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영은 사진첩을 열심히 뒤졌지만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연재준의 카톡을 클릭하고 자신의 연락처를 찾았다.하지만 대화창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다.설마 처음부터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유월영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속으면 안 돼. 수 틀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야. 어쩌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은밀히 보관했을 수도 있어.’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벽에 패대기쳤다.탁!욕실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연재준은 바닥에 두 동강이 난 핸드폰과 유월영을 번갈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내가 미련하게 핸드폰에 사진을 숨겼겠어? 클라우드 저장공간도 있는데?”유월영은 분노를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잖아요. 아직도 뭐가 부족한데요?”연재준은 욕실가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느긋하게 말했다.“부족하지 않아. 우리 유 비서가 해주는 서비스는 항상 날 즐겁게 해줬으니까.”그 말이 유월영에게는 굉장히 굴욕적으로 들렸다.“사진 삭제해요.”연재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이 즐거움을 더 오래 가져가고 싶은데 내가 왜 굳이 그래야 할까?”설마 그 사진으로 협박해서 잠자리를 가지겠다는 걸까?유월영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정말 고소할 수도 있어요.”연재준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소파에 앉아 하정은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유월영이 말했다.“제가 입을 옷도 좀 부탁한다고 해줘요.”하정은은 유월영이 비서실에서 일할 때 사이가 꽤 돈독했던 동료였기에 그녀와 연재준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물론 눈치 빠른 하정은은 한 번도 그들의 앞에서 티를 낸 적 없었다. 유월영은 그녀의 그런 점이 매우 고마웠다.그렇게 조심스럽게 지켜온 비밀인데 연재준이 수 틀리면 당장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한참이 지나 호텔에 도착한 하정은은 옷만 전해주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
언니가 말이 없자 유월영은 다급히 물었다.“언니? 듣고 있어?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조급한 목소리에 언니가 말했다.“괜찮아. 어제 엄마가 너 보고 싶다고 전화하셨는데 네가 안 받아서…. 모자 완성됐어. 또 뭐 필요하냐고 엄마가 물으셔.”그제야 굳었던 유월영의 표정이 풀렸다.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으면 한번만 울리고 끊었을 리 없다며 스스로 위안했다.“난 괜찮으니까 엄마 무리하지 말라고 해. 뜨개질도 정력이 필요하잖아.”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엄마는 깨셨어? 엄마 좀 바꿔줘.”“엄마 지금 수액 맞는 중이라 불편해. 수액 다 맞고 연락하신대.”“그래.”그 대화를 끝으로 유월영은 전화를 끊었다.언니는 괜찮다고 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어제 그런 일을 겪어서 놀란 탓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면서 신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월영 씨, 괜찮은 거죠?”유월영은 담담히 대답했다.“괜찮아요.”“어제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요. 카톡으로 문자하니까 나를 차단했더라고요. 어제 그렇게 두고 가서 화난 줄 알았어요.”유월영은 그 말을 듣고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연아 때문에 기분이 안 풀린 거라면 내가 연아 많이 혼냈어요. 연아도 이제 잘못을 알았으니 오늘 직접 사과한대요.”유월영은 연재준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장난질 쳤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어제 술이 좀 취했는데 핸드폰 하다가 잘못 눌렸나 봐요. 이따가 다시 추가할게요.”“지금 어디예요? 아까 방으로 찾아갔는데 없더라고요.”신연우가 물었다.“네. 너무 취해서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 잤어요.”신연우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그럼 언제 돌아와요? 내가 데리러 갈까요?”이때,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손이 유월영의 허리를 감쌌다.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연
유월영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헀다.“어젯밤에 수림에서 땅을 파던 2인조를 만났어요. 저도 하마터면 납치를 당할 뻔했고요.”형사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한 뒤, 정색한 표정으로 녹음기를 작동했다.유월영은 자신과 연재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제외한 모든 과정을 형사들에게 진술했다.그녀는 형사들을 통해 며칠 전에 2인조를 잡으러 나갔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그들은 수배범이었다.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형사에게 말했다.“놈들은 저한테 약물까지 사용했어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지금 피검사 하면 약성분을 검출할 수 있나요?”그 말을 들은 형사는 그녀를 혈액검사과로 데려가서 채혈을 진행했다.“클럽에 CCTV도 있을 거예요.”형사는 그녀에게 그 클럽이 주영문의 소유이며 지금 가도 그쪽에서 CCTV가 망가졌다는 답변을 내놓을 거라는 사실을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대신 유월영의 협조에 감사하며 경찰서 문앞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유월영 씨, 최근에는 혼자 외출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유월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를 나와 보니 연재준의 차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쪽으로 다가갔다.차창이 내려지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신고하러 간 게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어제 납치 당할 뻔한 일 때문에 온 거니까요.”만약 어젯밤 사건이 살인 사건의 연장선이라면 그녀는 혹시나 자신이 유용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온 것이었다.“나를 경찰에 신고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납치 당할 뻔한 널 구해준 거?”연재준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유월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왜 따라왔어요?”“어제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 차나 타고 다니는 걸 봐서 한심해서 따라왔어. 그 택시가 놈들이 위장한 차면 어떡할래?”유월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대표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지금부터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겠네요? 차만 봐도 납치범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식당에
“그렇게 급하면 신 교수 혼자 돌아가. 유 조교는 여기 남고.”신연우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여쭤봐도 됩니까?”“매화산 기지의 데이터 수집이 완료되지 않았잖아. 연구팀에 한 명은 남아야지. 신 교수는 신주에 할 일이 많으니까 돌아가고 조교만 남으라는데 내 말이 그렇게 어려웠나?”두 남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기싸움을 벌였다.같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뒤로 그들이 일적으로 마찰을 빚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연재준이 일부러 신연우를 신주 실험실로 돌려보낸 것도 한몫 했다.둘이 부딪힐 일이 없으니 조용했는데 이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그런 생각이라면 조 조교가 남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제외하면 이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유월영 씨는 조교가 아니라 제 개인비서입니다. 저랑 같이 돌아가서 제가 하는 업무를 보좌해야 해요.”신연우도 날을 세워서 말했다.연재준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허리를 기대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이번에 유월영 씨와 같이 일하면서 느낀 건데 유월영 씨가 남는 게 맞아. 유월영 씨, 혼자 남아서 데이터 기록하는데 문제없겠지?”유월영과 연재준은 멀리 떨어져 앉았다.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자신의 손을 들어줄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저 자신감의 근거는 아마 그 사진이겠지.’유월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연 대표님 말씀대로라면 매화산 데이터 작업이 끝나면 돌아가도 된다는 말씀인가요?”“당연하지. 설마 여기 계속 남아서 우리랑 같이 일하고 싶어?”유월영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신 교수님, 제가 비록 조 조교님보다는 전문성이 떨어지지만 데이터 수집은 줄곧 제가 했던 일이니 제가 남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신연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유월영을 바라봤고 유월영은 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나도 그리 급하게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신연우가 말했다.“우린 팀이고 같이 움직
유월영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저항했다.“대표님이 뻔뻔한 거죠.”연재준은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겉으로는 그렇게 챙겨주는 척하면서 사실 상 제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잖아. 그건 고상한 게 아니라 무능한 자의 핑계야. 그런 것도 몰라? 너 해운 나가고 갑자기 동화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왔어?”유월영은 그가 회의에서 신연우가 자신의 의견에 대립한 것을 두고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해운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있죠. 진짜 남자는 어떤 사람이라는 거. 예전에는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요.”‘그러니까 지금 내가 진짜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유월영은 당당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신 교수님은 무능해서 못한 게 아니라 파트너의 의사를 존중한 거예요. 협박밖에 모르는 누구랑은 달리 정직한 사람이거든요.”연재준이 기가 차다는 듯이 물었다.“내가 너 협박했어? 언제? 어떻게 협박했는데?”유월영은 차갑게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협박이 아니라면 돌아가게 해주세요.”“빨리 돌아가서 신연우랑 데이트나 즐기고 싶어?”연재준은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었다.“SK가 널 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한 조건은 네가 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거야. 해운에서 요구할 때마다 너희 연구팀은 상응한 데이터를 제출할 의무가 있어. 너희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고. 이거 최소 2년짜리 프로젝트인데 영안에서 2년 정도 살아보는 건 어때?”유월영은 분노가 치밀었다.“대표님은 협박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요?”“네 남자친구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하기 좋은 기회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신연우가 여전히 네 곁에 남겠다고 할지 궁금하지 않아?”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항상 마음 가는 대로 모든 걸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진행되지 않는 모든 일을 증오했다.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
연재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유월영이 말했다.“처음에 저한테 돌아오라고 했던 게 아마 제가 SK를 도와서 계약에서 우위를 점했을 때였죠? 그때 저는 SK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요. 그냥 제가 대표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게 싫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거예요?”그녀는 줄곧 그의 신변에서 새장 속의 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새가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가는 게 불편했던 걸까?안 좋게 말하면 연재준은 그녀의 행복보다는 그냥 그녀가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를 원했다.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쥐었다.마치 애완견을 대하는 듯한 그의 몸짓은 유월영에게 치욕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피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네가 아무리 높게 날아도 나보다 높게 올라갈 수 있어? 네가 어디를 가든 난 네가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어. 내가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잊었어?”유월영은 이런 의미 없는 입씨름을 끝내고 싶었다.“대체 이유가 뭐예요?”연재준은 대답 대신 입술을 부딪혀왔다.참다못한 유월영이 소리쳤다.“대표님은 뉴스도 안 봐요? 대다수의 유명인들은 사무실이나 회의실에서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가 사진이 유포돼서 이미지가 추락해요! 여기 CCTV도 다 있다고요!”“우리 유 비서는 상상력도 풍부하군.”그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하는 악취미는 없었다.“약은 챙겨먹었어?”유월영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피임약?’너무 오랜만이라 꼭 챙겨야 하는 절차인데도 잊고 있었다. 연재준이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덜렁대니까 자기만 다치지.”자연유산을 가리키는 듯한 말에 유월영은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허리를 숙여서 책상 밑을 통해 빠져나갔다.그러고는 떨어진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연재준은 더 이상 그녀를 잡지 않고 떠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난 내 사람 몸에 다른 놈의 흔
유월영은 그제야 윤미숙의 옆에 임신한 여자가 같이 걷고 있는 모습을 주의해서 보았다.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배가 나온 걸 봐서 6개월 이상은 되어 보였다.[휴대폰이 흔들려서 제대로 안 보일지 모르겠는데 둘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아주 가까워 보였어. 설마 연재준이 밖에서 사생아라도 만든 건 아니겠지?]유월영은 한참을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전에 백화점 육아용품 코너에서 윤미숙 여자와 마주쳤던 것을 떠올렸다. 나중에 산부인과에서도 만난 적 있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었다.유월영은 윤미숙이 임신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임산부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누굴까?윤미숙이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여자라면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설마 정말 연재준 옛 애인 중에 누가 임신했나?아니면 연 회장님?전자에 비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연재준과 윤미숙의 사이는 거의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연재준이 사생아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윤미숙에게 부탁할 리는 없었다.만약 후자라면 정실부인이 남편이 바람나서 임신한 여자를 돌보는 격이었다.그것도 현실과 괴리감이 있었다.유월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윤미숙 여사님 맞아. 옆에 여자는 나도 모르는 얼굴이야. 윤 여사님 지인이겠지.]조서희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괜찮아. 여긴 시골 마을이라 한집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야. 나중에 엄마한테 알아보라고 하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알아내면 소식 전해줄게.]유월영은 친구가 그래도 씩씩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그래. 난 지금 영안으로 출장 중이야. 지역 특산물 좀 사서 보낼 거니까 주소나 보내줘.]조서희는 기뻐서 춤 추는 이모티콘과 함께 주소를 보내왔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며 고민에 잠겼다. 뭔가 엄청난 일을 알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해운 같은 대기업 가문에서 사생아가 등장했다면 곧 승계권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것
서지욱은 신속히 약을 손수건으로 감싸는 신연우를 바라보며 그가 교수님이 아니고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연재준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차에 오른 서지욱이 야릇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너 일부러 신 교수 도발한 거지?”“내가?”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연재준은 확실히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보였다.“아니야? 넌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거 알면서 그런 걸 유 비서한테 전해주라고 하면 어떡해.”서지욱은 친구지만 참 나쁜 인간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유 비서가 그렇게 미워?”연재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서지욱이 말했다.“신연우 씨가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일반 친구나 썸을 타는 사이였어도 아까 네 처사는 너무했어. 유 비서 입장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잖아. 솔직히 원수 사이가 아니고는 일부러 그럴 이유는 없었어.”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미운 건 아니야.”솔직히 미운 감정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다.유월영은 내일 업무를 준비하며 배달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었더니 밖에 신연우가 서 있었다.“교수님이 어쩐 일이세요?”베이지톤의 니트는 그의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연아 약 가지러 내려갔는데 하필 월영 씨도 배달을 시켰더라고요. 그래서 내려갔던 김에 가져왔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유월영은 가슴이 철렁했다.신연우는 봉다리를 그녀에게 건넸다. 유월영은 포장이 그대로인 것을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하지만 그녀의 눈에 찢어진 봉다리 입구가 들어왔다.그 순간 그녀는 신연우가 내용물을 보았다고 확신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저녁은 먹었어요?”“네. 룸 서비스 시켰어요.”“그래요. 다른 일 없으면 일찍 쉬어요. 오늘 일정 앞당긴다고 무리했으니 피곤했을 거잖아요.”유월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교수님도 쉬세요.”신연우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문을 닫은 유
의사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의학적으로 35세 이상의 임산부를 고령 산모로 정의하는 이유는 나이가 증가할수록 염색체 이상, 임신성 당뇨병, 고혈압 같은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산부가 이런 문제를 겪는 건 아니며 사람마다 다릅니다.”이혁재가 물었다.“문제가 없을 확률이 높은가요?”“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즉, 그들이 아이를 원한다면 가질 수는 있지만 이승연의 건강이 크게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병원을 나서며 이혁재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우리, 아이 가지지 말자.”이승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의사가 아직 가능하다고 했잖아. 좋은 소식 아니야?”“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야! 난 본 적도 없는 아이 때문에 누나 몸이 상하는 걸 절대 두고 볼 수 없어!”이혁재의 단호한 태도는 1%의 타협도 없었다. 두 사람은 3분간 대치하다 결국 이승연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이혁재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 거의 모든 일에서 아내에게 맞춰주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결국 그는 부부 생활을 단절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마치 순결을 지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이승연은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며 도발했지만 이혁재는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경고했다.“그만해! 더 장난치면 난 손님방에서 잘 거야.”이승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잠옷 끈이 흘러내려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손님방에 간다고? 정말?”이혁재는 다시 반응해 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박차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끼얹었다.다음 날, 이승연은 그에게 쇼핑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열어본 이혁재는 남성용 순결 벨트를 보고 기가 막혔다.“...”그는 그것을 살지 말지 10초 동안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결국 쇼핑몰 창을 닫고 억울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순수한’ 한 달을 보냈다.이혁재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기
“...그런 헛소리를 믿어?”“당연히 안 믿지. 중요한 건 그 집에 CCTV가 있다는 거야. 영상 속에서 그의 행동이 정말 이상했거든. 정신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말이야. 만약 정신병으로 판정된다면 내 의뢰인은 원하는 판결을 받기 어려워질 거야. 귀찮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마.”이승연이 사건 얘기를 마친 뒤, 이혁재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 아이 문제로 마음 쓰고 있진 않은지 조심스럽게 그녀를 몇 번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고민으로 보였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웠다. 이혁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누워 있었지만 불을 끄자마자 이승연이 몸을 돌려 그의 위로 올라탔다.이승연의 이런 행동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이혁재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긴장했다.“여보...”이승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쳤다. 그녀가 행동하기도 전에 이혁재는 이미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마치 뼈다귀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그는 즉각 반응하며 그녀의 실크 잠옷을 벗겼다.뜨거운 밤이 네 시간 넘게 지속된 후, 새벽에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혁재는 기진맥진한 이승연을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이유를 곱씹었다.‘혹시 누나도 아이를 원하기 시작한 걸까?’욕조 옆에서 물결을 손가락으로 장난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아이를 갖고 싶어진 거야?”이승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졸린 눈으로 대답했다.“모르겠어.”“내가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 갖고 싶은 건지, 아니면 첫 아이를 잃고 그걸 잊지 못해 다시 아이를 ‘찾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아마도 내가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거야.”이혁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하나로 부족해?”이승연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밀치며 답했다.“...저리가.”이승연이 아이에
유월영이 딸 고윤아를 낳은 후, 가족 외에 이 아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 사람은 이승연이었다.유월영이 봉현진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사는 이승연은 바쁜 일정에도 3일마다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그녀는 유월영보다도 윤아에게 더 신경을 썼다. 매번 아이를 위한 선물을 사 왔는데 지난번에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작은 방울이 달린 은팔찌를, 이번에는 귀여운 아기용품을 들고 나타났다.“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아이의 성장이 조금 느껴지자 다음번에는 신상 옷을 사줘야겠다고 계획까지 세웠다.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윤아가 승연 언니를 대모로 모셔야 할 것 같네.”이승연이 윤아를 보기 위해 올 때마다 남편 이혁재도 동행했지만 그의 목적은 달랐다. 그는 아이가 아니라 아내를 따라오는 데만 신경 썼다. 한 번도 윤아를 안아본 적이 없는 그는 윤아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 중 하나였다.이 사실을 눈치챈 연재준이 물었다.“너, 우리 딸한테 무슨 불만 있어?”이혁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아니, 그냥 난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이 관심이 없을 뿐이야.”연재준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그래? 그럼 예전에 이 변호사가 임신했을 때는 왜 그렇게 들떴었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재는 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이승연 쪽을 확인한 뒤 그녀가 듣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아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연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윤아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야. 넌 이 변호사가 네가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첫 아이를 잃은 걸 떠올릴까 봐 두려운 거지.”역시, 연재준은 이혁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이승연은 올해 35세였다.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뒤 매일 운동과 요가를 하며 건강을 유지했지만 의학적으로 고령 산모에 해당했다. 더구나 첫 아이를 잃은 사고로 자궁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 임신하
이승연은 속았다고 느꼈다.이 남자의 따뜻함에 넘어가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기분 좋겠지? 드디어 내 유산을 손에 넣게 됐으니.”이혁재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유산, 유산, 유산. 왜 항상 이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야?’그는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배를 감싸안았다.“여보, 내가 돈이 부족해 보여? 난 돈이 부족하지 않아. 지금 있는 돈으로 다음 생까지 살아도 충분해. 그 많은 돈을 뒀다 뭐 하겠어? 난 당신 돈을 원하지 않아. 그 유산이 당신한테 주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을 뿐이야. 난 그냥 당신을 돕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믿어줄 거야?”이승연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충성스러운 강아지를 다독이듯. 이혁재는 항상 그녀에게 충실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그 후로 두 사람은 함께 평생을 보내기로 결심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행복한 세 식구가 될 거라고 믿었다.그러나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법정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아이를 잃었고 이승연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처음 한 달 동안 이혁재는 살이 빠져 송장처럼 변해갔다. 그는 며칠씩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잠조차 자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이끌려 겨우 물 한 모금을 마시곤 했지만 결국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공주연이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들은 그가 극심한 기아 상태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이혁재가 깨어났을 때 공주연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내리쳤다.“넌 네 엄마도 필요 없니? 네 아빠는 이미 날 버렸어. 세상에선 네가 전부야! 그런데 너마저 날 버리려 해?”하지만 이혁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공주연은 울면서 말했다.“승연이 아직 죽지 않았어! 곧 깨어날 거야. 그런데
이혁재의 시점사실, 두 사람의 불화와 이별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이혁재의 어머니인 공주연이 이승연에게 출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주연은 겉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승연의 유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이승연의 유산을 당당히 상속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이혁재 역시 어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아이에게 상속자가 생기면 이승연의 친척들도, 우리 가족도 유산에 대한 욕심을 접고 물러나겠지. 그러면 그녀의 부담도 줄어들 거야.”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이승연에게 가서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승연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가 지금 따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그리고 이내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결혼 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여기에 사인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이승연은 이미 이혁재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그녀의 유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재는 말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사한 방법을 선택했다.그녀가 복용하는 피임약을 엽산제와 임신 보조제로 몰래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국 이승연은 그의 의도대로 임신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이승연은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에 격분했고 심지어 이혁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반면, 이혁재는 호텔에서 이승연과 오성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오성민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오해했다.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크게 다퉜고 이혁재는 한강에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너 정말 적당히 좀 해라.”연재준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뭘 적당히 하라고!”이혁재는 술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내 첫사랑은 이제 날 원하지 않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어!”서지욱이 나서서 말렸다.“그렇게 미련이 남으면 그냥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걸 얻는 공정한 거래일 뿐이야.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아. 하지만 네가 이 결혼이 억울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상관없어.”이승연의 단호한 말에 이혁재는 심장이 벌집처럼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그녀가 애초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자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자신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고 믿으려 했다.이혁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물론 난 이 결혼을 원하지.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타는지 모를 거야. 게다가 누나 가문의 그 거대한 유산에 누가 눈독을 들이지 않겠어?”사실 이혁재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녀의 유산을 탐내는 사람들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방패가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이승연은 “역시 너도 내 유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구나”라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눈빛을 보냈다.그 눈빛을 마주한 이혁재는 차라리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그는 평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이승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서툴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더 나쁜 인상을 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결국 두 사람은 서로 기분이 상한 채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그나마 유일한 희소식은, 이혁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왔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례를 치렀고 첫날밤을 함께 보냈다.이승연의 시점이승연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며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그 유산은 주변 사람들을 질투와 광기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생전에 친절하고 따뜻했던 삼촌과 고모 같은 친척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단 하룻밤 사이에 괴물로 변했다.그녀는 영화에서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떠올렸다.정상이던 사람들이 물리면 금세 인간성을 잃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친척들도 오로지 그녀의 유산을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하지만 이승연은 변호사로서 법을 잘 알고 말재
이혁재의 시점이승연과 오성민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이혁재였다. 그래서 이승연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그녀가 아직도 오성민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그는 집 안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그는 첫사랑이란 게 원래 잊기 어렵고 학창 시절부터 이어진 감정에, 그리고 7년이라는 긴 시간을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성민이 완전한 쓰레기라는 것이었다.오성민은 자기 인턴과 바람을 피웠다. 이런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에 불과했고 이승연은 왜 그런 사람을 잊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대체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보다 어디가 부족하다고!”분노에 찬 이혁재는 다음 날도 2만 보를 걸으며 화를 삭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다시 한번 가보세요!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승연이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룻밤 생각했으면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을 거예요.”그는 자신이 오성민보다 못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아들의 말대로 공주연은 다시 한번 이승연을 찾아갔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돌아와 말했다.“여전히 거절하더구나.”이혁재는 소파에 쓰러져 한쪽 다리와 팔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원한에 사로잡힌 시체처럼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쌌다.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승연을 직접 찾아갔다.“누나한테 직접 물어봐야겠어. 왜 나랑 결혼하지 않으려는지!”사무실에서 문서를 검토하던 이승연은 담담히 말했다.“너는 나보다 너무 어려.”“그게 이유라고?”그러자 이혁재는 불쑥 다가가 이승연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이승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붙잡으며 외쳤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혁재는 그녀를 안고 빙글빙글 돌며 깡충깡충 뛰었다.“너 미쳤어? 빨리 내려놔!”이승연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말했다.“내가 단지 누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는 누나 옆
연재준은 의사가 산모와 아이의 상태를 알리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었다.그는 곧장 유월영 곁으로 달려갔다.분만대에 누워 있는 유월영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몸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흐릿한 의식 속에 있었다.연재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눈물이 유월영의 얼굴에 떨어져 그녀의 땀과 함께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연재준이 쉰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괜찮아? 많이 아파?”유월영은 흐릿한 시야로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아요.”연재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마를 그녀의 손등에 대며 말했다.“미안해.”“고마워.”“사랑해.”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유월영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다시는 수술실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유월영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괜찮아요.”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일주일 후, 유월영은 봉현진 마을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딸의 정식 이름과 성씨는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신 임신 때부터 부르던 애칭 ‘찹쌀떡’으로 불렀다. 이는 엄마, 아빠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하지만 한 달 이내에 출생 신고를 해야 했기에 아이의 정식 이름은 반드시 정해야 했다.연재준은 더 이상 유월영을 고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와 ‘고’를 각각 종이에 적어 공 모양으로 말아 병에 넣고 침대에 있는 모녀에게 다가갔다.유월영은 그가 딸에게 뽑기를 시켜 성씨를 정하게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병의 입구를 유월영에게 내밀며 말했다.“당신이 뽑아.”“내가요?”“당신이 낳은 아이니까, 당신이 성씨와 이름을 결정할 권리가 있어.”유월영은 웃으며 손을 뻗어 종이 하나를 뽑아 펼쳤다.“고.”그녀는 종이를 보고 연재준과 눈을 맞췄다. 연재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고씨로 하자. 좋아, 아주 좋네.”마침내 딸의 정식 이름이
“...”조서희의 말은 황당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이승연은 전문 변호사로서 논리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다.“우선, 너의 신분증과 호적에는 여전히 ‘유월영’으로 기록되어 있잖아. ‘고민서’라는 이름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름이지.”“그러니까 너의 아이가 너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면 유씨 성을 따르는 게 더 안전한 선택이야. 예를 들어, 현시우처럼 다른 성씨로 인해 가문에서 배척받는 일을 막을 수 있지.”그녀는 말을 이어갔다.“지금 너의 가문에서 상속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게 좋아. 그래서 나는 유씨 성에 한 표야.”“게다가, 유씨 성을 따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 너의 이름처럼 유씨 성 여자 이름이든 남자 이름이든 독특한 멋이 있잖아. ‘유월영’, 달빛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운치 있는 이름이잖아.”이승연의 말에 유월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은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그러나 유씨와 고씨 모두 한 표씩 얻으면서 결국 2 대 2,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유월영은 고민 끝에 투표 범위를 더 넓혀 이혁재, 서지욱 부부와 노현재, 심지어 현시우에게까지 의견을 물었다. 다섯 사람의 투표 결과는 유씨와 고씨에 각각 두 표씩으로 또다시 동점이었다.결정적인 한 표는 서지욱에게 달려 있었다. 서지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내 생각엔, 너희 아이의 성씨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게 어때? 딸이면 유씨, 아들이면 고씨로 하는 거야.”하지만 이 말에 모두가 반대했다.“왜 딸이면 꼭 유씨여야 해? 딸도 고씨 성을 따를 수 있어.”“왜 아들이면 꼭 고씨여야 해? 아들도 유씨 성을 따를 수 있잖아.”서지욱은 이내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알겠어. 내가 헛소리했네. 기권할게.”결국 성씨 문제는 출산 직전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유월영의 출산은 최고의 의료팀이 관리하며 그녀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를 판단한 후 제왕절개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