 필요했을 때, 이번 구중탑에서도,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도, 오양산을 잃었을 때도, 네가 무슨 도움을 줬지?”“난 네가 진심으로 형을 돕고 싶어 했는지조차 의심스럽워. 도대체 목적이 뭐야!”“무슨 소란이냐.”봉구안이 문가에 서서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단정은 즉시 염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이 여자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접근
양연삭을 상대하기 위해 소욱은 이미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호위병들은 결진을 이루며 그물을 내려 양연삭을 마치 고기잡이하듯 가두었다.곧이어 병사 몇 명이 주변을 돌며 위치를 바꾸자, 그물구멍은 더욱 단단히 조여졌다.양연삭은 두 손을 휘저으며 발버둥쳤다.그러나, 구중탑이 붕괴하면서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데다, 여러 명과 싸운 후 특히 소환의 일격까지 더해져 그의 진기는 안으로 흡수되기는커녕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평소라면 이 그물을 쉽게 부숴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진기가 계속 새어나가며 그의 몸은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화살을 쏴라!” 남산왕이 소리쳤다.이제 곧 대마두를 사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갑자기 주변에 하얀 연기가 터져 나왔다.그 연기의 중심은 바로 양연삭이었다.봉구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누군가 양연삭을 구하고 있었다!연기가 너무 짙어 모두 앞을 볼 수 없었고, 연기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남산왕은 급하게 외쳤다.“화살을 쏴라! 어서 쏴라!”그러나, 양연삭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한 잔의 차를 다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연기가 완전히 가셨다.봉구안은 즉시 양연삭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그가 있던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그를 가뒀던 그물은 찢겨나간 상태였다.그녀는 앞으로 나아가 확인하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의 반쯤 기댄 몸은 소욱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었다.소욱은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며 냉랭한 표정으로 남산왕에게 명령을 내렸다.“온 도시를 뒤져 양연삭을 잡아라. 죽었으면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동방세는 그물을 살펴본 후 찢어진 자국을 보고 말했다.“검기로 끊은 것이군.”…남산왕부.귀환한 이들을 본 단정은 얼굴에 분노를 띤채 물었다.“양연삭은 죽었나요?”이어 소욱의 품에 안긴 채 의식을 잃은 봉구안을 보고는 급히 묻기 시작했다.“형수님,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양연삭에게 당한 것이란 말인가요? 이렇게 많
양연삭은 많은 이들의 내력을 흡수했지만, 이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봉구안의 말로 인해 그의 진기가 크게 요동쳤고, 몸속에서 진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억제하려다 보니 만건성법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내력을 소모하며 자신의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이 짧은 순간, 봉구안과 동방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파공참… 두 사람의 협동 공격이었다.봉구안은 자신의 검을 동방세에게 던졌고, 동방세는 먼저 직격으로 나아가 어지러운 검술로 양연삭을 몰아붙였다.양연삭이 몇 발자국 물러섰을 때, 그는 머리 위를 주시하지 못했다. 그 순간, 봉구안이 독수리처럼 급습하며 손바닥에 기를 모았다.쾅!봉구안의 손바닥이 양연삭의 정수리를 직격했다.양연삭의 두개골이 울리는 순간, 소욱은 곧바로 옆에서 손바닥으로 보강했고, 십이사명이 동시에 공격을 퍼부었다.여러 갈래의 힘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양연삭은 본능적으로 진기를 발산하며 모두를 튕겨냈다.그의 면갑이 부서지며 드러난 얼굴은 단단하고도 강직한 모습이었다.쿵! 쿵쿵!모두가 한순간에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남산왕과 장사들은 방패로 결진해 그들을 보호하며 물러서지 않았다.그러나 양연삭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발광하듯 비명을 질렀다.“아아악…!”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그의 시야에는 온통 붉은 빛이 퍼져 있었다.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눈가를 타고 흘렀다.피였다.선혈이 두 줄기 눈물처럼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소환! 소환!!” 양연삭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그는 무작정 주위의 모든 것을 공격했다. 돌들이 튕겨 날아가고, 땅은 기류에 의해 먼지가 날렸으며, 나무들이 쓰러져 내렸다.봉구안은 파공참을 사용하기 위해 전신의 내력을 한 곳에 집중했기에 자신을 방어할 여력을 두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일어서기조차 힘겨운 상태였다.소욱은 그녀를 부축하며 어깨를 감싸 함께 섰다.그는 그녀가 진정으로 양연삭을
옥령산.양연삭은 어지럽게 얽힌 바위 틈에서 뛰쳐나왔다.병사들은 적을 만난 듯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동방세가 즉시 앞으로 나서며 혼자서 양연삭을 저지해, 그를 그냥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곧이어 산을 지키는 십이사명이 출동해 진을 결성하였고, 양연삭을 가두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봉구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격전은 바위를 산산조각 내며 이어졌다.병사들이 활과 화살로 공격했지만, 양연삭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봉구안은 가면을 쓰지 않고 본래 얼굴을 드러냈다.그때 양연삭은 소욱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맹성주도 알아차렸다. 바로 자신의 아들 양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였다.맹성주가 아니었다면, 양소도 그렇게 비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양연삭의 가면 속 두 눈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즉시 십이사명의 포위를 뚫고 소욱과 봉구안을 향해 돌진했다.봉구안은 장검을 뽑아 정면에서 맞섰다.소욱과 동방세는 양쪽에서 협공했다.세 사람은 마치 화살처럼 날카로운 진형을 이루었다.진한길과 병사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양연삭의 공격을 저지하며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양연삭의 목표는 분명했다. 먼저 소욱을 죽이고, 그다음 맹성주를 죽이는 것이었다.그는 전투 중 바위 파편에 의해 이미 중상을 입었으나, 그의 마공은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해가 되는 한 사명을 붙잡아 그들의 내공을 전부 흡수했다.나머지 열한 사명이 분노하며 외쳤다.“마두야! 목숨을 내놔라!”동방세는 가장 먼저 봉구안의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무모했다. 예전 같지 않았다.양연삭의 함정에 빠진 봉구안이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동방세가 다급히 외쳤다.“비켜! 소환!”양연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소환?동방세가 맹성주를 소환이라 불렀다?설마… 맹성주와 소환이 같은 사람인가!?양연삭은 순간 타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새로운 원한과 옛 원한이
단회욱은 죽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력이 다해 있었다.그동안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 다섯 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이제, 그의 구안이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곁에는 친구와 연인이 있는 것을 본 이상, 자신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는 완전히 힘을 놓아버렸다.그는 이 생에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정의 울부짖는 소리가 고요한 밤을 찢어발겼다.온 왕부가 암울한 그림자에 휩싸였다.소욱은 뜰에 서서,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마음이 불안해졌다.만약 단회욱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었을까?그들과 단 며칠 함께했을 뿐이고, 나눈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지만, 그는 왜 봉구안이 과거에 단회욱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이토록 온화한 군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을 생각했다.소욱은 봉구안이 단회욱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뭐 하나 잡히지도 않고,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남산왕은 왕부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불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단회욱을 위해 묻을 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하지만 단정은 이를 거절했다.그는 형을 옥령산에 묻고 싶지 않았다.양연삭도 옥령산에서 죽었으니, 형이 죽어서까지 편히 쉬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단정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북방에 묻겠다고 했다.그곳은 형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곳이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형님께서는 살아 있을 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죽어서만큼은 북방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단정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삼키며 봉구안에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단회욱의 시신이 화장되던 날, 소욱도 자리에 있었다.그의 시선은 내내 봉구안을 향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줄곧 무표정이었다.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마치 죽은 사람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