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안진이 이 자리에서 과거 사건을 들출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무려 2년이나 지난 사건이고 재조사를 시작한들 단서가 나올 리 만무했다.설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호통쳤다.“봉 공자, 뭐가 억울하단 말이오. 억울함이 있으면 대리사를 찾았어야지! 폐하 앞에서 과거 사건을 고발하는 건 너무 무례한 처사 아니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남제의 조사관들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소!”봉 대인도 아들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폐하, 아이가 철이 없어서...”하지만 봉안진의 태도는 결연했다.“2년 전, 소신은 명을 받고 구호식량을 운송하는 길에 박주 일대를 지나다가 강도들의 습격을 당했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지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봉안진, 무슨 염치로 그날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거지?”“너의 판단 착오 없었고 그날 그 길로 가지 않았으면 그 많은 형제들이 죽지 않았어!”그는 어떻게든 봉안진의 잘못으로 몰아가려고 했다.과거의 일을 떠올린 대신들도 의논이 분분했다.“그 사건을 말하는 거였구나. 이미 끝난 사건 아니었나?”“봉안진이 무능하여 그르친 일을 왜 억울하다고 하는 거지?”“우리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었나?”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안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의 억울함을 계속 말해보거라.”봉안진은 당당히 답했다.“그날의 불행은 소신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옵니다.”관원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눈치만 살폈다.누가 봉안진을 배신했다는 걸까?게다가 구제물자 운송은 재난지역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이었다!봉안진은 담담히 설지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배신자는 바로, 현임 참장인 설지입니다!”설지는 흠칫하더니 바로 반박했다.“폐하, 소신은 억울합니다! 소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봉 공자가 제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렇게 저를 모함하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이 질문을 이어갔다.“증거가 있느냐.”봉안진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당
말을 마친 봉구안은 서신을 소욱에게 건넸다.설지와 암찰사는 멍하니 서서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가장 초조한 사람은 설지였다.그는 속으로 당연히 가짜일 거라고, 황후와 봉안진이 거짓 증거를 내민 거라고 반복해서 되뇌었다.쾅!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은 소욱의 두 눈에 살기가 돌았다.“너희 둘, 꿇어라!”두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곧이어 궁인들이 서신을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억울하다고 하면 필적 대조에 들어갈 판이었다.서신을 확인한 설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럴 수가!’분명 아무도 모르게 보관했다고 생각했던 서신들이 눈앞에 있었다.설지는 그래도 믿기지 않아 서신을 들고 위조의 단서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보면 볼수록 초조하기만 했다.서신은 진짜가 틀림없었고 그의 탄탄대로는 오늘로서 끝장이었다!‘아니지, 거의 다 암찰사 나리께 불리한 내용만 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어!’설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렸다.하지만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 놓인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서신을 본 암찰사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왕래한 서신이라고는 하지만 전부 그가 설지에게 보낸 것들이었다.그는 이런 위험한 것들을 없애지 않고 보관한 설지의 멍청함이 증오스러웠다.암찰사는 당장에서 설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황제에게 큰절을 올렸다.“폐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소신이 잠깐 설지의 꼬임에 넘어가서 큰 잘못을 저질렀사옵니다. 놈이 봉안진을 음해하였다는 것을 알고도 돈 욕심에 눈이 멀어 고발을 미룬 죄, 사죄드리옵니다!”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설지는 그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 대인을 쳐다봤다.‘이 개자식이 이렇게 날 배신한다고?’황제가 심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다 불어버렸으니 모든 것은 봉구안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녀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설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설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만
능지형 얘기가 나오자 문무백관이 당황했다.율법대로라면 두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사형에 처할 정도가 아니었다.설지와 암찰사의 두 눈에 충격과 공포가 서렸다.‘안 돼! 봉안진은 고작 관직을 파면당하고 말았는데 왜 난 이제 와서 능지형에 처한다는 것이야!’“폐하, 재고하여 주십시오! 폐하!”설지는 봉안진의 앞으로 기어가서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안진 형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저희 한 때는 생사를 같이한 동료였잖아요…”어제까지 봉안진의 앞에서 거만을 떨던 설지가 지금은 개처럼 납작 엎드려 봉안진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봉안진은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을 전부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는 냉랭한 얼굴로 답했다.“네가 동료를 배신하고 그들의 목숨으로 네 관직을 바꿨을 때는 우리가 동료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겠지! 설지, 난 황 대인보다 네가 더 괘씸해!”설지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형님, 저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 잊으셨나요? 한때 우리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이상을 말하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때 형님께서 우린 평생 함께할 형제라고도 말씀하셨어요…”지켜보던 관원들조차 고개를 흔들었다.그를 능지형에 처한 것은 이 나라의 황제이고 그의 생사를 좌우지할 수 있는 사람도 황제뿐이었다.그런데 여기서 봉안진에게 목숨이나 구걸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반면 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안진을 응시하고 있었다.설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똑똑한 인간이었다.봉안진이 그를 용서하고 황제께 죽음을 사해주라 간청만 한다면 아까 비무장에서 괴두를 쓰러뜨린 봉안진의 공로와 과거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그를 안타까이 여기는 황제가 간청을 거절할 리 없었다.한편, 설지가 자신에 관한 것들까지 털어놓을까 두려웠던 귀비는 재빨리 호위를 재촉했다.“폐하의 명이 안 들리느냐? 뭘 꾸물거리고 있어?”“시끄럽게 떠드는 저 입부터 틀어막아라! 졸렬한 것들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있으니.”호위무사들이 달려들어 설지를 끌고 가려던 순간, 봉안진
귀비가 혼절하여 영소전으로 돌려보내졌다.어의가 침을 몇 대 놓았지만 그녀는 깨어나지 못했다.소욱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태의가 다가가 아뢰었다.“폐하, 마마께서 중상을 입으셔서 기혈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큰 문제는 없으시니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영화궁.봉구안이 동경 앞에 앉아 머리에 꽂은 비녀를 하나씩 떼어내자 시중을 들고 있던 연상이 두려운 마음이 남아 한마디 물었다.“마마, 마마... 정말 안 다치셨습니까? 그 괴두가 매우 강하던데 정말 태의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정말 태의에게 상처를 보이면 마마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봉구안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내가 경기에 나간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연상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예! 마마!”그녀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 서재의 내시가 말을 전하러 왔다.“황후마마, 폐하께서 부르시옵니다.”연상이 제풀에 켕겨 손을 흠칫했다.“마마, 폐하께서 의심하시는 거 아닙니까?”봉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할 말이 있어도 마음속에 담아두거라. 옷을 갈아입자.”2분 뒤.황실 서재.소욱은 책상 뒤에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작은 불당에서 일하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황후가 잠시만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었는지 말해보거라.”봉구안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사건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신첩은 그때 소식을 듣고 설지와 안찰사의 서신을 찾았습니다. 편전에서 폐하를 만났을 때 신첩은 오라버니를 찾아가 언제 증거를 올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지 의논하려고 했습니다. 오라버니와 아직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첩은 감히 사실을 말씀드릴 수 없었고...”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딱 멈추었다.햇빛이 사르
옥 안.독방에 갇혀 있던 설지는 봉안진을 보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안진, 나 좀 꺼내줘. 부탁할게. 내가 정말 잘못했어. 우리 오랜 인연을 봐서라도 날 좀 봐줄래?”“너... 나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통쾌하게 보내 줘. 능지처참은 너무 무서워.”자신을 모욕했던 사람이 지금이 무릎을 꿇고 빌고 있으니 봉안진은 속이 시원하고 화가 풀려야 하는데 왠지 슬프기만 했다.“능지처참당하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다라… 재군이 그들은 죽고 싶었겠어? 매우 억울했을 텐데 널 놔주면 내가 어떻게 망령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어!”“설지, 너 혼자 올라가기 위해 너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죽인 것이 정말 가치가 있어? 우린 친했잖아. 난 우리가 서로 아끼는 줄 알았어. 그런데 왜 그랬어? 왜!”봉안진은 옥문을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많은 형제가 설지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는 정말 답을 원했다.설지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봉안진이 자신을 도울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포자기한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하하... 왜? 왜냐고 묻다니! 넌 명문가 출신의 도련님이고 난 가난한 집 출신일 뿐이야. 내가 온 힘을 다해 뛰어올라야 얻는 것을 넌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얻을 수 있잖아. 우리가 서로 아끼는 줄 알았다고? 웃기지 마!”“나는 너의 그 선비 꼴이 제일 싫어! 처음으로 봉가 저택에 갔을 때 너의 서재에 들어갔었지. 너의 벼루 하나면 우리 가족의 반 년 치 식량을 살 수 있었어! 왜? 왜 너는 이 모든 것을 쉽게 가질 수 있고 나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건데?”봉안진은 그 이유가 이렇게 간단한 줄은 몰랐다.질투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설지가 기억을 더듬었다.“이번 생에는 네 발밑에서만 살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내가 너를 대신할 수 있다고 했어. 참장이 되어 너를 발밑에 밟을 수 있다고 말이야...”“황 대인이야?”봉안진이 물었다.“맞아! 그 사람이야! 봉안진, 봐봐. 나만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나와 황 대인이야말로 정말 서로를 아끼는 사이야!
황실 서재에 있는 소욱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두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앞에 놓인 책상 위에 설지의 자백서가 놓여 있었다.그는 봉구안을 살피더니 곧 시위 진한길에게 분부했다.“설지를 부르거라. 짐이 직접 물어보겠다.”얼마 지나지 않아 설지가 끌려오다 성안을 보자마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몸을 떨었다.“죄신... 죄신 설지, 폐하, 황후마마를 뵙니다!”옆에 서 있는 봉구안의 눈빛은 덤덤했다.소욱이 따져 물었다.“자백을 직접 서명한 것이냐?”자백서에는 그가 2년 전 봉안진을 모함하고 황 대인께 뇌물을 바치는 등 각종 죄를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귀비 마마도 언급했다.지난 2년 동안 설지는 참장을 한 후 많은 돈을 모아 얻은 재물의 절반은 황 대인에게 뇌물을 주고 나머지 절반은 영소전으로 보냈는데 구체적인 금액은 그의 집에 있는 비밀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이 외에도 그는 귀비 마마의 명을 받아 접풍연을 열기 전에 봉안진의 팔을 부러뜨린게 그가 시합에서 괴두에게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설지는 머리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네, 죄신이 자백했습니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떴는데 눈빛이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다.“장부가 어디 있느냐?”“죄신의 서재 암거 안에 있습니다.”설지가 대뜸 대답했다.소욱은 차갑게 흘겨보며 말했다.“진한길, 네가 직접 찾으러 가거라.”“명을 받들겠습니다.”소욱은 설지에게 질문을 이어갔다.“귀비가 어떻게 봉안진을 다치게 했느냐? 다음날 시합이 있을지 어떻게 알 게 된 것이냐?”“설지, 네가 감히 한 마디라도 허언한다면 짐이 너를 능지처참보다 백 배나 더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봉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폐하를 바라보며 정말 귀비를 아낀다고 생각했다.설지가 자신의 애비를 모함할까 봐 이런 질문까지 하니 말이다.설지는 몸을 조금 떨며 엎드려 있었다.“죄신은 귀비마마께서 이튿날 겨루는 시합을 어찌 미리 아셨는지 모르겠으나 단지 마마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폐
소욱은 땅에 엎드려 있는 설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귀비가 너에게 어떻게 시켰는지 똑똑히 말하거라.”설지는 황급히 아뢰었다.“폐하께 아뢰옵니다. 죄신은 내궁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무슨 계획이든 모두 궁중의 내시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 내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죄신은 그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으니 본다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소욱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영소전의 내시들을 모두 부르도록 하거라.”“네!”귀비의 총애가 각별하여 영소전에는 내시가 50명이나 있었다.그들은 열 명씩 황실 서재에 들어가 설지의 지목을 받아야 했다세 번째 내시들이 들어오자 설지는 갑자기 두 눈을 반짝이며 그중 한 명을 가리켰다.“저 사람입니다!”지목된 내시는 가슴이 뜨끔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렸다.“심문하라!”단 한 마디로 사람을 몹시 놀라게 하고 부들부들 떨게 하였다.내시가 끌려가는 것을 본 봉구안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차 두 잔 정도 마시자 진한길이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폐하, 심문해냈습니다. 그 내시가 귀비마마의 명을 받들었다고 자백했습니다.”폐하를 오랫동안 시중을 든 진한길은 주인을 따라 정색을 하고 차갑고 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봉구안은 손가락을 모아 살며시 주먹을 쥔 채 소욱을 바라보았다.“폐하...”그녀가 입을 열자 소욱이 얼굴에 한기를 머금고 말을 끊었다.“설지를 옥으로 돌려보내거라.”설지는 끌려갈 때도 용서를 빌었다.“폐하, 죄신이 잠시 귀신에게 홀려 그런 거니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폐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그러자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미간이 싸늘해졌다.“설지의 자백서가 어떻게 황후 손에 먼저 들어간 것이냐?”봉구안 공손히 회답합니다.“오라버니께서 팔을 다친 시간이 공교롭다고 생각하여 사사로이 옥졸을 시켜 설지를 심문하자 뜻밖에 귀비가 연루되었습니다.”“폐하께서 귀비를 총애한다는 것을 알기에 전옥장도 감히 자백서를 직접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증이 부족하
봉구안은 입술을 깨문 채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이것이 바로 귀비의 대단한 부분이다.봉명헌이 육심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구한 것은 맞다.그렇게 일이 들통나도 육심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일부 죄를 봉명헌과 황후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그녀가 진작에 밝혀내지 않았더라면 이 주범인 귀비마마가 봉명헌이 벼슬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여 이 판을 짰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지금 봉구안에게는 변명거리가 없게 되었다.“어쩌면 정말 신첩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서제가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첩 죄를 인정하고 폐하의 처벌을 달갑게 받겠습니다.”그녀가 이렇게 흔쾌히 잘못을 인정하니 소욱은 오히려 좀 의외였다.하지만 ‘어쩌면'이라는 단어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하기도 했다.소욱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먼저 영화궁으로 돌아가 반성하거라. 짐은 황후가 금인장을 계속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으니!”봉구안은 그 결과를 받아들인 듯 몸을 일으켜 인사를 올렸다.“예, 폐하.”그녀가 떠나자 봉명헌은 당황한 기색으로 두려워하며 원망했다.‘이렇게 가버리다니? 사정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나의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다니.’소욱은 결단력 있게 행동했지만 황후의 체면을 고려하여 봉명헌을 용서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그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육심의 직무를 정지하고 조사 처리하며 육심이 처리한 모든 임명을 철저히 조사한 후 처리한다.”“봉명헌, 파직. 뇌물로 받은 돈은 국고에 충원하고 옥에 가서 1년 반성을 하고, 3년 동안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으며 5년 동안 관직에 들어갈 수 없다!”육심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봉명헌이 먼저 울부짖었다.“안 됩니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매형!”“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옥에 가고 시험도 금지되고 벼슬도 금지당하면 그에게 무슨 앞날이 있겠는가!황제도 너무 잔인했다. 그는 이 일을 겨우 며칠 했는데 몇
방 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운산파 장문 구학이 아니라, 그의 자리를 대신한 엄 장로였다.장막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기마저 서려 있었고, 그의 머릿속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버지의 모습만이 맴돌았다.이불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눈엔 증오가 고였다.부친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하지만 복수만 좇다간, 남겨진 것을 모두 잃게 될 터였다.운산파를 지키는 것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모든 비극의 시작은 사람을 약인으로 만들어 팔아넘긴 자들. 그들이 운산파를 더럽혔다.그 뿌리를 반드시 끊어내리라.그는 자신의 손으로 끝장을 낼 것이라 다짐하였다.……밤은 깊어졌다.운산파에 머무는 외부 문파 제자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혹시라도 운산파 측이 음식을 통해 무언가 꾸민 건 아닐까.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전진파는 하나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 옆 방엔 벽력당 제자들이 자리했다.정원아의 죽음으로 침통해 있던 그들은 이 와중에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부장문님… 비무대회, 계속 나가야 하나요?”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 말은, 결국 포기를 암시하는 질문이었다.차선아는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내공을 다스리고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하산한다.”방민이 벌떡 일어섰다.“부장문님! 두 경기만 더 이기면 결승이에요! 지금 포기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겁니다!”차선아는 조용하면서도 슬픔이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강호는… 편안하지 않아. 원아는 이미 죽었다.”“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구나.”운산파에 벌어진 일은 소환을 움직였고, 그것은 곧 조정이 직접 나섰다는 뜻이었다.강호와 조정은 본래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으나… 이번엔 그 선이 무너졌다.운산파가 저지른 일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이 상황에서 운산파에 머무른다는 건, 전진파도 위험에 휘말릴 수 있다는
봉구안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모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소욱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고,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닭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화로 옆에서 막 비둘기를 집어 들려던 강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급히 손에 들린 걸 들어 보이며 정정했다.“아니, 말했잖소! 이건 닭이 아니라 비둘기라 하지 않았소?”“그것도 제일 비싼 ‘비천비’라오!”“설마…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오? 혹시… 독이라도 들어간 아니겠지?”강림은 당황한 얼굴로 비둘기를 얼른 내려놓았다.봉구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건 괜찮소. 자네 비둘기 말고… 내가 말한 건 죽산진의 닭이었소.”그녀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약인독에 꼭 들어가는 약초 중 하나, 홍련초를 다들 기억하시오?”열무신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당연히 기억합니다. 그걸 조사하려고 죽산진에 사람도 남겨뒀는데…”“잠깐, 마마의 말씀은 혹시…”그는 말을 멈췄다.이미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 말인즉, 지금까지 우린 누가 홍련초를 사 갔는지 뒤쫓고 있었지만, 사실 그 약초 자체가 아니라, 그걸 먹고 자란 닭이 진짜 목표였다는 거로군.”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소. 확인이 필요하겠지.”애초에 그녀도 이런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강림이 기르던 ‘비천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죽산진의 닭들이 떠올랐다.비둘기가 특별한 먹이를 통해 효능을 갖게 된 것처럼, 홍련초를 먹은 닭도 무언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당장 소탁에게 전하게. 죽산진에서 유통된 닭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전부 조사하라고.”“알겠습니다.” 봉구안이 짧게 대답했다.이 와중에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는 단 한 명… 강림뿐이었다.그는 두리번거리며 말없이 모두를 쳐다봤다.“…도대체 무슨 소리오? 홍련초가 뭐고, 닭은 왜
소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도대체 구안이 준비한 선물이란 게 뭘까.비단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옥패 하나가 곱게 들어 있었다.투명하게 빛나는 그 옥패는 희고 맑았고, 묘하게도 그의 기품과 잘 어울렸다.황제의 자리에서 진귀한 보물쯤은 셀 수 없이 봐왔지만… 이건 달랐다. 봉구안이 직접 고른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소중했다.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좀 촉박했어요. 이 정도밖에 못 구했네요.”소욱은 아무 말 없이 옥패를 목에 걸었다.곧이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래도 내 탄신일을 잊지 않았구나. 고맙다.”봉구안은 담담히 답했다.“그 정도로 기억력 나쁘진 않아요.”소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런 정색스러운 대답 말고, 자기가 듣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그냥 자신이라서, 자신의 탄신일이라서 기억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그는 그녀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똑, 똑.하필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폐하, 강림이 돌아왔습니다!”……원래 강림은 상단을 이끌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지만, 강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가만있을 수 없었다.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려왔고, 마침내 때를 맞춘 셈이다.“휴, 아직 안 떠났군!”강림은 선홍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자줏빛 금관을 썼다. 허리에는 값비싼 옥이 매달려 있고, 발에는 자수가 놓인 검은 장화를 신었다.걸음마다 은은한 향과 함께 사치가 묻어나는 모습이었다.동방세는 그와 익숙한 사이인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강주 행은 자네의 덕을 많이 봤네. 이 객잔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네.”강림은 손을 휘휘 저으며 쿡 웃었다.“뭘 그런 걸 갖고 그래. 형제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딨소? 아, 폐하께서도 계시다던데?”그는 시선을 넘겨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봉구안 곁에 앉은 소욱을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강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뭐라고요? 가짜라고요?”문을 지키던 제자는 크게 놀라 얼굴이 새파래졌다.관리가 가짜라면, 그럼 장문님은? 장문님이 지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닌가!그들은 급히 이 사실을 부장문에게 보고했다.한편, 부장문은 각 문파 인사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장문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술 대회도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부장문님!”한 제자가 급히 뛰어왔다.부장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가짜라니?그들이 가짜 관리였단 말인가!그는 즉시 정예 제자들을 소집해 추격을 지시했다.그러나, 오백과 은칠은 이미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도망친 후였다.……열무신의 혹독한 심문 끝에, 결국 비밀이 밝혀졌다.구학이 마침내 자백했다.자신이 직접 사부인 엄청송을 죽였다고…이 소식을 들은 엄 장로는 분노에 차 방으로 뛰어들었다.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구학이었지만, 엄 장로는 여전히 분을 삭일 수 없었다.그는 구학의 목을 움켜쥐고 외쳤다.“왜! 왜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그분은 사형의 스승이자, 사형을 친아들처럼 길러주신 분이셨습니다! 어찌 양심이 이리도 다 썩어 문드러질 수 있냐 말입니다!”구학은 이미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그러면서도 힘겹게 웃었다.“그야… 스승님이 멍청했기 때문다.”“그 분은 단순히 병에 걸렸을 뿐이었다. 치료하면 나을 수 있었지...”“하지만 그 분께서 약쟁이와 인신매매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를 관청에 고발하려 했고…”“게다가 내게 준 장문 자리까지 빼앗으려 했어… 난… 난 스승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엄 장로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이 악랄한 놈!”얼마 지나지 않아, 엄 장로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 안에는 봉구안과 소욱도 있었다.엄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과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
열무신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안에서는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폐하! 저를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소욱은 문 밖에서 이 말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학이 결코 무고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차라리 열무신이 직접 심문하는 편이 나았다.그 늙은이가 어떻게든 입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같은 시각, 운산파.운산파 제자들은 산문을 지키며 장문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비무대회가 중단되자, 다른 문파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벽력당에서 비꼬듯 말했다.“운산파는 어쩜 이렇게 말썽이 많은가? 저 구 장문이 정말로 엄 장문을 살해했다면, 운산파는 비무대회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 아니오?”“맞소! 스승을 배신하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악한 문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소!”운산파 제자들은 즉시 반발했다.“우리 장문께선 그런 일을 하신 적 없소! 입 조심하시오!”운산파 부장문은 높은 자리에 앉아 단호하게 외쳤다.“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니, 함부로 추측하지 마시오!”그러나 다른 문파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이 사건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우리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차 부장문, 어떻게 생각하시오?”그들은 전진파의 차선아를 바라보았다.운산파를 제외하면, 비무대회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전진파였으므로, 그녀 역시 속이 탈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차선아는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듯했다.그들이 전진파를 자극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다시 운산파를 향해 몰아세웠다.“결국 문제를 일으킨 건 운산파 아니오. 차라리 대회에서 물러나시오! 우리를 마냥 기다리게 할 이유가 없지 않소?”운산파 제자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기다리기 싫으면 떠나시오! 우리 운산파는 붙잡지 않소!”“너희들…!”운산파 제자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자, 다른 문파들은 더욱 분노했다.그러나 운산파 내부에서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었다.문하 대제자가 부장문에
약쟁이 거래의 배후를 묻자, 구학은 당황한 듯 보였다.그는 소욱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모릅니다…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그자들은 항상 밀서로만 연락했습니다. 밀서에 물건을 받으러 갈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고, 저희는 그 지시에 따라 물건을 받은 뒤 구매자에게 가져다주기만 했습니다.”“그들은 매번 신중히 움직였고, 접선 장소도 항상 달랐으며, 저희와는 단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폐하, 소인이 드리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며, 감히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구학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절을 올렸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는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소인은 올해 나이가 예순셋입니다. 무릎 아래 자식 하나 없는데, 제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설령 재물과 명예를 얻는다 한들, 제가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운산파의 천 명 넘는 제자들을 굶기지 않는 것뿐입니다!”소욱은 냉담하게 반응했다.“약쟁이에 관한 얘기를 계속하거라.”구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털어놓았다.“소인은 약쟁이 거래가 그렇게 돈벌이가 좋다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약쟁이 한 명을 운송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면, 우리 운산파가 직접 약쟁이를 만들어 팔면 얼마나 큰돈을 벌겠는가 하고요.”그는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짐작한 게 맞습니다. 동쪽 별채에 있던 그 '단약'들은 사실 약쟁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수년간 실패했고, 약쟁이를 만드는 데 참고할 생각으로 약쟁이 하나를 빼돌렸다가 그자들에게 발각돼 제자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구학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약쟁이 제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었다.봉구안이 차갑게 물었다.“무고한 이들을 납치한 것도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느냐?”구학은 싸늘한 질문에 더듬지 않고 대답했다.“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골라 약쟁이를 만들기 위해 잡아
구학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 앞에서 가면을 쓴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이내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철통같이 방비했다고 자부했건만, 결국은 이 지경이 되다니.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도 자신을 구하러 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만 이상,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란 없었다.열무신이 손에 든 단도를 툭툭 튕기며 말했다.“모두 나가시오.”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앞둔 늑대처럼 구학을 응시했고, 바라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사람들이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구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좀 만나게 해주시오!”그는 이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폐하가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열무신이 돌아서서 봉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찌할까요?”봉구안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자가 스스로 자백하겠다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소욱을 방 안으로 들였다.소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은 나가도, 그녀만큼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열무신은 나가기 전 봉구안에게 당부했다.“우린 밖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네.” 봉구안은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닫히자 구학은 소욱을 빤히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폐하이십니까?”소욱은 가면을 벗고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얼굴을 확인한 구학은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침을 삼켰다.“소인… 폐하를 뵙습니다!”구학은 아까의 당당함을 온데간데없이 잃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봉구안은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은침 하나를 쥐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운산파의 목적이 줄곧 황제를 암살하고 약쟁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소욱은 차갑게 구학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무엇을 말하려는 것이냐?”구학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구학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운산파 장문인 자신이 마치 죄인처럼 끌려가게 될 줄이야.그는 부장문에게 당부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문파의 모든 일을 자네가 맡아 처리하게. 부디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게.”부장문은 진중히 고개를 숙였다.“염려 마십시오, 장문!”관아 사람들은 구학뿐 아니라 엄 장로와 봉구안까지 함께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유골 또한 가져갔다.소욱이 운산파에 온 것은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실마리가 보이자 그는 관아 사람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봉구안은 떠나기 전 바닥에 누운 정원아의 시신을 깊게 바라보았다.정원아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그녀는 차선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차 부장문, 정 사저를 부디 잘 안장해 주십시오.”차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운산파 밖 공터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구학은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죄인을 호송하는데 언제부터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관아 사람들이 각자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며 말했다.“당신들은 모두 강호에서 이름난 인사들이니 특별히 비밀리에 심문을 받을 것이오. 백성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차에 타시오! 가는 길에 소리치거나 소란을 피우면 망신당하는 건 당신들이오!”구학은 떳떳한 척하며 제일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치 이러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 말이다.봉구안과 소욱은 한 마차에 타고 침묵 속에서 어두운 눈빛을 주고받았다.관아 사람들은 이들을 산 아래로 호송해 관아 쪽으로 향했다.한참 길을 가던 중 구학은 갑자기 몸이 몹시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이상함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두 명의 관아 사람을 바라보았다.“너희들…”관아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노인네, 눈치는 빠르구나.”말을 마친 관아 사람이 순식간에 구학의 목덜미를 강타했다.구학은 쇠고랑을 찬 상태라 저항이 어려웠고, 그 약간의 미향까지 더해지니 그대로 의식
엄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구학을 바라보았다.“장문, 제 허락 없이 동쪽 별채에 들어간 건 저의 잘못입니다.”“운산파의 규율대로 이 일에 대한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친의 유골이 왜 동쪽 별채에 있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오백도 품에 안긴 유골을 들며 당당히 턱을 들었다.“옳습니다! 남의 아버지 유골을 이런 꼴로 만든 이유부터 제대로 설명하란 말입니다!”구학은 답답한 얼굴로 엄 장로를 쳐다보았다.“이들이 의도적으로 나를 모함하는 게 보이지 않소?”“내가 뭘 설명하길 바라오? 난 이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소!”“조금 전 곳곳에서 불이 난 것도 필시 저들이 벌인 짓이오. 그 틈을 타 유골을 동쪽 별채로 옮긴 것이 분명하오! 저들에게 이용당한 것이오!”“우리는 수십 년을 함께한 사형제이지 않소? 내 사람됨을 아직 모르시오? 내가 어떻게 사부님을 해칠 수 있단 말이오!”엄 장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저는 오늘 그저 진실을 원할 뿐입니다.”봉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모든 물증이 구 장문의 범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 장문께서 엄 장문의 자리를 탐내 스승을 살해했고, 혹은 스승에 대한 원한 때문에 시신을 훔쳐 별채에 숨겨두고 모욕한 것이겠죠.”“헛소리다! 감히 나를 욕먹이려고 하다니!” 구학은 봉구안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그는 다시 엄 장로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저 여인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한단 말이오? 사부님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겨 모든 무공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셨고, 직접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장문직을 물려주셨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범하겠소? 게다가 내가 무슨 이유로 사부님을 해친단 말이오?”주변 사람들도 동조했다.“맞소. 구 장문은 부족함이 없고, 사형 간의 정이 깊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했겠소? 이건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요.”“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전 장문님께서는 생전에 구학 장문을 가장 아끼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