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느긋하게 등을 돌리고 싸늘한 눈으로 봉구안을 응시했다.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기가 황궁보다 편하더냐.”말투는 담담했지만 봉구안은 그가 분노를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황후가 신변에서 도망을 쳤으니 황제로서 존엄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소욱은 걸음을 움직여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섰다.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사내는 그녀와 한걸음 남겨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의 거대한 체구가 햇빛을 가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곧이어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면사포를 벗겼다.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마지막에 턱끝에 닿았다.“왜 도망친 거지?”말투는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눈빛이었다.봉구안은 두려움없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답했다.“두려웠기 때문입니다.”문득 사내의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계속 말해보거라.”봉구안은 죽음 앞에 두려워서 벌벌 떠는 대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날 밤에… 신첩은 오라버니께 배운 기술로 폐하를 기절시켰지요. 그후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요.”“자유를 잃은 이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여자 사체를 하나 찾아서 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모두가 믿게 하고 싶었지요.”소욱의 눈빛은 날카롭고 어두웠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 같았다.“정말 죽고 싶었다면 짐이 네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다.”봉구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북부로 도망치는 길에서 힘들게 사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신첩은 저를 곱게 길러주신 부모님이 떠올랐지요. 그리하여 욕심을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황후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지요.”“폐하, 신첩의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압박했다.“뭘 잘못했다고 생각
교먹은 곧장 황제와 황후가 있는 막사로 갔다.맹 장군이 친히 말동무를 해드리고 있었다.황제의 옆에 앉은 황후의 입술이 유난히 빨갰는데 딱 봐도 격렬한 입맞춤 후에 남은 흔적이었다.황제의 시선은 수시로 황후에게 향하고 있었고 마치 그녀를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이는 교먹이 바라던 장면이 아니었다.황제가 도망친 비빈을 잡았는데 당연히 엄벌에 처해야 마땅했다.하물며 황성에서 그녀가 본 황제는 분명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봉구안은 분명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테고 거세게 반항을 해야 마땅했다.그들 사이가 이렇게 화목할 리가 없었다.교먹은 여러 의문을 참으며 억지미소로 예를 행했다.“소신, 폐하와 황후마마를 뵈옵니다.”“예는 되었다.”소욱은 대외적으로 황후가 처음부터 자신과 동행하여 변방의 장령들을 위로할 계획이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긴 여정에 지쳐 잠시 역관에다 쉬다가 늦었다고도 덧붙였다.허점이 많은 해명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맹 장군은 두 사람을 위해 거처를 마련했다 했지만 소욱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거절했다.그 뒤로 소욱은 계속해서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봉구안이 말했다.“북대영에은 여인군이 있다고 들었는데 맹 장군, 날 위해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겠나?”교먹이 미처 뭐라 하기 전에 소욱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황후, 군영은 황궁과 달라. 짐의 옆에 있거라.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저들에게 시키면 될 일이다.”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봉구안은 공손히 답했다.“예.”교먹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황후가 자신을 따로 부르려 한다는 건 분명 황제가 왜 그 오두막에 나타났는지 묻기 위해서일 것이다.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밀고했다는 것을 황후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북대영의 연무장은 무척 훌륭했다. 여인군은 풍채가 남달랐는데 대부분 전장에 부군을 잃은 미망인들로 구성되어 부군 대신 변방을 지키겠다는 것을 구호로 삼고 있었다. 아주 감동적인 사례였다.연무가 끝난 후, 소욱
봉구안은 담담한 어조로 해명했다.“폐하는 줄곧 맹씨 부자의 손에 너무 많은 병력이 치중될까 걱정하셨지요.”“교먹은 맹건의 제자이자 그동안 자식처럼 돌본 아이이니 교먹을 황성으로 부른다면 맹건 장군의 약점을 잡은 셈이 됩니다.”소욱은 냉소를 지었다.“맹교먹을 인질로 삼자는 말로 들리는군. 황후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나?”봉구안은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사적인 감정보다는 폐하의 심려를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북대영에서 맹 소장군의 위망은 이미 군주를 넘어섰지요.”“신첩이 보기에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소장군을 황성으로 부른다면 점차 북대영의 관할권도 폐하의 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그녀의 진솔한 제안은 소욱으로 하여금 점차 후궁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법도를 잊게 만들었다.그 역시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맹씨 부자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황제로서 그들을 견제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황제라는 자리는 본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하는 자리이며, 이는 소욱도 예외가 아니었다.전쟁을 치를 때, 그는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을 지켰지만 천하가 태평한 지금 그에게는 권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했다.북부에 시찰을 와서 군영과 북부 백성들이 맹씨 부자를 신으로 칭하는 것 또한 보았다.그러니 그는 신이라는 칭호를 없앨 필요가 있었다.2각이 지난 후, 마차는 온천 객잔 앞에 멈추었다.산을 등지고 지은 이 객잔은 각 방마다 온천이 있었는데 남제에서도 호화롭기로 유명한 객잔이었다.황성에는 천연 온천이 없었다.멀리 고생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소욱은 굳이 일만 하다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진길이 두 사람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렸다.객잔 주인은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그 나이에도 여전히 매혹적이었다.이 객잔에 투숙하는 투숙객들은 대부분이 부자 아니면 관료들이었으나 소욱의 주변으로 풍기는 비범한 기질은 여주인을 놀라게 했다.눈앞의 사내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옥패만 봐도 귀중하여 구하기도
봉구안은 아주 빠르게 반응했다. 고개를 황급히 돌려 가까스로 입맞춤을 피하였다. 그녀의 눈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속삭였다.“보은이라느니, 짐을 위해서라느니… 너는 참으로 위선적이구나.”“너는 이미 맹교먹이 너를 배신했다는 걸 알지 않았느냐? 맹교먹을 곁에 두어 천천히 괴롭히려는 속셈이겠지…”“짐의 생각이 맞느냐?”봉구안은 잠시 표정이 얼어붙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이어 황제가 다시 물었다.“너는 정말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인가?”봉구안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저는…”“오늘 오두막에서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짐을 들고 있었다. 본디 도망치려 했던 것이 아니었느냐?”황제는 그녀의 속내를 모두 꿰뚫어 본 듯했다.그녀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애원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그러나 그녀는 단지 고개를 들어 묵묵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모든 것이 무언의 도전처럼 보였다.“돌아오고 싶었사옵니다.”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맹교먹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믿었다.“그 아이는 남제 최고의 여장군이다. 그 아이를 망가뜨리면 너는 무엇으로 배상할 작정인가? 남제에 대한 가치로 따지자면, 너는 그 아이의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니 말이다.”봉구안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신첩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사옵니다.”“짐은 너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그는 다시 입술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봉구안은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폐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까? 신첩은 예전에 산적들에게…”그 말을 들은 황제는 잠시 멈췄다. 그의 눈빛은 차가워졌고, 목소리에는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너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엄밀히 따지면, 그녀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황성으로 관직을 받으러 간다고 해서, 교먹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무심결에 황제 곁에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이것이 정녕 사저의 뜻이란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다. 황제가 여인의 말에 휘둘려 자신에게 감찰위 직위를 내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교먹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사실 봉구안 또한 소욱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분명 어젯밤, 그는 그녀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던가.봉구안이 그를 바라보자, 황제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은 차가웠지만, 오직 그녀만이 알아챌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너는 짐의 결정에 만족하느냐?"황제가 시키는 일인데 어찌 그녀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곧이어 황제는 교먹에게 명을 내렸다."관직이 중하니, 삼일 내로 출발하도록 하라.""황제 폐하…" 교먹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때, 맹 장군이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장군 맹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 아이를 대신하여 황제 폐하의 큰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그러고는 눈짓으로 교먹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라는 신호를 보냈다.교먹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황제 폐하의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사람들은 모두 황제와 황후를 배웅했다.마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봉구안은 창문을 열어 바깥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눈앞에는 온통 하얗게 펼쳐진 잔잔한 눈발이 가득했다.봉구안은 이번 눈이 지나면 북방이 훨씬 깨끗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녀는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눈이 안으로 들어오는구나."황제는 슬며시 봉구안의 손을 잡았다.봉구안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그의 기
가빈은 태황태후의 물음에 모두 답하였다. "신첩이 사람을 시켜 사당에 가서 살펴보았사온데, 황후마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그제야 황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을 단정하였사옵니다." 태황태후의 얼굴이 한층 더 엄중해졌다. "가빈, 네가 알고 있느냐? 함부로 말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중벌을 받는 일이다. 내가 다시 묻겠노라. 정말로 황후가 사당에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황태후마마! 신첩,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사옵니다." 태황태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황후가 정말 사당에 없다면, 그동안 어디에 있었단 말이냐?" 황제와 관련된 일은 감히 조사할 수 없는 터, 굳이 스스로에게 불편함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가빈에게 명하였다. "내가 네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내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황후에게는 별다른 위험이 없는 듯하니, 곧 돌아올 것이니라. 네가 이 일을 정말로 알고자 한다면 사사로이 황후에게 물어보도록 하여라." 가빈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정녕 사실입니까!" "황후마마께서 무사하시다니 다행이옵니다!" 태황태후는 친히 가빈에게 당부하였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주저 없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여라." "예, 태황태후마마!" 섣달 그믐날. 소욱과 그 일행은 황성과 인접해 있는 의성에 이르렀다. 이미 해가 저문 뒤였고, 그들은 의성 안에 위치한 객잔에 투숙하기로 하였다. 의성까지 오면서 소욱과 봉구안은 각기 방을 따로 썼으나, 이 객잔은 방이 몹시 부족하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여러 호위들은 다 함께 1층 창고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은 유독 바람이 차가웠고, 봉구안 또한 바닥에서 자며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침대가 넉넉하였던 터라, 이전에 운성의 객잔에서 그랬듯 한 침대에 눕고도 서로 살갗이 맞닿을 일
그 객잔 하인이 말을 더 붙이려 했으나 소욱이 그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고, 그는 몸서리를 치며 입을 다물었다.봉구안은 별 생각 없이 그저 소욱의 취향이 독특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군영에도 겨울에 물놀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이것이 몸을 단련하는 방법이라 말하곤 했다.삼일 후, 황성에 도착해 입궁하기 전 연상이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연상은 매우 기뻐하며 소리쳤다."마마!"그녀가 ‘죽은’ 후, 소욱은 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가 줄곧 사당에 머물러 있었다고 알렸다.봉구안은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 소욱은 연상을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을 말이다…입궁 후, 소욱은 조정의 일에 곧바로 착수하였다.봉구안은 영화궁에 머물며 다시 황후의 자리를 지켰다.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으나, 사실 그녀의 마음 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사방에 아무도 없을 때에야 연상이 용기 내어 물었다."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찾으셨습니까?"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소욱은 그녀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교먹을 황성에 묶어 두었으니, 이제 맹 부인은 안심하고 용호군 사건을 조사할 수 있었다.그녀 역시 교먹을 더욱 자세히 조사할 수 있었다.봉장미는… 북방에 남아 잘 지낼 것이라 믿었다.이어서, 그녀는 오백이 가져다준 가사약을 잘 보관하여 만일을 대비했다.오후.가빈과 강빈은 소식을 듣고 곧바로 영화궁을 찾았다.가빈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황후마마, 정말 사당에 다녀오신 거예요? 제가 사람을 보내 확인했는데, 마마가 그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답변만 받았었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봉구안은 많은 것을 밝히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말했다."네가 보낸 사람이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가빈이 더 캐물으려 하자, 강빈이 곧바로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황후마마, 벌써 섣달 그믐날이 지났습니다. 설날 연회에 대비하여, 저희가 도울 일이
’침전’이라는 말에 봉구안은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으나, 그의 예리한 눈을 속이진 못하였다. 이는 분명 놀람, 거부감, 그리고 거부의 뜻이 담긴 표정이었다."흠."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저 ‘예’만 할 줄 아는 줄 알았더니."봉구안은 미묘한 긴장감을 띠며 입술을 떼었으나, 이 순간에는 말을 아끼는 것이 나을 터. 다행히 ‘폭군’은 그녀의 냉랭한 태도를 견디지 못했는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자리를 떴다.이틀 후.교먹은 황성에 도착하여 감찰위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먼저 입궐하여 하례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교먹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보를 흘려준 덕에 황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등을 돌려 배신하는 자는 결코 군자의 도리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스스로 군자라고 자부한 적은 없었으나,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교먹이 궁을 나서려는 찰나, 황후의 부름을 받았다. 그녀는 이 부름을 예감하고 있었다. 내전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오로지 봉구안의 얼굴만을 보았다. 여전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렸다."황후마마를 뵈옵니다."궁중은 무겁고, 높은 담벼락에 조그만 창문이 달려 있어, 대낮이라 해도 등이 밝혀지지 않으면 어둑어둑하고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봉구안은 그늘과 빛이 섞인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고도 영기가 가득했다."폐하께서는 너를 꽤나 중히 여기시는구나."교먹은 쓴웃음을 지었다."언니도 알다시피, 나는 북방에 남아 사부님과 사모님 곁에 머물고 싶었어.""그저 어찌 된 일인지 폐하께서 갑자기 날 황성으로 불러들이신 거야."봉구안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감찰위는 궁성 각 문을 관할하는 직책이라, 앞으로 자주 궁중에 드나들 수 있겠구나.""내 벗이 되어 주면 좋지 않아?"교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것만이 좋은 점이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명을 절대 따르지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
황제는 용좌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무백관을 훑었다.“과인이 황성을 비운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사이 그대들은 더욱 해이해졌구나.”문무백관들은 몸을 낮추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정에서 명하여 각지에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라 했거늘. 과인이 묻겠다. 너희는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대부분의 신하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사건 수사는 지방 관아의 일 아닌가.그들은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다.그중 몇몇 관료만이 그나마 성의를 보이며 대답했다.“폐하, 신이 아는 바에 따르면 이 약쟁이 사건은 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사람은 이성을 잃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전에 천용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약쟁이로 구성된 군단이 실제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폐하, 신이 들은 바에 따르면 동산국이 비밀리에 약쟁이를 양성하고 있으며, 병력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약쟁이 독도 동산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소욱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눈빛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약쟁이 사건은 백성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도 관련된 일이다. 너희 가문의 안위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리 무감각할 수 있느냐.”꾸짖음을 들은 관료들은 줄줄이 엎드려 스스로 죄를 청했다.“부끄럽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소욱은 그들을 곧장 벌하지는 않았다.대신 명을 내렸다.“과인이 너희들에게 직접 수사하라 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오늘부터 약쟁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다면 스스로 고하라. 훗날 과인이 직접 밝혀낸다면 그 자는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며 구족이 멸문당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그중 몇몇은 속삭였다.“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봉구안이 약쟁이의 본거지가 황성에 있을 것이라 단언한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제 전역의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설명했다.“정말 막다른 길에 몰려야 그들도 허점을 보입니다.”“이번에 문제가 생긴 도시들. 그 위치와 거리로 계산해 보면, 명령이 어디에서 내려졌는지 역산할 수 있어요.”지도 위에는 이미 여러 곳의 약쟁이 거점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최근 발생한 약쟁이의 운송 경로와 이동 시간, 중간에서 방향을 바꾼 흔적까지 더하면 본거지가 어느 지역인지 대략 짚어낼 수 있었다.이런 판단력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었다.봉구안은 시간과 거리의 계산만으로도 적의 주둔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그래야 곧장 본진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소욱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이라니… 정말 그곳인가.”역시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그들은 황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죽산진을 들렸다.황성으로 돌아가기 전 소탁을 보기 위함이었다.보아하니 소탁은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어 실명에 위험까지 있었다.소욱은 그를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맡기기로 했다.이 작은 죽산진에서는 명의라 할 만한 자를 구하기도 어려웠다.자객의 습격을 떠올린 소탁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는 형인 소욱을 걱정하며 말했다.“약쟁이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선 이번 여정 내내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결국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자신의 상처보다 제왕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봉구안은 하얀 천으로 눈을 가린 소탁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이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그녀가 물었다.“열무신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소탁은 고개를 저었다.“그 자객을 쫓아 한참을 달아났습니다. 호위들도 따라잡지 못했지요. 혼자서 움직였으니, 살아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도중에 남긴 흔적이라도 있다면 좋겠습니다.”봉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그 닭장수들은 고문을 당해 사람 꼴이 아니었다.그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 그 닭들을 거래한 뒤, 그걸 어디에 쓰는지도 몰랐습니다.”“누가 높은 값을 제시하길래,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열무신은 무고한 이를 죽이지 않았다.그들이 실토한 이상 그는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마침 소탁과 마주쳤다.소탁은 내내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소탁은 성품이 부드럽고 인자했다.이런 고문이나 심문 같은 일은 애초에 잘하지 못했다.황제가 곁에 붙여준 암위들도 제법 실력은 있었지만, 닭장수들을 떨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열무신은 달랐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지옥불에서 기어나온 귀신 같았다.맑은 날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존재감 하나로 공포를 자아냈다.소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저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군요.”열무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손에 묻은 피를 닦고, 수건을 바닥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잔챙이들이지. 아무리 캐물어도 쓸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닭장수 몇 명을 잡아봤자 소용없었다.열무신의 마음엔 짙은 짜증이 피어올랐다.약쟁이의 수법은 치밀하고 조심스러웠다.겹겹이 함정을 깔아놓은 듯, 쉽게 뿌리를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둡게 눈을 떴다.속이 타들어갔고, 분노를 쏟아낼 데도 없었다.소탁은 그의 좌절과 혼란을 읽고 조심스레 말했다.“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 집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고 길을 나서시지요.”그의 말 뜻은, 강주로 돌아가 황제와 황후에게 상황을 전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권하는 것처럼 들렸다.열무신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이런 와중에도 밥이 넘어간단 말입니까.”소탁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제
봉구안은 자신의 친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몰랐다.그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지녔고, 내용을 명확히 꿰뚫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하지만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었다.지나치게 총명하면 오래 못 간다.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억눌렀고, 남 앞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집중만 한다면, 단 한 번 본 것도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이 십수 년간 강성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성씨, 이름, 무슨 일로 들어왔는지, 머문 날짜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우선 가족을 동반하거나, 노약자와 함께 들어온 이들은 제외했습니다. 대부분은 친척을 만나거나 생계를 위해 온 이들이니까요.”“그리고 또 걸러냈습니다. 강주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런 이들은 약쟁이와 같은 은밀한 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지요. 저들은 언제나 혼자 움직이니까요.”봉 대인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결국 그의 탁월한 기억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원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대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최근 2년간 입성한 외지인에 대해서는 여관마다 숙박 기록이 남아 있어, 그것도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었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 섞이긴 했지만, 봉구안은 이 명부가 충분히 쓸 만하다고 보았다.봉 대인은 말을 덧붙였다.“폐하, 특히 수상하다 여겨지는 인물들은 모두 붉게 표시해 두었습니다.”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말했다.“알겠다. 만약 이 명부에서 약쟁이의 흔적을 찾아낸다면, 자네는 큰 공을 세운 셈이니라.”그러자 봉구안이 단호하게 나섰다.“설령 단서가 나온다 해도,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이전에 잡은 자들도 그랬지만, 약쟁이는 각자 다른 방식과 규율을 따르고 있어, 흔적을 따라간다 해도 본거지에 닿기는 어렵습니다.”소욱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장인어른에게는 현재 채찍보다는 당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봉구안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봉 대인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