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자녕궁.소욱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황후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에게 물었다.“뭐가 그리 재미 있어서 하루종일 보고 있는 것이냐?”봉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나화 비단의 구매 명책을 확보하라 지시하였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구미사 도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고는 담담히 말했다.“그냥 흔히 보이는 도안일 수도 있다.”“그럴지도 모르지요.”봉구안이 책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소욱이 물었다.“북대영에 단씨 성을 가진 군의관이 있다고 하더군. 천우비침은 그자에게서 배운 것이냐?”봉구안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소욱은 계속해서 말했다.“짐은 진실만을 원한다. 그자이냐?”봉구안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답했다.“예.”소욱은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단씨 일족의 천우비침은 절대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일반 친구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소욱이 떠보듯이 물었다.“단씨 일족은 반역죄를 저지르고 구족을 멸하는 처벌이 내려진 걸 알고 있느냐? 그 사람이 단씨의 여당이라면 죄인이란 말이다.”봉구안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답했다.“알고 있습니다.”“알면서도 관부에 넘기지 않은 것이냐? 네가 만약 죄인을 숨겨주는 거라면…”“죽었습니다.”봉구안은 아주 평온하게 그에게 말했다.너무 예상밖의 답이라 소욱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봉구안은 전혀 상심하지 않은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천수독에 당해서 죽었지요.”소욱이 흠칫하며 물었다.“네가 말한 친구라는 사람이 그자란 말이냐?”봉구안은 솟구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답했다.“예.”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말했다.“이미 죽은 사람이고 그 사람의 죄를 따지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소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짐은…”그러려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
봉구안이 소욱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단회욱이 그녀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천수독은 원래 그녀를 향해 오고 있었는데 단회욱이 그녀 대신 막아준 것이다.그리고 단회욱은 이미 천우비침의 비적을 그녀에게 줬지만 그녀는 전장을 치르느라 바빠서 절반밖에 습득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중독되어 죽어가는 단회욱을 그녀는 살리지 못했다.그 일로 그녀는 영원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그날 밤, 황궁의 수많은 사람들의 잠자리가 뒤숭숭했다.소욱은 호위들과 밤새 권법을 수련했다.호위들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정비는 내일 있을 황제와의 외출을 기대하며 꼬박 밤을 새웠다.다음 날 아침.정비는 일찍이 짐을 꾸리고 제물을 챙겼다.호송을 맡은 호위가 마차를 끌고 다가왔다.비빈들은 출궁할 때 측문으로 돌아서 나가야 했다.정비는 마차에 오르는 대신 호위에게 물었다.“폐하께선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은 것이냐?”추홍 역시 긴 궁중 복도를 바라보며 황제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호위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정비마마, 어서 차에 오르시지요.”소박한 복장을 입은 정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된다. 폐하께서 아직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내 어찌 먼저 마차에 오르겠느냐?”추홍이 말했다.“마마, 폐하께선 조금 있다가 오시려나 봅니다.”그런 그녀와는 다르게 호위가 말했다.“마마, 폐하께선 저희에게 마마를 호송하라는 지시만 내리셨고 동행하신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정비는 순간 당황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호위를 바라봤다.잠시 후, 애써 감정을 추스른 정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폐하께서 정무가 다망하신가 보구나. 괜찮다.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영비의 기일에 소욱이 외출을 안 할 리 없었다.정비가 고집을 피우니 시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갔다. 땡볕 아래에서 두 시진을 버틴 정비는 머리가 어지러웠다.황제의 행방을 알아보고 돌아온 호위가 아뢰었다.“마마, 폐하
황제가 직접 봉가 저택에 행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봉가 안팎은 발칵 뒤집혔다.“폐하와 마마를 뵙사옵니다!”봉대인은 가장 앞에 서서 황제를 맞이했고, 그 뒤에는 봉 부인, 첩실인 임이랑, 며느리 주씨,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서자 봉명헌이 줄을 서 있었다.봉명헌은 황제를 몹시 두려워했다.거북이처럼 고개를 움츠리고, 얼굴조차 들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과거 그는 뇌물을 써 관직을 사려다 들켜 엄벌을 받았었다.그때 황제에게 가서 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그 순간 황제의 눈에 서려 있던 혐오와 살기를 그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임이랑은 이번이야말로 황제를 직접 뵙는 첫 자리였다.그의 위엄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소욱은 비록 오늘 용포를 입지는 않았으나,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엄이 넘쳐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폐하께서 저희 같은 천한 집에 행차하시다니, 실로 가문의 영광이옵니다!”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봉 대인도 이 순간만큼은 말문이 막혔다.소욱은 무표정하게 말했다.“짐은 그저 황후와 함께 군기감을 시찰하던 길에 들른 것뿐이니, 특별히 신경 쓰지 말거라. 황후의 본가에 잠깐 온 셈이라 생각하거라.”그가 한마디마다 자신을 짐이라 칭하니, 결코 평범한 사위의 방문으로 느껴질 수 없었다.붉은 얼굴로 웃음이 가득한 봉 대인과는 달리, 임이랑의 속마음은 시기로 가득했다.‘황후는 총애를 못 받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는 봉가 저택에 행차까지 하신 거지?’일행은 본청으로 자리를 옮겼다.남녀는 각각 자리하여 앉았고, 봉안진은 군무로 바빠 아직 귀가하지 못했기에 서자인 봉명헌이 봉 대인과 함께 황제를 접대하게 되었다.세 명의 남자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벌을 받는 것 같았다.소욱의 시선이 봉명헌에게 머물렀다.“살이 많이 빠졌구나.”봉 대인은 재빨리 말을 받았다.“소자가 요즘 책을 벗 삼아 열심히 정진하느라,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옵니다.”봉명헌은 말을 참지 못하는 성
봉명헌은 마치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 입에 올렸다.소욱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가 올리는 술잔을 기꺼이 받았다.그러나 봉구안의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으며, 봉명헌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마치 칼날이 서려 있는 듯했다.달빛이 버들가지를 비추는 밤, 봉가 저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떠들썩했다.봉안진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멀리서 봉명헌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손님이 왔느냐?” 봉안진은 음식을 나르는 하인에게 물었다.그 하인은 급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모시고 친정을 다녀가셨습니다!”봉안진은 크게 놀랐다.황후가 친정에 온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었다. 심지어 황제까지 함께 오다니…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그는 급히 본청으로 들어섰고, 과연 황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급히 손을 모아 인사드렸다.“폐하, 황후마마께 문안드립니다.”소욱은 술잔을 잇달아 비우며, 눈에는 이미 약간의 취기가 서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유지하며 맑은 표정을 보였다.“오늘은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주씨는 남편을 맞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서방님, 이제야 오셨군요. 아버님과 서방님은 이미 만취하셨습니다. 막내 도련님은 계속 소란만 피웠답니다.”봉명헌은 취기가 오른 채 봉안진을 끌어다가 중간에 앉히며 말했다.“형님, 예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어서 폐하… 아니, 형님께 술을 올리십시오! 오늘은 군신 관계도 없고 폐하도 없으니, 우리는… 가족입니다!”그는 말을 마치자 먼저 황제에게 술을 올렸다.소욱은 술잔을 들려던 찰나, 봉구안이 갑자기 일어섰다.그는 그녀를 자연스레 바라보았다.“폐하, 신첩은 배불리 먹었사옵니다.”소욱은 그녀의 불쾌함을 감지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그녀가 정청을 나설 때까지 그는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봉명헌은 여전히 술을 권했고, 봉 부인은 폐하가 더 마실 수 없음을 깨닫고 하인들에게 봉명헌을 끌고 나가도록 지시했다.술에 취해
봉구안은 어리둥절했다.그러나 이내, 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단숨에 품에 안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그러나 소욱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턱은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고, 고개를 기울이자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귓가와 뺨,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너에게 강하게 나가야 했어야 했다.”말을 마친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그녀를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문 밖에 서 있던 진한길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침상의 삐걱하는 소리에 얼굴이 굳어졌다.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그날 밤 달빛은 유난히 밝았으나,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방 안. 침상 위.봉구안은 소욱의 위에 걸터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아래에 눕혀진 소욱은 두 손이 허리띠로 단단히 묶인 채, 차가운 미간 사이로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어서 풀어라!”봉구안은 그의 허리띠를 빌려 손을 묶어둔 뒤, 날렵하게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방금 전 그의 막무가내인 행동에 그녀의 비녀가 약간 흘러내렸지만, 그로 인해 그녀의 기세가 약해지는 일은 없었다.“폐하께서는 술에 취하셨사옵니다. 어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침상을를 벗어났다.방금 전 소욱이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에게 억지로 굴 생각을 한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었다.봉구안은 결코 그렇게 쉽게 당할 여인이 아니었다.그때, 방 안의 촛불이 갑자기 꺼졌다.봉구안은 걸음을 멈췄다.갑작스레 뒤에서 짐승 같은 존재가 나타나 그녀를 덮쳤고, 그녀는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쿵!등이 침상에 닿았다.그녀 위에 소욱이 웅크려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그녀는 위압감을 느꼈다.소욱은 얼굴을 가까이 대며 술 취한 듯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차가운 술처럼 맑고도 매운 기운을 내뿜었다.“다음엔 좀 더 단단히 묶는 걸 배우는 게 좋겠군.”봉구안은 숨이 멎을 듯했다.……깊은 밤.봉안진은 아내 주씨
어젯밤, 소욱은 술김에 주책없이 봉구안에게 억지로 힘을 쓰려 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은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 그의 눈을 한 대 쳤다.이제 그 원흉이 바로 앞에 서 있다. 손에는 껍질을 벗긴 계란이 들려 있었다.눈은 신체의 다른 부위와 달라, 내공으로 멍을 없앨 수 없었다. 봉구안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를 치료했으나, 효과가 더디기만 하였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미 열여섯 개의 계란을 썼건만, 소욱의 눈 주위 멍은 여전히 푸르스름해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소욱은 답답한 마음에 앉아 있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이토록 힘센 여자는 처음 보는구나!”소욱은 어젯밤 그녀의 주먹이 거의 자신의 눈을 멀게 할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봉구안은 계란을 손에 쥔 채 그의 눈 주위에 굴리던 중, 갑자기 손목을 움켜잡혔다.“감히 나에게 방자하게 굴다니, 네가!”소욱은 울분을 토하듯 외쳤다.봉구안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하였다.“폐하께서 먼저 잘못하셨사옵니다.”소욱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도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모든 원인은 그 빌어먹을 봉명헌 때문이었다!그가 한 말은 어디서 나온 괴상한 이론이란 말인가!만약 봉명헌이 이를 듣는다면 분명 억울해할 것이다.그가 알려준 이론은 평범한 여인들에게 통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말도 안되는 이론을 봉구안에게 쓰려 했으니…소욱은 애초에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이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욱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으며 말했다.“계속 해라.”그러나 봉구안은 기어코 굴복하지 않았다.“손이 저려옵니다. 이제 폐하께서 직접 하시지요.”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봉구안은 밤새 잠도 못 자고 그의 눈에 계란을 굴리는 일을 하느라 지쳐있는 상태였다.봉구안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소욱은 마침내 체념하듯 입을 열었다.“어젯밤, 과인은 과음을 했을 뿐이다.”봉구안은 냉정히 쏘아붙였다.“술에 취하셨으면서, 어찌하여 진한길에게
“황후, 곧 네가 아끼던 시녀와 다시 만나게 될 터인데, 어찌 조금의 기쁜 기색도 없단 말이냐?”소욱은 고양이가 쥐를 쥔 듯한 기세로 여유로움을 즐기며 말했다.그는 눈앞의 여인을 관찰하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폈다.지난번 그녀가 갖은 꾀를 부려 연상을 궁 밖으로 내보내려 했을 때부터,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비장의 수를 더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봉구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고, 소욱은 그 미소에 잠시 넋을 잃었다.그러나 그 순간…“윽!”그녀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눈두덩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손에 들린 삶은 달걀은 노른자와 흰자가 뒤섞이며 산산조각이 나, 그의 눈 주변으로 흩어졌다.“황후! 감히 나를 해치려 드는 것이냐!”소욱은 크게 소리쳤다.이 여자가 도대체 얼마나 대담한지,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북방(北境)맹건 장군 부부는 급히 전해진 서찰을 읽었다.맹건 장군의 아내는 그 서찰을 읽고 나서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교먹이 비영령을 위조했다고요? 그렇다면 그 아이가 이전에 나에게 돌려준 것은 가짜였단 말인가…”그녀는 즉시 비밀함을 열어 안에 든 비영령을 꺼내 보았다.언뜻 보기에는 진짜와 똑같았다.맹건 장군이 그것을 받아들고 한참을 꼼꼼히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가짜군! 진짜처럼 정교하지 않소!”그는 곧장 그 가짜 패를 부숴버렸다.“집안 도둑 고양이를 경계하지 못했군요.”맹 부인이 차갑게 한마디 덧붙였다.“그 당시 받을 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건가요?”맹건 장군은 부인이 화내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에, 변명 대신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했다.“내 탓이오. 나이가 들어 눈이 흐릿해서…”“눈이 흐린 거요? 아니면 마음이 약한 거요?”그녀는 날카롭게 물었다.맹건 장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 깊은 자책에 빠졌다.맹건 장군은 어느 면에서나 훌륭하였으나, 감정에 지나치게 연연한다는 약점이 있었다.교먹은 어린
화살에 맞은 뒤, 교먹은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그녀는 이렇게 죽어버리는 것도 차라리 속 시원하리라 생각했다.그러나 뜻밖에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이 그녀를 깨워내었다.눈을 뜬 교먹은 자신이 낯선 산속 동굴에 누워 있음을 알았다.사방이 돌벽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그녀는 허술한 나무판자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다.그때, 귀가에 노쇠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맹 소장군, 깨어났군…”교먹은 뒤통수 너머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의 얼굴은 흉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통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교먹은 본능적으로 물었다.“당신이 저를 구했나요?”그렇겠지, 언니는 원래 많은 사람을 구해왔던 사람 아닌가!이 사람 역시 그 장 공주처럼 그녀를 맹 소장군으로 착각하고, 기어코 살려내려 한 것이리라.그때, 그 남자의 손이 교먹의 가슴에 닿았다.그녀는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이어지는 것은 섬뜩한 웃음소리.“과연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맹 소장군답소. 이 몸뚱이, 마치 쇠로 만들어진 것 같구려.”“치명적인 화살에 맞고도 이렇게 살아남다니 말이오.”그날 밤, 그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맥박도 멈춘 상태였다.그는 그녀의 몸과 머리를 갈라내 이 비범한 생존력을 탐구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그녀가 갑자기 살아난 것이었다.살아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그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마치 희귀한 보물을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교먹은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당신은… 누구죠?”“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남자는 주름진 손으로 교먹의 턱을 들어 올리며, 기괴한 자세로 그녀를 올려다보게 했다.“중요한 건 맹 소장군, 드디어 당신이 내 손에 떨어졌다는 것이오.”“하하… 당신이 죽인 우리 양 나라 사람들의 원한, 이제 당신이 갚아야 할 차례요!”“당신은 나에게 고통받다 죽을 운명이오!”그는 이성을 잃은 듯 미친 듯한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