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은 유서 위에 종이를 덮으면서, 그의 눈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저기요, 뭐 하는 분이시죠?”서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박진성이 고개를 들자, 멀리서 한 여자가 당황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서원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문채연 씨... 제발 저를 경찰서에 넘기지 말아주세요...”서원은 잠시 멈칫했다.“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그 눈먼 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딱해 보여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문채연 씨를 죽음으로 몰게 될 줄은 몰랐어요...”박진성,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듯 벌떡 일어나며 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먼 여자라니!”그 여자는 박진성의 강렬한 기세에 움찔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박 대표님! 박 대표님, 제가 다 말할게요! 그 여자가 시켰어요! 다 그 여자가 시킨 대로 한 거예요!”“대체 누구의 말을 따랐다는 거야!”박진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여자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전 원래 이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어요. 19일, 평소처럼 각 병실을 돌며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1209호실에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던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갑자기 저에게 애절하게 부탁했어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제 손을 세게 움켜쥐고 어떻게든 피 나고 살집이 뜯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나중에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문채연 씨를 쫓아내고 박 대표님을 다시 자기 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고 했어요.”“그게 정말이야?”“네! 문채연은 불륜녀라고 하면서 자기가 배신당한 조강지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욱하는 마음에 그 여자를
“서원아! 그만해!”박진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단호하게 서원의 말을 끊으며 이를 악물었다.“너도 그 여자한테 속은 거야.”씁쓸한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쳤다.“민여진이 네게 나를 찾아가서 일러바치라고 했겠어? 처음부터 모든 걸 계획한 게 그 여자인데? 나를 죄책감에 빠뜨리고 채연이에게 책임을 묻게 하려고 했어! 그런 위선적인 여자에게 속아서 나는 채연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다고!”분노와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쥐어뜯었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아득할 정도였다.박진성은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민여진의 병실로 달려갔다.문을 거칠게 발로 차자, 안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민여진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단숨에 그녀의 목을 거칠게 조아붙였다.“윽!”목이 조여오자,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숨이 막혀 전신에 전율이 퍼졌고 조금만 더 힘이 가해지면 목이 부러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박진성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민여진! 너 같은 악독하고 역겨운 여자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해!”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숨을 쉬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질식할 것만 같았고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박진성이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민여진은 가차 없이 침대 위로 내던졌다.“쿵!”충격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녀는 그 아픔도 잊은 채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을 들썩였고 목에서는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그러나 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도... 도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그녀가 힘겹게 말을 뱉자, 박진성은 비웃음을 흘렸다.“무슨 일이냐고? 네가 짠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리야!”그는 한 발짝 다가오며 그녀의 다친 손 위에 거칠게 발을 올렸다.
“박진성! 진성 씨!”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박진성이 방현수를 해칠 거라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제발... 제발 그러지 마! 채연 씨가 죽을 뻔한 일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사과할게. 채연 씨가 그랬던 것처럼 수면제를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한테까지 화풀이하지 마! 무슨 벌을 내리든 내가 다 받을게...”“죄 없는 사람?”박진성이 비웃으며 몸을 숙이더니 눈물로 범벅진 그녀의 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죄 없는 사람? 채연이는 무슨 죄가 있는데?”그는 이를 악물었다.“네가 얌전히 내 말에 따르기만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왜 이 사단을 만든 거야! 도대체 왜 채연이를 모함한 거야?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냐고!”그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거침없이 그녀를 밀쳐냈다.“윽!”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가 울릴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아니라고! 그런 짓 하지 않았어! 거짓말도, 모함도 한 적 없어!”“거짓말이 아니라고?”박진성이 걸음을 멈췄고 그의 시선엔 냉소와 혐오감만 가득했다.“네가 사주한 공범이 방금 죄책감을 못 이기고 직접 찾아와서 이실직고했는데도 너는 태연하게 끝까지 잡아떼는 거야?”‘공범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곧이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박진성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쾅!”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찬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진성이 말했던 공범은 대체 누구일까? 내가 뭘 속였다는 거지?’“민여진 씨!”문이 열리며 서원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이게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께서 이렇게 만든 거예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박진성의 머릿속에는 오직 문채연의 안위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사흘이 지날 동안 민여진은 박진성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박진성은 서원까지 회사로 불러들였다.서원을 대신해서 온 사람은 간병인이었다.새로 온 간병인은 민여진이 시각장애가 있고 돌봐 줄 사람조차 없다는 걸 알고는 더욱 거칠게 대했다. 음식을 가져와서는 자기 배부터 채운 뒤, 반쯤 남은 것을 건네며 먹으라고 했다.민여진은 간병인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 그녀가 건네는 음식을 밀쳐냈다.“어이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음식까지 가려 드시겠다? 정나미가 떨어지긴 했어도, 아직 여진 씨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역겹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간병인은 빈정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가진 것도 없고 부모도 없는 주제에 누가 돌봐 주기라도 하면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서 감히 입맛을 따져?”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간병인은 속에 쌓아 둔 화풀이를 민여진에게 쏟아냈다.“안 돼! 이거 다 먹어! 나중에 박 대표님께서 내가 밥을 굶겼다고 오해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그러니까 남김없이 먹으라고!”간병인은 억지로 밥그릇을 들이밀었다.민여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저항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휘두른 손끝에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야! 미친년이 감히 그릇을 내팽개쳐?”간병인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바닥에 쏟아진 찌꺼기를 집어 민여진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 했다.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박진성이었다. 그는 점잖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했다.간병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박... 박 대표님...”그녀는 움찔거리며 박진성을 올려다봤다.‘이렇게 비참해 보여도 여진 씨는 박 대표님이 직접 맡긴 환자였다. 괜히 일이 커질까 두
“그만해!”박진성이 성큼 다가와 민여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이제 그만하면 됐어! 불쌍한 척하는 데 온 힘을 다 쏟네? 민여진,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가증스러워... 박진성, 넌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아직도 내가 가식 떠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민여진의 상처는 칼로 도려내듯 쓰라렸다. 손이 떨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만, 아직 그의 명령을 다 따르지 못했다는 생각에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제 손 좀 놔 줄래?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남았잖아.”“정리는 개뿔!”박진성이 거칠게 발길질하자, 쓰레기통이 넘어졌고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간병인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직접 손으로 치우세요. 피 흘리기 전까진 멈추지 말라고요!”간병인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다.그러나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박진성은 이미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치료실로 향하고 있었다.민여진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를 의자에 거칠게 눌러 앉히더니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내가 지금 널 살려주려는 건 줄 알아? 착각하지 마! 민여진,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는 거야. 네가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 있으니까.”‘치러야 할 대가? 그게 무슨 뜻이지?’순간 민여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진성이 비웃음을 흘렸다.“이제야 무서운가 보네?”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박진성, 난 이미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제발... 현수 씨는 건드리지 마.”박진성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조여왔다.‘결국 방현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였어? 그놈이 다칠까 봐 벌벌 떠는 거였어?’화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박진성은 손아귀를 더욱 세게 쥐었다. 깨진 조각이 살을 깊이 파고들었지만,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그는
“버닝 나이트?”민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양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를 리 없었다.버닝 나이트는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게는 완벽한 은신처였고, 그 안에서는 인명사고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가능했다.입술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박진성! 나를 여기 왜 데려온 거야?”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그녀가 버둥거릴수록 그의 손아귀는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결국 힘으로 그녀를 품에 가둬버렸다.이윽고 박진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 늦었어! 민여진, 채연이를 죽을 뻔하게 만들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생각이었어?”“난 그런 짓 안 했어!”그러나 박진성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하겠다고?’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가고 싶으면 가. 막지 않을게.”그러나 그의 다음 말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하지만 네가 가면 방현수는 어떻게 될까?”순간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뜨거운 열기가 눈가를 적셨다.입술이 떨리며 간신히 새어 나왔다.“너무해... 박진성...”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너보다야 덜하지.”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채연이를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스스로 상처까지 낸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억울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민여진은 이를 악물었다.“...만약 언젠가 네가 믿고 있는 모든 게, 사실은 문채연이 꾸민 함정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떨것 같아?”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서려 있었다.그 순간 박진성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강하게 뱉어냈다.“그럴 리 없어! 채연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그의 눈빛이 더 거칠어졌다. 그는 민여진을 꿰뚫을 듯 노려보며 한 글자씩 힘을 줘 내뱉었다.“그리고 절대 후회 같은 거 안 해.”“알겠어.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됐
박진성이 그녀를 데려온 이유가 점점 분명해졌다.“자, 박 대표님이 직접 모셔온 손님이니까 나도 예의를 갖춰야겠네? 이거 한잔 받아 마셔.”“마셔! 마셔!”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민여진은 술을 전혀 못 마셨다. 단순히 못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술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힐 정도였다.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에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그녀는 급히 손을 뻗어 술잔을 밀쳐냈다.“뭐야? 박 대표님 말만 듣고, 우리 말은 무시하는 거야?”술잔을 내민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센터에 앉아 있던 박진성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끝으로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찌를 듯이 꿰뚫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얼어붙게 했다.“내가 뭐라고 했었지?”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한 경고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건 명령이야. 거부하면 대신 당하는 건 방현수야.’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계속해서 밀어내는 건 여기 앉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경’을 선사하는 것이었다.“저... 마실게요.”손끝이 떨렸다.하지만 그녀가 술잔을 집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홀짝홀짝 마시는 건 안 돼! 한 번에 들이켜야지! 알았어?”손에 든 술잔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독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방현수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오늘 술독에 빠져 죽는 한이 있어도, 현수 씨는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겠어.’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불타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순간, 방 안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좋았어! 역시 박 대표님이 데려온 사람이라니까!”속이 울렁거렸고 곧바로 토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억지로 삼켰다.곧 몸이 휘청였다.‘안 돼... 정신 차려야 해...’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
박진성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민여진에게 굴욕을 피하고 싶다면 방현수를 부르라는 뜻이었다.방현수를 불러서 대신 수모를 당하고, 이곳의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되도록 만들라는 거였다.민여진의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냉정했다.‘박진성, 넌 정말 잔인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어...’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그녀는 단호하게 입을 뗐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할게.”그 순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들 중에는 이 연극이 갑자기 끝나는 걸 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박진성만이 살기를 머금은 채 얼굴을 굳혔다.그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민여진, 제대로 생각해. 정말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이라도 벗겠다는 거야?”박진성의 살기 어린 눈빛이 번뜩였다.“방현수에게 전화하면 기껏해야 술 몇 잔만 마시게 할 거야.”‘...기껏해야 술 몇 잔?’민여진은 쓴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더 이상 박진성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그날 밤에도 박진성은 문채연에게 사과하라며 그녀를 협박했었다.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민여진은 그의 말에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심지어 감옥에서 일어난 일도 혹시 박진성이 개입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예전의 그녀라면 모든 게 문채연이 꾸민 일이 아닐까 하고 희망했었지만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것이었다.이게 바로 그가 말한 ‘공정’이었다. 문채연이 수면제를 먹고 위태로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녀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단 한 마디, 청소부의 증언만으로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와 모욕을 주었다.‘눈뜨고 시각장애인 노릇을 하는 것도, 사리 분별 못하는 것도 모두 네 선택이야! 박진성...’그녀는 입술을 닦고 차갑게 말했다.“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야. 내가 직접 할 거
라미연이 이렇게까지 확신하자, 문채연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분명히 박진성을 봤고, 양성에서 안진까지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어떻게 된 거지?’라미연은 문채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또 불을 지폈다.“채연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 여자에게 내줄 셈이야? 민여진은 그저 너랑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고, 널 공식 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게 했어. 이제는 네 남자까지 빼앗으려 하는데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너 이러다 다 빼앗길 수도 있다고!”힘들게 지내던 과거가 떠오르자, 문채연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났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알았어. 미연아, 고마워.”문채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올해 신상으로 나온 핸드백, 사람을 시켜 보내줄게.”라미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양했다.“됐어. 친구 사이에 뭘 이런 것 가지고.”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던 문채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마저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게 변했다.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두 손에 힘을 주더니,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는 마치 칼날처럼 문채연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왜? 넌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꼴을 하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데?’반면 문채연은 이정화가 그 두 해 동안 함께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안 후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버렸고 몇 번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할 뿐이었다.‘이정화와의 관계도 끝났는데 박진성마저 잃는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문채연은 이를 악물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치고 나갔다.박진성의 병세는 도저히 나아지지 않았다. 복부의 상처가 자꾸만 벌어지며 악화하여 며칠 내내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게다가 민여진의 일까지 더해져 그는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문채연이 찾아가자, 서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께서
민여진의 머리가 임재윤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특정할 수 없는 향수 냄새였지만, 오히려 민여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다만 애매한 이 자세가 불편했다.두 사람의 행동에 여자는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뭐야? 사귀는 사이였어? 요즘 세상에 왜 잘생긴 남자는 다 못생긴 여자랑 붙는지 모르겠네!”여자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는 자리를 떠났다.여자의 말에 임재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민여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익숙해요.”민여진은 임재윤이 자신의 마음이 다친 건 아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스러웠다.임재윤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그녀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썼다.[민여진 씨가 저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워요.]한 글자 한 글자 강한 압력으로 글을 쓰는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진심이 어려 보였다.어쩌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민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왜 현준 오빠랑 똑같이 그래요? 현준 오빠는 원래 사람을 잘 달래주는 사람이라 이해가 가는데, 임재윤 씨는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봐서 제 얼굴이 신기한 건가요?”임재윤은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그리고.”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타자를 했다.“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건 싫어요.”다른 한편.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라미연은 민여진과 임재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멈춰 섰다.‘저거 민여진 아니야?’깜짝 놀란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여진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 바로 문채연에게 사진과 함께 음성을 보냈다.“채연아, 방금 너한테 사진 보냈는데 봤어? 이 여자 민여진 아니야?”음성을 보내고 다시 한번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라미연은 그제야 민여진 옆에 한 남자가 희미하게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터라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등만 찍혀 있었는데 체형으로 보니 박진성인
“하지만...”민여진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짧은 시간 안에는 갚기 어려울 거예요.”민여진에게는 자립할 능력도, 돈을 벌 방법도 없었다.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짐이 될 뿐이었다.“그냥 돈을 받아주세요. 현준 오빠한테 빚진 건 언제든 갚을 수 있지만, 임재윤 씨는 휴양지 건설이 끝나면 떠나실 거잖아요. 기간이 너무 짧아요.”민여진은 임재윤이 평생 안진 마을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집은 여기가 아니었고,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임재윤은 받지 않고 물었다.“민여진 씨의 뜻은 나더러 안진 마을에 좀 더 머물러 달라는 건가요?”차가운 기계음 소리는 임재윤이 지금 농담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민여진이 잠깐 멈칫하자, 임재윤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일단 가지고 계세요. 제가 떠나기 전에 갚을 수 있을 거예요.”결국 민여진은 그 돈을 임재윤한테 주지 못한 채 다시 조인화에게 가져갔다.“왜 다시 갖고 왔어? 임재윤 씨가 뭐라고 했는데?”“빌려주는 거래요.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조인화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건 앞으로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직 순진한 민여진만이 자신에게 매력이 없다고 여기며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었다.“갚지 못하면 어쩌려고?”민여진도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임재윤 씨의 말로는, 떠나기 전에 내가 갚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몸으로 갚으라는 거야?”민여진은 흠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이모, 장난치지 마세요.”조인화는 웃으며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아이고, 이 바보.”잠시 후, 포장 되어있는 봉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임재윤이 봉투를 받아 든 뒤, 세 사람은 가계를 나왔다.밖으로 나가던 중 다른 한 가계에서 조인화는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민여진이 옷을 내려놓자, 조인화가 다가오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가게로 가요.”“왜? 현준이가 나한테 이 가게를 추천했는데, 겨울옷이 보온성이 좋다더라.”말하던 중 조인화는 뭔가를 깨달은 듯 미소를 지었다.“돈 걱정은 하지 마. 현준이가 너한테 옷을 사주라면서 돈을 푼푼이 보내줬어. 한 푼도 남기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그러니까 현준이 말을 들어야겠지?”조인화가 민여진을 데리고 계산대로 가 결산을 하려 하자, 한 직원이 임재윤을 바라보며 말했다.“금액은 저분이 이미 결제하셨습니다. 옷은 포장해 드릴까요, 아니면 주소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따로 배송해 드릴까요?”직원의 말에 조인화와 임여진은 깜짝 놀랐다.임재윤이 시내까지 태워다 준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인데 갑자기 옷까지 사준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얼마를 내셨죠?”민여진이 묻자, 직원은 웃으며 대답했다.“이 매장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예요.”조인화는 탄성을 내뱉었다.“임재윤 씨가 부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브랜드 매장인데 이 매장을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줬다니, 도대체 얼마를 준 거야?”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대가 없는 호의는 받을 수 없어.'그녀는 차라리 조현준에게 신세를 지더라도 임재윤에게 더 이상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이모, 현금 가지고 계세요? 제가...”“가지고 있지!”조인화는 서둘러 지갑에서 돈을 꺼내 민여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이모도 알아. 너와 임재윤 씨 사이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는걸. 그러니까 이렇게 받는 건 아닌 거 같아. 어서 가서 돌려줘.”민여진은 돈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너무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카운터를 짚으며 입구로 향했다.문어 구에 있던 임재윤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가 휴대전화로 물었다.“왜요? 옷 다 골랐어요?”민여진이 손에 든 현금을 임재
“이모...”조인화의 말에 민여진은 당황스러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차가 다시 멈추더니 앞에서 휴대전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도착했습니다.”“임재윤 씨, 고생하셨어요”문을 열려던 조인화는 문득 임재윤에게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날카롭게 각진 그의 턱선은 불편할 정도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미간에 잡힌 가느다란 주름이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임재윤의 태도에 조인화의 머릿속에는 순간 한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임재윤이 휴대전화로 물었다.“돌아갈 방법은 생각해 두셨나요?”민여진이 대답했다.“오후 5시에 안진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어요.”“너무 늦네요.”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다섯 시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저도 할 일이 없으니 같이 쇼핑하다가 다시 모셔다드릴게요.”“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민여진이 사양하려는 찰나, 임재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타자했다.“그냥 이렇게 하는 거로 하죠.”완강한 그의 태도에 민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수고해 주세요.”조인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재윤과 민여진 사이를 관찰하고 있었다.한 매장에 들어간 뒤 임재윤이 입구에서 기다리자, 조인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진아, 너랑 임재윤 씨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민여진도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라 두루뭉술하게 답했다.“임재윤 씨는 모두에게 친절하시잖아요.”“글쎄다.”조인화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재윤 씨가 널 보는 눈빛은 분명히 다르더라. 게다가 성격도 원래 냉정한 걸로 보이는데, 우리랑 쇼핑하겠다고 하다니. 분명히 너 때문이야. 그리고...”게다가 민여진이 조현준과 통화할 때, 임재윤은 불편한 기색을 훤히 드러냈다.“그리고요?”민여진은 묻다가 바로 웃으며 말했다.“임재윤 씨는 겉보기에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잖아요. 이모도 그날 축하 자리에서 보셨잖아요.”조인화는
“우리도 좀 태워주시겠어요?”조인화가 말했다.“시내에 가서 여진이 겨울옷 좀 사주려고요.”“그럼요.”진시우는 자신의 차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했다.“근데 제 차는 자리가 꽉 찼네요. 앞에 차가 임재윤 차인데 저쪽에는 자리 남았을 거예요.”“임재윤 씨요?”조인화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임재윤에 대해 더 이상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편하지는 않아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괜히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무슨 소리세요.”진시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 한 식구 아닙니까. 도움 줄 수 있다면 좋아할 거예요.”“알겠어요.”조인화는 민여진의 손을 잡고 임재윤의 차 옆에 다가가 차창을 두드렸다.임재윤이 차창을 내리자, 날렵하면서도 깔끔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조인화를 스치듯 흘깃 보고는 민여진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조인화는 순간 당황했으나 바로 말을 이었다.“임재윤 씨, 저희 시내에 가서 옷 좀 사려고 하는데 태워주실 수 있나요?”임재윤은 볼품없이 낡아빠진 민여진의 옷을 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조인화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두 사람이 모두 뒷좌석에 타는 건 임재윤을 운전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 조인화는 조수석에 올라탔다.차가 출발하자마자 민여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진아.”“현준 오빠.”의외의 전화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던 민여진은 운전석에 있는 임재윤이 미동하는 게 느껴져, 그가 시끄럽다고 생각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전화를 다 하고?”조현준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해?”“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약간 당황해하며 말했다.“전화해 줘서 당연히 반갑죠. 그런데 지금 출근 시간 아니에요?”“맞아.”조현준은 미소를 머금었다.“그런데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민여진이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너무 자연스러운 임재윤의 행동에 민여진은 또다시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털어 버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행동은 박진성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계속 앞으로 걸어가자, 눈은 어깨에도 쌓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하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인지, 그다지 춥지 않았다.문 앞까지 왔을 때, 임재윤은 멈춰 서서 휴대전화로 말했다.“도착했어요.”민여진은 옷에 묻은 눈을 털며 말했다.“고마워요.”민여진이 대문을 여는 순간까지 임재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민여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임재윤 씨, 들어가서 따뜻한 차 한잔하실래요?”“다음에요.”임재윤은 빠르게 글을 쓰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어젯밤, 제게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볼 말이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 물을 테니까 그때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요.”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임재윤의 발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민여진이 안뜰로 들어가자, 불을 피우고 있던 조인화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옷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며 말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방금 불을 피워 놓고 너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마당에 마무리할 게 조금밖에 안 남아서, 그냥 두고 오기가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했어요.”“이 바보야, 안 추웠어? 내가 여기 있는 옷 몇 벌만 손보고 나가서 도와줄 테니, 너는 일단 앉아서 불 쬐고 있어. 따뜻한 물 좀 떠올게.”“네.”민여진은 앉아서 얼굴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손을 내밀어 차가웠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아까 임재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뜻은 원래 어젯밤에 할 말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민여진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눈이 한번 내리자, 기온은 뚜렷하게 떨어졌다.민여진이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같이 얇은 옷들이었고 유일하게 맞는 건 조인화의 낡은 옷뿐이었다
임재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여진에게 물었다.“됐어요?”그의 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있었고, 귀가 달아오른 민여진은 보이지 않음에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네.”임재윤은 다시 옷을 내려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천천히 글을 썼다.“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 저와 매우 비슷한가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마... 조금은요. 하지만 많이 닮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요?”‘어떤 사람이냐고? 독단적이고 냉혈 하면서도 무자비한 사람.’민여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박진성의 모습은 항상 높은 곳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살얼음처럼 차가운 모습뿐이었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정반대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두 사람을 겹쳐 본 걸까?“잊어버렸어요.”민여진은 박진성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기 싫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요.”어쩌면 이건 민여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박진성이라는 이름조차 잊고 아픈 과거를 모두 떨쳐내고 새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임재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꿨다.“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민여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교회 내부 구조를 잘 모르는 한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해 줘요.”임재윤은 잠시 침묵했다. 약간 불쾌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민여진의 손목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가보니 땅에는 얇게 눈이 쌓여 있었다.민여진이 손을 내밀자, 눈이 손바닥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렸다.“집까지 데려다줄게요.”임재윤이 휴대전화로 글을 썼다.“괜찮아요.”민여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안진 마을에 오신 것도 일 보러 오신 거잖아요. 저 때문에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하셨는데 일 보러 가세요. 여기서부터는 길을 아니까
임재윤은 더 이상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지 않았고 대신 조용히 민여진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고 그 사람이 지니던 차가운 손과는 전혀 달랐다. 임재윤의 손은 피부가 델 듯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고 임재윤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이끌었다.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가슴과 복부 사이 어디쯤 조심스럽게 얹었다.마침 그 자리는 심장이 뛰는 곳이었고 손등 너머로 전해지는 맥박은 뜨겁고 강했다. 그 울림에 민여진은 마치 전신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민여진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임재윤이 더욱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아래로 이끌었다.그의 허리로 내려간 손끝에는 단단하고 잘 단련된 근육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압도적인 힘과 긴장감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잠시 후,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놓았고 옷을 더 걷어 올렸다.그건 마치 마음껏 확인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민여진의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피가 터질 것처럼 귀 끝까지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건 그저 확인일 뿐이야. 그 사람인지 아닌지만 알아보면 되는 거야.’하지만 시야가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은 모든 걸 더욱 생생히 느꼈다.그의 숨소리 피부에서 나는 미묘한 향기 손끝에 닿는 근육의 결까지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예전에 박진성과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그의 몸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그들은 서로의 몸만 공유한 낯선 사이였을 뿐이다.감정도 사랑도 없었다.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임재윤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그제야 민여진도 정신을 차리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그러고는 손을 그의 왼쪽 허리로 옮겼다.그녀는 눈을 꼭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칼을 찔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