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아! 그만해!”박진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단호하게 서원의 말을 끊으며 이를 악물었다.“너도 그 여자한테 속은 거야.”씁쓸한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쳤다.“민여진이 네게 나를 찾아가서 일러바치라고 했겠어?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게 그 여자인데? 나를 죄책감에 빠뜨리고 채연이에게 책임을 묻게 하려고 했어! 그런 위선적인 여자에게 속아서 나는 채연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다고!”분노와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쥐어뜯었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아득할 정도였다.박진성은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민여진의 병실로 달려갔다.문을 거칠게 발로 차자, 안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민여진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단숨에 그녀의 목을 거칠게 조아붙였다.“윽!”목이 조여오자,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숨이 막혀 전신에 전율이 퍼졌고 조금만 더 힘이 가해지면 목이 부러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박진성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민여진! 너 같은 악독하고 역겨운 여자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해!”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숨을 쉬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질식할 것만 같았고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박진성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민여진은 가차 없이 침대 위로 내던졌다.“쿵!”충격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녀는 그 아픔도 잊은 채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을 들썩였고 목에서는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그러나 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도... 도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그녀가 힘겹게 말을 뱉자, 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렸다.“무슨 일이냐고? 네가 짠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리야!”그는 한 발짝 다가오며 그녀의 다친 손 위에 거칠게 발을 올렸다.
“박진성! 진성 씨!”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박진성이 방현수를 해칠 거라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제발... 제발 그러지 마! 채연 씨가 죽을 뻔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사과할게. 채연 씨가 그랬던 것처럼 수면제를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한테까지 화풀이하지 마! 무슨 벌을 내리든 내가 다 받을게...”“죄 없는 사람?”박진성이 비웃으며 몸을 숙이더니 눈물로 범벅진 그녀의 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죄 없는 사람? 채연이는 무슨 죄가 있는데?”그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얌전히 내 말에 따르기만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왜 이 사단을 만든 거야! 도대체 왜 채연이를 모함한 거야?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냐고!”그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거침없이 그녀를 밀쳐냈다.“윽!”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가 울릴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아니라고! 그런 짓 하지 않았어! 거짓말도, 모함도 한 적 없어!”“거짓말이 아니라고?”박진성이 걸음을 멈췄고 그의 시선엔 냉소와 혐오감만 가득했다.“네가 사주한 공범이 방금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직접 찾아와서 이실직고했는데도 너는 태연하게 끝까지 잡아떼는 거야?”‘공범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곧이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박진성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쾅!”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찬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말했던 공범은 대체 누구일까? 내가 뭘 속였다는 거지?’“민여진 씨!”문이 열리며 서원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께서 이렇게 만든 거예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박진성의 머릿속에는 오직 문채연의 안위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사흘이 지날 동안 민여진은 박진성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박진성은 서원까지 회사로 불러들였다.서원을 대신해서 온 사람은 간병인이었다.새로 온 간병인은 민여진이 시각장애가 있고 돌봐 줄 사람조차 없다는 걸 알고는 더욱 거칠게 대했다. 음식을 가져와서는 자기 배부터 채운 뒤, 반쯤 남은 것을 건네며 먹으라고 했다.민여진은 간병인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그녀가 건네는 음식을 밀쳐냈다.“어이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음식까지 가려 드시겠다? 정나미가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 여진 씨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역겹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간병인은 빈정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가진 것도 없고 부모도 없는 주제에 누가 돌봐 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서 감히 입맛을 따져?”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간병인은 속에 쌓아 둔 화풀이를 민여진에게 쏟아냈다.“안 돼! 이거 다 먹어! 나중에 박 대표님께서 내가 밥을 굶겼다고 오해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그러니까 남김없이 먹으라고!”간병인은 억지로 밥그릇을 들이밀었다.민여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저항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휘두른 손끝에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야! 미친년이 감히 그릇을 내팽개쳐?”간병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바닥에 쏟아진 찌꺼기를 집어 민여진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 했다.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박진성이었다. 그는 점잖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했다.간병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박... 박 대표님...”그녀는 움찔거리며 박진성을 올려다봤다.‘이렇게 비참해 보여도 여진 씨는 박 대표님이 직접 맡긴 환자였다. 괜히 일이 커질까 두
“그만해!”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민여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이제 그만하면 됐어! 불쌍한 척하는 데 온 힘을 다 쏟네? 민여진,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가증스러워... 박진성, 넌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아직도 내가 가식 떠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민여진의 상처는 칼로 도려내듯 쓰라렸다. 손이 떨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만, 아직 그의 명령을 다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제 손 좀 놔 줄래?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았잖아.”“정리는 개뿔!”박진성이 거칠게 발길질하자, 쓰레기통이 넘어졌고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간병인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직접 손으로 치우세요. 피 흘리기 전까진 멈추지 말라고요!”간병인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다.그러나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이미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치료실로 향하고 있었다.민여진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거칠게 눌러 앉히더니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내가 지금 널 살려주려는 건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민여진,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으니까.”‘치러야 할 대가? 그게 무슨 뜻이지?’순간 민여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진성이 비웃음을 흘렸다.“이제야 무서운가 보네?”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박진성, 난 이미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제발... 현수 씨는 건드리지 마.”박진성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조여왔다.‘결국 방현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였어? 그놈이 다칠까 봐 벌벌 떠는 거였어?’화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박진성은 손아귀를 더욱 세게 쥐었다. 깨진 조각이 살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그는
“버닝 나이트?”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양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를 리 없었다.버닝 나이트는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게는 완벽한 은신처였고, 그 안에서는 인명사고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가능했다.입술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박진성! 나를 여기 왜 데려온 거야?”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녀가 버둥거릴수록 그의 손아귀는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결국 힘으로 그녀를 품에 가둬버렸다.이윽고 박진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 늦었어! 민여진, 채연이를 죽을 뻔하게 만들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생각이었어?”“난 그런 짓 안 했어!”그러나 박진성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하겠다고?’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가고 싶으면 가. 막지 않을게.”그러나 그의 다음 말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하지만 네가 가면 방현수는 어떻게 될까?”순간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뜨거운 열기가 눈가를 적셨다.입술이 떨리며 간신히 새어 나왔다.“너무해... 박진성...”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보다야 덜하지.”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채연이를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스스로 상처까지 낸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억울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민여진은 이를 악물었다.“...만약 언젠가 네가 믿고 있는 모든 게, 사실은 문채연이 꾸민 함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것 같아?”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서려 있었다.그 순간 박진성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강하게 뱉어냈다.“그럴 리 없어! 채연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그의 눈빛이 더 거칠어졌다. 그는 민여진을 꿰뚫을 듯 노려보며 한 글자씩 힘을 줘 내뱉었다.“그리고 절대 후회 같은 거 안 해.”“알겠어.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됐
박진성이 그녀를 데려온 이유가 점점 분명해졌다.“자, 박 대표님이 직접 모셔온 손님이니까 나도 예의를 갖춰야겠네? 이거 한잔 받아 마셔.”“마셔! 마셔!”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민여진은 술을 전혀 못 마셨다. 단순히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술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그녀는 급히 손을 뻗어 술잔을 밀쳐냈다.“뭐야? 박 대표님 말만 듣고, 우리 말은 무시하는 거야?”술잔을 내민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센터에 앉아 있던 박진성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끝으로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찌를 듯이 꿰뚫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얼어붙게 했다.“내가 뭐라고 했었지?”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한 경고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건 명령이야. 거부하면 대신 당하는 건 방현수야.’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계속해서 밀어내는 건 여기 앉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경’을 선사하는 것이었다.“저... 마실게요.”손끝이 떨렸다.하지만 그녀가 술잔을 집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홀짝홀짝 마시는 건 안 돼! 한 번에 들이켜야지! 알았어?”손에 든 술잔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독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방현수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오늘 술독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현수 씨는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겠어.’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불타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순간, 방 안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좋았어! 역시 박 대표님이 데려온 사람이라니까!”속이 울렁거렸고 곧바로 토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억지로 삼켰다.곧 몸이 휘청였다.‘안 돼... 정신 차려야 해...’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
박진성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민여진에게 굴욕을 피하고 싶다면 방현수를 부르라는 뜻이었다.방현수를 불러서 대신 수모를 당하고, 이곳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도록 만들라는 거였다.민여진의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냉정했다.‘박진성, 넌 정말 잔인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그녀는 단호하게 입을 뗐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할게.”그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 중에는 이 연극이 갑자기 끝나는 걸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박진성만이 살기를 머금은 채 얼굴을 굳혔다.그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민여진, 제대로 생각해. 정말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이라도 벗겠다는 거야?”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방현수에게 전화하면 기껏해야 술 몇 잔만 마시게 할 거야.”‘...기껏해야 술 몇 잔?’민여진은 쓴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더 이상 박진성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날 밤에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사과하라며 그녀를 협박했었다.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민여진은 그의 말에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심지어 감옥에서 일어난 일도 혹시 박진성이 개입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예전의 그녀라면 모든 게 문채연이 꾸민 일이 아닐까 하고 희망했었지만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것이었다.이게 바로 그가 말한 ‘공정’이었다. 문채연이 수면제를 먹고 위태로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녀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단 한 마디, 청소부의 증언만으로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와 모욕을 주었다.‘눈뜨고 시각장애인 노릇을 하는 것도, 사리 분별 못하는 것도 모두 네 선택이야! 박진성...’그녀는 입술을 닦고 차갑게 말했다.“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야. 내가 직접 할 거
“하하... 박 대표님 센스 있으시네요. 사실 저 여자는 볼품도 없고... 마른 몸매라 구경할 맛도 없잖아요. 괜히 분위기 망칠 뻔했네요.”“맞아요. 너무 마른 여자는 볼 게 없죠. 춤을 춘다 해도 매력이 없을 텐데...”사람들이 맞장구치며 깔깔댔다.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혜정만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박 대표님이 저 여자 몸에 상처가 많아서 볼 게 없다고 했다는 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설마... 직접 본 거야? 저 얼굴을 보고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 거야?’이혜정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한편, 술기운이 확 올라온 민여진은 온몸이 덜덜 떨렸고 몸이 뜨겁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박진성은 그녀를 강제로 소파에 앉혔다. 그러자 기운이 빠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기댔다.그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자마자 재빨리 몸을 떼어내더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려는 듯 버티며 거리를 두었다.박진성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거칠어지며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민여진,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 내가 널 구해줬으면 최소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맙다고 하라고?’비틀거리는 정신 속에서도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할 일도 없었어. 저 무대 위에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이제 와서 흥미가 떨어졌다고 날 끌어내렸다고 해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도둑이 훔쳤던 물건 다시 돌려줬다고 해서, 도둑이 아니게 되는 거냐고...’그러나 그녀는 너무 어지러워 더 이상 생각할 힘도 없었다.속이 울렁거렸고 메스꺼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숙였다.“윽.”순간, 박진성의 몸 위로 모든 것이 쏟아졌다.주변에서 비명이 터졌고 방안에 역한 냄새가 퍼졌다.박진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는 이를 갈며 낮게 중얼거렸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민여진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잠이 오지 않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옷장을 더듬다가 손끝에 만져지는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조인화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있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왜 밖에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지금 얼마나 추운 줄 알아?”조인화가 민여진에게 걸어오며 중얼거렸다.“날도 추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 이런 날씨에 도대체 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에, 외제 차까지 타고 왔더라고. 생긴 건 또 무지하게 잘생겼어.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니까.”“처음 보는 사람이요?”민여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계속 안 가고 기다리고 있더라. 방금도 나 보자마자 이것저것 캐묻고.”“뭘 물어봤는데요?”민여진이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잠시 당황한 듯 멈칫한 조인화가 대답해 주었다.“별거 안 물었어. 그냥 우리 마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은 있나 정도로만 물어보더라. 이상하긴 했어. 여기가 외부인 접근이 쉬운 곳도 아니고, 이렇게 외딴 산간 마을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건 거의 6개월 만이잖아.”민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억지로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아니야, 아닐 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도 있나?’그들에게 민여진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진성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찾아올까? 더군다나 이정화가 민여진의 행방을 누설할 리도 없었다.“왜 그래, 여진아?”조인화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민여진의 반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어디 아파서 그래?”“아니요...”민여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힘겹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현준 오빠가 돌아온다고요?”민여진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왜요? 아직 시간 좀 남지 않았어요?”조인화가 웃으며 대답했다.“얼마 전에 현준이한테서 전화 왔거든. 얘기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네 얘기가 나왔었는데, 회사에 휴가 내고 바로 오겠다더라. 말로는 오랜만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고는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너 보러 오는 것 같아.”“저 보러 온다고요?”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던 민여진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를 왜요?”“이 녀석이, 정말 몰라서 물어?”조인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리 현준이, 어릴 때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몰랐어?”물을 마시던 민여진은 그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조인화는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추고 진정한 민여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민여진은 조현준을 이때까지 계속 친한 오빠로만 여겨왔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까지 둘 사이에 애매한 기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조현준은 고등학교 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며 집에 돌아온 적도 거의 없었다.그런 조현준이 자신을 좋아해 왔을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민여진은 민망한 마음에 말했다.“이모, 장난 좀 치지 마요.”“얘가, 내가 너한테 이런 거짓말을 왜 하겠니? 현준이가 중학교 때 쓴 일기 보니까 온통 네 얘기밖에 없더라. 못 믿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때 일기장 꺼내서 읽어줄까?”“아, 아니요... 됐어요...”당황한 민여진이 손사래 쳤다.“다 지난 일이잖아요.”“지난 일이면 어때? 우리 현준이는 아직 너 못 놔준 것 같은데.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그 귀한 휴가까지 먼저 내가면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아예 그냥 여기서 살래? 우리 집안 며느리 하면 딱 좋을 것 같은데.”민여진은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뺐다.조인화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채연이는... 누구야?”박진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어머니가 저희 결혼을 반대했었던 그해에 채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의식이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셨다면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과 결혼하게 두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시켜 채연이를 대신하게 했고 그 사람이 민여진이었습니다.”박진성이 문채연을 처음 박씨 가문에 데려왔을 때 이정화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그녀는 문채연의 눈에 자리 잡은 야망과 욕심을 단번에 읽어냈다. 딱 봐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이 결혼은 이정화의 거센 반대를 맞았지만 어느 날 문채연이 변한 것이다. 이해타산만 따지던 여자는 이정화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그날 이를 악문 채 그녀를 등에 업고 눈 속을 걸어 병원까지 갔다.그리고 며칠을 밤새 간병했고 이정화가 정신을 차린 후엔 쑥스럽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게다가 공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고열에도 묵묵히 약 몇 알로 견뎠다.며느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그렇게 묵묵히 이정화의 곁을 지켰다.그런 하나하나가 이정화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박진성은 기억 속의 그 문채연이 사실은 민여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이정화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동안 민여진에게 퍼부었던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을 쿵쿵 울렸다. 가슴이 뻐근해져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삼켰지만 손이 멈추지 않고 계속 떨렸다.“왜... 왜 그때 나한테 말 안 했니?”박진성은 눈을 내리깔았다.왜 말하지 않았냐고? 그건 그땐 그에게 민여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문채연’이란 이름을 지켜주기 위한 대체물일 뿐이었다. 그런 존재에 대해 굳이 입을 열 이유가 없었다.이정화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펜을 들어 종이에 주소 하나를 적었다.“여진이가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그 애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박진성의 입술은 새하얗게 바랬고 얼굴도 병든 사람처럼 창백했다.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있었다.“죽기 전엔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어지는 기침에 온몸이 떨렸다.그래도 그는 참고 또 참으며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만해!”이정화가 분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목숨 걸고 나를 협박하는 거야? 내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저 추운 밖에 나가 죽을 거란 말이지? 너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어?”박진성은 문가에 멈춰 섰다.밖에서 미친 듯이 눈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단호했다.“어머니, 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어머니가 저보다 더 후회하는 일을 막고 싶은 겁니다.”“그게 무슨 뜻이야?”“민여진이 죽게 된다면 2년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킨 사람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건 어머니 스스로 만든 일이에요.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이정화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는 멍하니 박진성을 바라보았다.문채연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진성 씨!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지 못했다.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과거의 모든 진실을 밝히려 하다니?‘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하지만 박진성은 차분했다.“원래 민여진의 것들이었던 걸 이젠 돌려줘야죠.”문채연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이정화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점점 짙어지는 불안을 안고 박진성에게 다그쳤다.“진성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2년 동안 날 곁에서 돌봐준 사람이 민여진이었다는 거야? 그 애가 언제 내 곁에 있었단 말이야?”“어머니, 민여진을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는 생각 안 드셨습니까?”그 말에 이정화의 신경이 순간 확 당겨졌다.그녀는 민여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
“이 못된 놈!”이정화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차갑게 눈을 부라리며 박진성을 노려봤다.“너는 네가 지은 죄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박진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많죠. 그래서 전 민여진을 찾아야 해요. 제가 저지른 모든 걸 하나하나 갚아야 하니까요.”“네가 갚고 싶다고 그 애가 받아들이기라도 할까?”이정화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진성은 가슴이 쿡 하고 찢어지는 것 같아 손바닥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도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이 거절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전 끝까지 빌 거예요.”이정화는 두 손을 모아 불상 앞에 합장을 올리며 말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떠난 건 내가 시켜서가 아니야. 그 애가 널 증오했기 때문이지. 널 벗어나고 싶어 했고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정말 그 애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부 내려놔. 가볍고 평온한 삶을 살아. 그리고 그냥... 그 애가 죽은 셈 쳐.”“그럴 수 없습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랐다.그는 창백한 얼굴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똑같이 물었다.“어머니, 민여진을 어디에 숨기셨습니까?”이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박진성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몸을 떨었고 계단을 비틀비틀 올라가려다 겨우 두 걸음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진성 씨!”문채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달려가 그를 붙들려 했다.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고 표정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문채연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문채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민여진이 죽지 않았고 그 사실을 박진성이 알아버렸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박진성은 병 때문에 안색이 형편없었지만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구석구석 모든 방을 다 뒤졌다.그제야 이정화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쳤다.“너 정말 미쳤구나! 지금 여기 채연이도 있고 너희는 약혼을 앞두고 있어. 곧 결혼도 할 거고. 그런데 넌 채연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이
“확실합니다. 백 퍼센트 확실해요. 물속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쉽게 올라왔겠습니까.”잠수부는 거듭 말했다.“나는 이런 경우 처음 봐요. 차가 바다에 빠졌는데 안에 시신이 하나도 없어요.”“혹시 시신이 다른 데로 떠내려간 건 아닐까요?”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말도 안 돼요.”남자가 고개를 저었다.“차창은 단단히 닫혀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누가 물속에서 문을 열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능성은 단 하나예요. 차가 빠질 당시 차 안엔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벼락처럼 박진성의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그는 이 감정이 기쁨인지 절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까매지고 숨조차 가빠왔다.‘민여진이 살아 있어.’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른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건 계획된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가장해 그를 내려놓게 만들려는 함정이었다.문득 그녀가 경찰서에서 나온 직후 곧장 이 차에 탑승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박진성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핏발 선 눈으로 서원에게 명령했다.“당장 조사해. 민여진이 경찰서에서 너와 나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전부.”서원은 곧장 움직였고 박진성은 차 안으로 돌아왔다.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오한과 열이 번갈아 밀려왔고 손끝까지 떨려왔다. 그는 죽음 끝에서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민여진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계략을 짰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속였다.정말 잔인한 여자였다.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몰랐을까? 아니, 알았기에 더욱 철저히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랐으니까.박진성의 온몸이 끓어올랐다. 그 열기에 머리까지 지끈거렸고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별장 소파 위였고 곁에서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강태화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박진성은 몸을 가누며 통증을 참아내고 전화를 받았다
차 안엔 아무도 없었다박진성이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고 몸은 불덩이처럼 뜨겁다가도 금세 차갑게 가라앉았다.몸이 이렇게 고장 난 건 분명 병 때문이었다.마지막으로 아팠던 게 거의 1년 전이었을까. 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민여진이 약상자를 거기에 뒀던 게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기침을 하며 상자를 꺼내보자 하나하나 약봉지마다 작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언제까지 복용’, ‘이 약은 공복에’, ‘열이 나면 복용’, 세세한 설명이 다 적혀 있었다.그 여자는 항상 그랬다.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박진성은 메모지를 떼어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팠다.며칠이 지나도 병은 쉽게 낫지 않았지만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정상 출근했다.기침을 참아가며 몸살과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서류를 넘기고 회의를 소화했다. 하루, 하루, 또 하루.이제는 조금씩 잊히는가 싶었는데 그날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님! 그 차량 위치를 찾았습니다!”박진성은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놓고 바로 차를 몰았다.남산교에 도착하자 서원이 몇몇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벌써 윗옷을 벗고 준비 중인 남자들도 있었다.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원에게 다가갔다.“어떻게 됐어?”“차량 위치는 확인됐습니다. 지금 두 번째 잠수하러 들어가는 중이에요. 장비를 들고 들어가 유리창을 깨고 사모님을... 데리고 나올 겁니다.”“그래...”박진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마비됐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묵직하고 차가운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그는 두려웠다. 정말로 민여진의 시신을 보게 될까 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그녀를 드디어 편히 보내줄 수 있다는 조금의 평온도 느껴졌다. 이 차가운 물속에서 그녀가 더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잠수팀은 장비를 짊어지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서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정식으로 시신 수습하
분노한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너 왜 이 일을 숨겼어?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민여진이 감옥에 가게 내버려둔 이유가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야? 문채연, 넌 죄책감도 안 느껴?”그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이 불렀다.문채연은 본능적으로 겁에 질렸고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진성 씨! 내 말을 들어봐요!”그러나 박진성은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는 순간 깨달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란 것을.어떻게 이렇게 냉랭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토록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말이다.문채연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성 씨, 제발...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난 그냥... 너무 무서웠을 뿐이에요...”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내가 2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에 진성 씨는 민여진 씨와 관계를 이어갔잖아요. 민여진 씨는 이미 진성 씨의 아이까지 가졌고요... 만약 내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민여진 씨가 아이를 낳고 나서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까요?”“난 진성 씨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진성 씨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어요. 그만큼 내겐 목숨보다 진성 씨가 더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그것뿐이에요.”“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여진 씨를 해치지도 않았고요. 나의 이기심이 문제라면 그건 인정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말아요, 진성 씨...”문채연은 흐느끼며 그를 힘껏 끌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그러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밀어냈다.“진성 씨...”문채연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약혼은 미루자
상우가 도착했을 때 박진성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2층에서 내려왔다.“대표님.”상우는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문채연 씨의 약혼식 드레스 디자인입니다. 여러 가지 시안을 준비했는데 매장에서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합니다.”“그래.”박진성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그런데 상우가 돌아서려 할 때 박진성이 그를 불러 세웠다.“서원은 요즘 어디에 있어?”상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서원 형님은 아직도 인양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모님의 시신을 먼저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대로 안치해 드리고 싶다면서요.”박진성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이제는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원은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박진성은 한참을 침묵하다 짧게 말했다.“추운 날씨에 바닷가에 계속 있게 하지 마. 아직 젊잖아.”“네. 저도 몇 번이나 말렸는데 잘 듣질 않네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포기할지도 모르죠.”상우가 떠난 후 박진성은 노트를 들고 문채연의 방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성 씨, 나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박진성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손에 든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업체에서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어. 상우가 가져다줬는데 빨리 결정하라고 하네.”“네, 침대에 놓아 줘요. 곧 나갈게요.”문채연의 목소리는 왠지 조금 부끄러운 듯 들렸다.사실 그녀는 박진성이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박진성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그는 몇 걸음 걸어가 티 테이블 위에 노트를 내려놓았다.그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진동음이 울렸다. 박진성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휴대폰에 꽂혔다.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그때 문채연이 서둘러 나왔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으며 뺨은 열기로 붉어져 있었다.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박진성을 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민여진이 박진성의 마음을 차지한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그의 ‘첫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