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의 눈에 서늘한 냉기가 서렸다. 비록 어의가 고하지 않았더라도, 소욱은 그녀가 병을 가장하고 있음을 이미 알아챘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병을 가장할 수 없었고, 이를 기회로 삼아 가짜 죽음으로 궁을 떠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우선 오백과 연락을 취하여 가사약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이 궁중은 연일 삼엄한 경계라, 쉽지 않은 문제였다.한편 소욱은 황후의 열병이 대부분 가장임을 알아챘으나, 감히 이를 말할 어의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국사가 많아 그녀의 일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생각건대, 병을 가장하는 것도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함일 터. 이전에 그녀가 자신을 위해 화살을 대신 맞았던 것을 감안하여, 그는 이를 폭로하지는 않겠으나 그렇다고 방임하지도 않을 터였다. 그날 이후 소욱은 더 이상 영화궁에 들르지 않았다. 그 대신 가빈과 강빈 두 사람이 자주 찾아오곤 했다.가빈이 말했다. “황후마마,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얼마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병간호를 방해하지 말라 하셔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강빈 또한 덧붙였다. “맞아요. 연회 이후로 궁중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지요. 저는 단지 영화궁으로 편지를 보내려 했을 뿐인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답니다.”이토록 삼엄한 경비 덕분에, 봉구안이 필요한 가사약 또한 궁에 들여보낼 수 없었다. 좋은 기회를 이렇게 놓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도 급히 시도한 것이었기에, 헛점을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연회장에서 자객이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황제를 대신해 그 화살을 막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라가 평안해야 국경에서의 전쟁도 줄어들 것이며, 군주는 나라의 주축이기 때문이다.가빈이 말했다. “황후마마, 하루빨리 쾌차하셔야지요. 다시 한번 경마 경기를 열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 승마 실력도 많이 늘었답니다!” 봉구안은 간단히 대답하며 넘겼다. 강빈
서재에서 느껴지는 황제의 위엄은 누구라도 압도당해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모용선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전각 안은 고요하여 마치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릴 듯했다.그때,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대 오라비가 군량미를 횡령하고 남의 공을 빼앗은 데다, 이를 덮으려 비밀을 아는 자들을 살해하고 사형을 남용하여 황성까지 쫓아온 일이 있다 하던데, 그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모용선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신첩은 어려서부터 사찰에서 자라, 기억 속의 오라비는 올바르고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 오라비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황제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듯 무심히 입을 열었다.“추석 연회, 예물 말이다.”황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이어서, 황제는 무심한 듯 손에 쥔 상소문을 펼쳐 들고는 느긋하게 물었다.“그 일도 너와 무관하다는 말이냐?”모용선은 추석 연회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황제가 그 일을 언급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곧바로 부인했다.“신첩은 해를 끼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부디 제 마음을 알아주시길 간곡히 원하나이다.”황제의 입가에서 차가운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모두들 죽으면 증거가 사라진다 생각하겠지만, 죽은 자의 몸에서도 드러나는 증거가 있는 법이다.”모용선은 숨이 멎을 듯 긴장했다.이때, 황제는 고개를 들어 모용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가 과거에 사랑했던 영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영빈을 생각하여,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겠다.”황제는 손에 쥔 상소문을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모용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후궁에서는 총애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쓸 수 있었지만, 황제를 어리석은 자로 여겨서는 안 되었다. 모용선은 눈에 맺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진주처럼 빛나는 눈망울이 마치 황제를 바
영화궁.소욱이 도착했을 때, 봉구안은 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더욱 그녀의 기품을 차갑고 맑게 돋보이게 하여 마치 밝은 달과도 같았다. 그 약은 냄새만 맡아도 쓰디썼는데, 하물며 입에 넣었을 때야 오죽할까. 봉구안은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짐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굳이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예, 알겠사옵니다.” 소욱은 자리에 앉아 본래 묻고자 했던 상소문을 떠올리려 하였으나, 그녀의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핏기가 하나도 돌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저 며칠 보지 않았을 뿐인데, 이렇게 초췌해지다니…’ ‘이 영화궁의 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주인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어의가 와서 맥을 짚어 보았느냐.” 마치 무심히 묻는 듯한 말투로 던졌다. 봉구안은 그저 초췌한 표정으로 소욱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어의가 왔었사옵니다. 신첩의 몸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연상이 적절하게 말을 보탰다. “폐하, 중전마마께서는 부모님을 그리워하심에 편히 쉬지 못하고 계십니다.” 봉구안은 그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소욱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추석 연회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너는 중궁전의 주인으로서 후궁의 귀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봉구안의 눈빛 속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 신첩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궁궐 안에 들어오면, 원래 가족 인연은 얕아지는 법이옵니다.” 소욱은 이 말을 빌미로 그녀를 추궁하였다. “그 상소문은 그대가 명절 선물에 넣은 것이냐?” 연상은 놀라서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폭군이 그녀의 이상 행동을 볼까 두려워 어쩔 줄 몰라했다. 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사모님, 저는 단지…”교먹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맹 부인은 재빨리 그 서신들을 챙겼다.그녀는 그것들이 봉구안의 물건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봉투에 ‘내 사랑 구안이에게’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맹 부인은 정색한 표정으로 교먹에게 따져물었다.“지금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이것들을 불태우려고 했었니?”교먹은 옷소매를 꽉 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대낮에 병기를 들고 무예를 수련하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오해세요, 사모님. 저… 저는 단지… 이것들을 남겨두었다가 혹여나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언니의 명성에 누가 될까 봐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맹 부인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참 세심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것들은 네 언니가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불태우기 전에 구안이의 의중은 물어봤느냐?”교먹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사모님,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지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요. 언니는 이제 일국의 황후가 된 몸인데 혹여나 폐하께서 언니가 진작에 사내랑 평생을 약속했던 것을 아신다면…”교먹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생각이 단순하고 어리버리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그래서 맹 부인도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고 사랑을 주었지만 지금 보니 이 아이는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단순한 아이가 절대 아니었다.“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네 언니는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사람은 구안이어야 한다.”교먹의 두 눈이 순간 어둡게 빛났지만, 이내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예, 사모님.”‘언니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교먹이 또 부주의란 핑계로 봉구안의 물건들을 처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맹 부인은 말했다.“네 언니의 물건들은 내가 직접 보관할 테니 넌 일단 나가 있거라.”교먹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분명 자신의 방인데 주인
태황태후는 대부분 시간을 옥양산에 거주했지만 궁 안에 적지 않은 자기 사람들을 두고 있었다.태황태후가 말했다.“추석연에서 황후는 황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화살을 막아냈지. 하지만 아직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황상은 황후가 입만 열면 뭐든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지. 황후의 오라버니를 만호후에 봉하는 일도 흔쾌히 허락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하지만 황후는 지금까지 아무런 포상도 바라지 않았다.”모용선은 태황태후의 일깨움을 알아들었다.황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법.만약 황후가 모용 가문을 위해 나서준다면 황제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모용선은 태황태후께 감사인사를 올리고 만수궁을 나가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모용선은 내전에서 무릎을 꿇고 한사코 일어나지 않았다.봉구안은 의자에 앉아 느긋한 자세로 약을 마시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은 늘 그렇듯 평온했으며 미동 하나 없었다.“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꿇고 있어도 난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모용걸 같은 사람을 구해줄 이유가 없었다.군량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장령들이 입을 솜옷, 배를 채울 양식까지 횡령한 놈이었다.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부류가 이런 인간쓰레기였다.모용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마마께서 오라버니의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신첩은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마 제발…”봉구안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설마 내가 정 귀인 너의 오라버니를 해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모용선은 입을 뻐금거리며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황제 폐하 납시오!”봉구안은 약그릇을 내려놓고 문쪽을 바라보았다.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안정된 걸음걸이로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폐하를 뵙습니다.”내전 안의 뭇 시종들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모용선은 공손히 예를 행했다.소욱은 옷자락을 잡고 상석에 앉아 싸늘한 눈으로 모용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재.대리사경이 엄숙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폐하, 관병들이 모용걸의 저택에서 수색해낸 장부입니다. 군량만 횡령한 것이 아니라 운성상인들로부터 뇌물까지 받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적우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는 홍매강의 관할권을 장악하고 선박과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모용걸은 그들에게 관선으로 위장하여 홍매강을 통행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운성 상인들은 고가로 자철광을 적우부에 팔고 모용걸은 그들로부터 3할의 수고비를 받았던 거로 알려졌습니다.”소욱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몰래 자철광을 타국에 내다 팔다니.나라를 팔아먹은 죄로 모용걸은 열 번 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오마분시로도 그가 저지를 죄를 처벌하기엔 부족한 것 같았다.당일, 감옥에 수감된 모용걸은 혹독한 심문을 못 견디고 모든 죄를 자백하였다.그의 말에 따르면 운성의 관료와 상인, 도적들이 결탁하여 나라가 운영하는 자철광으로 수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관부에 납부하는 자철광은 대부분 다른 광석으로 채워졌다. 관부의 매수가가 너무 낮다는 것이 이유였다.반면 적우부에 파는 자철광은 상등품이었다.이런 비밀 거래는 이미 선황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사실을 전해들은 소욱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운성이 아주 썩어들어가고 있었구나!”분명 엄격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대리사경이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모용걸 사건을 듣다 보니 몇몇 흠차 대신들의 죽음이 떠올랐습니다.”“선황께서 즉위하셨을 때, 여러 번 흠차 대신을 운성으로 보내 자철광의 채굴 과정을 감독하게 하였죠.”“하지만 그 관원들은 모두 인황산을 경과할 때 벼랑에서 추락하여 숨졌습니다.”“귀안록에 따르면 인황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산봉오리로 이루어져 있어 평소에도 원혼이 자주 출몰한다는 괴담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흠차 대신들이 모두 벼랑에서 추락하여 시신도 찾지 못하게 되었지요.”“그 뒤로 황성의 대신들은 운성으로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
봉구안이 일어서며 말했다.“폐하, 사복 순방은 대외적으로 위장 신분이 필요합니다.”“신변에 호위무사들을 많이 데리고 나가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일부 지방 관료들은 패주 노릇을 하며 각지에 자기 사람들을 풀어 동향을 관찰하게 하지요. 눈에 띄는 외부인이 성에 진입하면 경계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놈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신첩과 동행하면 폐하의 부인으로 위장할 수 있고 오라버니는 많은 강호인사들과 인맥이 있으니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소욱은 부인이라는 말에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그녀가 이렇게 출궁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마 그의 안위를 걱정해서일 것이다.그녀는 내력을 희생해가며 그를 위해 해독을 해주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위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지 않았는가.처음에는 황후가 사복 순방에 동행하겠다고 하였을 때 황당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번 출궁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후는 출중한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고 침술로 독을 해독할 수도 있으니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그리고 그녀가 제기한 이유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건 황후가 진짜 봉장미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무공을 연마한 것에 관해서 그는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길이 조사한 데 의하면 봉장미는 어릴 때부터 가야금과 바둑, 서예와 그림을 배웠고 나중에는 황성에서 손에 꼽히는 여 수재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머리가 비상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하지만 그가 아는 봉장미는 두터운 내공에 각 문파의 무공 초식을 꿰고 있으며 아주 뛰어난 경공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고 그것은 절대 몰래 한가할 때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하필이면 여인이라니!하지만 그녀가 분신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아마 해내기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분명 그 과정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그는 이번 출궁의
겉보기에는 아주 초라한 방이었는데 침상 위에 온갖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침상 옆의 욕조 주변에는 전신 거울이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긴 의자가 있었는데 모양이 굉장히 독특했다.객잔 주인은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객잔에서 가장 잘나가는 방인데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소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군.”그는 진길을 시켜 은화를 지불하라고 지시했다.객잔 주인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소욱이 안으로 들어간 후, 봉구안도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오라버니께서 그러셨는데 많은 검은 객잔들이 환각향을 쓴다고 합니다.”소욱은 별로 개의치 않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이때, 봉구안이 갑작스럽게 그를 밀쳤다.“조심하세요!”벽 안쪽에 숨겨진 장롱이 보였는데 건드리기만 하면 화살을 발사할 것 같았다.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에, 소욱은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장롱 안에는 민간인 화가가 그린 춘궁도가 들어 있었다.소욱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들이었다.객잔은 관부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금기된 물건들을 숨겨진 장롱 안에 보관한 듯했다.멀찌감치 서 있던 봉구안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오자 소욱은 장롱 문을 닫고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별거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봉구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9월 중순의 기온은 점차 싸늘해지고 있었다.소욱은 방을 봉구안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어딘가로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봉구안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도 안 쓰였지만, 그래도 홀로 방에 있자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욱은 진길의 방에서 나왔다.여전히 풍채 늠름한 소욱에 반해 진길의 눈가는 거뭇거뭇했고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문을 열고 나온 봉구안은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폐하는 사실 여인이 아닌 사내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소욱은 당연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