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대리사경이 엄숙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폐하, 관병들이 모용걸의 저택에서 수색해낸 장부입니다. 군량만 횡령한 것이 아니라 운성상인들로부터 뇌물까지 받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적우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는 홍매강의 관할권을 장악하고 선박과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모용걸은 그들에게 관선으로 위장하여 홍매강을 통행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운성 상인들은 고가로 자철광을 적우부에 팔고 모용걸은 그들로부터 3할의 수고비를 받았던 거로 알려졌습니다.”소욱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몰래 자철광을 타국에 내다 팔다니.나라를 팔아먹은 죄로 모용걸은 열 번 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오마분시로도 그가 저지를 죄를 처벌하기엔 부족한 것 같았다.당일, 감옥에 수감된 모용걸은 혹독한 심문을 못 견디고 모든 죄를 자백하였다.그의 말에 따르면 운성의 관료와 상인, 도적들이 결탁하여 나라가 운영하는 자철광으로 수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관부에 납부하는 자철광은 대부분 다른 광석으로 채워졌다. 관부의 매수가가 너무 낮다는 것이 이유였다.반면 적우부에 파는 자철광은 상등품이었다.이런 비밀 거래는 이미 선황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사실을 전해들은 소욱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운성이 아주 썩어들어가고 있었구나!”분명 엄격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대리사경이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모용걸 사건을 듣다 보니 몇몇 흠차 대신들의 죽음이 떠올랐습니다.”“선황께서 즉위하셨을 때, 여러 번 흠차 대신을 운성으로 보내 자철광의 채굴 과정을 감독하게 하였죠.”“하지만 그 관원들은 모두 인황산을 경과할 때 벼랑에서 추락하여 숨졌습니다.”“귀안록에 따르면 인황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산봉오리로 이루어져 있어 평소에도 원혼이 자주 출몰한다는 괴담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흠차 대신들이 모두 벼랑에서 추락하여 시신도 찾지 못하게 되었지요.”“그 뒤로 황성의 대신들은 운성으로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
봉구안이 일어서며 말했다.“폐하, 사복 순방은 대외적으로 위장 신분이 필요합니다.”“신변에 호위무사들을 많이 데리고 나가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일부 지방 관료들은 패주 노릇을 하며 각지에 자기 사람들을 풀어 동향을 관찰하게 하지요. 눈에 띄는 외부인이 성에 진입하면 경계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놈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신첩과 동행하면 폐하의 부인으로 위장할 수 있고 오라버니는 많은 강호인사들과 인맥이 있으니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소욱은 부인이라는 말에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그녀가 이렇게 출궁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마 그의 안위를 걱정해서일 것이다.그녀는 내력을 희생해가며 그를 위해 해독을 해주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위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지 않았는가.처음에는 황후가 사복 순방에 동행하겠다고 하였을 때 황당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번 출궁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후는 출중한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고 침술로 독을 해독할 수도 있으니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그리고 그녀가 제기한 이유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건 황후가 진짜 봉장미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무공을 연마한 것에 관해서 그는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길이 조사한 데 의하면 봉장미는 어릴 때부터 가야금과 바둑, 서예와 그림을 배웠고 나중에는 황성에서 손에 꼽히는 여 수재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머리가 비상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하지만 그가 아는 봉장미는 두터운 내공에 각 문파의 무공 초식을 꿰고 있으며 아주 뛰어난 경공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고 그것은 절대 몰래 한가할 때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하필이면 여인이라니!하지만 그녀가 분신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아마 해내기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분명 그 과정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그는 이번 출궁의
겉보기에는 아주 초라한 방이었는데 침상 위에 온갖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침상 옆의 욕조 주변에는 전신 거울이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긴 의자가 있었는데 모양이 굉장히 독특했다.객잔 주인은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객잔에서 가장 잘나가는 방인데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소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군.”그는 진길을 시켜 은화를 지불하라고 지시했다.객잔 주인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소욱이 안으로 들어간 후, 봉구안도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오라버니께서 그러셨는데 많은 검은 객잔들이 환각향을 쓴다고 합니다.”소욱은 별로 개의치 않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이때, 봉구안이 갑작스럽게 그를 밀쳤다.“조심하세요!”벽 안쪽에 숨겨진 장롱이 보였는데 건드리기만 하면 화살을 발사할 것 같았다.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에, 소욱은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장롱 안에는 민간인 화가가 그린 춘궁도가 들어 있었다.소욱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들이었다.객잔은 관부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금기된 물건들을 숨겨진 장롱 안에 보관한 듯했다.멀찌감치 서 있던 봉구안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오자 소욱은 장롱 문을 닫고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별거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봉구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9월 중순의 기온은 점차 싸늘해지고 있었다.소욱은 방을 봉구안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어딘가로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봉구안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도 안 쓰였지만, 그래도 홀로 방에 있자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욱은 진길의 방에서 나왔다.여전히 풍채 늠름한 소욱에 반해 진길의 눈가는 거뭇거뭇했고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문을 열고 나온 봉구안은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폐하는 사실 여인이 아닌 사내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소욱은 당연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거대한 바위의 위력은 마차를 순식간에 산산조각내 버렸다.진길의 고함이 산골짜기에 울려퍼졌다.위기의 순간에 소욱이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옆에 있던 여인은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바깥으로 이끌었다.그녀는 이미 진길이 주의를 주기 전에 바위의 동향을 예측하고 움직였던 것이다.그들이 마차를 벗어난 순간에 마차는 바위에 짓눌려 산산조각이 났다.놀란 말은 미친듯이 질주하다가 벼랑으로 추락했다.3인은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사이에 갇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었다.장검을 빼든 진길은 소욱의 앞을 가로막고 주변을 경계했다.“나리, 분명 놈들이 주변에 숨어 있을 겁니다!”소욱이 시선을 내리자 황후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채, 진길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진길과 다른 점은 진길은 방어에 치중하였다면, 봉구안은 출구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바위가 낙하하던 순간, 그녀는 절대 두 개뿐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고 분명 세 번째 바위가 떨어져 그들의 목숨을 취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험난한 산길에서 전방은 바위에 의해 가로막혔으니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갑자기, 봉구안은 벼랑끝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진길이 비명을 질렀다.“위험합니다!”그는 하도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마마라는 칭호까지 붙일 뻔했다.봉구안은 진길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곧이어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래로 뛰어야 합니다!”진길은 순간 아연실색했다.죽음을 자초하는 길 아닌가!봉구안은 벼랑 아래쪽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바위벽을 타고 자란 덩굴은 미인가시라는 품종인데 뿌리가 바위벽 내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어 줄기는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뛰어내리면서 덩굴을 잡는다면...”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소욱을 끌고 아래로 뛰었다.진길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를
봉구안은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나가서 지원군이라도…”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하지만 그의 손은 봉구안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봉구안은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손목을 보니 이미 뻘건 자국이 나 있었다.‘얼마나 꽉 잡고 있었던 거야…’봉구안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뜨거운 물을 들고 들어온 노부부가 그녀를 보고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아씨!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혹시… 이대로 저 사내를 두고 떠나시려고요?”봉구안은 괜히 찔려서 얼굴을 붉혔다.노부부가 말했다.“아씨! 이대로 가시면 안 되지요! 아씨가 가면 저 안의 사내는… 혹시라도 이대로 죽으면 우리 두 늙은이들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입니까!”그들은 봉구안이 사내를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갈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부드럽게 그들에게 말했다.“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하인들과 함께 동행했는데 그 하인을 찾으러 가는 겁니다. 부군께서는 이미 고비를 넘겨서 걱정하지 않으셔도…”“어쨌든 이대로 떠나시는 건 아니됩니다! 우린 평범한 백성들이고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할아버지는 강경한 태도로 대문을 잠가버렸다.할머니는 대야를 내려놓고 봉구안을 안으로 등떠밀었다.어린 손자도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이 밖에서 잠겼다.한 시진 후.소욱은 정신을 차렸다.눈을 뜬 그에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 문을 바라보고 있는 봉구안의 모습이었다.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봉구안도 침상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고개를 돌리자마자 약간은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화살에 부상을 입은데다 높은 곳에 추락하다가 뼈를 다쳤는지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모양이었
갑자기 나타난 소욱 덕분에 봉구안은 도주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겉으로는 평온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산길이 험난할 것 같아 진으로 가서 의원을 데려올 생각이었습니다.”아이는 바구니를 집어 봉구안에게 돌려주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누나, 산길은 전혀 험난하지 않아요.”소욱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해명을 기다렸다.봉구안은 더 이상의 해명 없이 그들에게 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같이 나왔지요?”아이가 소욱을 가리키며 대신 답했다.“누나의 부군이 저한테 누나 찾으러 같이 가달라고 했어요. 두 분은 금슬이 좋나 봐요. 마치 저희 부모님처럼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나 봐요!”소욱은 입가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금슬이 좋긴 하지.”봉구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 뒤로 세 사람은 그 길로 다시 농가로 돌아갔다.방으로 들어온 소욱은 봉구안의 손목을 꽉 잡고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나가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봉구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담담히 답했다.“의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소욱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여러 차례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녀의 마음이 떠올라서 다시 의심을 거두었다.하물며 이곳을 떠난들, 그녀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괜한 의심이었나.’하지만 해야 할 말은 꼭 해야 했다.“너의 신분을 잊지 말거라.”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예.”한편, 오백은 송려에게서 가사약을 받았다.송려가 정중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안 쓰는 게 좋다고 전하거라.”“몸의 근간을 해치는 약이야. 심각하면 근맥이 모두 끊어지고 내력을 모두 소실할 수도 있어.”“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약이야. 이 약을 먹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하지.”설명을 들은 오백은 불안에 떨었다.“그렇게 위험한 약이라고요!”송려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약은 다 독성이 있기 마련이야.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약물이니
자객이 공격하는 동시에 봉구안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욱은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고 몸을 뒤집어 그녀를 아래로 숨겼다.어둠 속에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싸늘한 살기는 느낄 수 있었다.쾅!사내가 손을 뻗자 강력한 내력이 파도가 되어 침상 근처에 있는 자객들을 공격했다.털썩!몇몇 자객들이 바닥에 쓰러졌고 침상의 상대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자 급기야 소리쳤다.“같이 덤벼!”곧이어 침상에서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그는 강력한 위압감을 풍기며 말했다.“같이 덤빈다고?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살인을 한지 정말 오래됐거든.”소욱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그대로 몸을 날려 한 자객의 가슴에 주먹을 꽂았다.그 자객은 신음 한번 못 내고 쓰러졌다.몸을 일으킨 봉구안은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자객들은 소욱의 상대가 아니었다.잠시 후, 안뜰에 불빛이 보이더니 진길이 시위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폐하를 호위하라!”황제의 내전 시위들이라 전부 일당 백하는 고수들이었다.그들은 자객들을 하나씩 쓰러뜨리기 시작했다.소욱이 음침한 목소리로 분부했다.“모두 끌고 가거라.”“예!”방 안은 여전히 불이 꺼진 상태였다.전투가 끝난 후, 소욱은 어둠 속에서 침상으로 돌아왔다.봉구안이 담담히 물었다.“일부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목을 끈 이유가 놈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습니까?”소욱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앞에 서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아 치켜올리고 말했다.“왜 마취향이 너에게 통하지 않았는지 말해 보거라.”봉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신첩이 놈들과 공범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녀는 교묘히 화제를 돌렸다.소욱은 단지 그녀가 무공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황후, 짐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실을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봉구안은 침묵을 택했다.소욱은 손을 뻗어 그녀를 침상에 쓰러뜨렸다.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그녀
신속히 몸을 일으킨 봉구안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입가를 닦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상대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주먹이 나갔을 것이다.따라서 몸을 일으킨 소욱은 어둠 속에서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곧이어 그는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겨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밀고 당기기라고 해도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거다.”봉구안은 들을수록 화가 치밀었다.그녀는 최대한 분노를 억제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뭔가 오해를 하셨나 본데, 신첩은 폐하와 밀고 당기기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소욱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넌 짐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다. 그리고 짐의 처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봉구안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반박했다.“폐하를 구한 건 폐하이기 때문입니다. 대신들이 폐하를 지키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죠. 시위가 폐하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모두 애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폐하의 처가 되겠다고 한 일은 아마 잘못 기억하고 계셨을 겁니다. 저는 이미 황후이고 그런 말을 폐하께 했을 리가 없지요.”소욱의 표정이 점점 음침하게 굳어갔다.현실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짐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황후, 정말로…”“그런 적 없습니다.”봉구안은 그가 물으려는 게 뭔지 알기에 서둘러 대답했다.이미 여기 오기 전부터 황제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대놓고 말을 하지 않으니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 없었다.상대가 황제라서 에둘러 말한 것뿐이었다.그녀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혼인식 날, 폐하께선 신첩에게 경고하셨지요. 총애를 받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요. 신첩은 그 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 경외심은 있지만 다른 감정은…”거기까지 들은 소욱이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젊은
옆방.단회욱은 검은 피를 토해냈다.그는 단정의 어깨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마치 버드나무처럼 연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쌍의 옥처럼 맑던 눈동자는 이제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를 보며 봉구안은 많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뼛속까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병사들의 희롱과 조롱에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늘 부드럽게 대했다.그는 군의관으로서 항상 인내심이 넘쳤다.그녀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지닌 고요한 세월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늘 마음이 차분해졌다.그래서 그가 천룡회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그의 선량함과 자애로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 것들은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그의 신분과 과거는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그녀는 한 사람을 좋아할 때 언제나 현재만을 바라보았다.그를 좋아했던 일에 대해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었다.봉구안은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한때 그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정말로 다시 보게 되자 수많은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그녀는 그에게 이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가 겪은 고통과 고난은 손수 적어낸 기록에 상세히 쓰여 있었다.“앞으로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단회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한층 단단해진 냉엄함이 더해져 있었다.그녀의 옷은 흙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하지만 지금은 욕심이 생겼다.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단정은 두 사람의 눈빛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단회욱을 눕혀놓고 말했다.“형님, 약을 좀 다려 올게요.”그가 있으면 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단회욱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봉구안의 마음이 순간 떨렸다.단회욱은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한쪽 팔은 부러졌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잘생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시체처럼 입술은 하얗게 메말라 있었다.“형님!”단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드디어, 드디어 형님을 찾았어요!”단회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멀리 있는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말했다.“오라버니…”단회욱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온화했다.“구안아…”“폐하!”진한길이 놀라 외쳤다.봉구안은 급히 뒤돌아보았고,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으로 달려갔다.“폐하께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나 소욱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진한길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전 구역에 틈이 생겨 폐하께서 낙석에 팔을 맞으셨습니다!”그때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과인은 괜찮다…”남산왕은 급히 외쳤다.“어서 사람을 구하라! 균형이 깨지면 안전 구역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만약 안전 구역이 무너지면, 그 이후의 위험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단정은 황제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형님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자 그를 업었다.그러다 형님 얼굴에 찍힌 뺨 자국을 보고 순간 몸을 굳혔다.“형님, 누가 형님을 때린 겁니까!”단회욱은 이전에 흐릿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러나 그가 말했다.“누구든 상관없다…”그는 오로지 봉구안만 걱정하고 있었다.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소욱이 드디어 구조되었다.남산왕은 중얼거렸다.“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습니다.”그러나 소욱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의 팔은 옷과 살점이 뭉개져 엉망이었다.진한길은 마음이 아팠다.봉구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
수만 대군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화약과 진천뢰를 옮겼다.구중탑 내부.양연삭은 계속 위층으로 올라가 마침내 여덟 번째 층에 도달했다. 진기의 영향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다섯 번째 층 이상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지만, 그는 소환과 황제를 찾을 수 없었다.잠시 생각한 뒤, 그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발걸음도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꼭 꼭대기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꼭대기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다!”양연삭은 구중탑의 아홉 번째 층에 오르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살폈다.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했다.옷자락 한 조각이었다.그는 손바닥에 진기를 모아 그것을 끌어당겼으나, 나타난 것은 단지 겉옷 한 벌일 뿐이었다.“속임수인가?”양연삭의 눈빛이 차갑고 깊어졌다.“나와라!!”그는 광기에 휩싸인 듯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진기로 형성된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공격을 가했다.그때, 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안전구역 내부.소욱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산을 폭파하고 있는 모양이군.”그의 눈썹 사이에 약간의 긴장이 풀리며 미소가 번졌다.“드디어 끝이 나는군…”쾅!!펑…!고요했던 옥령산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연기와 화염이 뒤덮었다.남산왕은 장병들을 이끌고 안전지대로 물러난 뒤 명령을 내렸다.“폭파하라!“다시 폭파해라!”남산왕의 반복되는 명령에 진한길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슬그머니 봉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소... 공자, 그 안전구역이라는 곳이 정말 폭파되지 않는 겁니까?”그는 이 상황을 보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봉구안의 다른 쪽에 서 있던 동방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동방가문이 남긴 안전구역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물론 전제는 황제가 정말 안전구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지금 가면을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과거 자신이 알던 그 소환이 아니었다.소환이 여인이었다니… 그것도 폐비 봉씨라니…동방세
구중탑 밖, 남산왕은 여전히 굳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이토록 완고한 사람은 봉구안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동방세가 말했다.“저희 선조께서 구중탑으로 옥석비를 보호하신 이유는, 아마도 태조 황제께서 옥석비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길 원치 않으셨기 때문일 겁니다.”진한길이 남산왕 앞에 무릎을 꿇고, 눈가가 붉어졌다.“전하! 방금 말씀 들으셨습니까! 태조 황제께서 정말 옥석비를 필요로 하셨다면 어찌 그것을 진압하셨겠습니까? 진작 그것을 받들어 모셨을 것입니다!”“그러니 더 망설이지 마시고, 어서 구중탑을 파괴하십시오!!”남산왕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냉정하게 돌아섰다.“봉맥은 끊어질 수 없다.”그와 그 장수들의 사명은 봉맥을 지키는 것이었다.봉맥이 끊기면, 그들 모두 죽게 될 터였다.달빛이 봉구안의 얼굴을 비추니, 차갑고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남산왕에게 단호히 말했다.“양연삭이 감히 구중탑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나갈 방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 탑을 부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양연삭의 손에 의해 탑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옥석비 역시 그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혼란에 빠질 텐데, 그것이 전하께서 바라는 바이십니까!”남산왕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분명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단정은 형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분노하여 소리쳤다.“이 고집불통 노인네! 봉맥은 끊어질 수 없다고 하면서, 소씨 황족의 혈맥은 끊어져도 된단 말입니까?”“오늘 여기서 저 단정이 맹세합니다! 구중탑을 부수지 않아 저희 형님이 나오지 못하면, 전 소씨 황족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위를 잇는 자는 더 이상 없겠죠!”남산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단정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이 고집불통 노인네, 먼저 당신부터 죽일 것입니다!”봉구안이 단정을 재빠르게 막았다.단정은 곧 멈
“소환?! 너는 어떻게 나온 것이냐!폐하는!”진한길은 즉시 그녀의 뒤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뒤에는 굳게 닫힌 돌 문 뿐이었다. 돌문 외에 황제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산왕이 급하게 물었다. “소환! 어찌하여 너만 나온 것이냐! 폐하는 어디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봉구안은 즉시 말했다.“전하, 즉시 명령을 내려 구중탑을 폭파하십시오!” 남산왕의 얼굴이 금세 파래졌다. “그럴 수 없다!” “저긴 봉맥이 이어진 곳이기 이전에, 폐하께서 아직 안에 계시지 않는가!” “지금 나의 손을 빌려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결코 폐하를 시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봉구안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폐하께서는 안전한 곳에 대피해 계십니다. 천룡회 교주는 수시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 구중탑을 파괴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그래도 남산왕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래도 안 된다! 구중탑이 무너지면 봉맥은 반드시 끊어지게 돼. 나는 이 봉맥을 망칠 수 없다! 남제 국운에 관계되는 이 일은 내가 감히 결정할 일이 아니다.”“설령 폐하께서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난 끝까지 구중탑을 지켰을 것이다!”진한길이 노했다. “남산왕 전하! 지금 황제 폐하께서 안에 갇혀 계십니다!”그는 즉시 분부하였다.“어서 빨리 사람을 불러와 구중탑을 폭파할 준비를 하십시오!!” 원래 그는 황제의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금, 황제는 안에 갇혀있는 상태였다.그는 즉시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중탑을 폭파하기 위해 필요한 폭약과 진천뢰는 이미 충분히 준비해둔 상태였다! 남산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거라! 황제는 새로 세울 수 있지만, 남제의 국운은 다시 올 수 없는 법이니...” 봉구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남산왕 전하께서 지키는 것은 봉맥이 아니라 그 황백한 물건들이 아닙니까! 설마 그 보물들이 황제 폐하의 목숨보다
소욱은 위층으로 달려갔다. 계속 달려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그는 아래로 내려가는 쪽이 생존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래로 내려가면 봉구안에게는 아무런 살길이 남지 않았다.첫째, 그녀는 자신보다 체구가 작고 경공이 뛰어나 내문을 더 빠르게 통과할 수 있어 탑을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둘째, 탑을 나간 뒤에는 남산왕을 설득해 탑을 부숴야 했다. 만약 탑 안에 남는 사람이 봉구안이라면 남산왕은 그녀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이 황제인 자신이라면 남산왕도 어느 정도는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결국 봉구안은 탑을 나간 뒤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녀는 그저 자신이 살기보다는 그를 살리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심지어 단회욱과 함께 죽을 각오까지 한 듯했다.그런 그녀의 뜻을 소욱이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는가!…봉구안은 빠르게 1층까지 내려갔다.상황이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시간은 더욱 촉박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구중탑은 오직 들어올 수만 있고 나갈 수는 없는 구조였다. 입구가 곧 출구였다.탑을 나가려면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소욱이 탑에 들어온 이상, 진한길과 그 일행은 필사적으로 탑 안으로 들어와 그를 지키려 할 것이다.그러니 문은 언젠가 열릴 터였다.봉구안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이었다.그때였다. 2층에 있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젊은이, 여기서 나갈 수는 없다. 이 구중탑에는 문이 두 개지.”“바깥 문이 열리기 전에 안문이 먼저 닫혀버리는 구조라네.”“가끔 머리를 굴려서 안문 바깥에 미리 서 있으면 괜찮을 거라 착각하는 자들이 있더군.”“하지만 그곳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안문의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게 되지… 못 믿겠으면 한번 해보거라.”봉구안은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녀는 이미 5층에서 악인들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이 바닥에는 하중 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 사람이 발
봉구안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적룡왕과 자룡왕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 자들 가운데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너희들, 저 둘의 옷을 입고 변장하거라.”악인들은 봉구안의 명령에 불만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또 그 소위 보물이라는 걸 위해서 일단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곳에 갇힌 자들 대부분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예 구중탑에 갇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흉내 내는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옷을 갈아입고, 가면을 쓰자 꽤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다.잠시 후, 그들은 봉구안을 따라 다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양연삭은 그곳에서 명상을 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변장한 자룡왕이 나서서 예를 표했다.“교주님, 조사해본 결과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다섯 번째 층 바닥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어쩐지 다른 층보다 훨씬 두텁더니…”양연삭은 그들의 몸에 묻은 피를 보며 차갑게 시선을 내리깠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저들을 죽이려 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제가 교주였다면 저 자들을 당장 없애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말한 위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그 말은 은근히 협박의 뉘앙스를 풍겼다.양연삭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충분한 인원을 소집하여 당장 땅을 파거라.”“알겠습니다, 교주님!”봉구안이 제안했다.“외부인을 믿을 수 없으니…”“다섯 번째 층의 모든 이를 몰아내고 저희 손으로 직접 파는 게 어떠십니까?”양연삭의 음성이 날카롭게 변했다.“저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그의 차가운 자신감은 무적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말이 끝나자, 그는 갑자기 기세를 폭발시키며 강력한 힘을 봉구안에게 발산했다. 기류가 즉시 감옥처럼 형성되어 그녀를 가뒀고, 그녀의 몸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진기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그것은 양연삭의 만건성법이었다! 그는 그녀의 내공을 빼앗으려 했다.양연삭의 눈빛은 얼
그녀더러 소욱을 죽이라니?봉구안의 손바닥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양연삭에게 되물었다.“이 탑에서 나갈 방도가 있습니까?”말인즉슨, 황제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양연삭은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황제를 당장 죽여라.”봉구안은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 소욱을 보호하며 말했다.“보물과 황제, 둘다 필요합니다.”자룡왕은 이미 몸을 가누고 일어서며 양연삭에게 외쳤다.“교주님, 이건 계략입니다! 소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양연삭은 봉구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태연하게 고백했다.“저는 소수자입니다. 미남을 좋아하죠. 황제는 제가 아직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만약 황제를 죽이신다면, 여러분 중 누가 이보다 나은 장난감을 저에게 보상해 주시겠습니까?”그녀는 말하며 시선으로 오왕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 눈빛은 방자하고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참고로, 저는 자극적인 놀이를 좋아합니다. 당신들 중 감당할 자가 있다면, 나이가 좀 많더라도 상관없습니다.”그 말에 자룡왕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양연삭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길을 안내하거라.”봉구안은 마치 아쉽다는 듯 오왕을 흘낏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양연삭은 탑의 제9층에서 떠나지 않고, 자룡왕과 적룡왕에게 봉구안을 따라가라고 명령했다.봉구안은 그들을 탑의 5층 돌계단까지 데려갔다.그러고는 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그녀는 눈앞의 돌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입니다.”자룡왕과 적룡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즉시 봉구안을 죽이려 하였다.그러나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억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한 층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자룡왕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소환, 경고하겠다. 잔꾀 부리지 말거라!”봉구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교주님께서는 보물의 절반을 줄 만큼 후
봉구안은 원래 쓰던 가면이 깨져버려 다른 이의 가면을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형에 조금 맞지 않아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좁고 작아 보였다.소욱은 살기를 가득 담은 얼굴로 중앙에 있는 이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양연삭은 가부좌 자세로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어쨌든 그의 곁에는 다섯 명의 왕이 그를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다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벌어졌다.봉구안이 뒤에서 기습을 가해 은침 하나를 소욱의 뒷목에 꽂았다.소욱은 검을 쥔 채 동작을 멈추더니 믿기 힘든 듯 뒤를 돌아보았다.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네가 어째서…”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쇳덩이에 불과했다.천룡회의 다섯 왕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무슨 상황이지?양연삭은 쓰러진 황제를 한 번 보더니 봉구안을 다시 바라보았다.봉구안은 쓰러진 소욱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저는 소환이라 합니다.”자룡왕은 분노에 찬 냉소를 터트렸다.“소환? 네가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우리가 누군지 알기는 하느냐?”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든 무기를 봉구안의 목에 들이댔다.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압니다. 여러분들은 천룡회의 사람들이지요.”“예전에 우리 천룡회를 멸망시킨 자가 바로 너구나. 오늘, 네놈을 당장 죽여, 천룡회 일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자룡왕이 곧바로 공격하려던 찰나, 봉구안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저를 죽이신다면, 여러분은 보물을 찾을 가능성이 더더욱 없어집니다.”“멈춰라.”양연삭이 직접 말을 꺼냈다.자룡왕은 즉시 공격을 멈췄다.“네놈,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봉구안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룡왕을 지나쳐 교주 양연삭을 향해 말했다.“여러분처럼 저 또한 이번에 구중탑에 들어온 것은 남제 태조 황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