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 진성 씨!”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박진성이 방현수를 해칠 거라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제발... 제발 그러지 마! 채연 씨가 죽을 뻔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사과할게. 채연 씨가 그랬던 것처럼 수면제를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한테까지 화풀이하지 마! 무슨 벌을 내리든 내가 다 받을게...”“죄 없는 사람?”박진성이 비웃으며 몸을 숙이더니 눈물로 범벅진 그녀의 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죄 없는 사람? 채연이는 무슨 죄가 있는데?”그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얌전히 내 말에 따르기만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왜 이 사단을 만든 거야! 도대체 왜 채연이를 모함한 거야?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냐고!”그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거침없이 그녀를 밀쳐냈다.“윽!”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가 울릴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아니라고! 그런 짓 하지 않았어! 거짓말도, 모함도 한 적 없어!”“거짓말이 아니라고?”박진성이 걸음을 멈췄고 그의 시선엔 냉소와 혐오감만 가득했다.“네가 사주한 공범이 방금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직접 찾아와서 이실직고했는데도 너는 태연하게 끝까지 잡아떼는 거야?”‘공범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곧이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박진성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쾅!”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찬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말했던 공범은 대체 누구일까? 내가 뭘 속였다는 거지?’“민여진 씨!”문이 열리며 서원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께서 이렇게 만든 거예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박진성의 머릿속에는 오직 문채연의 안위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사흘이 지날 동안 민여진은 박진성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박진성은 서원까지 회사로 불러들였다.서원을 대신해서 온 사람은 간병인이었다.새로 온 간병인은 민여진이 시각장애가 있고 돌봐 줄 사람조차 없다는 걸 알고는 더욱 거칠게 대했다. 음식을 가져와서는 자기 배부터 채운 뒤, 반쯤 남은 것을 건네며 먹으라고 했다.민여진은 간병인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그녀가 건네는 음식을 밀쳐냈다.“어이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음식까지 가려 드시겠다? 정나미가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 여진 씨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역겹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간병인은 빈정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가진 것도 없고 부모도 없는 주제에 누가 돌봐 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서 감히 입맛을 따져?”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간병인은 속에 쌓아 둔 화풀이를 민여진에게 쏟아냈다.“안 돼! 이거 다 먹어! 나중에 박 대표님께서 내가 밥을 굶겼다고 오해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그러니까 남김없이 먹으라고!”간병인은 억지로 밥그릇을 들이밀었다.민여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저항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휘두른 손끝에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야! 미친년이 감히 그릇을 내팽개쳐?”간병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바닥에 쏟아진 찌꺼기를 집어 민여진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 했다.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박진성이었다. 그는 점잖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했다.간병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박... 박 대표님...”그녀는 움찔거리며 박진성을 올려다봤다.‘이렇게 비참해 보여도 여진 씨는 박 대표님이 직접 맡긴 환자였다. 괜히 일이 커질까 두
“그만해!”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민여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이제 그만하면 됐어! 불쌍한 척하는 데 온 힘을 다 쏟네? 민여진,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가증스러워... 박진성, 넌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아직도 내가 가식 떠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민여진의 상처는 칼로 도려내듯 쓰라렸다. 손이 떨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만, 아직 그의 명령을 다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제 손 좀 놔 줄래?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았잖아.”“정리는 개뿔!”박진성이 거칠게 발길질하자, 쓰레기통이 넘어졌고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간병인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직접 손으로 치우세요. 피 흘리기 전까진 멈추지 말라고요!”간병인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다.그러나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이미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치료실로 향하고 있었다.민여진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거칠게 눌러 앉히더니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내가 지금 널 살려주려는 건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민여진,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으니까.”‘치러야 할 대가? 그게 무슨 뜻이지?’순간 민여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진성이 비웃음을 흘렸다.“이제야 무서운가 보네?”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박진성, 난 이미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제발... 현수 씨는 건드리지 마.”박진성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조여왔다.‘결국 방현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였어? 그놈이 다칠까 봐 벌벌 떠는 거였어?’화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박진성은 손아귀를 더욱 세게 쥐었다. 깨진 조각이 살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그는
“버닝 나이트?”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양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를 리 없었다.버닝 나이트는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게는 완벽한 은신처였고, 그 안에서는 인명사고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가능했다.입술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박진성! 나를 여기 왜 데려온 거야?”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녀가 버둥거릴수록 그의 손아귀는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결국 힘으로 그녀를 품에 가둬버렸다.이윽고 박진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 늦었어! 민여진, 채연이를 죽을 뻔하게 만들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생각이었어?”“난 그런 짓 안 했어!”그러나 박진성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하겠다고?’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가고 싶으면 가. 막지 않을게.”그러나 그의 다음 말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하지만 네가 가면 방현수는 어떻게 될까?”순간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뜨거운 열기가 눈가를 적셨다.입술이 떨리며 간신히 새어 나왔다.“너무해... 박진성...”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보다야 덜하지.”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채연이를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스스로 상처까지 낸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억울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민여진은 이를 악물었다.“...만약 언젠가 네가 믿고 있는 모든 게, 사실은 문채연이 꾸민 함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것 같아?”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서려 있었다.그 순간 박진성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강하게 뱉어냈다.“그럴 리 없어! 채연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그의 눈빛이 더 거칠어졌다. 그는 민여진을 꿰뚫을 듯 노려보며 한 글자씩 힘을 줘 내뱉었다.“그리고 절대 후회 같은 거 안 해.”“알겠어.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됐
박진성이 그녀를 데려온 이유가 점점 분명해졌다.“자, 박 대표님이 직접 모셔온 손님이니까 나도 예의를 갖춰야겠네? 이거 한잔 받아 마셔.”“마셔! 마셔!”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민여진은 술을 전혀 못 마셨다. 단순히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술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그녀는 급히 손을 뻗어 술잔을 밀쳐냈다.“뭐야? 박 대표님 말만 듣고, 우리 말은 무시하는 거야?”술잔을 내민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센터에 앉아 있던 박진성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끝으로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찌를 듯이 꿰뚫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얼어붙게 했다.“내가 뭐라고 했었지?”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한 경고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건 명령이야. 거부하면 대신 당하는 건 방현수야.’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계속해서 밀어내는 건 여기 앉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경’을 선사하는 것이었다.“저... 마실게요.”손끝이 떨렸다.하지만 그녀가 술잔을 집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홀짝홀짝 마시는 건 안 돼! 한 번에 들이켜야지! 알았어?”손에 든 술잔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독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방현수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오늘 술독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현수 씨는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겠어.’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불타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순간, 방 안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좋았어! 역시 박 대표님이 데려온 사람이라니까!”속이 울렁거렸고 곧바로 토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억지로 삼켰다.곧 몸이 휘청였다.‘안 돼... 정신 차려야 해...’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
박진성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민여진에게 굴욕을 피하고 싶다면 방현수를 부르라는 뜻이었다.방현수를 불러서 대신 수모를 당하고, 이곳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도록 만들라는 거였다.민여진의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냉정했다.‘박진성, 넌 정말 잔인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그녀는 단호하게 입을 뗐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할게.”그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 중에는 이 연극이 갑자기 끝나는 걸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박진성만이 살기를 머금은 채 얼굴을 굳혔다.그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민여진, 제대로 생각해. 정말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이라도 벗겠다는 거야?”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방현수에게 전화하면 기껏해야 술 몇 잔만 마시게 할 거야.”‘...기껏해야 술 몇 잔?’민여진은 쓴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더 이상 박진성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날 밤에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사과하라며 그녀를 협박했었다.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민여진은 그의 말에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심지어 감옥에서 일어난 일도 혹시 박진성이 개입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예전의 그녀라면 모든 게 문채연이 꾸민 일이 아닐까 하고 희망했었지만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것이었다.이게 바로 그가 말한 ‘공정’이었다. 문채연이 수면제를 먹고 위태로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녀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단 한 마디, 청소부의 증언만으로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와 모욕을 주었다.‘눈뜨고 시각장애인 노릇을 하는 것도, 사리 분별 못하는 것도 모두 네 선택이야! 박진성...’그녀는 입술을 닦고 차갑게 말했다.“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야. 내가 직접 할 거
“하하... 박 대표님 센스 있으시네요. 사실 저 여자는 볼품도 없고... 마른 몸매라 구경할 맛도 없잖아요. 괜히 분위기 망칠 뻔했네요.”“맞아요. 너무 마른 여자는 볼 게 없죠. 춤을 춘다 해도 매력이 없을 텐데...”사람들이 맞장구치며 깔깔댔다.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혜정만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박 대표님이 저 여자 몸에 상처가 많아서 볼 게 없다고 했다는 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설마... 직접 본 거야? 저 얼굴을 보고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 거야?’이혜정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한편, 술기운이 확 올라온 민여진은 온몸이 덜덜 떨렸고 몸이 뜨겁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박진성은 그녀를 강제로 소파에 앉혔다. 그러자 기운이 빠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기댔다.그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자마자 재빨리 몸을 떼어내더니,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려는 듯 버티며 거리를 두었다.박진성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거칠어지며 그녀의 턱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민여진,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 내가 널 구해줬으면 최소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맙다고 하라고?’비틀거리는 정신 속에서도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할 일도 없었어. 저 무대 위에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이제 와서 흥미가 떨어졌다고 날 끌어내렸다고 해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도둑이 훔쳤던 물건 다시 돌려줬다고 해서, 도둑이 아니게 되는 거냐고...’그러나 그녀는 너무 어지러워 더 이상 생각할 힘도 없었다.속이 울렁거렸고 메스꺼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숙였다.“윽.”순간, 박진성의 몸 위로 모든 것이 쏟아졌다.주변에서 비명이 터졌고 방안에 역한 냄새가 퍼졌다.박진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는 이를 갈며 낮게 중얼거렸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맞아. 박 대표님이 그냥 분위기를 깰까 봐 저 여자를 이 자리에서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일 뿐이야. 다들 마저 마시자고!”사람들이 맞장구쳤지만, 그들의 웃음에는 어딘가 어색함이 서려 있었다.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그들조차 믿지 못하고 있었다.안쪽 방으로 들어선 박진성은 거칠게 욕실 문을 발로 밀어 열었고 욕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다음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민여진의 옷을 찢어내듯 벗겼다.“아!”차가운 물 속으로 던져지듯 빠진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입안으로 물이 밀려들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지자, 필사적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붙잡았다.눈가가 붉어진 그녀는 흐트러진 시선을 겨우 그에게 돌렸다.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보며 박진성의 목젖이 미묘하게 떨렸다.순간,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감아쥐고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안... 돼... 하지 마...”민여진의 숨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그의 손아귀는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목을 짓눌렀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강한 압박감이 전해졌다.“싫다는 거야?”박진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일그러졌다.“밖에서는 창녀처럼 굴면서도? 네 몸값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옷을 벗으라고 했다고 기꺼이 벗어? 내 앞에서는 또 왜 이러는 거야?”민여진의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찬물 속에 담긴 탓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가 내뱉은 그 말이 살얼음처럼 차갑게 그녀의 피부를 베어냈다.“...박진성!”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조용히 되물었다.“나한테 옷 벗으라고 한 게 누구였더라?”‘네가 시켰잖아. 어떻게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넌 선택할 수 있었어.”“...선택?”민여진이 허탈하게 웃었다.“그 선택은 방현수를 부르는 거였지?”‘그래, 난 천한 여자야=. 하지만 적어도 은혜나, 의리마저 모르는 인간은 아니야.’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왜? 방현
“바쁘시면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여진 씨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혹시라도 제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도울 일 있으면 제가...”주먹을 꽉 쥔 박진성의 손등에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졌다. 보아하니 남자는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계속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러내며 차갑게 민여진을 노려보았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셨다.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호흡을 가다듬고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서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진호영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 것 같았다.“제가 나이가 좀 많죠? 여진 씨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저도 가 볼게요.”진호연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레스토랑을 나섰다. 아마도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민여진의 표정이 점점 복잡미묘해졌다. 박진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왜? 미련 남았어?”박진성은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민여진의 표정을 보는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여진, 네가 아무리 눈이 멀었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상대로 흔들려? 넌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려는 거야?”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박진성 씨, 제발 다른 사람 외모 갖고 비하 좀 하지 마!”“외모 비하라고?”박진성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억센 손길로 민여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저 인간부터 감싸고 돌아? 네가 일하러 온 거지, 남자 꼬시러 온 거야?”민여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진성의 막말은 언제나 민여진에게만 거침없이 쏟아졌다.익숙해질 때가 됐지만 저절로 붉어지는 눈시울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나타나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다.박진성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무어라 더
이제는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도 다 민여진을 보러 오는 것 같았다.“아, 그분이요? 지금 소개팅 중이세요.”메뉴판을 계속 넘기던 박진성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더니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다.“소개팅이요?”“네.”웨이터가 몰래 웃으며 말했다.“피아노는 잘 쳐도, 못생긴 데다가 장님이잖아요. 솔직히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죠. 그래서 저희 청소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소개팅 주선해 주셨어요. 남자가 7~8살 정도 더 많다고는 하지만, 상대 가려 만날 처지는 아니잖아요.”박진성의 서늘한 시선에 웨이터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서버리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왜 그러세요, 손님?”“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잠시 망설이던 웨이터는 급히 손가락으로 레스토랑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저쪽이요.”민여진과 남자는 시야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앉아 있었다. 마음먹고 안 찾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이었다. 박진성의 시선은 곧장 남자에게로 옮겨졌다.정말이지 볼품없다는 말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아무리 민여진이 시각장애인이라고 해도 사람 고를 줄은 알 터였다. 굳이 눈길을 줄 가치조차 없는 남자에 박진성이 안심했다.그러던 그때, 남자와 얘기를 주고받던 민여진이 환하게 웃었다. 남자의 어떠한 말에 몸까지 떨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눈동자의 초점이 없었지만 그녀의 미소 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박진성의 미간이 힘껏 찌푸려졌다. 지금의 그 역시도 민여진을 저렇게 웃게 해줄 수 없었다....“아주머니께서 이런 성격이셨군요. 확실히 화끈하시긴 해요.”민여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나갔다.“아직 결혼 생각 없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집요하게 나오실 줄은 저도 몰랐어요. 아예 오늘 바로 불러내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저도 마찬가지예요.”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휴대폰 확인해 보니까 전화가 10통이나 와 있더라고요. 그래도 뭐, 어느 정도
“그건, 얼마 하지도 않는데.”민여진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 것처럼 답답했다.“진성 씨가 그걸 차고 가면, 괜히 체면만 깎일 거야.”“그래서 나한테 안 줬던 거야?”민여진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박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민여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낮게 속삭였다.“여진아, 나 정도 위치까지 올라오면 그런 허영이나 허례허식 따위엔 관심이 없어져. 내가 하고 다니는 물건들이 얼마짜리든, 그까짓 게 내 입지를 흔들 수는 없거든. 길거리에서 이런 걸 팔고 있었다고 해도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건 솔직히 인정할게. 하지만 이건 네가 준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두 사람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피어올라 시끄럽게 요동쳤다. 민여진은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감정에 긴장됐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려갔다....그 후 며칠 동안 민여진은 레스토랑 일에 점점 적응해서 이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간단한 대화까지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오늘, 화장실에서 나오던 민여진의 손을 청소 아주머니가 덥석 잡았다.“여진아, 너 나이도 있는데 결혼 생각은 없어? 나중에 더 나이 들면 의지할 사람도 없을 텐데?”민여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결혼했다고 말할 수도 없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저는 괜찮아요.”“뭐가 괜찮아? 솔직히 너 같은 애는 서둘러야 해. 젊을 때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지. 나이 들고 찾을 거야?”아주머니는 더 돌려 말하지 않고 곧장 본론부터 얘기했다.“우리 옆집에 아들이 하나 있거든. 서른 넘었는데 너보다 일곱 살이었나, 여덟 살이었나 조금 더 많을 거야. 그래도 사람은 착해. 자동차 공장에서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애가 참 성실하고 좋아. 외모는 조금 별로긴 한데, 넌 어차피 앞도 안 보이잖아. 어떻게, 오늘 저녁에
결국, 고민하던 민여진이 대답했다.“사촌 동생이에요.”이제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웨이터는 민여진에게 다가가 그녀와 함께 팔짱을 끼며 물었다.“그 사촌 동생 말이에요, 여자친구 있어요? 나 소개 좀 해주면 안 돼요?”“여자친구 있어요.”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었던 민여진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김빠지는 대답에 웨이터는 빠르게 흥미를 잃고 말했다.“피아노는 이쪽에 있어요. 연주 시간 되면 누가 와서 알려줄 거예요. 더 물어볼 거 없으면 먼저 가 볼게요.”민여진은 갑자기 바뀐 상대의 말투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피아노에만 정신이 팔려 당장이라도 연주하고 싶었다. 예전 카페에서 연주하던 피아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퀄리티가 높아 보였다. 시험 삼아 한 번 연주해보니 하루 만에 사람들의 칭찬이 끊임없이 쏟아졌다.덕분에 민여진의 얼굴에도 웃음이 늘었다. 다시 활기를 찾은 그녀의 표정은 더욱 생동해 보였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민여진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민여진이 물었다.“서원 씨, 진성 씨 서재 불 켜져 있어요?”“네, 켜져 있어요.”민여진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박진성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니 감사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박진성의 서재 앞에 도착한 민여진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서재 문이 활짝 열렸다. 굳이 허락을 받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는 듯 애초에 잠겨 있지 않았다. 민여진을 위해 일부러 열어둔 것 같았다.민여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조용히 물었다.“진성 씨, 안에 있어?”박진성은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서원과 함께 차를 타고 마당에 들어설 때부터 그는 민여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진성은 민여진의 말을 분명히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 대답 없는 서재에서 남자의 호흡을 느낀 민여진이 고개를 숙여 잔잔한
민여진은 적어도 선물을 사기는 했다.가슴이 뜨거워진 박진성은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잠시 후 방을 나섰다.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오아시스 레스토랑에 대해 조사해 봐. 문제가 없는지.”...민여진이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옆자리는 반듯한 채로 비어있었다. 민여진은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가다가 정수향과 마주쳤다.“일어났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허둥지둥해?”“아니에요.”민여진은 안심했다. 어젯밤에 박진성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그가 민영미를 내보낸 줄 알았던 것이다.“어젯밤에 엄마는 방에서 안 주무셨어요?”“어.”정수향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감기 기운이 있어서 너한테 옮길까 봐 나가서 잤어.”정수향은 화제를 돌렸다.“맞다, 서원 씨가 아래층에서 너 기다리고 있어. 꽤 오래 기다렸는데.”“서원 씨가?”민여진은 어리둥절했다.‘서원이가 왜 나를 기다리지?’민여진은 벽을 짚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원 씨?”서원은 정말 그곳에 있었다. 서원은 민여진에게 다가가 말했다.“민여진 씨, 일어나셨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가 그러는데 나를 찾았다면서요? 무슨 일이에요?”서원은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민여진 씨, 모르셨어요?”“뭘요?”“대표님께서 그 레스토랑에 출근하시라고 저보고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민여진은 머릿속이 하얘졌고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서원 씨, 지금 농담하는 거예요?”서원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대표님 허락 없이 제가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하겠어요?”그러니 정말이었다.민여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이때 서원이 말했다.“민여진 씨, 옷 좀 갈아입으시죠.”“맞아! 옷 갈아입어야겠다!”민여진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물었다.“서원 씨, 진성 씨가 왜 내가 일하는 걸 허락했는지 알아요?”“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밤새 그 레스토랑을 조사해서 문제없는 걸
“저는 이렇게 생기 있는 민여진 씨를 처음 봤어요. 박 대표님도 보시면 분명 감동하실 거예요. 박 대표님이 원하는 건 민여진 씨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거잖아요. 제가 보기에 민여진 씨는 피아노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요.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그게 민여진 씨에게 살아갈 힘이 될지도 몰라요.”박진성은 정수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나더러 허락하라는 말인가요?”정수향은 미소를 지었다.“저는 박 대표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본 것을 박 대표님께 말씀드리는 것뿐이죠.”정수향은 어깨에 걸친 숄을 매만지며 말했다.“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세요. 저는 다른 방에서 쉴게요.”정수향은 나가다가 다시 멈춰 서서 말했다.“그리고... 침대 옆 서랍 안에 든 물건도 한번 확인해 보세요.”문이 닫히자 박진성은 문 앞에 서서 민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민여진은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지만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잠든 민여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은 고요했다.그는 민여진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그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이 있었다니.민여진에게도 꿈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네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박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민여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처음 민여진을 만났을 때부터 민여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민여진은 그 마음 때문에 별장에서 2년을 갇혀 지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도 하지 않았고 나를 귀찮게 하지도 사고를 치지도 않았다.“네가 그저 나에게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민여진, 내가 없으면 넌 어떻게 살아가려고? 혼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어?”박진성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네가 원하는 일이 정말 네가 찾던 일인지 어떻게 확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생활하는 데 부족한 것도 없잖아. 그런데도 굳이 나가서 일하겠다고 하는 걸 보니 도망가고 싶은 거잖아.”박진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민여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꽉 잡았다.“민여진, 며칠 내버려 뒀더니 정말 날개 달고 날아가 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민여진은 문에 밀쳐진 채 박진성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꼈다.“진성 씨,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나가서 일할 자유도 없어?”“네가 나가서 일하려면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지. 내가 없으면 넌 겨울도 못 넘길 거야. 어디 길바닥에서 얼어 죽어도 아무도 모를걸!”박진성은 단지 밖에서 시각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게 나가 버렸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민여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돈이 필요하면 내가 줄게. 네가 외출하는 것도 막지 않았잖아. 너한테 충분한 자유를 줄 테니까 제발 나가서 일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너 밖에서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 못 져.”민여진은 박진성의 손을 뿌리치고는 차가운 손끝과 표정 없는 눈으로 말했다.“알았어.”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들어 올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갑자기 다시 공허해진 눈빛에 그는 짜증이 났다.“민여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알아. 나 이만 나갈게.”민여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음이 무감각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이 아팠다.그녀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았다. 민영미가 무사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박진성의 인내심을 시험한 건 그녀의 잘못이었다.방으로 돌아온 민여진의 표정은 어두웠다. 정수향은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래도 물었다.“왜 그래? 진성이가 허락 안 했어?”민여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진성 씨는... 내가 밖에서 힘든 일을 겪을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눈이 안 보이니까.
‘그러게. 박진성은...’민여진의 눈빛에 실망감이 어렸다. 박진성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정수향은 풀이 죽은 민여진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여진아, 별장에서 지내는 게 편하지 않아? 왜 굳이 나와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거야?”“나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껴 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자조하며 말했다.“그리고 언제까지나 남한테 기대 살 수는 없잖아요. 만약에 내가 이 일을 잘 해내면,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만약... 만약에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박진성에게 손 벌리지 않고 엄마를 도울 수 있고요.”정수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살아가기도 힘든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민여진은 생각보다 훨씬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민여진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지해서 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정수향은 그제야 박진성처럼 훌륭한 남자가 왜 민여진을 잊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의 매력은 외모보다 훨씬 강력하다.“그렇다면 진성이와 상의해 보는 게 좋겠다. 너희는 부부니까, 네가 스스로를 잘 챙길 수 있다면 그도 이해해 줄 거야.”민여진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얘기해 볼게요.”민여진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저녁에 방에서 기다렸다. 9시가 되어서야 박진성이 돌아왔지만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서재로 향했다.민여진은 준비한 디저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민여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를 본 박진성은 화가 누그러졌다.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답답하고 고지식한 성격이라 내가 화난 줄도 모를 거라 여겼다“무슨 일이야?”박진성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였지만 눈에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민여진은 겁이 났지만 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박진성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디저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저기...
민여진은 망설였다.‘나는 속상해할까? 예전 같았으면 정말 속상했을 테지.’속상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하지만 도도한 박진성이 예전의 그녀와 같은 생각일 수 있겠는가.“생각해 볼게요.”민여진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그때 옆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 민여진은 마음이 끌렸다.정수향은 민여진의 마음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진아, 저 피아노 한번 쳐 보고 싶어?”“내가요?”민여진은 당황하며 말했다.“안 돼요. 난 잘 못 쳐요. 잠깐 배운데다가 지금은 눈도 안 보이잖아요. 아마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쳐 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정수향은 종업원을 불러 피아노를 잠깐 써도 되는지 물었다.종업원은 흔쾌히 허락했다.“네, 괜찮습니다.”정수향은 민여진을 부축해 피아노 앞에 앉혔다.민여진은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자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건반을 누르며 기억 속의 멜로디를 연주했다.민여진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빈민가에서 남들이 버린 전자 피아노를 민영미가 가져와 전원을 연결해 주자 민여진은 며칠 만에 그럴듯하게 연주했었다.민영미는 아프기 전에 민여진의 연주를 들으며 웃으며 말했었다.“우리 여진이는 정말 재주가 많구나. 나중에 피아노 연주자가 될지도 몰라. 좀만 기다려. 엄마가 일 더 해서 음악 선생님을 모셔 줄게.”민영미는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피아노 선생님을 구해 줬지만 그 후 건강이 나빠졌다. 민여진은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 바람에 민영미가 아프게 됐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 민영미가 다시 용기를 주었다. 연주를 마친 민여진은 목이 메어왔다.“바보야, 왜 울어? 네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운데.”정수향은 민여진의 얼굴을 감싸며 칭찬했다.민여진은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기뻐서... 엄마가 무사히 돌아와서 나랑 함께 있어 줘서 너무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