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어두운 방안에서 아찔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연재준은 살면서 여자에게 귀뺨을 맞은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 다 유월영에게 맞았다.처음에 그녀가 귀뺨을 때렸을 때는 그가 그녀를 두고 쓰다 버린 도구라고 말했을 때였다.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힘이 많이 들어갔다.유월영은 소파에 누워 씩씩거리며 어둠 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광선이 어두워서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그들은 마치 폭발 직전의 야수처럼 아무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카드로 문을 열었다.유월영은 급기야 연재준을 밀쳐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옷깃을 여몄다.이 방은 그녀가 혼자 쓰는 방이었다.전등이 켜지고 광선이 쏟아지면서 유월영은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문밖을 바라보았다.호텔 직원 두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직원은 두 사람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급기야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방에 두 분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조… 조금 전에 1702호 방 문이 안 열린다는 신고를 받고 알아보려 온 참이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 볼 일 보세요!”유월영은 직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나 혼자 쓰는 방인데 누가 신고를 했다는 거예요?”“그게… 전화 거신 분은 남성분이었는데 1702방에 투숙하신다고 했어요. 성이 유씨라고 했는데….”직원이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연재준은 일어나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유월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직원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버렸다.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모퉁이에서 누군가 핸드폰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을 사진 찍어 어딘가로 전송했다.[방해 작업 성공입니다.]갑작스러운 전화 신고는 누군가의 짖꿎은 장난으로 결론이 났다. 유월영 본인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고 했고 직원은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에 문을 닫고 나갔다.유월영은 누군지는 모르나 신고자에
그나마 분풀이라도 하니 솟구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느 정도는 갈무리할 수 있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조급해 하지 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자. 할 수 있어.그녀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연재준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서지욱이 서 있었다.서지욱은 친구의 얼굴이 뻘겋게 부은 것을 보고 층수를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유 비서 찾아왔었어?”해운에서 사직한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서지욱은 여전히 습관처럼 유 비서라고 불렀다.3년이나 불렀던 호칭이었기에 바꾸려니 쉽지 않았다.연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서지욱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둘이 또 싸웠어? 얼굴은 유 비서한테 맞은 거야?”연재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자기가 뭐 대단한 놈 만난 줄 알고 아주 기고만장하더라고.”서지욱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준아, 너 요즘 부쩍….”“내가 뭐?”“유 지서가 신연우랑 가깝게 지낸 뒤로 네가 요즘 부쩍 유 비서한테 관심이 많아진 것 같아서 말이야.”연재준은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거슬려서 그래. 거슬려서.”서재욱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재준은 그런 친구를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았다.‘자기가 여자 하나에 목 매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아나 보네.’그는 유월영을 굳이 정의하자면 그녀가 자신에게 많은 걸 빚졌고 자신은 지금 빚 독촉을 하는 중이라고 단정지었다.“정말 거슬려.”서재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누구? 신연우? 함부로 걔 건들지 마. 걔 별로 대단한 것 같지 않아도 SK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이라고.”연재준은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다음 날 아침, 신연우는 신주 실험실에 문제가 생겨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하지만 오늘은 고찰이 시작되는 첫날이고 기술팀은 남아서 데이터를 수집해야 했기에 유월영은 여기 계속 남아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유월영은 처음
지배인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층에 다른 손님들도 있고 다른 분들이 사생활 침해라고 문제 삼을 수도 있는 부분이라서요. 상부에 한번 요청은 드려보겠습니다.”“그건 지배인님이 알아서 하세요. 다만 제가 언제든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것만 명심해요. 어쨌든 저는 스토킹으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형사들이 수사에 착수하면 당연히 CCTV를 조사하려 하겠죠?”지배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건 없잖아요. 그리고 미행도 고객님 추측일 뿐이지 증거도 없고요. 경찰에 신고해도 사건 접수가 힘들 수 있어요.”“그래요? 하지만 어제 그 시간에 19층에 투숙 중이신 연 대표님이 17층에 오셨다가 스토커로 오해 받고 하마터면 피해를 당할 뻔했는데 이래도 상관 없나요?”연재준 이름이 나오자 지배인의 표정이 바뀌더니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눈짓했다.직원이 다가와서 그의 귓가에 대고 뭐라 하자, 지배인은 유월영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지배인은 노현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재준이까지 거기 엮였단 말이지?”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드린 거지요. 영상을 보여줘야 할까요?”“그 여자 이름이 뭐야?”“유씨 성을 가진 손님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성함을 물어볼까요?”곧이어 남자의 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유씨? 유월영? 그 여자였네.”지배인은 갑자기 미묘하게 바뀐 그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했다.“그 여자라면 보여줘도 돼.”“알겠습니다.”통화를 마친 노현재는 기분 좋게 노천 수영장에 뛰어들어 신나게 수영을 즐겼다.한편, 로비로 돌아간 지배인은 유월영에게 소식을 전했다.“저희 대표님께 여쭤봤는데 손님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랑 함께 보안실로 가시죠.”유월영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지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현재가 대답했다.“아직.”“그럼 그 인터넷전화 위치는 추적해 봤어?”“그건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아무것도 진행된 게 없다는 얘기에 연재준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CCTV 영상 쳐다보고 있을 시간에 조사를 했으면 벌써 끝났겠다.”수화기 너머로 노현재의 억울한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재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유월영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언니, 무슨 일이야?”“월영아, 지금 시간 괜찮아?”그래도 큰언니의 목소리가 편안해 보여서 그녀는 한시름을 놓았다.“시간 괜찮아. 무슨 일이야?”“엄마가 너 줄 목도리 다 완성하셨어. 모자도 만들어 주신다고 굳이 지금 너한테 좋아하는 색상 물어보라느니 거야.”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옆에 계시지?”“응. 엄마 바꿔줄게. 둘이 얘기해. 우리 엄마 요즘 따라 성격이 급해지셨어. 저녁 때 물어본다니까 굳이 지금 물어보라잖아.”큰언니는 투덜거리며 엄마를 바꿔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컨디션 괜찮을 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유월영은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쓰렸다.“엄마.”이영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월영아.”“엄마, 얘기해. 듣고 있어.”“목도리 완성했어. 모자도 떠주고 싶은데 넌 어떤 색상이 좋아?”“다 좋아. 목도리랑 같은 색상이면 돼.”유월영이 말했다.“엄마, 앞으로 시간은 많아. 급할 거 없어. 뜨개질한다고 밤 새고 그러면 안 돼.”“아니야. 오후에 좀 하고 지금은 쉬고 있어. 모자 하나 뜨는 건 빨라.”이영화가 말했다.“이웃집 혜민이 아빠가 올해 메밀 수확이 괜찮다고 메밀가루를 보내왔더라고. 그거로 나중에 냉면 만들어서 먹자.”여름에 먹는 냉면을 겨울에 얘기하시는 걸 보면 엄마는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월영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냉면탕은 좀 달게 해줘. 나 신맛보다는
연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지욱이 여기 특색 메뉴랍시고 매운 것만 시켰던데 그 상태로 매운 게 입에 들어가겠어?”유월영은 뭔 상관이냐는 듯이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연재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다.“10분 줄 테니까 간이 약하고 담백한 음식 8번 방으로 좀 올려줘.”유월영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갑작스러운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참 기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어제 그렇게 다투고 이제 와서 아파한다고 음식을 챙겨주는 꼴이라니.연재준은 싸늘하게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그렇게 놀랄 거 없어. 먹으면서 내 질문에나 대답해.”‘목적이 있었구나.’유월영은 어차피 피할 수도 없는 거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연재준은 메뉴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유산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지겨운 질문에 유월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안 믿는다면서요?”“내 질문에만 대답해.”강압적인 태도에 유월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애매모호한 말투로 말했다.“납치당했어요.”연재준이 인상을 확 구겼다.“뭐라고?”“납치범들이 돈을 요구하길래 대표님께 전화를 걸었어요. 대표님은 제 전화를 끊어버렸고요. 그래서 화가 난 녀석들이 저를 차들이 오가는 길바닥에 떠밀었어요. 그래서 사고를 당했고요.”잠자코 듣고 있던 연재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 없어. 난 네 전화 끊은 적이 없거든.”유월영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대표님한테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전화를 끊은 적 없으니까 하는 소리야.”연재준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유월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가시 돋친 말에 연재준이 똥 씹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월영, 지금 나 놀리는 거지?”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유월영이 패드로 데이터를 정리하는데 소은혜가 뒤에서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말했다.“여기 수치가 좀 틀린 것 같아요.”유월영은 그 말을 진짜로 믿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그래요? 어디가 문제 있어요?”소은혜는 그 기회를 틈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제 연 대표님 귀뺨 친 거 월영 씨가 했죠?”유월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소은혜는 더 소리를 낮춰서 말했다.“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분에게 그런 짓을 한 거예요?”유월영은 그쪽이 먼저 술 마시고 진상을 부렸다고 쏘아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소은혜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주제를 알아야지.”유월영은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룻밤이 지나서 그런지 얼굴의 붓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검은색 정장에 늠름한 풍채를 풍기는 모습과 어젯밤 술 마시고 진상을 부리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시선을 느낀 연재준이 고개를 돌리자 유월영은 급히 시선을 패드로 돌렸다.방대한 사업이었기에 각자 맡은 바 업무가 막중했다.유월영은 검측과 데이터 기록을 맡고 처음 프로젝트를 가동할 때 정부의 핵심 인력인 설 의원을 만났다.그 외에는 전문가의 영역이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 연재준의 일정에 동행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호텔로 돌아온 유월영은 데이터를 정리해서 연구팀 단톡방에 전송했다.신연우에게서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문자가 왔고 유월영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실험실 상황을 물었다.“화재 때문에 대량의 데이터가 유실되었어요. 지금은 복구 중이고요.”유월영은 이번 일의 주모자인 연재준을 생각하면 짜증이 치밀었다.신연우가 물었다.“연 대표가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죠?”유월영은 전에 연재준이 했던 말이 떠올라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신 교수님, 혹시 약혼했어요?”만약 연재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건 자제하는 게 좋았다.신연우는 한참을 답이 없다가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약혼이요?
유월영은 다급히 해명했다.“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 아니라….”“안 들을래요.”신연우가 억지를 부렸다.“어쨌든 월영 씨가 날 조금은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할래요. 다른 일 없으면 실험실 일 처리하고 영안에 내려가서 다시 얘기해요.”억지스러운 그의 발언에 유월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쉬어요. 이만 끊을게요.”그 말을 끝으로 신연우는 정말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베란다로 가서 화분에 물을 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갑자기 며칠 전 강의실에서 남학생들이 싸우던 대화가 떠올랐다.“주영아, 너 어떻게 친구 여자친구를 빼앗을 수 있어?”신연우는 쓴웃음을 지었다.‘너 계속 질질 끌면 정말 내가 빼앗을지도 몰라.’다음 날 아침, 유월영은 신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 일 때문에 따지려고 아침부터 전화한 거예요?”유월영이 말이 없자 신연우가 속상한 듯이 말했다.“정말 그런 거라면 나 너무 서운한데요?”유월영은 다급히 말했다.“그게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그런데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지?’수화기 너머로 신연우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러니까 조금은 나를 신경 쓴다는 거죠?”연애 경험이 없는 유월영은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겉으로는 진중해 보이는 신연우는 사실 상 이런 쪽으로는 고수가 따로 없었다.유월영은 대놓고 화제를 돌렸다.“급한 일이에요.”신연우도 장난을 멈추고 진지 모드로 돌아왔다.“알았어요. 무슨 일인데요?”“어제 일하다가 직원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설 의원님이 신주시로 가신대요.”“알았어요.”“신 대표님한테 얘기해서 설 의원님 한번 만나보라고 하세요.”“그게 다예요?”두 사람은 이 일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화를 끊기 전, 신연우가 말했다.“이 일이 성공하면 형한테 부탁해서 월영 씨한테 제대로 감사를 표하라고 할게요.”유월영은 기분
상대는 얼굴이 검게 그을린 사내였다.유월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괜찮…아요?”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같았다.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괜찮으세요?”“저는 괜찮아요. 어디 다친데 없어요?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정신을 차린 유월영이 인부에게 물었다.철근이 무너지며 그는 어깨를 다쳤기에 그는 곧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차로 향했다.사람들이 달려와서 유월영의 안부를 물었다.연재준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철근이 무너진 순간 뛰어가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손이 닿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그때 보트 공장에서 있었던 사고가 떠올랐다.그때 그는 유월영이 그를 구해주려고 뛰어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백유진에게 달려갔다.그때는 딱히 문제삼지 않았는데 지금 방관자의 입장에서 보니 그녀는 그 사고에서 충분히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구하려다가 다친 것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도 먼저 소은혜를 위기의 현장에서 밀어냈다.이번에는 인부가 달려들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 유월영은 다리 부상 때문에 한 달을 바깥 출입을 하지 못했다.연재준은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치솟았지만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멍청하긴.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자기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소은혜에게 다가갔다. 소은혜는 하이힐 때문에 발목이 삐어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연재준은 다가가서 소은혜를 안아올렸다.고개를 돌린 유월영은 소은혜를 안고 현장을 떠나는 연재준의 모습을 발견했다.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연 대표님이 소 팀장한테 유난히 신경 써주는 것 같지 않아요?”“처음부터 그랬어요. 다친 사람이 소 팀장님 말고도 더 있는데 소 팀장님만 챙기는 것 좀 봐요.”이번 사고로 오늘 일정은 하루 연기되었다.유월영은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빨리 데이터 기록을 마치면 신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 연이가 원하는 거라면 아빠는 꼭 해낼 거야.”윤영훈은 목이 메어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주월향은 딸에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빠가 누군지 알려주며 7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딸이 그를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해줬다.‘이 세상에 이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그러나 윤영훈은 주월향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집안에 들어서자 연이가 활기차게 떠들었다.“엄마!”주월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이야, 배고프지? 어제 배추전 먹고 싶다고 했잖아? 방금 만들어서 아직 따뜻해. 간식이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아이가 환호하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주월향은 윤영훈을 힐끗 보며 말했다.“당신도 먹어볼래요?”윤영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월향아, 미안해...”“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주월향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딸을 한 번 보더니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윤영훈도 그녀를 따라 나갔다.주월향은 식물에 물을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7년 전, 영훈 씨가 감옥에 가기 전에 우리 모녀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 줬어요. 돈, 집, 차까지 모두 마련해줬죠. 게다가 내가 당신을 한 번 배신하기도 했으니 당신에게 상처 준 대가로 다 갚았다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7년 전에 이미 정리됐어요. 그러니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요.”윤영훈은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주월향이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이 7년 동안 내가 감옥 면회를 가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먼저 다가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오늘 출소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죠. 당신이 날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그냥 이대로 끝났을 거예요.”“하지만 영훈 씨는 나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여기 남을 건가요?”“...내가 여기 남아
“됐어요, 사촌 오빠, 얼른 가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모와 이모부께는 제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여기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사촌 오빠?’남자는 주월향의 남편이 아니라 사촌 오빠였다.거의 죽어가던 윤영훈의 마음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그는 참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그러나 그 사촌 오빠가 집을 나서자 윤영훈은 재빨리 수박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물론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해서 주월향에게 남편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이 반전만으로도 그는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그때 머리 위의 수박잎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젖혀졌다.윤영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빨리 벼부터 거두는 걸 도와줘요. 비 맞으면 이번 농사는 다 망해요.”윤영훈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주월향의 말투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그가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들렸다.천천히 돌아선 윤영훈을 주월향은 담담하게 바라보며 갈퀴를 건넸다.“모두 한데 모아주세요. 내가 자루를 가져올게요.”윤영훈은 멍하니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그는 감옥에서도 농사일을 해봤기에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자꾸 주월향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려 애썼다.주월향이 입을 열었다.“지금 나는 온라인에서 요리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어요. 팔로워가 몇백만 명은 되죠. 영상 편집이 아직 안 끝났으니 벼를 다 거두고 나면 이 앞에 초등학교에 가서 연이를 좀 데려와 주세요.”“지안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알죠? 몰라도 괜찮아요. 핸드폰 내비게이션 켜고 찾아가면 돼요.”윤영훈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주월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 말 들었어요?”“들었어...”주월향은 거둔 벼를 집 안으로 가져가며
윤영훈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모범수로 인정받아 감형된 덕분에 실제 복역 기간은 7년 10개월이었다.출소하는 날,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감옥 문 앞에 서서 바라본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그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의기양양하고 자유분방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윤영훈은 감옥 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출소를 반년 앞두고 그는 출소 후의 삶을 계획하려 애썼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윤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다.2년 전,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교도관들의 배려로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그곳에서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보았다.가문의 보호막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윤영훈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의 사촌 서정희는 출소 후 찾아오라 했지만 그녀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윤영훈이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주월향이었다.그녀와 딸 연이를 보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녀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재판을 받던 날에도 주월향은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녀는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 곁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남자가 없더라도 모녀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윤영훈은 감옥에 가기 전 그녀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겼고 그녀가 이를 잘 활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등장은 적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비열하다고 느꼈다.주월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멀리서 그녀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만족하겠다고 다짐한 윤영훈은 감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기차표를 사서 그녀의 고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었다.기차역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그래도 돼?”강수영은 신현우가 미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의 애인이 되었고 강수영은 반년 넘게 그와 몰래 관계를 이어갔다.강수영은 일부러 자신이 이미 남편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매주 몰래 찾아오는 신현우를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가끔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바로 떠났다.그럴 때마다 신현우는 알림도 받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친구들은 강수영이 신현우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현재 신현우의 눈에는 질투와 시기가 가득 차 있었고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강수영은 자신이 그의 곁에서 겪었던 모든 억울함과 상처를 이렇게 풀고 싶었다.이번 주, 강수영은 영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신현우는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강수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그는 거실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고 있었다.엉망이 된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초라해 보였고 강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그녀는 오랜 시간 방치해둔 녹음기를 꺼냈다. 그건 예전에 신연우가 건넨, 신현우의 음성이 담긴 파일이었다.그녀는 당시 결혼 생활에 전념하고 싶어 듣지 않았던 녹음을 재생했다.녹음기에서는 술에 취한 신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것은 강수영의 결혼식 날, 신현우가 취한 상태에서 남긴 말들이었다.신연우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수영이가 내 앞을 그렇게 지나갔어. 남편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내가 정말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니야, 난 수영이를 좋아했어. 다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나 때문에 부모님과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었잖아. 너무 어리석었어. 나는 그런 가치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닌데...”“다 내 잘못이야. 처음부터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수영이가 이렇게 집착하지
두 사람은 서쪽으로 스위스 알프스를 찾아가 산맥의 낭만을 만끽하며 자연 보호구역에서 아름다운 야생동물들을 만났다.북쪽으로는 핀란드의 로바니에미와 캐나다의 퀘벡으로 향해 겨울 축제와 북유럽의 신비로운 매력을 경험하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오로라의 장관을 즐겼다.그러던 중, 한 여행지에서 강수영은 신연우를 우연히 마주쳤다.오래된 친구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식사 후, 신연우는 그녀에게 녹음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이 안에는 우리 형의 음성이 들어 있어. 들을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하지만 듣는다면 네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그는 이어 덧붙였다.“형이 요 몇 달 동안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큰 병을 앓아 체중이 많이 빠졌고, 회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최근에서야 조금 회복됐지.”강수영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녹음 파일을 받았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지성으로 돌아와 결혼 후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큰 갈등이 없었다. 강수영의 남편은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었고 이혼의 원인은 문화적 차이와 생활 습관의 차이였다.한 사람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다른 한 사람은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자라며 서로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았다.부모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후 강수영은 다시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각 나라, 각 도시에서 신현우를 계속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세 번째 만남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수영이 그를 조롱했다.“신 대표님, 이렇게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왜 자꾸 저를 따라다니시는 거죠?”“따라다닌 게 아니야. 우연일 뿐이야.”“우연이 이렇게 자주 겹칠 리가 있나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차가운 미소를 띤 강수영에게 신현우는 화제를 돌렸다.“넌 왜 여기저기 여행
‘소은혜’에서 다시 ‘강수영’으로 돌아온 후, 강수영은 그 차가운 남자와 더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한눈에 반했던 감정은 결국 그녀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파혼하고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꾼 채 명분 없이 그의 곁을 지켰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그러는 동안 그는 가문 배경이 잘 맞는 귀한 집 아가씨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스스로를 명문가의 딸에서 천한 첩으로 전락시켰지만 그에게선 차가운 시선만 돌아왔다. 그녀가 바친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온기 한 줌 나눠주지 않았다.강수영은 결국 깨달았다. 그 감정을 고집한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그녀는 강씨 집안의 딸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신씨 가문의 장남으로 남아 있었다.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맞선을 주선했고 두 가문 모두에게 이로운 자리였다.강수영은 더 이상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맞선에 응했다.맞선 상대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배경도 잘 맞았다.며칠간 그와 시간을 보내본 그녀는 그가 괜찮다고 느꼈다. 특히,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을 때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교제했고 큰 문제 없이 잘 맞았다. 비록 심장이 크게 뛰는 설렘은 없었지만 세상 대부분의 결혼이 ‘적당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기준에서 본다면 그와의 결혼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결국 두 사람은 약혼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나타났다. 바로 신현우였다.그의 등장에 강수영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신랑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방금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이승연은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되어 이혁재에게 맡기기로 했다.“경험 있는 네가 좀 맡아줘.”이혁재는 황당했다.“내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그래!”이승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처지가 비슷하잖아.”화가 난 이혁재는 이승연을 들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곱게 바른 립스틱을 번지게 했다.“전혀 비슷하지 않거든!”이혁재의 사무실.이혁재와 연재준은 일 얘기를 하고 있었고 두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었다.그때 이혁재가 무심코 고양이에게 한마디를 건넸다.“호두야, 누나를 잘 돌봐야 해.”기어다니기 시작한 윤아는 갑자기 호두의 꼬리를 잡았다.호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좋아했지만 꼬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혁재의 말 때문인지 꼬리를 잡힌 채로 억울한 듯 야옹 소리만 냈다.윤아는 깔깔 웃으며 꼬리 끝을 입에 넣으려 했고 그제야 호두는 꼬리를 빼내더니 아기에게 돌아서서 야옹 소리를 내며 경고했다.마치 “입에 넣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러자 윤아는 호두를 향해 돌진하며 그를 덮쳤다.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찾으러 갔을 때 윤아는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호두는 듬직한 몸을 베개 삼아 윤아를 받치고 있었다.그 동화 같은 장면에 연재준과 이혁재는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다.“고양이가 어린이를 알아본다더니 진짜인가 봐.”퇴근 시간이 되어 이혁재는 호두를 데리고 이승연의 사무실로 향했다.이승연은 호두를 품에 안고 기뻐하며 입을 맞췄고 이어 호두가 이혁재에게도 뽀뽀하도록 했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혁재는 고양이 털을 한가득 삼키고 서둘러 뱉어냈다.“퉤퉤퉤.”그 순간, 호두도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흉내를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토해냈다.이혁재는 어이가 없어 발끈했고 이승연은 웃음을 참지 못해 의자에 쓰러지듯 폭소했다.사실 고양이는 털을 핥으며 스스로를 청소하는 습성 때문에 위에 털 뭉치가 생겨 종종 토하곤
작은 고양이는 케이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치료로 인해 털이 대부분 깎인 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이혁재가 싫은 소리를 내자 새끼 고양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이승연을 알아본 듯 비틀거리며 케이지 가장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향해 야옹 울었다.이승연은 손가락을 내밀어 고양이를 살짝 만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꿈틀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그녀는 미소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이혁재가 말했다.“여보, 얘 다 낫고 나면 집에 데려가 키우자. 이렇게 작고 못생긴 애가 혼자 힘으로 먹을 걸 찾기도 힘들고, 다른 고양이들이 받아주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얘 어떻게 살겠어.”이승연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달 후, 고양이는 건강을 회복했다.이혁재는 직접 고양이를 씻기고 구충한 뒤 집으로 데려갔다.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는 털이 윤기 나게 자랐고 살이 올라 뼈만 앙상했던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결국, 고양이는 기름지고 윤기 나는 털을 자랑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이혁재의 몸 위로 덮치는 대형 고양이가 되었다.“이런 젠장!”이혁재는 고양이의 기습에 또 당했고 숨이 턱 막힐 뻔했다.고양이가 도망치려 하자 그는 재빨리 붙잡아 들어 올리며 따졌다.“너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날 깔아뭉개려고 작정한 거야?”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야옹거리며 반응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이승연에게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기에 이혁재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고양이는 이승연이 일할 때 그녀의 발등 위에 앉아 체온으로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그녀가 서류를 검토할 때는 네 발을 모아 단정한 자세로 그녀 곁에 앉아 ‘독서’에 동참했다.때로는 앞발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중요한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이혁재는 고양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양이를 뒤집어 배를 위로 한 채 들어 올려 얼굴을 고양이 배에 묻고 한 번 흡입했다.고양이는 저항하며 네 발로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한 후, 이혁재는 정관 절제술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피임 수술’을 통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이혁재는 이 일을 이승연에게 알리지 않았다. 관련 정보를 철저히 조사한 뒤, 직접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수술은 간단했고 외래 진료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을 마친 그는 바로 퇴원했고 그날 오후에는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열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수술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이혁재는 가벼운 농담처럼 이 일을 이승연에게 털어놓았다.이승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평소 재빠른 두뇌 회전과 날카로운 눈치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혁재는 그녀가 ‘수술’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혹시 일이 심각하다고 오해했을까 봐 그녀를 안고 달래며 자세히 설명했다.“여보, 내가 요즘 아이를 갖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랐지? 피임을 해도 혹시 실수라도 생길까 봐 계속 걱정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낳든 낙태하든 둘 다 누나 몸에 무리가 갈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근본적으로 위험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이승연은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이 수술 알아. 우리 아빠가 받았거든.”그녀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그 시절에는 보통 여자가 피임 수술을 받곤 했는데 우리 아빠는 알아보니 여자가 받는 수술이 훨씬 위험하고 몸에 무리가 된다는 걸 알게 됐대. 그래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받았지.”“아빠는 우리 동네에서 피임 수술을 받은 유일한 남자였고 사람들은 우리 아빠를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남자라고 칭찬했어. 엄마도 복 받은 거라고 하셨고.”이혁재는 그녀가 아버지를 칭찬하며 은근히 자신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소파와 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