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유월영이 말했다.“처음에 저한테 돌아오라고 했던 게 아마 제가 SK를 도와서 계약에서 우위를 점했을 때였죠? 그때 저는 SK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요. 그냥 제가 대표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게 싫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거예요?”그녀는 줄곧 그의 신변에서 새장 속의 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새가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가는 게 불편했던 걸까?안 좋게 말하면 연재준은 그녀의 행복보다는 그냥 그녀가 자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를 원했다.연재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쥐었다.마치 애완견을 대하는 듯한 그의 몸짓은 유월영에게 치욕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피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네가 아무리 높게 날아도 나보다 높게 올라갈 수 있어? 네가 어디를 가든 난 네가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어. 내가 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잊었어?”유월영은 이런 의미 없는 입씨름을 끝내고 싶었다.“대체 이유가 뭐예요?”연재준은 대답 대신 입술을 부딪혀왔다.참다못한 유월영이 소리쳤다.“대표님은 뉴스도 안 봐요? 대다수의 유명인들은 사무실이나 회의실에서 여자와 밀회를 즐기다가 사진이 유포돼서 이미지가 추락해요! 여기 CCTV도 다 있다고요!”“우리 유 비서는 상상력도 풍부하군.”그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하는 악취미는 없었다.“약은 챙겨먹었어?”유월영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피임약?’너무 오랜만이라 꼭 챙겨야 하는 절차인데도 잊고 있었다. 연재준이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덜렁대니까 자기만 다치지.”자연유산을 가리키는 듯한 말에 유월영은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허리를 숙여서 책상 밑을 통해 빠져나갔다.그러고는 떨어진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연재준은 더 이상 그녀를 잡지 않고 떠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난 내 사람 몸에 다른 놈의 흔
유월영은 그제야 윤미숙의 옆에 임신한 여자가 같이 걷고 있는 모습을 주의해서 보았다.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배가 나온 걸 봐서 6개월 이상은 되어 보였다.[휴대폰이 흔들려서 제대로 안 보일지 모르겠는데 둘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아주 가까워 보였어. 설마 연재준이 밖에서 사생아라도 만든 건 아니겠지?]유월영은 한참을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전에 백화점 육아용품 코너에서 윤미숙 여자와 마주쳤던 것을 떠올렸다. 나중에 산부인과에서도 만난 적 있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었다.유월영은 윤미숙이 임신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임산부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누굴까?윤미숙이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여자라면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설마 정말 연재준 옛 애인 중에 누가 임신했나?아니면 연 회장님?전자에 비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연재준과 윤미숙의 사이는 거의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연재준이 사생아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윤미숙에게 부탁할 리는 없었다.만약 후자라면 정실부인이 남편이 바람나서 임신한 여자를 돌보는 격이었다.그것도 현실과 괴리감이 있었다.유월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윤미숙 여사님 맞아. 옆에 여자는 나도 모르는 얼굴이야. 윤 여사님 지인이겠지.]조서희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괜찮아. 여긴 시골 마을이라 한집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야. 나중에 엄마한테 알아보라고 하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알아내면 소식 전해줄게.]유월영은 친구가 그래도 씩씩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그래. 난 지금 영안으로 출장 중이야. 지역 특산물 좀 사서 보낼 거니까 주소나 보내줘.]조서희는 기뻐서 춤 추는 이모티콘과 함께 주소를 보내왔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월영은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며 고민에 잠겼다. 뭔가 엄청난 일을 알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해운 같은 대기업 가문에서 사생아가 등장했다면 곧 승계권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것
서지욱은 신속히 약을 손수건으로 감싸는 신연우를 바라보며 그가 교수님이 아니고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연재준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차에 오른 서지욱이 야릇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너 일부러 신 교수 도발한 거지?”“내가?”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연재준은 확실히 아까보다 기분이 좋아보였다.“아니야? 넌 둘이 사귀는 사이인 거 알면서 그런 걸 유 비서한테 전해주라고 하면 어떡해.”서지욱은 친구지만 참 나쁜 인간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유 비서가 그렇게 미워?”연재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서지욱이 말했다.“신연우 씨가 남자친구가 아니고 그냥 일반 친구나 썸을 타는 사이였어도 아까 네 처사는 너무했어. 유 비서 입장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잖아. 솔직히 원수 사이가 아니고는 일부러 그럴 이유는 없었어.”연재준이 담담히 말했다.“미운 건 아니야.”솔직히 미운 감정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다.유월영은 내일 업무를 준비하며 배달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었더니 밖에 신연우가 서 있었다.“교수님이 어쩐 일이세요?”베이지톤의 니트는 그의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연아 약 가지러 내려갔는데 하필 월영 씨도 배달을 시켰더라고요. 그래서 내려갔던 김에 가져왔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유월영은 가슴이 철렁했다.신연우는 봉다리를 그녀에게 건넸다. 유월영은 포장이 그대로인 것을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하지만 그녀의 눈에 찢어진 봉다리 입구가 들어왔다.그 순간 그녀는 신연우가 내용물을 보았다고 확신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저녁은 먹었어요?”“네. 룸 서비스 시켰어요.”“그래요. 다른 일 없으면 일찍 쉬어요. 오늘 일정 앞당긴다고 무리했으니 피곤했을 거잖아요.”유월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교수님도 쉬세요.”신연우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문을 닫은 유
유월영은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사람을 잘못 보셨네요. 저는 미연이가 아니에요.”“아, 잘못 본 거구나.”주영문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미연이가 아니라 모범시민 유월영 씨였네? 경찰에 적극적으로 단서를 제공하는 모범시민. 유월영 씨 한 마디에 우리 클럽이 지금도 영업 정지 상태야.”유월영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주영문은 협박이 안 먹히자 냉소를 지으며 연재준에게 말했다.“매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가이드 해드릴게요. 이 마을은 제가 가장 잘 알거든요.”“그래, 그럼.”연재준이 담담히 답했다.주영문은 연재준의 얼굴에서 놀라거나 경계하는 표정이 안 보이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그는 애먼 개들에게 화풀이를 했다.“멍청한 것들! 당장 안 꺼져? 손님들이 무섭다잖아!”그의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도 으르렁거리던 개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하지만 도망가거나 자리를 뜨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주영문은 약속 대로 그들을 거느리고 마을 주변을 돌며 이곳 저곳을 소개헀다.신연우는 유월영과 함께 걷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그날 월영 씨 납치를 시도한 녀석이 저 녀석이에요?”유월영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 말을 들은 순간 안경 너머로 신연우의 두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마을 도로는 흙탕길에 주변이 온통 초목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짧은 치마를 입고 온 신연아는 벌써 모기에게 다리를 물렸다.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연재준의 팔을 잡아당겼다.“재준 오빠, 다 봤어요? 여기 볼 것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면 안 돼요?”연재준은 신연아가 무슨 말을 하든 줄곧 무시로 응대했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녀의 이런 행위가 무척 불쾌했다.전에는 SK그룹에 대한 예의 때문에 불편해도 몇 번 받아준 건데 지금은 SK에 관련된 사람은 그게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는 담담한 얼굴로 손을 빼내며 말했다.“신연아 씨
주영문의 부하이자 지금은 도주범이 된 난쟁이였다. 조금 전까지도 여기 나타나지 않았던 인물이 칼을 들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칼끝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유월영은 본능적으로 연재준을 밀치며 뒤로 뒷걸음질쳤다. 연재준은 그녀가 이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뒤로 이끌었다.그러고는 다리를 뻗어 난쟁이의 손목을 걷어찼다.안타깝게도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난쟁이의 손에 든 칼을 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쟁이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둘렀다.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이성을 잃은 인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잠깐 연재준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에 난쟁이의 손에 들린 칼이 연재준의 옆구리를 찔렀다.유월영은 순간 놀라서 동공이 확장되었다.공격에 성공한 난쟁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힘을 주어 칼을 빼냈다.유월영은 칼에 묻은 시뻘건 피와 옆구리를 잡고 주저앉은 연재준을 바라보았다. 난쟁이가 다시 공격을 개시하려는 사이, 그녀는 가방을 그의 얼굴로 휘둘렀다.단단한 재질의 가방에 얼굴을 맞은 난쟁이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연재준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경호원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난쟁이는 공격이 실패하자 또 다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주변에는 흉악한 개들이 짓고 있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까지 더해져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결국 유월영마저 칼을 맞았다.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미친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던 난쟁이가 그대로 주저앉았다.평상복을 입고 동행했던 형사가 총을 쏜 것이다.유월영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뒤늦게 그녀에게 달려온 신연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보지 마세요.”하지만 결국 이마에 총을 맞고 쓰러진 시체를 보고 말았다.소동은 거기서 마무리되었다.현장에 있던 인원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호송되었다.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바쁘지만 질서 있게 움직였다.유월영도 병상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출혈이 심해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유월영은 상처 입은 그의 옆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신연아 씨가 저보다 많이 다쳤으니까 가서 돌봐주는 것도 당연한 거죠.”연재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겠지. 넌 항상 신연우만 감싸더라.”수술 준비를 마친 의사가 마취약을 주사기에 주입하며 다가왔다.“봉합 시작할 거니까 일단 대화 중단해 주세요.”유월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숨을 참았다.연재준을 담당한 의사가 말했다.“아직도 피가 나오고 있네요. 장기를 다친 건 아닌지 확인하고 바로 수술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연재준의 신분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있었기에 의료진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연 대표님, 지금 당장 수술 들어가셔야 합니다.”하정은이 다급히 다가오며 의사에게 말했다.“선생님, 우리 대표님 꼭 살려주셔야 해요!”연재준은 그대로 수술실로 직행하려는 간호사에게 손짓해서 잠깐 멈추게 했다.마취제를 주사한 유월영도 봉합을 시작했다.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취제 때문에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느낌은 아주 선명했다.그녀는 눈을 감고 있느라 연재준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다섯 바늘 정도 꿰맨 뒤, 드디어 봉합이 끝났다. 유월영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힘없이 침상에 누웠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의사가 말했다.“이틀 정도 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입원 수속을 해야 하는데 여기 가족이나 친구가 있나요?”유월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연재준이 입을 열었다.“하 비서, 유월영 씨 입원 절차부터 처리해 줘.”“네, 대표님. 대표님도 어서 수술실로 들어가셔야 해요.”하정은은 붕대를 시뻘겋게 물들인 그의 상처를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연재준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유월영을 힐끗 보고는 수술실로 직행했다.하정은은 연재준이 수술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에 유월영의 신분증을 가지고 입원수속을 마쳤다. 잠시 후, 유월영은
연재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그것들 때문에 날 위해 나선 거야?”유월영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설마 은혜를 원수로 갚을 건 아니죠?”연재준은 피식 웃더니 차게 식은 얼굴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얌전히 치료받으면 퇴원한 뒤에 삭제할 거니까 걱정 마.”고작 이틀이긴 하지만 그와 같은 병실을 쓸 것을 생각하니 유월영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혹시 간호사한테 오늘 퇴원한다고 말할까?’그녀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본 연재준이 싸늘하게 말했다.“팀 대부분 인력이 병원에 입원했어. 혼자 나갔다가 주영문한테 끌려가고 싶어?”유월영은 결국 조기 퇴원을 포기하고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주영문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그 손은… 설마 사라진 시체에서 잘라낸 건가요?”연재준은 눈을 감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유월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전에 경찰견까지 동원해서 수색했는데도 찾지 못했는데 마을 풀숲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일부러 거기 가져다 두었다는 거네요.”“그렇겠지.”“아까 그 난쟁이가 그랬잖아요. 이미 발견된 거 다 죽여버리겠다고요. 설마 살인과 시체은닉죄를 혼자 뒤집어쓰려는 걸까요?”연재준이 입꼬리를 말며 대꾸했다.“비서 일이 싫증나서 이제는 탐정이 되고 싶은 거야?”유월영은 허무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연재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난쟁이는 칼을 들고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공격을 진행했고 십여 명이 다쳤어. 형사가 경고했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지. 그런 놈을 격살한 건 합리적인 판단이야. 키다리도 잡았고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인정했어. 하지만 주영문과의 관계는 깨끗하게 부인하더라고.”유월영은 그제야 상황을 알 것 같았다.조사가 진행될수록 꼬리가 드러날까 걱정한 주영문이 키다리와 난쟁이에게 죄를 뒤집어쓰게 만든 것이다.그들의 꼬리 자르기가 성공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형사들이 할 일이고 그들은 간섭할 수 없었다.다만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연재준이 사건의 실시간 동향을
연재준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유월영은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고 간호사를 불렀다.너무 아프다는 그녀의 말에 간호사가 상처를 살피고는 말했다.“바늘로 상처를 꿰맸으니 아픈 건 당연해요. 너무 참기 힘들면 진통제 처방해 드릴게요.”유월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는데 몸이 아픈 건 참기 힘들었다.굳이 진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을 참을 필요도 없었다.잠시 후, 간호사가 진통제를 가져왔고 약을 보용한 유월영은 잠을 청했다.간호사는 옆 침대에 있는 연재준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은 좀 어떠세요? 진통제 가져다드릴까요?”연재준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아니요. 됐어요.”간호사는 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밖으로 나갔다.연재준은 한참 화를 추스른 뒤에야 고개를 돌리고 유월영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그에게 무능하다고 독설을 날리던 여자는 세상 순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내가 무능해?’그는 냉소를 지었다.그가 무능한지 유능한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 그만하라고 빌던 주제에… 좀 봐줬다고 기어올라?’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상념에 빠졌다.업무적인 능력을 따지면 그는 최상위에 속했다.그가 진짜 무능한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연 회장의 핏줄이라고 해도 결국 회사 원로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지금의 해운이 있기까지 그는 독단적으로 자신의 말을 거부하고 다른 마음을 품은 싹을 하나씩 전부 잘라냈다. 감히 누가 연재준을 무능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무능하다고 독설을 내뱉던 여자가 자신의 밑에서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유월영은 매번 그와 정사를 나눌 때면 처음에는 꾹 참고 호응하다가 점점 체력이 딸린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3년을 함께하는 동안 거의 매일 밤 있었던 일이었다.그녀는 통증을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