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는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가위로 몇 번 꽃가지를 잘라낸 후 돌아섰다.“...”꽃밭 아래에서 유월영은 연재준의 위에 엎드려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연재준의 얼굴은 꽃잎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그의 새까만 눈만은 선명하게 유월영을 바라보고 있었다.“당신과 현시우, 이 모든 걸 짜고 사람들을 속인 거지?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말이야.”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연재준이 조용히 말했다.“당신은 항상 진심으로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어. 절대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좋은 말을 하지 않지. 나와 헤어진 뒤에 당신은 나에 대한 나쁜 기억만 기억했듯이.”“그러니 당신이 이렇게 현시우를 위해 변명한다는 것은, 이번 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게 모두 연극이라는 뜻이지. 왜 그런 거야? 이번에 목표는 누구지?”유월영은 연재준이 똑똑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그가 지나치게 예리하게 꿰뚫어 본다고 생각했다.“현시우가 당신을 마르세유로 보낸 건 두 사람의 목표 인물이 마르세유에 있다는 거고. 현시우의 그 친척 엘리자베스 부인인가?”“내가 전에 말했잖아. 현시우의 사고가 그 여자의 짓이라고. 이번에는 그 여자가 신현우와 손을 잡고 당신네 놀이공원 사고를 일으켰으니 마침내 그 여자를 찾아 결판내려고 하는 거네?”유월영이 차갑게 말했다.“때로는 너무 많이 아는 것도 꼭 좋지만은 않아요. 연 대표님, 너무 똑똑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죠.”연재준이 그녀의 입을 가볍게 막았다.“내게 저주를 걸지 마. 나는 오래 살아야겠으니까.”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내 추측이 맞는 거야?”유월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해요.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예외라고요.”너무 똑똑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지만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예외라.“그러니까 내가 틀렸다는 뜻이야?”유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 있
순찰 중인 경비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창고의 작업자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저택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발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유월영은 그들과 더 할 말이 없었다.연재준의 등에 업힌 채 유월영의 머리카락이 그의 가슴 쪽으로 흘러내렸고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연 대표님 몸 상태도 나보다 나아 보이진 않는데 날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당연하지. 만약 못나간다면...”유월영은 그가 또 자신한테 유리한 헛소리를 할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우리가 도망치지 못한다면 여기서 죽어서 각자 다른 곳에 묻히는 거예요.”연재준이 낮게 웃었다. 바람에 유월영의 머리카락이 그의 입술에 닿자 그는 고개를 돌려 살짝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그런 잔인한 결말을 맞을 수 없지. 반드시 당신을 데려갈 거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연재준은 유월영을 잡으러 달려든 작업자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작업자들은 한 명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따질 새도 없이 세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연재준은 유월영을 업고 있어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유월영은 이러다가 승산이 없을거라 생각했다.“우선 나를 내려놔요.”“기억나? 전에 영안에서 당신이 수영이한테 버려져 외딴 산속에 남겨졌었잖아?”유월영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묻은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 두 사람을 에워싸고 해코지하려 했다.“그때도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 지금은 더더욱 그래.”하지만 유월영은 그가 그때 자신을 내려놓지 않아서 몽둥이로 맞았던 것을 기억했다쿵!마치 그 옛날의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이번에도 연재준은 작업자가 휘두른 몽둥이에 허벅지를 맞고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유월영도 하마터면 그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연재준은 즉시 평형을 잡고 또 다른 작업자를 발로 차서 밀어냈지만 그의 숨소리는 확연히 거칠어졌다.유월영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말했다.“연 대표님, 지금
그 대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농구공이 그 남학생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오만함에 걸맞게 상대 팀 선수들이 앞을 가로막아 숨통을 죄어오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농구공을 손에서 튕기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드리블하다 몸을 회전하여 상대를 따돌렸다. 그가 회전할 때, 허리에 걸친 교복 상의가 휘날리며 곡선을 그렸다.유월영은 “우아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이렇게 스피드와 힘 대결이 가득한 농구 경기를 보면서“우아함”을 떠올리게 하다니 놀라웠다.남학생은 길쭉한 팔다리에 신체 비율이 뛰어났다. 앞을 주시하는 눈빛은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강렬했고 누가 그를 막아도 결국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살벌한 기세가 느껴졌다.그는 공을 잡고 점프하여 골대에 슛을 던졌다.여학생들은 환호하며 소리 질렀고 모두 그 공이 들어갈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상대 팀에도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있었으며 상대방은 점프하여 공을 막아냈다. 공은 반대쪽 농구장까지 날아가며 관중석을 향해 덮쳐왔다!여학생들은 꺅 소리 지르며 피했고 유월영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의 당황한 손길에 밀려 땅에 넘어졌다.농구공이 곧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유월영은 눈을 감고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뒤통수와 허리를 누군가가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그녀를 안고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풀잎 내음과 시원한 향기가 유월영의 코끝에 닿았다. 그 나이 때 남학생들과 달리 땀 냄새 없이 깨끗한 느낌이었고 그녀는 그 향을 더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살며시 고개를 든 유월영은 한 쌍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외꺼풀에 약간의 주름이 있어 그녀를 묘하게 끌어당겼다.유월영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구르면서 잔디밭의 자동 살 수 장치에 부딪히는 바람에 물이 흩뿌려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유월영은 급히 눈을 감았다.“바보.”남자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유월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술이 끝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유월영은 자신이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를 병실로 데려간 간호사는 인적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유월영 환자분, 가족들은 어디 계신가요?”유월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간호사가 재차 물었다.“유월영 씨, 가족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이때, 약품을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한테 줘. 그거 내가 입력할게. 환자가 구급차에 실려올 때 신분증이랑 카드 나한테 줬었어. 바로 등록하고 비용 결제하면 된다고. 아마 이 환자는….”유월영은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저는 가족이 없어요.”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점점 더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깊은 절망감이 찾아왔다.수술을 마친 유월영은 홀로 병원에서 사흘간 입원해 있었다.그 동안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나흘 째 되던 날, 드디어 연재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유 비서, 무단 결근 3일이면 충분히 휴식하지 않았어? 지금 옷 입고 서덕궁으로 와.”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배경 음악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까지 같이 전해져 왔다. 유월영은 지금 입원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유 비서.”낮게 깔린 중저음 목소리가 재차 전해졌다.화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유월영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그대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서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화장을 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대충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카운터로 직행했다.“해운그룹 연 대표님이 계신 방이 어디죠?”고개를 든 어린 남직원은 눈앞의 미모의 연인을 보고 수줍게 웃으며 다급히 길을 안내했다.“연 대표님은 1번 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게
술자리가 끝나고 유월영은 고객사 직원들을 한 명씩 차에 태워 보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길가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이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팠다.립스틱은 이미 지워진지 오래고 파리한 입술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연재준의 운전기사가 다급히 다가오며 그녀에게 말했다.“유 비서님, 먼저 차에 타실래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뒷좌석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문이 열리더니 밖에 연재준과 여자애가 서 있었다. 같이 타려고 했는데 유월영이 먼저 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연재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여자는 다급히 달려가서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대표님, 제가 앞에 탈게요.”연재준은 짜증스럽게 문을 쾅 닫고 차에 오르며 말했다.“유진이 먼저 데려다줘.”유월영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유산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니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차는 한 낡은 아파트 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월영이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데 연재준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골목이 어두워서 위험해. 유 비서가 유진이 집까지 좀 데려다줘.”백유진이 흑수정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대표님. 언니도 피곤할 텐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해요. 혼자 올라갈게요.”차에서 내린 그녀는 뒷좌석 차창에 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은 월영 언니 바래다줘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 꿔요.”차갑기만 하던 연재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그래, 좋은 꿈 꿔.”유월영은 차에 오르고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유월영을 집에 데려다주는 대신, 연재준의 동해안 별장으로 차를 돌렸다. 그는 연재준의 가까운 심복 중 한 명으로써 눈빛 하나로도 연재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집 안으로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남녀의 신음소리를 덮었다.연재준에 이끌려 욕조에 던져진 유월영은 갑자기 3년 전 그와의 첫만남이 떠올랐다.그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작은 슈퍼를 운영했다. 부유하진 않지만 궁핍하지는 않았고 다섯 식구가 서로 이해하고 도우면서 오붓하게 살았다.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사기꾼의 꼬임에 들어 10억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슈퍼와 집을 팔고 집안의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지만 그래도 6억이나 부족했다.막다른 길에 다달았을 때, 사기군은 유월영을 데려다가 빚을 갚게 하겠다고 꼬드겼다.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는 비 오는 밤에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쳤다. 뒤에는 오토바이 소리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맹수에게 쫓기는 이 가여운 먹잇감은 도망치는 길에 신발까지 잃어버리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어두운 대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달리다 지친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자,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가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절망하던 순간에 차량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섰다.차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구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약간 들자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검은 우산을 들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었다.그리고 조폭들에게 자기 사람이라고 당장 꺼지라고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 그는 꿈에서 나타난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에 깊게 각인되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대략 30분이 지나 유월영은 젖은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흑설탕을 따뜻한 물에 풀어 마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재준은 아직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그녀는 유산한 사실을 그에게 알려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결국 비밀에 부치는 걸로 결론이 났다.3년 전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는 그의 곁에 남는 대가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유월영이 물었다.“뭘 해명하라는 건가요?”“유진이 왜 해고했어?”유월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한아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단가가 크게 차이 나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아 쪽 관계자는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회사 이익에 큰 손해를 끼친 신입은 바로 퇴사 처리하는 게 우리 방침이잖아요. 책임을 안 물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그 말을 들은 백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제가 원래 덜렁거리는 습관이 좀 있어요. 죄송합니다….”연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서류 가져와.”유월영은 가지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연재준은 맨 마지막 장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도로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날짜를 보니 유 비서가 무단결근 한 날짜에 벌어졌네. 유 비서가 무단결근만 안 했어도 이 계약서는 유 비서가 처리해야 할 서류였어. 신입인 백유진이 아니라.”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그래서 제가 이걸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비서실 수석 비서로써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유 비서도 잘 알 텐데?”연재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백유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유월영은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유진 씨가 입사한 날에 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없었고요. 그리고 모르겠으면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해 둬도 되는 서류였어요. 혼자 의욕에 넘쳐 처리한다고 했다가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죠. 해운 비서실은 원래 전문 학과를 나온 탑클래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었나요? 아니면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 회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면 모를까, 예술을 전공한 학생이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연재준이 물었다.“내가 꼭 유진이를 비서실에 둬야겠다면?”유월영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비서실은 지금
유월영은 월셋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이제 돌아온 거야? 오늘도 안 돌아오면 시내에 있는 병원 다 뒤져서라도 찾아가보려고 했는데!”“이제 괜찮아.”유월영의 룸메이트 조서희는 그녀의 대학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같은 월셋방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입원해 있는 동안에 그녀를 걱정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월영은 친구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감기로 입원해 있다며 병문안을 거절했다.실내화로 갈아신은 조서희는 월영의 방 문 앞에서 짐 정리를 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또 출장이야? 퇴원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연재준 그 인간 너무 직원을 부려먹는 거 아니야?”조서희는 연재준과 월영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친구를 부려먹는 악덕 상사를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유월영은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기에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나 지방 발령 났어. 안성 지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는데 언제 끝날지는 몰라. 3개월이 지나도 나 안 돌아오면 새로운 룸메이트를 찾는 게 좋을 거야. 그때 가서 미리 나한테 연락 주면 와서 남은 짐을 가져갈게.”조서희가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이렇게 갑자기?”“누구나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발령 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다른 사람이었다면 흔히 있는 일이라고 넘어갔겠지만 연재준과 월영의 사이를 아는 조서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 연재준이랑 싸웠어?”월영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없이 일어섰다. 그러다가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서희는 발 빠르게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병원 진료 기록이었다.조서희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그녀가 집을 비운 날짜와 맞물렸다.“유산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거야? 아이는 당연히 연재준 아이일 테고. 그 인간이 유산하라고 강요했어? 아니면 이제 너 필요 없으니까 멀리 꺼지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