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눈을 떴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피 튀기는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괴두의 주먹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누군지 몰라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누군가가 사람들 틈에서 소리쳤다.“봉가의 장남 같네요!”또 다른 누군가도 소리쳤다.“입고 있는 옷을 보니 확실해요! 보호대도 차고 있잖아요!”봉가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중간에 무대로 올라간 무장들은 준비도 없이 그대로 올라갔기에 아무도 보호대를 장착하지 않았다.너무 멀리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차고 있는 보호대와 옷 색깔을 보고 그들은 봉안진이라고 확신했다.“괴두의 주먹을 받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네요.”그 말을 듣고 있던 후르달은 괜히 심통이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고작 한 주먹을 받아냈을 뿐이다.그는 괴두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비무장.괴두는 주먹을 거두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빤히 응시했다.상대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무장들과는 사뭇 달랐다.하지만 상대가 맹성주가 아니라면 자신이 있었다.“이리 와!”괴두는 팔뚝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소리쳤다.“여길 때려!”관망대의 모두가 비무장에 올라간 사람을 봉안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상 그는 변장하고 올라간 봉구안이었다.귀비가 봉씨 형제를 반 죽이기 위해 준비한 가면이 오히려 그녀가 위장하는데 편의를 주었다.양나라와의 전장에서 봉구안은 괴두와 결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그랬기에 그녀는 상대의 초식을 빤히 꿰고 있었다.그녀는 쓰러진 무장의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깔고 읊조렸다.“내려가.”그 무장은 진작에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남제의 존엄을 위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그를 대신할 사람이 올라왔으니 계속 무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세 사람의 협공도 쓰러뜨리지 못한 괴두였다.과연 봉안진이 혼자 힘으로 가능할까?귀비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하고 비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봉안진이 진심으로 대결에 응하
진 장군은 무대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봉안진은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려는 게 아니라 방어를 위장한 공격을 하고 있어!”“그럴 리가. 계속 피하고만 있잖아?”“진 장군이 잘못 본 게 아니야?”진 장군은 고개를 젓고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아니,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봉안진은 방어하는 척하면서 사실 상 공격을 하고 있는 거야!”그럴수록 남은 두 사람은 궁금증에 미칠 것 같았다.“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진 장군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봉안진은 공격을 피하며 무대 변두리를 돌고 있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왼쪽 방향으로만 몸을 틀고 있어. 괴두에게는 오른쪽이 되겠지.”“그게 뭐? 봉안진이 한 방향으로 빙빙 돌면서 괴두를 어지럽게 만들려는 건가? 맞아! 그런 방법도 있었네! 괴두가 이미 평형을 잃은 걸 보면 유효한가 본데….”진 장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게 아니야!”그렇게 아둔한 방법일 리가 없었다.진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괴두의 움직임을 잘 살펴봐. 오른다리가 좀 이상하지? 봉안진을 봐. 왜 굳이 계속 왼쪽으로만 피하는 걸까? 이상하지 않아?”그러자 다른 두 장군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봉안진은 주먹을 피하고 이동할 때 꼭 무릎을 구부려서 피하네. 괴두와 봉안진은 키 차이가 심한 편이니까.”“그래서 그게 뭐? 그냥 주먹을 피하기 쉬우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진 장군이 정색해서 말했다.“괴두가 무릎을 굽히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무릎을 굽혀? 그게 무슨 전술이야?”“잠깐! 나 알 것 같아! 괴두의 오른쪽 무릎이….”“뭐야? 또 뭔데?”유일하게 영문을 모르는 무장이 옆에 있는 사람을 재촉했다.진 장군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 장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이 장군도 알았지?”이 장군은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오른쪽 무릎이 돌파구였다니! 난 왜
거대한 산과도 같았던 괴두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렸다.한편, 연무장.봉구안은 다리를 뻗어 상대의 가슴을 가격했다.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괴두는 오른쪽 무릎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괴두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봉구안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돌려차기로 상대의 목덜미를 가격했다.괴두가 중심을 잃고 무대 한복판으로 쓰러졌다.봉구안은 무르팍으로 상대의 숨통을 압박했다.괴두는 두꺼운 가면 너머로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봉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마치 죽은 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서늘한 눈빛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네… 네가 어떻게….”괴두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왜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봉구안이 자신을 유인하여 무대를 빙빙 돌았는지 알아차렸다.‘내가 오른쪽 무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하지만 대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었다.한편, 관망대에서 시합을 지켜보던 후르달도 당황했다.“어떻게 된 거야?”그 역시 괴두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사신들도 당황했는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괴두, 일어나!”후르달은 연무장을 향해 고함쳤다.“넌 우리 양나라의 용사야! 이대로 쓰러지면 안 돼!”남제의 관원들도 지지 않고 연무장을 향해 응원을 보냈다.“봉안진! 잘했어!”“계속 공격해!”무려 세 판을 연속 지고 의기소침하던 남제인들은 환호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일하게 귀비만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었다.‘봉안진이 괴두를 쓰러뜨리다니! 어떻게?’그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봉안진이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어? 설지는 대체 뭘 한 거야!’귀비의 싸늘한 시선이 설지에게 닿았다.‘멍청한 자식!’설지도 불안에 떨고 있었다.괴두 같은 괴물을 쓰러뜨린 봉안진인데 차후 그의 보복이 두려웠
위기의 순간에 봉구안은 기둥을 잡고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뒤로 공중제비를 했다.그녀의 옷깃이 허공에서 휘날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곧이어 그녀는 괴두의 앞으로 달려가서 순식간에 상대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관전 중이던 여인들은 재빨리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긴 허리띠가 봉안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소욱은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게 과연 우연일까?그와 대적했던 그 여자객도 그에게 같은 수를 쓴 적이 있었다.사람들은 봉안진이 왜 상대의 허리띠를 가로챘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무대 아래에서 관전하던 세 장군들마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단순히 괴두에게 창피를 주기 위함일까? 아니면 괴두가 바지를 올리는 순간을 노리기 위함이었을까?봉구안은 괴두의 후방에 착지했다. 괴두는 바지를 올릴 틈도 없이 나무 기둥을 집어들고 후방을 향해 휘둘렀다.눈 깜짝할 사이에 봉구안은 허리띠를 허공에 집어던지더니 그대로 상대의 손과 기둥을 묶어버렸다.“절묘하네!”진 장군이 맨 먼저 감탄을 터뜨렸다.이 장군도 합세했다.“잘했어! 상대의 손을 나무 기둥에 묶어버렸으니 괴두는 손이 묶인 거와 다름없어!”괴두의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간 상태였고 두 손은 나무기둥에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그는 초조해하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사신들이 불만을 토로했다.“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 양나라의 용사에게 이런 모욕감을 선사하다니요!”“남제 폐하, 이 황당한 경기를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사내의 바지를 벗기다니! 이게 남제가 손님을 대하는 태도입니까!”남제의 대신들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사신 나리, 진정하시오. 승패는 중요하지 않소. 볼거리가 중요하지. 이 얼마나 역동감 넘치는 대결이오? 무희들의 춤보다 더 재밌지 않소?”“사신 나리, 오해 마시게. 양나라 용사의 바지는 누가 벗긴 게 아니라 저절로 흘러내린 거라오!”“비무는 실력으로 말하는 거지. 귀국의 용사가 나무 기둥을 휘두를 때도 우린 강
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방안을 살폈다.탁자 위에는 봉안진이 대결 시 사용했던 가면이 놓여 있었다.소욱은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병풍 뒤에 있는 그림자를 노려보았다.그와 여자객은 수차례 대결을 펼쳤기에 그녀의 초식은 이미 그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봉안진이 연무장에서 보여준 동작은 그녀와 무척이나 흡사했다.우연일지라도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남자는 긴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향했다.그리고 병풍 안으로 긴 팔을 뻗었다.팔목이 붙잡힌 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욱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예를 취했다.“폐하를 뵈옵니다.”봉안진은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소욱의 싸늘한 눈동자는 그를 꿰뚫어보려는 듯이 노려보았다.“방에 혼자 있었던 게 확실하느냐?”봉안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답했다.“예, 폐하.”안으로 들어온 유사양은 어깨가 반쯤 드러난 봉안진과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소욱을 보자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폐하….”소욱은 말없이 봉안진을 뿌리치고는 병풍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곧바로 방을 나가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는 듯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괜한 의심인 걸까?’봉안진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황제의 모습에 조심스레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가서 정중히 예를 올렸다.“죄 많은 소신,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괴두를 쓰러뜨렸는데 어찌 죄를 말하는 것이더냐.”겸손이 지나치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가식인 것이다.소욱은 그 뒤로 아무 말없이 편전을 나와 대전을 향해 걸었다.그런데 가는 길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후와 마주치고 말았다.황후는 공손히 그에게 예를 올렸다.“신첩, 폐하를 뵈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다들 대전으로 옮겼을 것인데 황후는 어딜 가는 길이냐.”봉구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태연자약하게 답했다.“오라버니가 걱정이 되어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소욱은 더 이상 묻지
소욱의 눈빛이 음침하게 굳었다.자고로 후궁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금기시된 이유는 후궁과 조정의 대신들이 결탁하여 외척이 과도하게 황제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이유는 견식이 짧은 후궁의 여인들이 공식적인 장소에서 말실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소욱이 어떻게 하면 양나라 사신들을 달랠지 고민하는 사이, 봉구안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귀비가 실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의 출중함을 가리키는 말이나, 전장의 공훈은 변방의 천만 장령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결과이지 어느 한 사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까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여러 장군들이 힘을 합쳐 괴두의 체력을 소모하여 그가 약점을 드러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 오라비도 이 대결에서 쉽게 그를 쓰러뜨리진 못했을 것이다.”“양나라에서는 한 사람만 내보냈으니 이 비무는 우리 남제가 수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양국의 교전 역시 남제가 십만 병력으로 양나라의 구만 병력을 물리쳤으니 양나라는 패하였지만 부끄러운 전투가 아니었다.”그녀의 말은 양나라의 체면을 살려주었기에 사신들의 표정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하지만 후르달은 아니었다.‘결국엔 자기네 남제가 더 잘났다고 강조하는 거잖아!’후르달이 생각하기에 듣기 좋은 말로 포장했을 뿐, 말하고자 하는 뜻은 똑같았다.하지만 워낙에 빈틈이 없는 말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봉구안을 바라보는 소욱의 눈빛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역시 그 세치 혀는 여전하군.’다만 저택에서 곱게 자란 귀족가의 아가씨가 전장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 뜻밖이기도 했다.후르달이 여전히 씩씩거리며 말했다.“예, 양나라는 패배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남제 폐하, 저희와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소욱은 근엄한 목소리로 상대의 말을 잘랐다.“백성을 생각하는 양나라 황제의 마음에 짐도 감탄하였다.”“그리하여 취산골 전역이 끝난 후에 양나라 황제의 바람에 따라 철수를 결정한
봉안진이 이 자리에서 과거 사건을 들출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무려 2년이나 지난 사건이고 재조사를 시작한들 단서가 나올 리 만무했다.설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호통쳤다.“봉 공자, 뭐가 억울하단 말이오. 억울함이 있으면 대리사를 찾았어야지! 폐하 앞에서 과거 사건을 고발하는 건 너무 무례한 처사 아니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남제의 조사관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소!”봉 대인도 아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아이가 철이 없어서...”하지만 봉안진의 태도는 결연했다.“2년 전, 소신은 명을 받고 구호식량을 운송하는 길에 박주 일대를 지나다가 강도들의 습격을 당했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지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봉안진, 무슨 염치로 그날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거지?”“너의 판단 착오 없었고 그날 그 길로 가지 않았으면 그 많은 형제들이 죽지 않았어!”그는 어떻게든 봉안진의 잘못으로 몰아가려고 했다.과거의 일을 떠올린 대신들도 의논이 분분했다.“그 사건을 말하는 거였구나. 이미 끝난 사건 아니었나?”“봉안진이 무능하여 그르친 일을 왜 억울하다고 하는 거지?”“우리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었나?”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안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의 억울함을 계속 말해보거라.”봉안진은 당당히 답했다.“그날의 불행은 소신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관원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눈치만 살폈다.누가 봉안진을 배신했다는 걸까?게다가 구제물자 운송은 재난지역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이었다!봉안진은 담담히 설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배신자는 바로, 현임 참장인 설지입니다!”설지는 흠칫하더니 바로 반박했다.“폐하, 소신은 억울합니다! 소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봉 공자가 제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렇게 저를 모함하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이 질문을 이어갔다.“증거가 있느냐.”봉안진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당
말을 마친 봉구안은 서신을 소욱에게 건넸다.설지와 암찰사는 멍하니 서서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가장 초조한 사람은 설지였다.그는 속으로 당연히 가짜일 거라고, 황후와 봉안진이 거짓 증거를 내민 거라고 반복해서 되뇌었다.쾅!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은 소욱의 두 눈에 살기가 돌았다.“너희 둘, 꿇어라!”두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곧이어 궁인들이 서신을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억울하다고 하면 필적 대조에 들어갈 판이었다.서신을 확인한 설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럴 수가!’분명 아무도 모르게 보관했다고 생각했던 서신들이 눈앞에 있었다.설지는 그래도 믿기지 않아 서신을 들고 위조의 단서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보면 볼수록 초조하기만 했다.서신은 진짜가 틀림없었고 그의 탄탄대로는 오늘로서 끝장이었다!‘아니지, 거의 다 암찰사 나리께 불리한 내용만 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어!’설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렸다.하지만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 놓인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서신을 본 암찰사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왕래한 서신이라고는 하지만 전부 그가 설지에게 보낸 것들이었다.그는 이런 위험한 것들을 없애지 않고 보관한 설지의 멍청함이 증오스러웠다.암찰사는 당장에서 설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황제에게 큰절을 올렸다.“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소신이 잠깐 설지의 꼬임에 넘어가서 큰 잘못을 저질렀사옵니다. 놈이 봉안진을 음해하였다는 것을 알고도 돈 욕심에 눈이 멀어 고발을 미룬 죄, 사죄드리옵니다!”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설지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 대인을 쳐다봤다.‘이 개자식이 이렇게 날 배신한다고?’황제가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 불어버렸으니 모든 것은 봉구안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설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설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만
황제는 그날 이후로 병을 앓았다.태의는 고뿔에 걸렸다고 말했으나 소욱은 정무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그렇게 12월이 되던 어느 날, 이혼 교지가 드디어 내려졌다.연상은 기쁨에 겨워 봉구안에게 말했다.“마마, 드디어 떠나실 수 있겠네요!”그녀는 진심으로 황후를 위해 기뻐했다.전에 황제의 행실을 보고 황후가 평생 이 궁에 구금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그녀였다.다행히도 황제는 결국 생각을 바꿔 황후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폐후가 아닌 이혼이라는 점이었다.역사를 통틀어 황제와 이혼한 황후는 없었다.연상과는 달리, 최 상궁은 구슬피 울었다.“마마,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왜 굳이 궁을 떠나시려는 거예요!”최 상궁은 복도에 주저앉아 오열했다.지나가던 궁인들이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듣지도 않았다.내전 안.봉구안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교지를 빤히 바라보았다.평화로운 이별, 그녀가 바라던 상책이었다.이렇게 되면 봉씨 가문과 연상을 비롯한 궁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소욱과 그녀는 이제 아무 사이라도 아니라는 것을 만 천하가 알게 될 것이고 이는 황후의 실종보다는 귀찮은 일들을 덜었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녀는 마음을 억누르는데 도가 텄을지도 모른다.봉구안의 짐은 많지 않아서 보따리 하나로 해결되었다.일각이 지난 후, 그녀는 출궁 준비를 마치고 교지를 들고 영화궁을 나왔다.영화궁 밖, 진한길이 굳은 표정을 하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황후를 본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인 감히, 마마께서 생각을 돌리시기를… 청합니다.”이는 그가 처음으로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청한 일이었다.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길은 전방에 있다.”그러니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잠깐의 동요는 있었지만 그걸 위해 평생을 헌신할 자신도 없었다.진한길은 그녀의 결연한 표정을 바라보며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욱은 황후를 꽉 안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황후, 짐은 너를 속이지 않았다. 영비의 아이는 짐의 것이 아니었어. 증거를 찾았다. 네가 못 믿을까 봐. 이제 짐은 드디어 내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짐을 떠나지 말거라.”말을 마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궁인들에게서 확보한 증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봉구안은 멍하니 있다가 그의 손을 밀쳐냈고, 그 순간 종이에 적힌 진술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을바람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종이가 흩날렸다.소욱은 급급히 진술서들을 줍다가 표정이 굳었다.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정신이 들어 진술서들을 버리고 눈앞의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그의 눈동자가 빨갛게 붉어졌다.그는 여전히 갈린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짐의 결백 여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냐.”봉구안은 진술서들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굳이 이런 일을 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폐하와 영비 때문에 떠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지금까지도 소욱은 그녀가 왜 떠나려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소욱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웠다.“알고 있었다. 네가 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가 짐이 아닌 단회욱이었더라면 넌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지.”“짐은 영비와 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초조해졌었다. 짐이 진짜로 그 아이를 품었고 그 일 때문에 네가 떠날까 봐.”“너에게 그 일을 숨길까 생각도 했었다. 아니면 진실을 다 조사한 후에 너에게 얘기할 생각이었지.”“하지만 진실이 어떻든, 너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그 증거를 찾았는데… 너는 전혀 동요가 없구나.”그는 그제야 그들 사이에 이미 미래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너무 급한 마음에 최 상궁의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소욱은 가까이에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침묵이 곧 답이었다.그녀는 진실이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한참이 지난 후,
악몽에서 깬 소욱은 더 이상 잠들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침상을 내린 그는 옷을 걸치고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에 도착한 소욱은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멍하니 밖에서 방 문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이면 황후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그가 들어가야 할지 주저하던 사이에 최 상궁이 다가왔다.최 상궁은 황후화 황제가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황후께서 말은 그렇게 하셔도 사실은 그냥 폐하께 서운한 일이 있어서예요. 소인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고, 황후께서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폐하와 영비마마께서…”소욱은 이상을 찌푸리며 최 상궁에게 물었다.“황후가 영비 때문에 화가 났단 말이냐?”최 상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황후께서 평소에 폐하를 얼마나 생각하시는데요. 그게 아니라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를 변방까지 운송했겠어요? 폐하께서 출정을 떠나신 동안, 마마께서는 폐하를 그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가 돌아오시고 황후마마는 갑자기 돌변하셨죠. 이혼을 제기한 것도 그 시점이고요.”“만약 폐하께서 정말 과거의 일을 신경 쓰신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얘기를 꺼냈을 리가 없지요. 폐하, 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영비마마의 침전으로 가신 그날 밤, 황후마마도 그곳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신 후, 표정이 안 좋으셨지요.”소욱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그가 장락궁에 머문 그날 밤이라면 흑포가 탈옥한 날이었다.아마 흑포 때문에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최 상궁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으로 돌아오기 전, 남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후는 멀쩡했다.그녀가 돌변한 건 궁으로 돌아온 후, 영비가 한때 회임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그날 서재에서 그는 영비를 시켜 자신과 영비가 합방한 적 없다는 사실을 해명하게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조촐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어쩌면 황후는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영비가 그와 짜고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오해했을
태황태후는 진짜로 죽으려던 게 아니라 죽음으로 소욱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그걸 아는 소욱은 태의가 태황태후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고하자마자 굳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마마마, 굳이 짐을 이렇게 괴롭히셔야겠습니까.”태황태후는 침상에 누워 슬픔에 잠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폐하를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폐하가 안타까워서 그래요!”“조중의 일은 이 늙은이도 들었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이 지경이되었는데도 그 아이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그 아이는 작정하고 궁을 떠나려는 겁니다. 폐하께선 그 아이를 마음에 품었고 옆에 두고 싶겠지만 그 아이는 아니에요.”“딴마음을 품은 여자를 어찌 옆에 묶어둔단 말입니까? 폐하, 선황의 원비 기억하십니까? 진심으로 황후를 아끼신다면 황후가 원비의 처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소욱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아름답지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원비는 선황이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었다.하지만 그 여인은 선황을 사랑하지 않았다.선황은 그녀를 강제로 궁에 머물게 하고 심지어 황후로 책봉할 생각까지 품었었다.하지만 입궁한지 3년만에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렸다.원비 이야기는 황궁의 금지어였으나, 황실의 핏줄인 소욱은 그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원비는 칼로 자신의 얼굴을 긋고 긴 검을 자신의 배에 찔러넣었다. 그때의 원비는 회임 중이었다.뱃속의 아이와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것이다.그는 선황이 그녀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장례도 거부하고 이틀이나 슬픔에 잠겨 있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그 뒤로 선황은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육신은 살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마음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매정했다.소욱의 머릿속에는 장렬히 죽어갔던 원비의 처참한 모습과 슬픔에 울부짖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태황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선황께선 아들들에게 제왕은 정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건 본인이 사랑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입니다.”“이 늙은이도 그때
소욱이 모습을 드러내자, 백성들은 두려워하거나 혹은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유사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대담하구나! 너희들은 폐하를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예를 올리지 않느냐?”그러자 백성들은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그러나 누군가는 약한 목소리로 외쳤다.“이혼…”소욱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서 있었으며, 넓은 곤룡포가 바람에 펄럭였다.그의 시선은 봉구안에게 닿았다.“황후는 궁으로 돌아가시오!”그러나 봉구안은 그 자리에서 단호히 외쳤다.“폐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시옵소서.”소욱의 손은 단단히 움켜쥐어졌고, 손바닥의 상처는 지금 그의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마음만큼 아프지 않았다.조금 전 황후가 말한 모든 것들.그는 들었다.그리고 그것이 모두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그녀가 그로 인해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몰랐다.그가 저지른 상처를, 기필코 회복시킬 것이다.그러나 이혼? 그것만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소욱은 분노에 차서 시위들을 쏘아보았다.“너희들은 다 죽었느냐!”유사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 등문고의 규칙은 깨뜨릴 수 없는 것이옵니다.”소욱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이 등문고를 치워라!”이런 빌어먹을!그는 이 물건이 있는 걸 잊고 있었다.“폐하, 결코 그렇게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몇몇 대신들이 극구 만류했다.“폐하, 등문고는 선조께서 세우신 것으로, 이를 없애는 것은…”“짐이 치우라 했다!” 소욱의 목소리는 반박을 용납하지 않았다.그러나 실상, 억울한 사람이 이 북을 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등문고는 그저 황실의 공정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일 뿐이었다.시위들은 명령에 따라 등문고를 옮기고 봉구안을 에워쌌다.그러나 봉구안은 평온한 눈빛으로 소욱을 바라볼 뿐이었다.황후가 등문고를 친 일은 금세 온 세상에 알려졌다.선량한 사람들은 황후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여성들은 황후의 처지를
궁문 밖은 수많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대체 무슨 일인가?”“모르겠네, 나도 막 와 보았네.”“들어 보니 황후께서 이혼을 청하셨다던데…”“뭐라고?! 이혼? 황후께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평범한 여인이라도 이혼을 청하려면 시댁의 온갖 압박을 견뎌야 하는데, 문벌 높은 집안에서는 ‘여인이 이혼할 수 없고, 단지 버림받을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하물며 황후가 이혼을 청하다니!사람들은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황후마마께서 미치신 게 분명해…”등문고 아래.봉구안은 단단한 눈빛으로 백성들 앞에 섰다.목소리는 우렁찼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울림이 있었다.“창천이시여!”“첫째로 고하옵나니, 혼인을 했으나 받들지 않으셨습니다.”“제후의 대례를 올리셨으나, 폐하께서는 신 대신 다른 이를 보내 혼례를 행하게 하셨사옵니다.”“둘째로 고하옵나니, 혼인을 하셨으나 믿지 않으셨습니다.”“초야에 들어가자마자, 폐하께서는 제 정결을 의심하시어, 봉가의 명예를 짓밟으셨사옵니다.”“셋째로 고하옵나니, 첩을 사랑하시고 아내를 멸시하셨습니다.”“혼인한 밤, 정실을 내버려 두고 비빈과 함께 밤을 보내셨으며, 황후의 인장은 비빈에게 맡기셨사옵니다.”“넷째로 고하옵나니, 아내를 방치하고 돌보지 않으셨습니다.”“폐하께서는 연이어 궁중에서 제 몫을 삭감하셨고, 그로 인해 저는 지참금까지 모두 소진하게 되었사옵니다.”“다섯째로 고하옵나니,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셨습니다.”“궁에 들어온 지 1년이 넘었으나, 수시로 궁규를 필사하게 명하시고, 팔이 부러지게 하시고, 은침으로 몸을 찌르셨사옵니다.”“마지막으로 고하옵나니, 호랑이를 길러 화를 부르셨습니다.”“폐하의 방임이 후궁 황귀비를 제멋대로 굴게 하여, 그녀는 혼례 전 저를 납치하고 명예를 훼손하며 헛소문을 퍼뜨렸사옵니다…”“그만! 그만두거라!!”봉구안의 부친 봉 대인은 군중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관모는 삐뚤어져 있었으나 바로잡을 겨를조차 없었다.그는 막아서는 시위들을 향해 고함쳤다.“
소욱은 알고 있었다.지금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져버린 것은 모두 황후가 낮에 태황태후를 찾은 탓이었다.그는 그녀가 할마마마께 도움을 청하려는 줄로만 알았다.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온 세상이 그를 규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였단 말인가?후궁들조차 그녀를 이렇게까지 감싸게 된 것이!정말이지, 그녀의 능력은 대단했다.소욱은 내전으로 들어섰다.그곳에 태연히 앉아 있는 봉구안을 거칠게 끌어올리며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광경이느냐?”봉구안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폐하께서 이대로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면, 장차 폐하께 제 목숨을 청원할 이들은 백성과 장병들이 될 것이옵니다.”소욱은 자신을 비웃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대체 무슨 청원이란 말인가? 내가 너에게 해를 끼쳤다고 말하려는 것이냐?”“그렇다면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자일 것이다!”“분명히 떠나겠다고 한 건 너였고, 나를 저버린 것도 너였다!”“나는 너에게 천 번 만 번 잘해 주었는데, 너는 마음이 돌처럼 차가워, 죽은 사람 하나만도 못하지 않았느냐!”봉구안은 여전히 고요한 얼굴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그 고요함이 그를 더욱 비참하고 화나게 만들었다.마치 자신이 혼자만 난리를 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침묵은 소욱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그는 이를 악물며 차갑게 말했다.“네가 나와 끝까지 싸우겠다면, 내가 너에게 이 남제의 태양이 누구를 위해 떠오르는지 보여주도록 하마!”…그날 밤.후궁들은 영화궁 밖에서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있었다.다음 날이 되자 전조의 대신들 몇몇이 차례로 상소를 올렸다.“폐하, 후궁의 일은 원래 신들이 간섭할 바가 아니지만, 황후께서는 모범적인 군후이십니다.”“전쟁 중에는 기도를 올리셨고, 그 뒤로는 군량미를 직접 보내셨사옵니다.”“이토록 어진 황후를 어찌 그렇게
영화궁 밖.수많은 후궁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있었다.그들 모두 황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황제께서 자신들에게 무심하신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으나, 황후마마처럼 훌륭하신 분께까지 그러하시다니!황후마마는 군량미를 보내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으셨건만, 결과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영비가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황후께 냉담해지셨고, 심지어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면벽 자숙을 명하셨다.이런 일을 겪고도 황후마마께서 심신이 지쳐 스스로 하당을 청하시고 궁을 떠나시길 구하신 것이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폐하께서 억지로 황후마마를 붙들어 두시며 그 마음을 짓밟으시는 것은 참으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었다.후궁들은 마음을 합해 한목소리로 탄원하였고, 이렇게까지 하나로 뭉친 적은 없었다.그들 대부분은 명문가 출신으로, 이미 은밀히 집안에 소식을 전하여 전조에도 힘을 보태도록 요청하였다.소욱은 이 말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황후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황후를 붙잡아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처음에는 후궁들의 행태를 무시하려 했으나, 그녀들이 외치는 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비통한 기색이 역력했다.멀리서 들으면 황제가 붕어한 줄 알 정도였다!결국 소욱은 무겁게 명을 내렸다.“모두 물러가라!”그러나, 어명을 받은 호위들은 후궁들에게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그녀들은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손을 대면 곧바로 ‘무례하다’고 소리쳤다.심지어 몇몇은 머리 장식인 발채를 목에 들이대며 죽음으로 저항하였다.이 전대미문의 상황에,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결국 천기를 울리며 돌아와 아뢰었다.“폐하, 신하들이 무능하여 대처할 수 없사옵니다.”자녕궁.장공주 역시 이 소식을 들었다.황후가 궁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빨리 옷을 갈아입혀라! 황제를 만나러 가야겠다!”장공주는 오래전부터 황후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며
태황태후는 눈앞의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황후, 네가 방금 뭐라 했느냐!?”봉구안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신첩, 스스로 폐위하길 청하옵니다.”전각 안에 있던 궁인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황후마마께서 무슨 망령된 짓을 하시는 것인지?“건방진 소리 마라! 이런 말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구나! 황상은, 황상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숨김 없이 말했다.“황제 폐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신첩이 마마의 의지를 구하러 온 것이옵니다.”태황태후는 사실 이 손자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진심으로 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냐?” 태황태후가 물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사옵니다.”“좋다. 내가…”태황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 전,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일로 할마마마께서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태황태후가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전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 눈빛은 심지어 그녀를 향해서도 약간의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황상, 네가…”소욱은 봉구안의 허리를 감싸며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황후가 짐과 다투다가 그런 헛소리를 한 것뿐입니다. 할마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태황태후는 속으로 모든 것을 간파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소욱이 봉구안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만수궁을 나선 후.소욱은 봉구안을 나무라지 않았다.다만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영화궁에 이르러 소욱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할마마마께서는 이미 폐후할 마음을 품으셨었지. 오늘, 그 바램을 이룰 뻔 했구나?”봉구안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소욱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그러니 다시는 이런 의미 없는 일을 하지 마라.”봉구안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었다.“제 마음은 변함이 없사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는 그녀가 웃는 것을 좋아했으나, 이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