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11화

Author: 일설연우
봉안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다 소신의 잘못입니다. 소신이 조금만 더 조심했었다면….”

“어제 그자들의 도발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신이 더 참았어야 했는데…”

봉구안은 어떻게 눈앞의 위기를 해결할지만 생각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라버니께서 비무에서 참패하는 것이니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봉안진이 과거 무과장원이었다는 알고 있는 귀비가 준비를 허술하게 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궁밖의 상황까지 살피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잠깐의 고민 후에 봉구안이 입을 열었다.

“가면을 저에게 주세요. 대역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봉안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됩니다. 이는 폐하와 모두를 기만하는 행위잖습니까.”

그가 아무리 무능해도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봉구안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기회는 한번뿐입니다. 선택은 오라버니에게 달렸어요.”

봉안진은 씁쓸한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

“정녕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냈나요?”

봉구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봉안진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재차 물었다.

“제가 이번 기회를 잡는다면 진실을 밝히고 허무하게 죽은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겁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주먹을 꽉 쥔 채로 봉구안을 지그시 응시했다.

봉구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고에 찬 그녀의 눈빛에서 봉안진은 원하던 답을 얻었다.

그 순간 봉안진은 오랜 시간 어깨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그는 더 이상 의기소침하게 웅크리고 살기 싫었다.

여동생과 가문,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Locked Chapter
Continue Reading on GoodNovel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이호정
2024. 12. 28. AM 03:52
VIEW ALL COMMENTS

Related chapters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2화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눈을 떴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피 튀기는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괴두의 주먹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누군지 몰라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누군가가 사람들 틈에서 소리쳤다.“봉가의 장남 같네요!”또 다른 누군가도 소리쳤다.“입고 있는 옷을 보니 확실해요! 보호대도 차고 있잖아요!”봉가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중간에 무대로 올라간 무장들은 준비도 없이 그대로 올라갔기에 아무도 보호대를 장착하지 않았다.너무 멀리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차고 있는 보호대와 옷 색깔을 보고 그들은 봉안진이라고 확신했다.“괴두의 주먹을 받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네요.”그 말을 듣고 있던 후르달은 괜히 심통이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고작 한 주먹을 받아냈을 뿐이다.그는 괴두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비무장.괴두는 주먹을 거두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상대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무장들과는 사뭇 달랐다.하지만 상대가 맹성주가 아니라면 자신이 있었다.“이리 와!”괴두는 팔뚝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여길 때려!”관망대의 모두가 비무장에 올라간 사람을 봉안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상 그는 변장하고 올라간 봉구안이었다.귀비가 봉씨 형제를 반 죽이기 위해 준비한 가면이 오히려 그녀가 위장하는데 편의를 주었다.양나라와의 전장에서 봉구안은 괴두와 결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그랬기에 그녀는 상대의 초식을 빤히 꿰고 있었다.그녀는 쓰러진 무장의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깔고 읊조렸다.“내려가.”그 무장은 진작에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남제의 존엄을 위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그를 대신할 사람이 올라왔으니 계속 무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세 사람의 협공도 쓰러뜨리지 못한 괴두였다.과연 봉안진이 혼자 힘으로 가능할까?귀비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비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봉안진이 진심으로 대결에 응하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3화

    진 장군은 무대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봉안진은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려는 게 아니라 방어를 위장한 공격을 하고 있어!”“그럴 리가. 계속 피하고만 있잖아?”“진 장군이 잘못 본 게 아니야?”진 장군은 고개를 젓고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아니,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봉안진은 방어하는 척하면서 사실 상 공격을 하고 있는 거야!”그럴수록 남은 두 사람은 궁금증에 미칠 것 같았다.“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진 장군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봉안진은 공격을 피하며 무대 변두리를 돌고 있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왼쪽 방향으로만 몸을 틀고 있어. 괴두에게는 오른쪽이 되겠지.”“그게 뭐? 봉안진이 한 방향으로 빙빙 돌면서 괴두를 어지럽게 만들려는 건가? 맞아! 그런 방법도 있었네! 괴두가 이미 평형을 잃은 걸 보면 유효한가 본데….”진 장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게 아니야!”그렇게 아둔한 방법일 리가 없었다.진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괴두의 움직임을 잘 살펴봐. 오른다리가 좀 이상하지? 봉안진을 봐. 왜 굳이 계속 왼쪽으로만 피하는 걸까? 이상하지 않아?”그러자 다른 두 장군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봉안진은 주먹을 피하고 이동할 때 꼭 무릎을 구부려서 피하네. 괴두와 봉안진은 키 차이가 심한 편이니까.”“그래서 그게 뭐? 그냥 주먹을 피하기 쉬우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진 장군이 정색해서 말했다.“괴두가 무릎을 굽히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무릎을 굽혀? 그게 무슨 전술이야?”“잠깐! 나 알 것 같아! 괴두의 오른쪽 무릎이….”“뭐야? 또 뭔데?”유일하게 영문을 모르는 무장이 옆에 있는 사람을 재촉했다.진 장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 장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이 장군도 알았지?”이 장군은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오른쪽 무릎이 돌파구였다니! 난 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4화

    거대한 산과도 같았던 괴두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한편, 연무장.봉구안은 다리를 뻗어 상대의 가슴을 가격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괴두는 오른쪽 무릎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괴두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봉구안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돌려차기로 상대의 목덜미를 가격했다.괴두가 중심을 잃고 무대 한복판으로 쓰러졌다.봉구안은 무르팍으로 상대의 숨통을 압박했다.괴두는 두꺼운 가면 너머로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봉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마치 죽은 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서늘한 눈빛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네… 네가 어떻게….”괴두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왜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봉구안이 자신을 유인하여 무대를 빙빙 돌았는지 알아차렸다.‘내가 오른쪽 무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하지만 대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었다.한편, 관망대에서 시합을 지켜보던 후르달도 당황했다.“어떻게 된 거야?”그 역시 괴두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사신들도 당황했는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괴두, 일어나!”후르달은 연무장을 향해 고함쳤다.“넌 우리 양나라의 용사야! 이대로 쓰러지면 안 돼!”남제의 관원들도 지지 않고 연무장을 향해 응원을 보냈다.“봉안진! 잘했어!”“계속 공격해!”무려 세 판을 연속 지고 의기소침하던 남제인들은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일하게 귀비만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봉안진이 괴두를 쓰러뜨리다니! 어떻게?’그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봉안진이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어? 설지는 대체 뭘 한 거야!’귀비의 싸늘한 시선이 설지에게 닿았다.‘멍청한 자식!’설지도 불안에 떨고 있었다.괴두 같은 괴물을 쓰러뜨린 봉안진인데 차후 그의 보복이 두려웠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5화

    위기의 순간에 봉구안은 기둥을 잡고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뒤로 공중제비를 했다.그녀의 옷깃이 허공에서 휘날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곧이어 그녀는 괴두의 앞으로 달려가서 순식간에 상대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관전 중이던 여인들은 재빨리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긴 허리띠가 봉안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게 과연 우연일까?그와 대적했던 그 여자객도 그에게 같은 수를 쓴 적이 있었다.사람들은 봉안진이 왜 상대의 허리띠를 가로챘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무대 아래에서 관전하던 세 장군들마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단순히 괴두에게 창피를 주기 위함일까? 아니면 괴두가 바지를 올리는 순간을 노리기 위함이었을까?봉구안은 괴두의 후방에 착지했다. 괴두는 바지를 올릴 틈도 없이 나무 기둥을 집어들고 후방을 향해 휘둘렀다.눈 깜짝할 사이에 봉구안은 허리띠를 허공에 집어던지더니 그대로 상대의 손과 기둥을 묶어버렸다.“절묘하네!”진 장군이 맨 먼저 감탄을 터뜨렸다.이 장군도 합세했다.“잘했어! 상대의 손을 나무 기둥에 묶어버렸으니 괴두는 손이 묶인 거와 다름없어!”괴두의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간 상태였고 두 손은 나무기둥에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그는 초조해하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사신들이 불만을 토로했다.“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 양나라의 용사에게 이런 모욕감을 선사하다니요!”“남제 폐하, 이 황당한 경기를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사내의 바지를 벗기다니! 이게 남제가 손님을 대하는 태도입니까!”남제의 대신들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사신 나리, 진정하시오. 승패는 중요하지 않소. 볼거리가 중요하지. 이 얼마나 역동감 넘치는 대결이오? 무희들의 춤보다 더 재밌지 않소?”“사신 나리, 오해 마시게. 양나라 용사의 바지는 누가 벗긴 게 아니라 저절로 흘러내린 거라오!”“비무는 실력으로 말하는 거지. 귀국의 용사가 나무 기둥을 휘두를 때도 우린 강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6화

    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방안을 살폈다.탁자 위에는 봉안진이 대결 시 사용했던 가면이 놓여 있었다.소욱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병풍 뒤에 있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그와 여자객은 수차례 대결을 펼쳤기에 그녀의 초식은 이미 그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봉안진이 연무장에서 보여준 동작은 그녀와 무척이나 흡사했다.우연일지라도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남자는 긴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향했다.그리고 병풍 안으로 긴 팔을 뻗었다.팔목이 붙잡힌 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예를 취했다.“폐하를 뵈옵니다.”봉안진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소욱의 싸늘한 눈동자는 그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노려보았다.“방에 혼자 있었던 게 확실하느냐?”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했다.“예, 폐하.”안으로 들어온 유사양은 어깨가 반쯤 드러난 봉안진과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소욱을 보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폐하….”소욱은 말없이 봉안진을 뿌리치고는 병풍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곧바로 방을 나가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는 듯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괜한 의심인 걸까?’봉안진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황제의 모습에 조심스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가서 정중히 예를 올렸다.“죄 많은 소신,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괴두를 쓰러뜨렸는데 어찌 죄를 말하는 것이더냐.”겸손이 지나치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가식인 것이다.소욱은 그 뒤로 아무 말없이 편전을 나와 대전을 향해 걸었다.그런데 가는 길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후와 마주치고 말았다.황후는 공손히 그에게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다들 대전으로 옮겼을 것인데 황후는 어딜 가는 길이냐.”봉구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태연자약하게 답했다.“오라버니가 걱정이 되어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소욱은 더 이상 묻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7화

    소욱의 눈빛이 음침하게 굳었다.자고로 후궁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금기시된 이유는 후궁과 조정의 대신들이 결탁하여 외척이 과도하게 황제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는 견식이 짧은 후궁의 여인들이 공식적인 장소에서 말실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소욱이 어떻게 하면 양나라 사신들을 달랠지 고민하는 사이, 봉구안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귀비가 실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의 출중함을 가리키는 말이나, 전장의 공훈은 변방의 천만 장령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결과이지 어느 한 사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까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여러 장군들이 힘을 합쳐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여 그가 약점을 드러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 오라비도 이 대결에서 쉽게 그를 쓰러뜨리진 못했을 것이다.”“양나라에서는 한 사람만 내보냈으니 이 비무는 우리 남제가 수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양국의 교전 역시 남제가 십만 병력으로 양나라의 구만 병력을 물리쳤으니 양나라는 패하였지만 부끄러운 전투가 아니었다.”그녀의 말은 양나라의 체면을 살려주었기에 사신들의 표정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하지만 후르달은 아니었다.‘결국엔 자기네 남제가 더 잘났다고 강조하는 거잖아!’후르달이 생각하기에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말하고자 하는 뜻은 똑같았다.하지만 워낙에 빈틈이 없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봉구안을 바라보는 소욱의 눈빛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역시 그 세치 혀는 여전하군.’다만 저택에서 곱게 자란 귀족가의 아가씨가 전장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뜻밖이기도 했다.후르달이 여전히 씩씩거리며 말했다.“예, 양나라는 패배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남제 폐하, 저희와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소욱은 근엄한 목소리로 상대의 말을 잘랐다.“백성을 생각하는 양나라 황제의 마음에 짐도 감탄하였다.”“그리하여 취산골 전역이 끝난 후에 양나라 황제의 바람에 따라 철수를 결정한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8화

    봉안진이 이 자리에서 과거 사건을 들출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무려 2년이나 지난 사건이고 재조사를 시작한들 단서가 나올 리 만무했다.설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호통쳤다.“봉 공자, 뭐가 억울하단 말이오. 억울함이 있으면 대리사를 찾았어야지! 폐하 앞에서 과거 사건을 고발하는 건 너무 무례한 처사 아니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남제의 조사관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소!”봉 대인도 아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아이가 철이 없어서...”하지만 봉안진의 태도는 결연했다.“2년 전, 소신은 명을 받고 구호식량을 운송하는 길에 박주 일대를 지나다가 강도들의 습격을 당했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지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봉안진, 무슨 염치로 그날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거지?”“너의 판단 착오 없었고 그날 그 길로 가지 않았으면 그 많은 형제들이 죽지 않았어!”그는 어떻게든 봉안진의 잘못으로 몰아가려고 했다.과거의 일을 떠올린 대신들도 의논이 분분했다.“그 사건을 말하는 거였구나. 이미 끝난 사건 아니었나?”“봉안진이 무능하여 그르친 일을 왜 억울하다고 하는 거지?”“우리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었나?”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안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의 억울함을 계속 말해보거라.”봉안진은 당당히 답했다.“그날의 불행은 소신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관원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눈치만 살폈다.누가 봉안진을 배신했다는 걸까?게다가 구제물자 운송은 재난지역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이었다!봉안진은 담담히 설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배신자는 바로, 현임 참장인 설지입니다!”설지는 흠칫하더니 바로 반박했다.“폐하, 소신은 억울합니다! 소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봉 공자가 제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렇게 저를 모함하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이 질문을 이어갔다.“증거가 있느냐.”봉안진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당

  • 폭군의 장군 황후   제119화

    말을 마친 봉구안은 서신을 소욱에게 건넸다.설지와 암찰사는 멍하니 서서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가장 초조한 사람은 설지였다.그는 속으로 당연히 가짜일 거라고, 황후와 봉안진이 거짓 증거를 내민 거라고 반복해서 되뇌었다.쾅!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은 소욱의 두 눈에 살기가 돌았다.“너희 둘, 꿇어라!”두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곧이어 궁인들이 서신을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억울하다고 하면 필적 대조에 들어갈 판이었다.서신을 확인한 설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럴 수가!’분명 아무도 모르게 보관했다고 생각했던 서신들이 눈앞에 있었다.설지는 그래도 믿기지 않아 서신을 들고 위조의 단서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보면 볼수록 초조하기만 했다.서신은 진짜가 틀림없었고 그의 탄탄대로는 오늘로서 끝장이었다!‘아니지, 거의 다 암찰사 나리께 불리한 내용만 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어!’설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렸다.하지만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 놓인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서신을 본 암찰사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왕래한 서신이라고는 하지만 전부 그가 설지에게 보낸 것들이었다.그는 이런 위험한 것들을 없애지 않고 보관한 설지의 멍청함이 증오스러웠다.암찰사는 당장에서 설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황제에게 큰절을 올렸다.“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소신이 잠깐 설지의 꼬임에 넘어가서 큰 잘못을 저질렀사옵니다. 놈이 봉안진을 음해하였다는 것을 알고도 돈 욕심에 눈이 멀어 고발을 미룬 죄, 사죄드리옵니다!”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설지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 대인을 쳐다봤다.‘이 개자식이 이렇게 날 배신한다고?’황제가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 불어버렸으니 모든 것은 봉구안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설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설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만

Latest chapter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11화

    선성 밖에서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수십만 남제 장병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는 선성 위를 울려 퍼지며, 마치 갇혀 있던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성 안에서도 그 소리가 선성을 흔들 만큼 강렬하게 울렸다.봉구안은 전마를 타고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갑옷 아래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성문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상태였다.성루 위에서는 단춘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그 옆의 부장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장군, 저건 동방군입니다. 대체 어떻게 선성에 나타난 걸까요?! 분명 감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하늘에서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북연의 황제는 성 밖 동방군의 존재에 크게 분노했다.그는 단춘의 옷깃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감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그런데 이게 대체 뭐냐! 단춘, 정말 잘도 해냈구나!”단춘은 당혹스러웠다.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기에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그때 수화부 연합군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남제가 당신들을 속인 게 확실하군!”황제는 점점 격분하며 단춘을 더욱 매섭게 쏘아봤다.“동방군이 너희 뒤를 따라왔는데도 모르다니, 이런 실력으로 남제를 우리 북연과 나누겠다고? 정말 가소롭구나!”단춘은 황제의 손을 뿌리치며 반박했다.“폐하, 성 밖에 있는 건 일부 동방군에 불과합니다.”“게다가 우리 동부 연합군만 속은 것도 아닙니다.”“남부 연합군인 수화부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남제군을 알아챘습니까? 똑같이 속았으면서 왜 저희에게만 책임을 묻습니까?”동부 연합군의 장수들도 이에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남제의 계략은 워낙 교묘합니다. 감주를 언제 빠져나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폐하, 북부 연합군이라고 해서 뒤따라오는 남제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그만들 하십시오.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10화

    강력한 적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어리석은 동맹이었다.단춘은 선성의 옥석비를 손에 넣고 싶었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그는 정정당당히 조유관을 공략하며 남제에 진입했다.그런데 수화부 연합군은 도대체 뭘 하는가?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부 연합군의 성과를 가로채려는 것은 아닐까?그들의 이런 태도는 단춘을 화나게 했다.그렇다고 이미 도착한 연합군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결국 단춘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모두 들어라. 먹을 것도 쉬는 것도 뒤로 미뤄라.”“다른 나라보다 앞서 선성에 도달해야 한다!”“예!”……감주.대하국 연합군은 성 밖에서 남제 동부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남제 황후 봉구안이 이미 거미줄이라 불리는 비밀 통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는 소수의 병력을 남겨 감주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이 계책에 말려든 동부 연합군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그 사이, 봉구안의 동부군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미 묵성에 도착해 있었다.그곳에서 그녀는 동방세를 만났다.동방세는 거미줄 비밀 통로의 마지막 관문을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그는 고된 작업 중에도 농담을 잊지 않았다.“이번 거미줄 개조를 위해 황제께서 이 장군의 10만 대군을 내게 맡기셨소.”“덕분에 난 한동안 대장처럼 군림하며 유세를 떨었네.”황제가 보낸 인력 덕분에 그는 북부와 동부의 거미줄 비밀 통로를 효율적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이제 마지막 관문만 마무리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봉구안은 그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동방세, 남제 장병들을 대신해 깊이 감사의 뜻을 전하네.”“선성으로 갈 계획이오?”동방세가 웃으며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동방세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여기 작업만 끝내면 범진과 함께 선성에서 보도록 하세.”그는 선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직감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9화

    남강.서왕은 수화부 연합군의 갑작스러운 철수가 단순한 계략일 것이라 의심했다.하지만 밤중에 직접 확인한 결과, 그들의 철수는 패주와 다름없었다.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떠난 흔적이 역력했으며, 모닥불조차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조사를 거듭한 끝에, 수화부 연합군이 선성의 보물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서왕은 당황스러웠다.적군이 사라졌으니, 그는 계속 방어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한편, 수화부 연합군은 선성을 향해 급히 북진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병사들은 강추위를 뚫고 말을 달리며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선두에서 말을 탄 장수가 외쳤다.“장군의 명령이다! 속도를 더 내라!”병사들은 지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우리가 가봤자 보물이 우리 손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둘러야 하나?”“그러게! 선성 보물 얘기를 듣자마자 진지를 철수했지만, 보물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잖아. 그 유명한 옥석비도 하나뿐인데, 그게 우리 차지가 되겠어?”“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우리가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동산국 황궁.동산국 황제는 어마장에서 여전히 기력이 넘쳤다.오십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이어 과녁 중심을 명중시켰다.곁에 있던 신하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폐하, 수화부 연합군이 남강 공격을 포기하고 북상하여 조유관으로 향했다고 합니다.”조유관은 대하국 연합군이 최초로 돌파한 약점이었다.더 많은 연합군이 조유관으로 몰려드는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했다.그러나 그로 인해 남부 방면의 공격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황제는 활을 내려놓았다.머리칼에는 은빛이 드리워졌지만,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담대연의 소식은 알아왔느냐?”“담대연은 여전히 남제에 억류되어 천옥에 갇혀 있습니다.”황제는 다시 활을 들어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한 번의 발사로 과녁을 뚫자, 곁에 있던 신하가 찬사를 보냈다.“폐하, 화살로 만물을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8화

    남강.서왕의 어깨는 부상으로 아파왔고, 완부옥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부부처럼 행동하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막상 군막 안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뉜 듯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완부옥은 저녁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배가 부른 상태였다. 갑작스런 복통에 허리를 구부린 그녀를 보자, 서왕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유화! 군의를 데려오라!”그는 완부옥의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완부옥은 그저 체한 것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필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내심 불안했던 그녀는 거짓 임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벌레가 최근에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태아의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군의가 와서 진찰을 하면, 모든 게 드러날 위험이 컸다.서왕은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녀를 침대에 앉힌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이는 괜찮은가?”그의 시선은 그녀의 배로 향했다. 완부옥은 워낙 마른 체형이라 배가 불러도 잘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느슨한 옷을 입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왕은 그녀의 진짜 상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일반적인 임산부라면 나타날 만한 불편함이 완부옥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점들이 서왕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그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드디어 이 남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걸까? 완부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초조해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어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어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겠어요?”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살짝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말해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완부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던 이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7화

    대하 연합군은 묵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선성을 향해 진격했다.장수들 중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 말했다.“단 장군, 지금까지의 남제 원정이 너무 순조롭습니다.”“선성에서 매복을 준비한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단춘 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동부군은 현재 감주에 주둔 중이었다.그는 전력을 선성으로 보내면서도 일부 병력을 감주로 보내 허위 공격을 감행하고, 동부군을 묶어두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만약 선성에 매복이 있다 해도, 우리의 10만 대군에 북부 연합군까지 합하면 수십만 병력인데, 선성 하나를 못 뚫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그럼에도 신중한 장수는 여전히 망설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남제의 전략은 적을 깊이 유인하려는 술책 같습니다.”“단 장군, 처음 계획대로 동부군을 견제하며 진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단춘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짜증을 드러냈다.“유인이라니? 남제가 그렇게 어리석어 감주를 내놓고 선성에 매복을 펼친다는 말인가?”“만약 남제가 유인책을 쓴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감주로 끌어들이는 것이겠지!”“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둬라. 만약 북연이 먼저 선성에 도달해 옥석비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북연의 손발 노릇을 하게 될 거야!”“북연이 동부를 맡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다 해먹으려는 술책일 뿐이다.”“기다릴 테면 기다려 봐. 하지만 대하는 그렇게 바보처럼 속지 않는다!”선성은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북연 황제 역시 선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은 남하하는 도중 남제 잔병들에게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키며 계속해서 진격했다.남제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연합군의 사기는 높아졌다.그러다 어느덧 설날 전야가 되었다.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적이 감돌았다.백성들은 해가 지자마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설날을 맞이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전란을 피해 숨으려는 모습이었다.황성.궁궐 안, 후궁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밤을 지새웠다.그들은 한 손에 작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6화

    군막 안.서왕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앉아 있었고, 군의가 그의 상처에서 독을 빼내고 있었다.예리한 단검을 손에 쥔 군의가 상처를 살피자, 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두꺼운 수건을 꽉 깨물었다.그 모습을 본 완부옥이 눈썹을 찌푸렸다.“이미 독화살을 뽑아냈는데, 왜 또 칼을 드는 거죠?”호위 유화가 대신 답했다.“군의께서 남아 있는 독을 빼려면 살을 도려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듣자마자, 완부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살을 도려낸다고? 군의가 혹시 적국에서 온 첩자가 아닐까요?”그녀의 말에, 군의의 손이 떨렸다.“부인, 어찌 그런 망언을!”서왕은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을 깨물며 눈빛으로 완부옥에게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그러나 그녀는 군의를 밀어내고 서왕의 상처를 살폈다.피부가 갈라지고, 독이 퍼지며 상처 주변이 검게 변해 있었다.흔한 여인이라면 얼굴을 돌리며 기겁했을 터였다.그러나 완부옥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이게 그렇게 심각한 건가? 별거 아니네.”그 말에 유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부인, 아직 독이 남아 있습니다! 군의께서 말하길 어서 전하의 몸을 도려내 독을 빼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완부옥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독을 빼는 방법이 꼭 살을 도려내는 것뿐인가?”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군의는 그것을 보며 해독약이라고 생각했다.유화 또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그러나 항아리가 열리자, 그들이 본 것은 해독약이 아니었다.완부옥은 맨손으로 뚱뚱하고 하얀 벌레 하나를 꺼내더니, 서왕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군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전하! 조심하십시오! 저것은 독충입니다!”유화도 경악하며 외쳤다.“부인, 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시끄럽다!”완부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한번만 더 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군의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남강의 독충은 맹독입니다! 부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5화

    대하 사국 연합군이 묵성을 함락시키려 진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묵성은 조유관과 똑같이, 텅 비어 있었다."말도 안 돼!"단춘은 차마 현실을 믿지 못했다.이 짧은 시간 동안,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그들이 모두 감주로 이동한 것일까?그때, 정찰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보고 드립니다! 장군! 묵성에 적군이 없습니다!"연합군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니..."묵성은 한때 인구가 많은 번화한 도시였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듯했다.연합군은 묵성에 주둔했지만, 밤이 되자 몰아치는 한파와 함께 불길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캄캄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병사들은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끓이려 했지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어.’주군이 모여 있는 대장막 안.장수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단춘을 바라보았다."단 장군, 이건 분명 남제의 계략입니다!""우리가 이미 두 번이나 빈 성을 마주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더욱이, 우리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보충하려 했으나, 기대와 달리 얻은 것은 없습니다!""장군! 이곳에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내일도 계속 진군하시겠습니까?"단춘의 표정은 냉랭했다.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묵성이 비어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감주로 이동했을 것이다.""그러나 감주에 적의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섣불리 공격할 수 없다."그는 고개를 들어 정찰병을 바라보았다."북연은 어떤가? 북부 연합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지?"정찰병이 빠르게 답했다."장군! 북부 연합군은 이미 풍양까지 진격했습니다.""풍양은 작은 군현으로, 바로 인근에 있는 박주를 넘어가면, 그다음은 곧바로 선성입니다!"회의실은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북연군의 속도는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4화

    이촌은 그야말로 유령 마을이 되어 있었다.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연합군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북연 황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지막 생존자를 끌어오라 명령했다.화살에 맞은 병사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끌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분명 이곳입니다! 바로 이 마을에서 기습을 당했습니다!”하지만 북연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여기엔 아무것도 없다. 귀신조차 보이지 않는구나.”조사에 나섰던 정찰병들도 나섰다.“폐하,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북연 황제의 손이 힘껏 말고삐를 쥐었다.“찾아라.”병사들은 마을 곳곳을 수색했지만, 백성은커녕 전날 죽은 병사들의 시신조차 사라져 있었다.그 순간,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쌓인 눈이 빠르게 대지를 덮으며 모든 흔적을 삼켰다.북연 황제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행군을 계속한다.”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남제의 백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임현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같았다.원래라면 사람이 넘쳐나야 할 곳,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병사들 사이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이건 이상하다. 아무리 전쟁이 나도, 이렇게까지 흔적 없이 사라질 리가…”“설마, 남제 황실이 모든 백성을 대피시킨 건가?”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마련이었다.이는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정찰병들이 조사한 결과, 십 리 안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그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북연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정찰병을 보내라.”이튿날 새벽.한 정찰병이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폐하, 확인된 바에 따르면 남제 황실은 일찍이 백성들을 남쪽으로 대피시켰습니다!”“그들이 향하는 곳은… 선성입니다!”선성.남제의 전략 요충지이자, 철벽 방어를 자랑하는 도시.이곳만 함락하면, 남제 황궁까지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북연 황제는

  • 폭군의 장군 황후   제903화

    동방이 함락된 데 이어, 이번에는 북방까지 무너졌다.끝없는 위기였다.조정 대신들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궁중 곳곳에서는 남제가 정말 끝장나는 것이냐는 말이 오갔다.그러나 용상에 앉은 소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그는 남제의 황제,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질 수 없었다.조정이 파한 후, 문무백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찌 된 일인가! 북방이 무너졌다니!”“연합군은 어디까지 쳐들어온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황후마마께서 그토록 신중하게 군을 이끌었음에도 동부를 지키지 못했으니, 서부와 남부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겠군.”혼자의 힘으로 십여 개국의 연합군을 막는 것은 결국 무리였던 것일까.많은 대신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황궁 안.궁궐 안에도 불안감이 퍼졌다.후궁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했다.그들은 조묘의 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성이 무너지고 적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가축과 다를 바 없어요.”“북연은 호랑이 같은 나라라더니… 그들에게 잡히면 끝장입니다.”그녀들은 북연과 대하의 야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포로가 된다면, 그들에겐 지옥보다 더한 운명이 기다릴 터였다.자녕궁.자녕궁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녕비는 잔뜩 겁에 질린 채 태후에게 물었다.“고모님… 남제는 정말 망하는 겁니까?”태후는 이미 곳곳의 정보를 통해 전황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태평성대에는 꽃이 피지만, 난세에서는 한낱 들풀에 불과하구나…”“내가 널 지키지 못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어서 이 병을 받거라… 들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거라.”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작은 약병을 녕비의 손에 쥐어주었다.그 의미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녕비의 손이 떨렸다.그녀는 약병을 쥔 채, 눈을 뗄 수 없었다.“고모님…”태후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처롭게 미소 지었다.“내가 너를 궁에 들인 것은 잘못된 선택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