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다.계획대로라면 이영화는 3개월 전 이미 기증자의 심장을 이식받고 무탈하고 건강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른다.3개월 전 기증을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맬게 아니라 시골 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 우려마시며 꿀이냐 설탕이냐를 여유롭게 논하고 있었겠지? 현 상황에 어쩔수 없이 후회가 몰려오는 유월영이다.숨을 크게 들이쉰다. 하지만 호흡기를 뚫고 들어오는건 비릿한 피냄새뿐.몸을 돌린 유월영은 곧장 내려가 연재준을 찾아나선다.......병원 주차장.내렸던 곳으로 가보니 연재준의 차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고 하정은이 우산을 들고 서있는게 보인다. 분명 그들은 유월영을 기다리고 있는게 틀림없다. 아무리 아득바득 애를 써도 당최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수 없는 듯한 느낌. 상위 10%의 의료진이 어쩌고 할 때부터 이미 자신의 그의 손바닥 안이라고 확신했었으니 말이다.교도관에게 잡혀간 아빠와 ICU에서 사경을 헤매는 엄마의 모습이 밀물처럼 몰려와 머릿속을 잠식시킨다. 유월영은 곧바로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음박질 치기 시작했다.하정은이 다급히 문을 여니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는 연재준이 보인다.달려오는 유월영을 본 연재준은 지난 3년동안 늘 사랑스럽고 진심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봐줬던 그녀를 회상한다. 애석하게도 퇴사한 뒤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별 일 아니다, 앞으로 기회야 많으니까.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휴대폰 너머에 대고 “알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월영은 차에 타지도 않으면서 우산을 씌워주려는 하정은마저 밀쳐낸다. 온 몸은 이미 흠뻑 젖어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런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것 같다. 하늘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지 오늘따라 구멍이라도 뚫린듯 장대비를 쏟아부었고 세찬 빗물은 떡하니 서있는 그녀의 몸에서 연신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연재준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물론 입술조차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하다.연재준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할 말 있으면 해.
짧은 침묵이 지나고 이내 유월영이 입을 연다.“---그래요.”연재준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본다.유월영이 입꼬리를 들썩이더니 조금 쉰 소리로 말한다.“사장님, 그렇게 놀란척 할 필요 없으시잖아요?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던거 아니에요?”그제야 연재준은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다 예상하고 있었지.”유월영은 한숨을 푹 쉬더니 이윽고 물었다.“의료팀은 언제 건너올수 있는거예요? 엄마 길어봐야 3일밖에 못 버티신다는데.”“약속했으니까 할 수 있어.”연재준은 이마를 지그시 짚은 채 묻는다.“어머니 오늘 수술 한 번 더 받으실수 있나?”“그게 무슨 말이에요?”“감당하실수만 있으면 오늘 바로 수술할수도 있어.”흠칫 놀란 유월영은 뭔가 이상한지 되묻는다.“의료팀은 미국에서 온다면서요?”비에 쫄딱 젖은 모습이 거슬렸는지 연재준은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유월영의 손목을 끌어당겨 곁에 앉힌다.“지금 모든건 다 내 예상대로 흘러가는거 안다며. 내가 미리 의료팀 데려온게 그렇게 이상해? 의료진, 기계는 벌써 3일 전에 신주시에 와있었다고. 어머니만 견뎌낼수 있으시면 언제든지 수술할수 있어.”차가운 빗물을 맞은 유월영은 히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맞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다.“......수술이 가능한지는 저도 잘 몰라요. 주치의 선생님한테 여쭤봐야 돼요.”연재준은 밖에 있던 하정은을 쳐다본다.“가서 잘 말씀드려.”하정은은 분부를 받고는 차 문을 닫았다.그 모습을 본 루장월이 몸을 틀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연재준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동해안으로 가.”운전기사는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거는데.전엔 잠자리를 가지고 싶을때만 그녀를 동해안으로 데리고 갔었다.유월영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화를 꾹꾹 참는다.“돌아오겠다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그런 짓을 하려는거예요? 엄마 ICU에 누워계시는데 도대체가 양심이라고는 없는거예요?”잠시 주춤한 연재준은 이윽고 웃기다는 듯 말한다.“과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네가 착각에
연재준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그러자 이혁재가 차갑게 웃어보이며 말한다.“사무실 입구에 가드 두 명 세워놓고는 못 들어가게 막는거 있지! 남편을 무슨 도둑놈 취급하는것도 아니고. 재산 협의서에 사인 안 했다고 이렇게까지 할 노릇이야? 환상 속에 갇혀 사는거라고 생각 안 해? 애초에 그 거액의 유산 아니었으면 내가 왜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했겠냐고.”연재준이 이윽고 묻는다.“고작 그 돈이 너희 집에 그렇게 막대한 돈도 아니잖아.”이혁재가 웃으며 말한다.“그건 결코 고작이라고 할수 있는 액수가 아니야.”하긴.부모님이 갑작스런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신 뒤, 막대한 유산이 전부 이승연에게 쥐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더우기 변호사인 그녀의 재산을 나눠 가지려는건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유독 남편이란 명목하에야만 나눠가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이혁재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턱 기대더니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돈이 화를 불러 일으키는 법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지. 보기엔 똑똑해 보이는데 사실......휴, 능력 있는 여자들은 이렇게 고분고분 말을 안 듣더라.”“재준아, 너도 이 말엔 동의하지?”연재준이 눈썹을 씰룩거린다.“누가 동의한대?”“아 그러셔? 너 그 유 비서라는 사람 내가 듣기론 SK그룹 입사제안까지 받았다던데 진짜 가버리는거면 3년이나 길들이지 못한거고 그건 곧 말을 안 듣는다는 거지.”“억지로 이승연이 네거라고 우길 자격도 없어 넌. 그리고 유월영은 너무 말을 잘 들어서 문제지, SK그룹인지 뭔지에 갈 일도 없고.”연재준이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한다.“유 비서라고 불리는건 내 비서니까 그런거겠지? 알아들어?”이미 반쯤 넘게 취한 이혁재는 냅다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잘 못 알아 듣겠는데.”연재준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여보세요?”묵묵부답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누구세요?”그제야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사장님......”연재준의 얼굴이 사악 굳어버린
연재준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호흡마다엔 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가 진동했다.유월영이 고개를 돌려 피한다.“......술 마셨어요?”미간이 찌푸려진다. 병원 중환자실인데다 밤이라 적막이 흐르는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도 저도 모르게 낮아진다.“여기서 뭐하세요?”“내가 좀 보상이 필요해서 말이야.”“무슨 보......읍!”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재준이 냅다 입을 맞춰버린다.전개도 없고 예고도 없이 그렇게 그는 처음부터 딥하게 입을 맞췄다.취기를 동반한 입맞춤은 강한 소유욕에 불타있었고 입술부터 시작해 치아를 지나 어느새 혀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두 손은 몸 뒤에 묶인 채 뒤통수는 벽에 단단히 붙어버리고 만다. 이런 입맞춤은 또 처음이다.갑작스런 입맞춤에 호흡이 가빠지던 그녀는 불편한 듯 신음소리를 냈고 그제야 연재준도 동작을 멈추고 입을 뗐다.“......미쳤어? 여기 병원이야!”연재준은 촉촉하면서도 빨개진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스윽 어루만지더니 쉰소리로 말했다.“지금 여긴 밤 열시 반을 지나는 인적 없는 중환자실이지.”넋이 나간 유월영의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돋는다.“뭘 어쩌려고?”“너.”“......”잠시 멍하니 서있던 유월영은 이내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씩씩거렸다.“미친 소리 작작해!”연재준이 입꼬리를 스윽 올린다.제법 술기운이 올라온 그는 평소 딱딱하고 차가운 모습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유해보였다. 그가 목젖을 위아래로 연신 움직이며 말한다.“움직이지 마, 난 그냥 입맞춤이 하고 싶을 뿐이니까.”유월영이 고개를 들어 까아만 그의 눈동자와 아이컨택을 한다.남자들은 별로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상대를 안달나게 만든다더니.그 말이 제격이다.지금 이 순간 연재준의 눈빛은 따뜻하고도 빠져들것 같은것이 마치 그녀가 세상 전부인 사람처럼 보였다.당연히 이런 거품 잔뜩 낀 거짓에 속아 넘어갈 유월영이 아니었지만 말이다.축축하게 습기 찬 호흡은 온 몸에서 풍겨오는 달콤함과 어우러져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또 한 번
병원을 빠져나온 연재준은 차에 올라타 말했다.“동해안으로 가.”기사가 분부를 듣고 차에 시동을 건다.백미러로 바라본 연재준의 입가엔 전엔 본 적 없는 미소가 띄어져 있다. 보아하니 유 비서를 만나러 갔던 30분동안 꽤나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기사가 간 크게 입을 연다.“사장님, 유 비서님 곧 다시 복귀하실건가 봐요?”“다른 뜻은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출근길에 업무 보고하던 비서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신 분인것 같아서요. 비서님 계시면 사장님도 업무 부담 많이 줄어드시잖아요.”평소의 연재준이라면 기사와 한가히 수다 떠는 법이 없었겠지만 오늘은 제법 기분이 좋은지 입을 열었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 비서는 내가 키운건데.”완벽히 그의 취향과 입맛에 맞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비서였다.그러니 어찌 다른 이들이 성에 차겠는가?저 멀리 동해안 3층 저택이 보인다. 문어구에 누군가 서 있는것 같다.여자다.그녀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빗방울 때문인지 결국엔 비에 젖어있었다. 자동차 라이트가 비춰졌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게 보였다. 기사가 주춤하더니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사장님.....백 아가씨세요.”연재준이 눈을 천천히 뜬다.백유진도 그들을 보고는 재빨리 빗속으로 달려들었다. 놀란 기사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는다.뒷좌석으로 달려간 그녀는 차창을 두들기며 소리친다.“연 사장님! 사장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가 다 설명드릴게요!”연재준이 차창을 천천히 내린다.장장 몇개월이 지나 드디어 그의 얼굴을 마주본 백유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연 사장님!”연재준은 온 몸이 홀딱 젖은 그녀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묻는다.“나 신주 돌아온건 어떻게 안 거지?”어제 금방 돌아와 오늘 유월영 때문에 회사에도 안 갔는데 소식 한 번 빠르다.그의 말 뜻을 눈치챈 백유진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저, 전 사장님 미행한게 아니에요. 사장님 측근들 매수할 엄두는 더욱 못 내고요.
그 말에 유월영이 카톡을 켠다.조서희가 보낸건 한 장의 찌라시 전단지였다.이 곳은 상권과 금융권 가십거리들만을 모아 터뜨리는 정보지같은 곳이었다.이번 찌라시는 연재준이 오늘 참석한 이벤트 자리에 데려온 파트너에 관한 것이었다. 연재준이 유난히 그녀를 챙겨주며 돈독한 사이를 뽐내더니 심지어 옷 매무새까지 섬세하게 정리해줬다는 거다.그간 세간에 보여진 연재준이 이미지라고 하면 차갑기 그지없고 무뚝뚝한것이 다였는데 갑자기 바뀐 모습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다들 여자에 대해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는 기사다.누구는 연재준의 비서다, 또 누구는 연재준의 여자 친구라고 말했다.이 점에 대해 연재준 본인은 물론 해운 그룹마저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허나 유월영과 조서희는 앞구르기를 하면서도 그녀가 누군지를 단번에 알아챌수 있었다.조서희가 씩씩대며 말한다.“저 년은 에르메스 한정판을 입혀놔도 그 시꺼먼 속내가 안 가려지네! 쟤한테 입힐거면 차라리 공장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편이 훨씬 낫겠다!”유월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웹 사이트를 꺼버렸다.결국엔 화해하고 재결합 했나보다.앞서 했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서희 말이 백번 맞았다. 나쁜 놈인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줄은 몰랐달까.저기 어딘가에 있는 연재준 애를 가진 여자를 두고 또 백유진과 재결합이라니. 거기다 자신더러 돌아오라면서 또 자고싶다나 뭐라나......참 나.전화를 끊은 유월영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주스를 사 병원으로 돌아간다.오늘도 여전히 비 내리는 하루다. 하지만 어제같은 장대비는 아니었고 우산이 없었던 유월영은 건물 지붕 아래로 걸어가고 있었다.계단 내리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유월영은 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이윽고 나무 아래 서있는 연재준의 모습이 보인다.깔끔하게 다림질 된 블랙 슈트를 빼입은 그는 진한 갈색 코트를 입고 한 손은 주머니에, 다른 한 손은 우산을 든 채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묵직하게
“진 아저씨 식당 여기잖아.”말은 그렇게 했지만 왜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걸까?유월영이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본다.“게장 기가 막히게 하시는 그 진 아저씨요?”“그래.”“......”유월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한다.“근데 왜 여기로 가? 아무리 지구가 둥글다 한들 한바퀴 돌면 다시 돌아올수 있는줄 아나 봐?”이건 분명 불평을 털어놓는거다. 연재준이 표정이 어두워진다.진흙바닥을 한참이나 걸었는데 그것마저 틀린 길이라니, 화가 안 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아저씨네 식당은 이 길이 아니잖아. 아까 말했어야지, 내가 데리고 가게.”“여기 아니야?”연재준이 흠칫 놀라는 눈치다.그걸 말이라고.왔던 진흙탕 길을 또다시 돌아가는 그들이다. 유월영은 귀차니즘이 제대로 도졌는지 물웅덩이 하나를 지나치며 “부주의로” 돌멩이를 탁 차버린다.차인 돌멩이는 흙탕물을 여기저기 튕기더니 연재준의 슈트 밑단을 더럽혔다. “......”양말도 젖은 느낌이 들더니 이내 스며든 흙탕물이 그의 발목을 적신다. 연재준의 미간이 배배 꼬이더니 단번에 유월영의 목덜미를 홱 잡아끈다.“일부러 그런거야?”“뭐가?”연재준은 실눈을 뜨더니 정말 영문을 모르는것 같은 유월영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손을 놓으며 투덜댄다.“똑바로 걸어.”“자기가 길 잘못 들어서놓고 왜 성질이야......전에 고객 모시고 와 봤잖아?”입맛 까다로운 그를 만족시킬만한 음식점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진 아저씨 식당이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자주 다녀갔을텐데 아직도 길을 모른다니.“평소엔 차로 다녀서 몰랐어.”“차는 길가까지 데려다주고 내려서 걸어가야 되는거잖아. 아저씨네 식당 가는 길은 아스팔트 길인데 진흙바닥 걸으면서도 감이 안 잡혔나 보지?”말문이 막혀버린 연재준이다.유월영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길치면 길치지, 뭔 변명이 많아.”“......”드디어 진흙길을 벗어나자 연재준은 또다시 그녀를 우산 안으로 끌어오며 말했다.“난 가치있는 것들만 기억해. 이런건
유월영이 무뚝뚝하게 내뱉는다.“사장님, 저희 엄마 내일 아침에 수술하시는데요.”“그래서 오늘은 밤을 새시겠다?”연재준이 국자로 국을 퍼담는다.“병원에서도 잘 수 있거든요.”유월영이 뽀얗게 우러난 사골 국물을 바라보며 조금은 나긋해진 말투로 말한다.“지금은 엄마 걱정 뿐이라서 최대한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요. 내일 돼야 수술하신다는데 엄마가......내일까지 버티지 못할까 봐 무섭거든요. 그래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기 싫고요.”연재준이 눈을 푹 드리우고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져 기분을 읽어낼수는 없었다.“내일까지 버텨서 수술하시는건 시작일 뿐이고 수술이 무사히 끝나는게 첫번째 관문이지.”“알아요, 많이들 수술 뒤 24시간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던데 치사율 10%도 대부분 그때를 말하는거래요.”유월영이 속상해하며 말한다.“그 24시간을 견뎌내야만 안정기에 접어든다고 하고요.”연재준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린다.“알면 됐어. 지금은 자기를 지키는게 더 중요해.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그러면서 그가 국그릇을 그녀의 앞에 놓는다.“자, 혈기 보충하자.”그녀를 위해 떠줬던거라니.유월영은 잠깐 굳어버린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이렇게 누구를 챙겨줄 사람이 아닌데, 보기 드문 광경이다.그는 어느새 벌써 국그릇을 다시 채워주고 있다. 유월영이 입을 오므리며 말한다.“전 뭘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엄마 곁을 지킬수 밖에.”연재준이 차가운 말투로 말한다.“알아, 오늘 밤 동해안 가기 싫다고 하는 뜻인거.”그가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쳐다본다. 무쌍에 기다랗게 뻗은 눈매는 매스칼마냥 날카롭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다.“내가 동해안 가자고 하는건 너더러 잠이라도 푹 자게 하려는거야. 내가 뭘 할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뭘 어떻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가 뭘 하려는게 아닌가.그게 아니면? 고작 밥이나 먹이려고 그녀를 찾아왔다?그런 사람이었나?유월영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꾼다.“맞다, 집도의 선생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