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레스토랑 안에 있는 단독 룸을 예약했으며 제임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어제 연재준과의 대화에서 그는 분명히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회사가 그녀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제임스는 약간 그녀에게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자의적으로 요리를 주문한 것을 보고 유월영에게 무례하다고 한마디 하려던 찰나, 제임스는 종업원이 가져오는 요리가 모두 자신의 취향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가 이 레스토랑에 올 때마다 주문하는 것들이었다.제임스는 그녀가 그의 취향을 철저히 조사하고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문이 막혔다. 요리가 모두 나오자 양복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제임스의 와인 잔에 화이트 와인을 우아하게 따랐다.유월영은 제임스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임스 씨가 식사 전에 화이트 와인 반 잔 마시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준비한 이 와인이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네요.”제임스는 용의주도한 그녀의 매력에 감탄했다“수고했네. 내 이런 작은 습관까지 알아냈다니.”유월영은 이전에도 매우 뛰어난 비서였기에 고객에 대해 미리 파악하는 것은 기본적인 소양이였다. 제임스는 기분이 좋아진 듯 눈앞의 나이 어린 한국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아직도 자네 이름을 모르겠네.”“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네요.”유월영은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넸다.크림색 명함은 은은한 향기를 풍겼고, 그 위에는 한영불 삼국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민서.” 제임스는 이 이름을 처음 듣는듯해서 명함을 받아 들고 그녀 뒤에 있는 한세인을 힐끗 보며 물었다. “저 여자분은 크로노스네 사람 아닌가? 지금은 왜 당신과 함께 있는 거지? 당신은 크로노스와 어떤 관계이길래?”한세인은 유월영을 한 번 보고 대답했다. “제임스 선생님,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저희 가주의 경호원입니다. 고민서 씨는 저희 가주의
제임스가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크로노스의 약혼자이자 레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지.”“그 여자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아니...”“그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일흔이 넘은 제임스는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깜짝 놀라며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몰라 이어 말했다.“그 여자의 비서가 그렇게 말했어. 그녀도 부정하지 않았고. 게다가 이 식사가 끝나면 그녀는 크로노스와 함께 파리로 갈 거야. 이게 거짓말일 리가 있나?” 태블릿을 쥐고 있던 연재준의 손가락 관절이 점점 더 굳어지며 얼굴도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원래도 약간 창백했지만, 지금은 마치 눈사람처럼 하얗게 보였다.제임스는 그에게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다. “당신...”하지만 연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분명 이상했다. 제임스는 급히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한국에.”“지금? 내일 돌아가기로 하지 않았어?”하지만 연재준은 대답 대신 문을 쾅 닫고 나갔고, 제임스는 영문을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왜 저러지? 화난 걸까? 뭐가 저렇게 급해서?”그는 마치 아내를 잃어버리고 찾으러 가는 것 같았다....연재준은 호텔을 나와 바로 차에 올랐다.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하정은도 당황하여 한 손으로는 조수석 문을 열고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신주시로 가는 항공편을 빠르게 검색했다.하지만 비즈니스석은 이미 다 팔렸고 급하게 예약하니 이코노미석밖에 남지 않았다.그녀는 머리가 멍해지며 지금이 직업 생애 최대의 도전임을 느끼고 급히 말했다.“대표님, 오늘 신주시로 가는 항공편에는 비즈니스석은 없고 이코노미석만 남아 있습니다...내일 다시 출국하는 게 어떨까요?”내일 떠난다면 오늘 밤까지 비즈니스석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연재준은 단 한마디만 했다. “예약해.”이코노미석을 예약하라는 건가? 하지만 마르세유에서 신주시까지는 최소 16시간이 걸리고, 중간에 한 번 환승해야 하는데. 좌석도 그렇게 좁고 다리를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작아서 키 차이가 딱 맞았고 비슷한 스타일의 하늘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베레모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모자챙이 눈만 보일 정도로 낮게 눌러져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남자는 몸을 숙여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외투에 눌린 머리카락을 옷깃에서 꺼냈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하얀 손가락에 감겨 있었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전혀 거부감이 없어 보였고 마치 당연한 듯 보였다.연재준은 순간 작년 신정 때가 떠올랐다. 지성에서 그는 그녀와 손을 잡고 거리에서 산책했다. 그때는 한겨울이었고 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그녀의 스카프를 정리해 주면서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꺼내주었다.그녀는 그때 고개를 들어 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연재준은 목이 메여 그들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지만 곧바로 멈추었다.‘안 돼, 안 돼.’‘지금은 때가 아니야.’곧 그 사람들은 비행기에 탑승했고 연재준은 더 이상 앞으로 걸음을 떼지 않았다.하정은 뒤따라와서 물었다. “대표님, 누구를 찾으시는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연재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정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 사람들의 옷에 달린 가문의 베지를 알아보았다. “저건 레온 가문입니다.”그녀는 그 남자와 여자를 보고, 남자를 알아보았다.“현 대표님...아니, 그는 여기서는 레온 가문의 가주로 불리는데 그 옆에 있는 여자가 그의 약혼자인가요?”연재준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 문이 닫히는 걸 보자 그는 눈을 감고 뒤돌아 걸어갔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그는 벽을 짚고 몸을 약간 굽힌 채 다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폐가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며 그는 격렬하게 기침했다.그가 기침하자 하정은은 급히 약을 꺼내 주었다. “대표님, 우리 내일 다시 돌아가요. 비즈니스석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전세기를 부를까요?”연재준이 입을 열었다.
연재준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고 달빛은 두꺼운 구름에 가려져 한 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깨어나면서 몸의 감각도 서서히 돌아오자 연재준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살짝 아픈 복부를 감싸려다 손등에 꽂힌 수액 병을 실수로 건드렸다.병상 가까이에 있던 서지욱이 먼저 그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드디어 깨어났구나.”소파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병상으로 다가왔다.그들 중에는 하정은, 이혁재, 그리고 윤영훈과 신현우도 있었다.서지욱이 물었다. “괜찮아? 의사를 부를까?”연재준은 고개를 저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너 큰일 날 뻔했어.”서지욱은 참지 못하고 그를 나무랐다.“너도 참, 자기 몸을 너무 소홀히 하는 거 아니야? 하 비서가 말하길 마르세유에서도 기침했, 신주시로 돌아오는 10여 시간 동안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었다며,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혀?”연재준이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속눈썹 그림자가 창백한 뺨 위로 드리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침대 끝에 있던 윤영훈이 침대 높이 조절 버튼을 눌러 침대를 세워 기댈 수 있게 했다.“고마워요.”“별말씀을.”윤영훈은 궁금한 듯 물었다.“의사 말로는 연 대표님의 혈압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게 감정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라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혹시 마르세유에서 무슨 일이 있었거나 누구를 만난 건가요?”이 말에는 탐색의 의미가 있었다.이혁재는 그 말에 불쾌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윤영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별 뜻 없어요. 그저 연 대표님이 걱정해서 그런 겁니다.”“아르사 그룹과의 협상이 잘 안되어서 그래요.” 연재준이 목소리를 낮추며 약간 기침을 했다.하정은이 즉시 말을 이어받았다. “네, 그들이 해성을 신생 회사로 보고 압박을 가해서 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제시했어요. 하지만 아르사와의 협력이 해성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혁재는 연재준이 잠깐 해외로 다녀온 후 하는 말들이 다 알쏭달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연재준은 아르사와의 계약서를 서지욱에게 건네주었다.서지욱은 두어 장 넘겨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정말 방대해. 완공하려면 최소 3년이 걸릴 텐데, 이 프로젝트만 있으면 해성은 금방 크게 될 수 있어. 묘목에 비유하자면 이제 막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단계지.”연재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해성은 반드시 크게 될 거야.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을 거야.”그녀가 와서 따갈 때까지....신현우와 윤영훈은 함께 병원을 나왔다.5월의 밤바람은 시원했고 병원 앞은 24시간 내내 사람이 붐볐다.두 사람은 길가에 서서 운전사가 차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길 건너편 상점들의 네온사인이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그들 위로 떨어졌다. 한 사람은 엄숙하고 정직한 표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유롭고 경쾌한 표정이었다.신현우가 윤영훈에게 물었다. “아까 연재준에게 그렇게 물어본 건 무슨 뜻이에요?”무슨 일을 당했는지 누구를 만났냐는 질문은 너무 무례해 보였다.윤영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우리 연 대표님의 감정이 그렇게 요동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당시 유 비서가 죽었을 때도 담담하던 분이 그러니,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신현우가 말했다.“우리는 지금 협력 파트너예요. 그렇게 계속 그를 탐색하려고 하면 그가 기분 나빠할 수 있어요.”연재준은 절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르사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총가치가 60조에요. 60조. 이 숫자, 좀 재미있지 않아요?”...이혁재는 병원을 떠나 집으로 바로 갔다.그는 이승연과 같이 '진주만'에 살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최근 들어 가장 일찍 돌아온 날이었으며 평소에는 새벽 몇 시가 되어야 집에 오곤 했다.문을 열자마자 여자의 구토 소리가 들려왔다. 이혁재는
이승연은 흠칫하다 결국 단호하게 이혁재의 품에서 벗어났다.이혁재도 그녀의 몸을 너무 꽉 안지 못하고 그녀가 거부하자 순순히 풀어주었다.이승연은 다른 소파로 가서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매일 이렇게 먹고도 아이를 5개월 동안 잘 키우고 있어. 매번 검진 결과도 매우 건강해.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네가 훈계할 필요는 없어.”이혁재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그녀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얼굴은 깨끗했으며 백옥같은 피부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하느님이 이승연이라는 여자를 만들 때 지능을 한 통 가득 부었어. 이제 감성을 한 통 부으려고 보니 어머, 이미 용기가 가득 찼네? 그래서 아쉽지만 감성은 넣지 못했지.”“결과적으로 이승연이라는 여자는 감성이 부족하게 태어난 거야. 내가 당신을 '훈계'한다고? 나는 분명히 당신을 걱정하는 거라고.”이승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5개월이나 지나서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지만 너의 관심은 필요하지 않아.”“...”‘변한 게 없다는 방금 한 말은 취소야.’ 임신 5개월 동안 몸매는 변하지 않았지만 성격은 꽤 많이 변했다...원래도 성격이 만만치 않았지만.이승연은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지 않고 거실로 갔다.이혁재도 따라 나갔다. 이승연은 그릇에 담긴 면을 들고 주방으로 가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려고 했다이혁재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한 끼도 내가 시킨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그래? 우리는 부부야, 그렇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어?” 그는 다시 요리를 주문해서 가져다주겠다고 말했었다.“나는 너와 이혼하지 않기로 약속했지, 다른 약속은 하지 않았어. 우리가 선을 긋지 않으면 더 복잡해질 거야...읍!”이승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뒤에서 다가와 그녀를 냉장고에 눌러 붙이고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그의 키스는 매우 능숙했고 특히 일부러 유
이승연은 그를 밀어냈다. 성격이 강한 사람은 구속받는 것을 싫어했다. 하필이면 이혁재 역시 알파(Alpha)였으며 성격이 강한 두 사람은 ‘상호 배척’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븐 장갑을 끼고 전자레인지에서 면을 꺼내 거실로 돌아와 먹기 시작했다. 이혁재는 자신만의 정신 승리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승연은 자신이 가져오는 음식을 먹기 싫어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기다릴 수 없어서 눈앞에 있는 걸 먹는 거라고 자아 위로했다. 그리고는 턱을 긁적이며 냉장고를 열어 두리번거리다가 계란 두 개를 꺼냈다. 이승연은 그가 부엌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은 채 국수를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서류를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혁재는 그녀의 국수 그릇에 반숙 계란 후라이 두 개를 올려놓았다.“핑크 솔트로 간을 했어. 맛있을 거야.”맛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란은 잘 익었다. 흰자는 타지 않았고 노른자는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이승연이 포크로 살짝 찌르자 반숙된 노른자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혁재를 한 번 쳐다보았다.“너 요리도 할 줄 알아?”이혁재는 무심코 쿠션을 집어 들고 웃으며 말했다.“잊었어? 나 옛날에 아버지한테 쫓겨나서 당신 집에서 얹혀살았잖아. 당신이 집에 돌아와서 나에게 밥 해주는 걸 잊어버리면 나는 혼자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나마 집에 얼마 없던 식량도 내가 다 먹어버렸잖아.”이 말은 이승연의 거의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혁재가 17, 18세였을 때 그는 한창 반항하고 있었다. 한 번은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가출해 그녀를 찾아왔다. 그때의 이혁재는 그녀에게 나중에 자신이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연은 그를 받아주었고 그는 그녀 집에서 한 달 넘게 지냈다. 그 당시 그녀는 대학생이어서 학업이 바빠 그를 돌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기억이 나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사다 주었고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갔다. 이혁재도 10대
그는 아주 부드럽지만 욕망이 담긴 키스를 했으며 입술에서 턱 그리고 목으로 내려갔다.이승연은 슬립 드레스와 얇은 시폰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이혁재는 입으로 그녀의 슬립 드레스의 끈을 물고 아래로 당겼다. 그 모습은 본 이승연은 그가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작은 강아지처럼 보였다.생각해 보면 그들은 거의 반년 동안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싸워서 그런 것도 있고 그녀가 임신 초기라 불편했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 두 사람 모두 감정이 격해져 벗을 옷은 벗었고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그 순간, 초인종이 갑자기 울려댔다. 이혁재는 짜증 난 얼굴로 무시하고 아이처럼 그녀의 몸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계속하려 했다. 이승연은 그에 비해 도저히 초인종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할 수 없어 아마도 배달이 온 것 같다고 하면서 그를 밀어냈다.“네 배달이야.”이혁재는 그녀의 가슴에서 머리를 들고 욕망으로 달궈진 눈으로 그녀를 보면 말했다.“그럼 밥 먹고 나서 다시 할 거야?”“...”이승연은 더 이상 대꾸하기 싫어서 그를 밀어내고 옷을 정리하며 문을 열러 갔다. 이혁재는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서 앉히고 자신이 문 열러 갔다. 문을 여니 확실히 배달이었다. 그는 음식을 받고 방해받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 배달원에게 팁을 주었다.이혁재는 이승연이 뭘 싫어하는지 몰랐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자발적으로 식탁을 정리했고 이승연은 방으로 가서 양치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며 10시가 넘었다. 그녀는 임신한 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혁재도 그걸 알고 늦게 들어와도 항상 게스트룸에서 잤다. 이승연은 그런 그의 모습을 그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오늘 밤에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불을 끄고 잠들었다.하지만 이혁재의 두 번의 키스와 ‘우리의 첫날밤’이라는 말이 영향을 미쳤는지, 이승연은 꿈에서 이혁재와의 첫 경험을 떠올렸다. 그날 그들은 혼인신고를 했고 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