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는 평소 자애롭고 온화한 사람이다. 녕비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녕비의 얼굴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을 터였다. 태후는 놀란 녕비를 바라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너...내가 늘 신중히 말하고 행동하라 했거늘, 너 지금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리도 나를 실망하게 만드느냐!”“그 정 귀인의 몇 마디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휘둘리다니, 도무지 생각이 있는 게냐? 정 귀인이 그리 순수하게 너를 위한다 여겼더냐?”“정 귀인은 너가 영비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다루기 쉬운 상대라는 것을 알기에 네가 상위로 올라가기를 도우려는 척하는 것이다.”“정 귀인이 아들을 낳으면, 너는 그저 빈껍데기를 지키다가 결국 한순간에 내쳐질 운명인 것을 너는 알기나 하느냐?"태후의 일침에 녕비는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녀는 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감정을 겨우 다스렸다.“고모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자녕궁에서 나선 뒤, 녕비의 마음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황제가 황자였던 시절, 선제께서 이미 자신을 황자에게 허락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변란의 시기였기에 혼사의 일이 미뤄졌고, 결국 봉장미가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의 굴욕을 참고 또 참아왔던 것이다.모용선은 확실히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녕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쉽게 화를 돋우어 놓았다. 그러나 태후의 말씀처럼, 황후의 자리라면 꼭 다툴 필요는 없다. 다투고자 한다면, 황자를 먼저 낳아야만 한다!…궁 밖, 모용 저택.명절을 맞이하여 모용가 사람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온 가족이 모여 입을 모아 모용걸을 극찬했다."형님, 폐하께서 제 조카를 만호후로 봉할 거라는 말이 벌써부터 돌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 아직 하명이 없습니까?"한쪽에 있던 부인이 말했다. "좋은 일에는 장애물들이 많은 법이오. 그대는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거요."모용객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소문일 뿐이라서, 성상의 뜻을
태황태후가 영화궁에 행차하니, 그 위엄이 자못 웅장하였다.최 상궁은 서둘러 태황태후를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갔다.내전 안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책상에 앉아 침상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황후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태황태후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였다.이때 유사양이 예를 갖추며 고하였다."소신, 태황태후를 배알하옵니다!" 비로소 황제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태황태후를 맞이하였다."태황태후마마, 어서오시옵소서." 황제의 목소리가 다소 쉰 듯했다. 그 또한 열이 나서 목소리가 상한 듯하였다. 태황태후는 손자를 아끼는 마음으로 말했다."황상, 어젯밤 자객의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아 별로 쉬지 못했을 터인데, 어찌 황후의 약까지 직접 챙기나이까. 지금 황후에게는 이리도 많은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으니 이만 물러가 쉬는 게 어떠합니까." 황제는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띠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소자가 순전히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이옵니다. 곧 떠날 참이었사옵니다."태황태후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침상에 누운 황후를 보며 물었다."어의가 뭐라 하던가요?"황제가 대답하였다."경황이 놀란 나머지 병이 든 것 같사옵니다."태황태후는 의아한 기색으로 반문하였다. "놀란 것뿐이라덥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하옵니다."이때 호위가 급한 일이 있어 큰 소리로 고하였다. 황제는 태황태후께 예를 갖춰 인사드린 후 황망히 자리를 떴다.이윽고, 태황태후는 홀로 남은 채로 중얼거렸다. '소가의 남자는 본래 무정하다 하였거늘, 이놈 또한 그 박정하기로 유명했던 부황과 조부의 성정을 닮았구나.'태황태후는 손자가 이토록 황후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내심 달갑지 않았으나, 다시 황후를 바라보니 동정심이 일렁였다.'결국 후궁에 들어선 여인은 모두 정 없는 사내를 남편으로 맞이한 셈이 아니겠느냐.'“황후를
“예.” 누구든 위험에 처한 이가 있다면, 그녀는 꼭 나서서 도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봉구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능력에 맞는 범위 내에서 구하겠습니다.” 봉 부인은 늘 그녀에게 이르길, 이 목숨은 우선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욱은 그녀의 그 한마디, “예”라는 말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황 귀비 또한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심지어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수명을 줄이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황후가 자신을 위해 천수의 독을 해독해 주고, 화살을 막아 준 것은 네 해 동안의 그녀의 희생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오히려 황후에게서 움직였다. 어쩌면, 황 귀비는 그에게 주면서도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기도 했지만, 황후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욱의 눈 속에 담긴 온화함은 다시 차가운 냉혹함으로 바뀌었다. 누가 알겠는가, 황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뒤로 물러서며 전진하는 게 아니었을지. 요 며칠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연회장에서 황후가 자신을 위해 화살을 막아 준 것을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는 속이 깊은 여인을 싫어했으며, 그런 여인에게 끌려다니는 어리석은 사람을 더욱 혐오했다. “짐은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짐은 그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소.”“어미 집안의 영예나 그대의 오라비를 만호후로 봉하는 일, 혹은 후사를 들이는 일은 짐이 모두 들어줄 수 있소.” ‘그대의 마음?’ 그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나, 겨우 화살 한 번 막아 준 일로 집안을 후하게 봉해 주겠다니, 제왕으로서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생사를 건 싸움을 치르는 장수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폐하, 신첩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소욱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
소욱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 표정은 한겨울의 살을 에는 냉기를 띠었다. 그는 속으로 모든 것을 황후의 탓이라 여겼다.갑자기 깊은 내공을 지닌 봉구안이 그의 존재를 감지하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그의 눈 속에 자리한 혐오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연상 또한 봉구안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바라보았고, 침상 위의 옷을 급히 집어 들고는 봉구안에게 걸쳐 주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처는 방금 전에 감싸 두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전하를 뵙습니다.” 연상이 먼저 밖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스스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등에 난 상처가 다시 당겨졌으나, 그녀는 참아낼 수 있었다.소욱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후는 오늘도 고열이 가시지 않았느냐?”연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맞사옵니다.” 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듯 보였다. 언제 이 폭군이 들이닥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방금 전 주상과 함께 있을 때 아무런 은밀한 말을 나누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봉구안이 옷을 다 입은 후, 소욱은 연상을 지나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봉구안은 침상 옆에 서서 절을 올리며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안정된 힘으로 지탱해 주며 말했다.“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예를 갖출 필요는 없소.”봉구안은 속눈썹을 반쯤 내리며, 기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예.”“상처는 좀 나아졌소?”그가 물었다.봉구안이 그의 눈 속 혐오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의 물음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아마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그때 연상이 발을 올리고 고리에 걸어두었다. 갑갑했던 공간이 조금은 숨을 틔우며,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짐이 너에게 고려해 보라 하였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본 바가 있소?”봉구안은 눈을 들어 그를
“태의원이 전체 회진을 온다고?” 태후는 잠시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 궁중에서 누군가 병이 나면 대개 두 명의 어의가 교대로 간호하는 정도로 그치는데, 태의원 전체가 회진을 온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황후가 이토록 큰 중상을 입은 것이란 말인가?계 상궁이 몸을 낮추어 말했다.“태후마마, 감히 제가 짐작컨대, 아마도 폐하께서 황후마마께서 병을 가장하고 있다고 의심하시는 듯합니다.” 태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큰 장관을 벌이다니. 만일 황후가 정말로 병을 가장한 것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그 얼굴을 어디에 둔단 말인가?방비전.추홍이 다소 짓궂은 기색으로 말했다. “귀인마마, 태의원에서 회진을 오니 황후마마께서 병을 가장한 건지 곧 알 수 있을 것입니다.”모용선은 오라버니의 사건으로 마음을 삭히고 있어 얼굴에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곧 추홍의 말을 듣고는 살짝 미소가 번졌다. 만약 황후가 황제를 속인 것이 사실이라면, 중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영화궁. 이백여 명의 어의들이 넓은 뜰에 옷깃을 여미고 정갈하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관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태의원에서 과거를 치를 때를 연상하게 했다.일을 맡은 최 상궁은 속이 복잡해졌다. 황후마마께서 상처를 입으신 이후 줄곧 연상궁이 곁에서 시중을 들며 외부인을 일절 들이지 않아 그녀 또한 황후의 상태를 자세히 알지 못한 터였다. 이제 이 모양을 보니, 설마 마마께서 중병이라도 드신 걸까? 궁 안에서 이와 같은 장면을 본 것은 20여 년 전, 영비가 병환에 걸렸을 때뿐이었다.한편, 침전 안쪽...봉구안이 침상에 기댄 채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젊은 어의가 기세등등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신이 보건대, 황후마마의 고열은 단순한 등 부상으로 인한 것이 아닌 듯 하옵니다.”“열은 내
봉구안의 눈에 서늘한 냉기가 서렸다. 비록 어의가 고하지 않았더라도, 소욱은 그녀가 병을 가장하고 있음을 이미 알아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병을 가장할 수 없었고, 이를 기회로 삼아 가짜 죽음으로 궁을 떠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우선 오백과 연락을 취하여 가사약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이 궁중은 연일 삼엄한 경계라, 쉽지 않은 문제였다.한편 소욱은 황후의 열병이 대부분 가장임을 알아챘으나, 감히 이를 말할 어의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국사가 많아 그녀의 일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생각건대, 병을 가장하는 것도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함일 터. 이전에 그녀가 자신을 위해 화살을 대신 맞았던 것을 감안하여, 그는 이를 폭로하지는 않겠으나 그렇다고 방임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날 이후 소욱은 더 이상 영화궁에 들르지 않았다. 그 대신 가빈과 강빈 두 사람이 자주 찾아오곤 했다.가빈이 말했다. “황후마마,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얼마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병간호를 방해하지 말라 하셔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강빈 또한 덧붙였다. “맞아요. 연회 이후로 궁중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지요. 저는 단지 영화궁으로 편지를 보내려 했을 뿐인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답니다.”이토록 삼엄한 경비 덕분에, 봉구안이 필요한 가사약 또한 궁에 들여보낼 수 없었다. 좋은 기회를 이렇게 놓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도 급히 시도한 것이었기에, 헛점을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연회장에서 자객이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황제를 대신해 그 화살을 막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라가 평안해야 국경에서의 전쟁도 줄어들 것이며, 군주는 나라의 주축이기 때문이다.가빈이 말했다. “황후마마, 하루빨리 쾌차하셔야지요. 다시 한번 경마 경기를 열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 승마 실력도 많이 늘었답니다!” 봉구안은 간단히 대답하며 넘겼다. 강빈
서재에서 느껴지는 황제의 위엄은 누구라도 압도당해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모용선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전각 안은 고요하여 마치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릴 듯했다.그때,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대 오라비가 군량미를 횡령하고 남의 공을 빼앗은 데다, 이를 덮으려 비밀을 아는 자들을 살해하고 사형을 남용하여 황성까지 쫓아온 일이 있다 하던데, 그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모용선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신첩은 어려서부터 사찰에서 자라, 기억 속의 오라비는 올바르고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 오라비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황제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추석 연회, 예물 말이다.”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이어서, 황제는 무심한 듯 손에 쥔 상소문을 펼쳐 들고는 느긋하게 물었다.“그 일도 너와 무관하다는 말이냐?”모용선은 추석 연회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황제가 그 일을 언급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곧바로 부인했다.“신첩은 해를 끼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시길 간곡히 원하나이다.”황제의 입가에서 차가운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모두들 죽으면 증거가 사라진다 생각하겠지만, 죽은 자의 몸에서도 드러나는 증거가 있는 법이다.”모용선은 숨이 멎을 듯 긴장했다.이때, 황제는 고개를 들어 모용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가 과거에 사랑했던 영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영빈을 생각하여,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겠다.”황제는 손에 쥔 상소문을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모용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후궁에서는 총애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쓸 수 있었지만, 황제를 어리석은 자로 여겨서는 안 되었다. 모용선은 눈에 맺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진주처럼 빛나는 눈망울이 마치 황제를 바
영화궁.소욱이 도착했을 때, 봉구안은 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더욱 그녀의 기품을 차갑고 맑게 돋보이게 하여 마치 밝은 달과도 같았다. 그 약은 냄새만 맡아도 쓰디썼는데, 하물며 입에 넣었을 때야 오죽할까. 봉구안은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짐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굳이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예, 알겠사옵니다.” 소욱은 자리에 앉아 본래 묻고자 했던 상소문을 떠올리려 하였으나, 그녀의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핏기가 하나도 돌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저 며칠 보지 않았을 뿐인데, 이렇게 초췌해지다니…’ ‘이 영화궁의 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주인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어의가 와서 맥을 짚어 보았느냐.” 마치 무심히 묻는 듯한 말투로 던졌다. 봉구안은 그저 초췌한 표정으로 소욱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어의가 왔었사옵니다. 신첩의 몸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연상이 적절하게 말을 보탰다. “폐하, 중전마마께서는 부모님을 그리워하심에 편히 쉬지 못하고 계십니다.” 봉구안은 그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소욱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추석 연회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너는 중궁전의 주인으로서 후궁의 귀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봉구안의 눈빛 속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 신첩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궁궐 안에 들어오면, 원래 가족 인연은 얕아지는 법이옵니다.” 소욱은 이 말을 빌미로 그녀를 추궁하였다. “그 상소문은 그대가 명절 선물에 넣은 것이냐?” 연상은 놀라서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폭군이 그녀의 이상 행동을 볼까 두려워 어쩔 줄 몰라했다. 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