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아이를 의심하는 거니?”맹 부인이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봉구안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사모인 맹 부인이었다.그녀는 장미가 당한 일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고 교먹을 의심하게 된 이유까지 덧붙였다.자초지종을 들은 맹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만약 교먹이 처음부터 소장군 자리를 노렸다면 너를 피해 장미에게 그런 잔인한 일을 벌였을 리 없어.”“만약 이 일이 그 아이의 짓이라면 정말 무서운 아이야!”맹 부인은 장미 사건에 교먹이 개입되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언제부터 이렇게 잔혹하게 변해간 걸까!봉구안도 마음이 착잡했다.“저도 그 아이를 의심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 많은 사건들이 그 아이를 향하고 있어요.”맹 부인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그리고 또 하나가 있어. 원래는 증거를 잡은 후에 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말해도 무방할 것 같구나.”“난 용호군이 기습을 당한 사건에 교먹이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어. 며칠 전까지 줄곧 그 일을 몰래 조사했는데 아쉽게도 증거는 못 잡았어.”봉구안은 사모를 위로했다.“그 아이가 한 일이라면 필히 흔적을 남겼을 겁니다. 지금 시급한 건 사부님 사건이에요.”맹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장군부에 그런 물건을 몰래 들여올 사람은 교먹뿐이더구나.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떻게 그 많은 상자들을 몰래 저택으로 운송했는지는 아직도 갈피가 안 잡혀.”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밖에서 육 숙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장군, 어떻게 오셨나요?”교먹이 온 것이다!봉구안은 재빨리 몸을 숨겼고 맹 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마당에서 교먹이 거의 쓰러져 가는 담장을 수리해 주고 있었다.맹 부인을 본 그녀는 짐짓 놀란 얼굴로 말했다.“어머니, 안 그래도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여기 와계셨군요.”교먹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환히 웃고 있었다.육 숙모는 맹 부인이 오랜 지인을 만나러 온 줄 알고 비밀을 지켜주었
벽 안쪽에 새로 교체한 벽돌의 이음새가 이상했다.봉구안은 딱히 티를 내지 않고 육 숙모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왔다간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밤이 되자 그녀는 육 숙모댁 서쪽 별채에 숨어들었다.잡동사니들을 다 정리하고 나니 안쪽에 느슨해진 벽돌들이 보였다. 대충 칠해진 진흙을 걷어내니 네모난 판자가 보였다.그 판자를 뜯어내자 지하통로가 나 있었다.그녀는 횃불로 안을 비춰보고 교먹이 어떻게 상자들을 장군부로 운반했는지 알아차렸다.다음 날.봉구안은 다시 맹 부인을 찾았다.그녀가 어제 알아본 일을 설명하기도 전에 맹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생부가 보낸 긴급 서신이야. 네 사부께 보내는 거였는데 내가 먼저 뜯어서 읽었어. 너도 한번 읽어보렴.”맹 부인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봉구안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서신을 열어보니 폭군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 일로 봉 대인을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맹 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봉구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폐하께선 아무 연유도 없이 봉씨 가문을 치려 하지 않을 겁니다.”지금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북부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곧이어 그녀는 서신을 내버려두고 맹 부인께 육 숙모네 집에서 발견한 단서를 설명했다.설명을 들은 맹 부인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육 숙모네 집에 지하통로를 만들었단 말이냐!”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분명 지하통로를 처리하러 다시 돌아올 겁니다.”“네 말이 맞아. 사람을 시켜 감시해야겠어.”황성.어느덧 시간은 흘러 10월말이 되었다.봉안진과 주씨 가문 여식과의 혼례가 곧 앞으로 다가왔다.혼례를 준비하는 봉씨 저택은 기쁨이 흘러넘쳐야 마땅하나, 봉 대인은 점점 우울에 빠져 있었다.봉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북부에 보낸 서신은 지금도 답신이 오지 않고 있었다.그는 치미는 분노를 발설할 곳이 없었다.‘대체 내 딸을 어떻게 구워삶았길래!’무릇 여자라면 현모양처
교먹은 장물의 출처를 밝혀냈고 그것들이 무덤도둑의 소행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그들은 은닉한 장물들을 몰래 장군부로 운반했다.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자신했던 그들은 관병들이 장군부를 수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맹건은 무죄 석방되었고 흠차 대신도 신상을 규명하는 서신을 황성에 보냈다.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맹 소장군이 아버지를 구한 일은 군영의 미담이 되어 퍼져나갔다.장군부는 드디어 차압이 풀렸다.맹 장군이 돌아오는 날, 맹 부인과 교먹은 대문 앞에서 그를 마중했다.“아버지!”교먹은 격앙된 목소리로 맹 장군을 부르며 맹 부인보다도 먼저 달려나갔다.맹 부인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그날 밤.맹 부인은 봉구안과 만났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교먹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이렇게 큰 판을 설계하여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일까?봉구안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어쩌면 사모께서 용호군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맹 부인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내 주의를 분산시켜 용호군 사건에 대한 조사를 멈추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지?”맹 부인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정말 치밀한 아이구나! 나와 네 사부가 그 아이에게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식으로 우릴 대한단 말이냐!”봉구안이 싸늘히 말했다.“도덕이라는 것이 없고 아주 잔인한 아이입니다.”“사모와 사부님의 안전, 그리고 나아가서 북대영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교먹을 계속 북부에 남겨둘 수는 없습니다.”맹 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다음 날 저녁.장군부로 돌아온 교먹은 익숙한 인영을 보았다.그녀는 마당에서 사부, 사모와 활짝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놀란 교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갔다.“언니?”은색 가면을 쓴 봉구안이 뒤돌아서더니 그녀를 향해 담담히 웃었다.“왔구나, 내 동생.”저택 안에는 외부인이 없었다.교먹은
자진궁.진길은 다급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섰다.“폐하, 황후마마께서 북부에 계신다는 소식이 있습니다!”곧이어, 병풍 뒤에서 온몸으로 냉기를 풍기는 황제가 걸어나왔다.소욱의 두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살기와 분노가 요동치고 있었다.‘내 이럴 줄 알았지.’황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시위들 데리고 북부로 떠나거라.”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그렇게 대단한 재주를 가진 여자라면 진길이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조회.봉 대인은 이미 죽을 준비를 마친 듯, 공허한 표정으로 조회에 임했다.‘내가 딸을 잘못 가르친 탓이지. 어찌 자기 자유만 추구하고 가문의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단 말이냐.’힘든 조회가 끝나고 황제가 자신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황제는 마치 한달 기약을 잊기라도 한 듯이, 조회가 끝나고 대전을 나가버렸다.봉 대인은 황제의 뜻을 알 수 없어 제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오늘은 안 죽어도 된다는 건가?’한편, 자녕궁.태후는 가빈의 헛소리를 듣고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황후가 사당에 없다고?”가빈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예, 태후마마! 제발 황후마마를 살려주시옵소서! 분명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어딘가로 끌고 갔을 겁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태후께 청을 들이는 일뿐이었다.태후는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멍청한 것!’황제가 황후를 어디로 끌고 갔을 리가 없고 분명 황후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다.어쩜 황후는 위험에 처해 돌아오지 못할 처지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다만 황제가 왜 이 일을 굳이 숨기고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11월17일.황제는 직접 변방 군영을 시찰하겠다고 나섰다.하지만 그가 어느 군영으로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북부.봉구안은 소환의 신분으로 가면을 쓰고 북대영을 출입했다.그녀가 군영에 오자마자 교먹은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다녔다.사람들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고 생각했다.교먹이 매
사내는 느긋하게 등을 돌리고 싸늘한 눈으로 봉구안을 응시했다.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기가 황궁보다 편하더냐.”말투는 담담했지만 봉구안은 그가 분노를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황후가 신변에서 도망을 쳤으니 황제로서 존엄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소욱은 걸음을 움직여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섰다.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사내는 그녀와 한걸음 남겨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의 거대한 체구가 햇빛을 가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곧이어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면사포를 벗겼다.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마지막에 턱끝에 닿았다.“왜 도망친 거지?”말투는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눈빛이었다.봉구안은 두려움없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답했다.“두려웠기 때문입니다.”문득 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계속 말해보거라.”봉구안은 죽음 앞에 두려워서 벌벌 떠는 대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날 밤에… 신첩은 오라버니께 배운 기술로 폐하를 기절시켰지요. 그후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요.”“자유를 잃은 이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여자 사체를 하나 찾아서 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모두가 믿게 하고 싶었지요.”소욱의 눈빛은 날카롭고 어두웠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 같았다.“정말 죽고 싶었다면 짐이 네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다.”봉구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북부로 도망치는 길에서 힘들게 사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신첩은 저를 곱게 길러주신 부모님이 떠올랐지요. 그리하여 욕심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황후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지요.”“폐하, 신첩의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압박했다.“뭘 잘못했다고 생각
교먹은 곧장 황제와 황후가 있는 막사로 갔다.맹 장군이 친히 말동무를 해드리고 있었다.황제의 옆에 앉은 황후의 입술이 유난히 빨갰는데 딱 봐도 격렬한 입맞춤 후에 남은 흔적이었다.황제의 시선은 수시로 황후에게 향하고 있었고 마치 그녀를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이는 교먹이 바라던 장면이 아니었다.황제가 도망친 비빈을 잡았는데 당연히 엄벌에 처해야 마땅했다.하물며 황성에서 그녀가 본 황제는 분명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봉구안은 분명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테고 거세게 반항을 해야 마땅했다.그들 사이가 이렇게 화목할 리가 없었다.교먹은 여러 의문을 참으며 억지미소로 예를 행했다.“소신, 폐하와 황후마마를 뵈옵니다.”“예는 되었다.”소욱은 대외적으로 황후가 처음부터 자신과 동행하여 변방의 장령들을 위로할 계획이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긴 여정에 지쳐 잠시 역관에다 쉬다가 늦었다고도 덧붙였다.허점이 많은 해명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맹 장군은 두 사람을 위해 거처를 마련했다 했지만 소욱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거절했다.그 뒤로 소욱은 계속해서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봉구안이 말했다.“북대영에은 여인군이 있다고 들었는데 맹 장군, 날 위해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겠나?”교먹이 미처 뭐라 하기 전에 소욱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황후, 군영은 황궁과 달라. 짐의 옆에 있거라.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저들에게 시키면 될 일이다.”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봉구안은 공손히 답했다.“예.”교먹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황후가 자신을 따로 부르려 한다는 건 분명 황제가 왜 그 오두막에 나타났는지 묻기 위해서일 것이다.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밀고했다는 것을 황후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북대영의 연무장은 무척 훌륭했다. 여인군은 풍채가 남달랐는데 대부분 전장에 부군을 잃은 미망인들로 구성되어 부군 대신 변방을 지키겠다는 것을 구호로 삼고 있었다. 아주 감동적인 사례였다.연무가 끝난 후, 소욱
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해명했다.“폐하는 줄곧 맹씨 부자의 손에 너무 많은 병력이 치중될까 걱정하셨지요.”“교먹은 맹건의 제자이자 그동안 자식처럼 돌본 아이이니 교먹을 황성으로 부른다면 맹건 장군의 약점을 잡은 셈이 됩니다.”소욱은 냉소를 지었다.“맹교먹을 인질로 삼자는 말로 들리는군. 황후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나?”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사적인 감정보다는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북대영에서 맹 소장군의 위망은 이미 군주를 넘어섰지요.”“신첩이 보기에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소장군을 황성으로 부른다면 점차 북대영의 관할권도 폐하의 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그녀의 진솔한 제안은 소욱으로 하여금 점차 후궁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법도를 잊게 만들었다.그 역시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맹씨 부자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황제로서 그들을 견제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황제라는 자리는 본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하는 자리이며, 이는 소욱도 예외가 아니었다.전쟁을 치를 때, 그는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을 지켰지만 천하가 태평한 지금 그에게는 권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했다.북부에 시찰을 와서 군영과 북부 백성들이 맹씨 부자를 신으로 칭하는 것 또한 보았다.그러니 그는 신이라는 칭호를 없앨 필요가 있었다.2각이 지난 후, 마차는 온천 객잔 앞에 멈추었다.산을 등지고 지은 이 객잔은 각 방마다 온천이 있었는데 남제에서도 호화롭기로 유명한 객잔이었다.황성에는 천연 온천이 없었다.멀리 고생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소욱은 굳이 일만 하다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진길이 두 사람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렸다.객잔 주인은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그 나이에도 여전히 매혹적이었다.이 객잔에 투숙하는 투숙객들은 대부분이 부자 아니면 관료들이었으나 소욱의 주변으로 풍기는 비범한 기질은 여주인을 놀라게 했다.눈앞의 사내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옥패만 봐도 귀중하여 구하기도
봉구안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고개를 황급히 돌려 가까스로 입맞춤을 피하였다. 그녀의 눈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속삭였다.“보은이라느니, 짐을 위해서라느니… 너는 참으로 위선적이구나.”“너는 이미 맹교먹이 너를 배신했다는 걸 알지 않았느냐? 맹교먹을 곁에 두어 천천히 괴롭히려는 속셈이겠지…”“짐의 생각이 맞느냐?”봉구안은 잠시 표정이 얼어붙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이어 황제가 다시 물었다.“너는 정말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인가?”봉구안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저는…”“오늘 오두막에서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짐을 들고 있었다. 본디 도망치려 했던 것이 아니었느냐?”황제는 그녀의 속내를 모두 꿰뚫어 본 듯했다.그녀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애원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그러나 그녀는 단지 고개를 들어 묵묵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모든 것이 무언의 도전처럼 보였다.“돌아오고 싶었사옵니다.”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맹교먹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믿었다.“그 아이는 남제 최고의 여장군이다. 그 아이를 망가뜨리면 너는 무엇으로 배상할 작정인가? 남제에 대한 가치로 따지자면, 너는 그 아이의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니 말이다.”봉구안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신첩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사옵니다.”“짐은 너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그는 다시 입술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봉구안은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폐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까? 신첩은 예전에 산적들에게…”그 말을 들은 황제는 잠시 멈췄다. 그의 눈빛은 차가워졌고, 목소리에는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너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엄밀히 따지면, 그녀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