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김평안이 왜 모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모두가 무모한 김평안을 향해 혀를 끌끌 찰 때, 진서준과 도권우는 이미 정식으로 맞붙었다.도권우는 속도 우세를 살려 진서준의 검을 정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몸에 숨겨둔 암기를 꺼내어 진서준을 향해 날렸다.“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암기는 전부 독이 묻어 있어. 조금이라도 스치면 30초 이내에 식물인간이 될 거니까.”도권우는 자신만만한 말투로 자기 암기를 자랑했다.하지만 진서준은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태연하게 산책하듯이 도권우가 날리는 암기를 피하고 있었다.“서남 지역 그 악당들은 네가 부른 거지?”진서준이 암기를 피하면서 태연하게 물었다.“뭐라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도권우는 냉랭하게 웃으며 모르쇠를 놨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서준은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일단 인정하면 이후에는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알아듣지 못한 거야,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척하는 거야?”“너와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는 것보다 너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게 나을 거야.”도권우는 갑자기 속도를 내며 옷에서 하얀 가루를 한 움큼 꺼내 진서준의 눈에 뿌렸다.그러자 진서준은 즉시 뒤로 물러서며 눈을 꼭 감았다.“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도권우는 진서준의 퇴로를 막기 위해 품에서 수리검을 꺼내 날렸다.그 장면을 본 진서준은 손을 들어 참선검으로 날아오는 수리검을 잘라버렸다.하지만 도권우의 진짜 목적은 암기 공격이 아니라 그 틈을 노려 진서준의 곁으로 돌진해 공격하는 것이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진서준은 독이 묻은 단검을 손에 잡고 진서준 앞에 나타났다.단검은 진서준의 목과 불과 1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조금만 단검에 스쳐도 진서준은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절체절명의 순간, 진서준의 다른 손이 갑자기 도권우의 손을 꽉 잡았다.“어라?”도권우가 의아한 표정
“당신들 남사는 규칙을 어기려는 거예요?”배수정의 목소리가 의장석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번 4대 종문 대회에서는 장로들의 참석을 금지했고 새로 입문한 제자들만이 링에 올라갈 수 있었다.배수정이 질문을 던지자 문추원은 기운을 거두었다.“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문추원은 냉랭하게 경고하고는 돌아서서 내려갔다.“김평안, 어서 내려와!”은청준이 즉시 소리쳤다.“김평안 씨, 내려와서 좀 쉬어요. 무리하지 말고요, 아직 세 번이나 더 싸워야 해요.”조슬기도 급히 만류했다.이미 신농보다 승리를 하나 더 거머쥐었으니 진서준도 마침 쉬려고 했다.유자성과 도권우는 진짜 고수 중의 고수였다.진서준이 쉽게 이긴 것 같았지만 사실 그는 영기를 거의 다 소진했다.쉬지 않고 또 다음 경기를 치른다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천용 반지의 힘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상 천천히 하는 게 나쁠 건 없었다.“그러죠, 저도 내려가서 쉬려던 참이었습니다.”진서준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무대에서 내려왔다.진서준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이 김평안 정말 대단하네. 국안부가 대규모로 홍보했던 이유가 있었구나.”“쯧쯧,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맞네. 동북 검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네.”“장백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승리에 관심이 없는 건가?”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백이 이번 대회에서 너무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다.장백은 경기 내내 소리치지도 않았고 제자들을 링에 올리지도 않았다.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건가?그럴 리가 없겠는데?그런데 정말 한 번도 링에 안 올라가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다들 의견이 분분할 때, 신농에서 또 한 사람이 일어섰다.이번에 링에 오른 것은 신농의 리더 유지수였다.“지금 4대 종문 대회 중 세 종문은 이미 링에 올랐는데 유독 장백만이 조용하네요. 혹시 겁먹은 건가요?”유지수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장백을 지목하며 도발했다.이 말이 떨어지자 장백의 제자들
“쯧쯧...”유지수는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이렇게 예의 바르니 죽이기 아까울 정도네요.”그 말에 정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저를 죽이려고요? 유지수 씨와 저 사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요?”“없어요. 하지만 제가 일단 공격하면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될 거예요.”유지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저는 유지수 씨가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정수현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정수현은 유지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신농의 리더인 이상 실력이 약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그래서 여자를 상대로 싸워도 정수현은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그럼 시작하죠.”유지수의 손톱이 점점 길어지더니 10cm 길이에서 멈췄다.날카로운 칼날을 예상케 하는 손톱을 보며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다.정수현도 방심하지 않고 손에 든 보검을 뽑았다.다음 순간, 두 사람은 정면으로 겨루기 시작했다.장검과 손톱이 부딪치며 금속이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김평안 씨, 저 두 사람 중 누가 이길 것 같아요?”조슬기는 이 경기의 결과가 궁금해졌다.“지금 보기엔 유지수가 이길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진서준은 직설적으로 대답했다.몇 번 교전하자 유지수는 이내 주도권을 손에 잡고 상대를 압도했다.반면, 정수현은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저 여자는 누구죠? 왜 이렇게 강한 거죠?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조슬기가 머리를 긁적였다.“정말 여자라도 남자 못지않네.”신수란도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소검선을 압도하는 여자는 바로 신수란의 우상이었고 신수란도 나중에 이런 고수가 되고 싶었다.“저 여자가 이 정도로 강하다고? 수현 선배가 상대가 안 될 지경이라고?”“그러게 말이야. 수현 선배를 압도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아.”“망했다, 우리 장백이 첫 경기부터 패배하게 되었네.”장백의 제자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정수현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였다.그런데 지금 신농의 듣보잡 여자 제자가 장백의 일인자를 압도하고
“그만둬.”배수정 곁에 있던 한 노승이 급히 말렸다.유지수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배수정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지금 지현민 주지도 자리에 없는데 만약 배수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도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괜찮아요. 단순한 시합일 뿐이니까요.”배수정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유 시주님이 너무 거칠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진서준과 유지수 사이의 과거 이야기는 배수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지금 유지수가 배수정을 직접 지명해 링에 올라오라고 한 건 그 목적이 분명했다.유지수는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하지만...”유지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칼날은 눈이 없으니 평온 씨도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은 순간 술렁였다.“이 여자가 평온 스님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평온 스님은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 유명 여배우였다던데, 아마 둘 사이에 무슨 악연이 있는 모양이야.”“여긴 소림이잖아. 지현민 주지님도 지금 계시는데 저 여자가 정말 평온 스님을 죽이려고 하진 않을 거야.”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진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지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배수정을 대놓고 죽이려는 걸까?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진서준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배수정은 천천히 무대에 올라 유지수 맞은편에 섰다.둘 사이의 거리는 3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배수정, 진서준이 바로 아래서 보고 있잖아. 내가 널 죽이려고 한다면 진서준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유지수는 오직 그들 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날 혹시 알아요?”배수정은 유지수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했다.“진서준 곁에 있는 모든 여자는 난 다 알고 있어.”유지수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허사연은 이미 복수했으니 두 번째 복수 대상은 바로 너야.”복수라고?배수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유 시주님, 큰 오해를 하셨
유지수는 이를 보고 느긋하게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찰랑!수박을 자르듯, 금색 빛은 순간 산산조각 났다.유지수는 종아리에 힘을 주더니 순식간에 속도를 내며 배수정을 향해 돌진했다.벼락이 내리치듯 두 사람이 빠르게 교전한 후, 배수정의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배수정은 순간 뒤로 물러났고 시뻘건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어머나, 평온 스님이 다쳤잖아!”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평온 스님이 지현민 주지의 직계 제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평온의 실력은 동년배 무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그런데 지금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농 제자에게 상처를 입었다.진서준은 마음이 조여들며 근육이 팽팽해졌다.진서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주자청이 물었다.“김평안 씨, 혹시 평온 스님과 아는 사이인가요?”“친구입니다.”진서준은 냉랭하게 한마디 던졌다.“저 여자가 아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공격하는 걸 보니 평온 스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겠어요.”주자청이 진서준에게 귀띔했다.“네? 저 유지수라는 여자가 평온 씨를 죽이려고 한다고요? 왜요? 둘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나요?”조슬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여긴 소림이잖아요. 저 여자가 진짜 평온 씨를 죽인다면 자기도 살아남기 어려울 건데요.”신수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주최 측의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려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저 여자가 진짜 마음먹고 평온 스님을 죽이려고 한다면요?”주자청은 진서준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슬쩍 떠보았다.“그럼 내가 평온을 구할 겁니다.”진서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진서준은 절대 유지수가 배수정을 죽이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지난번 유지수가 허사연을 고문할 때, 진서준은 현장에 없었다.이번에는 절대 그런 비극이 반복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배수정,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을 거야?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거야.”유지수는 눈을
“김평안, 너 설마 경기 규칙을 깨려는 거야?”용전이 벌떡 일어나서 곧장 진서준을 가리켰다.다른 사람들도 전부 경악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저자가 감히 링에 올라가 경기를 방해하다니, 다른 종문들의 분노를 사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보아하니 저 김평안이 평온 스님과 뭔가 숨겨진 과거가 있는 것 같아.”“영웅이 미녀를 구하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다만 안타깝게도 평온 스님은 이미 불문에 귀의했지.”은청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털어놨다.“저 자식,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건가? 저렇게 경기를 방해하면 이후의 경기는 어떻게 진행하라는 거지?”만약 모두가 진서준처럼 갑자기 난입해서 경기를 막아선다면 남은 대회는 아예 진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유지수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무례하게 굴면 널 저세상에 보내 주마.”“뭐야, 네 소중한 애인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유지수가 실실 웃으며 비꼬았다.“진서준, 넌 참 한결같구나. 네 최대 약점은 너무 착하다는 거야. 지금 넌 그 여자를 구했지만 이후의 경기는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이나 해 봤어? 우승하지 못하면 천년병제련을 얻을 수 없고 자연스레 진서라도 살릴 수 없어. 근데 진서라와 이 여자 사이에서 넌 이 여자를 선택했어.”이 말에 배수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진서준이 천년병제련을 얻기 위해 이 대회에 참석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 약초는 지금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검은 옷의 침입자가 들이닥쳤던 그날 밤, 주지가 직접 확인했을 때도 천년병제련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내가 남겨진 선택지가 단 두 개뿐이라고 생각해?”진서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웃기고 있네, 설마 네가 다른 곳에서 천년병제련을 구했단 말이야?”유지수는 여전히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진서라의 독은 내가 직접 놓은 거야. 천년병제련은 필수적인 약재지. 그게 없으면 진서라를 구할 방법은 없어.”“서라는 내가 반드시 구할 거야.
“진서준이 누구지?”은청준 일행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김평안이라는 신분이 가짜였던 말이야?”“잘 들어, 진서준. 네 주변의 여자들, 내가 하나씩 다 죽여버릴 거야. 오늘 날 죽이지 않으면 넌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유지수의 눈빛은 광기에 휩싸였고 그녀의 미친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소인은 건드려도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는 옛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좋아, 그럼 네 바람대로 해주지.”진서준이 담담하게 받아쳤다.“네 마음대로 날뛰게 놔둘 것 같아? 네가 지수를 죽이면 바로 네 정체를 폭로할 거야. 그땐 너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용전이 이를 갈며 위협했다.“굳이 네가 폭로할 필요도 없어. 난 이미 이 신분이 지겨워졌으니까.”진서준은 태연하게 손을 뻗어 얼굴에 쓴 인피면구를 벗어던졌다.“대박, 진짜 진 마스터잖아.”“진 마스터랑 김평안이 같은 사람이었다고?.”“이게 말이 돼? 한 사람이 검도, 횡련, 무도, 술법 네 가지를 다 정통했다고> 그럼 우리 같은 재능 없는 놈들은 대체 뭐 먹고 살라는 거야?”진서준의 젊은 얼굴이 드러나자 경기장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세 종문의 장로들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이 진서준이라는 청년은 아무리 봐도 20년 전 그 사람을 너무 닮아 있었다.혹시 이 진서준이 그 사람의 후손인 건가?“맞다, 이분이 바로 국경에서 나랑 수란 언니를 구해주셨던 그 은인이잖아.”조슬기가 눈을 반짝이며 단번에 진서준을 알아봤다.“맞네요.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네요.”신수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진서준과 김평안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걸 신수란이 예상할 리 없었다.“김평안이 진서준이었네. 그러니 배수정이 저렇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군.”양지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진서준이 주동적으로 인피면구를 벗는 모습을 본 용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 녀석이 오늘 진짜 죽을 각오를 한 건가?자기를 노리는 종문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꺼져.
이번엔 유지수가 진짜 당황해했다.유지수가 진서준의 눈에서 강렬한 살의를 읽었기 때문이었다.진서준은 지금 진짜 유지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진서준, 정신 차려! 내가 죽으면 구지범은 절대 네 아버지를 풀어주지 않을 거야!”유지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체내의 강기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그 느낌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구지범의 목적은 이미 알고 있어. 그놈은 단지 우리 아버지에게서 장청결을 얻으려는 것뿐이야.”진서준은 쌀쌀하게 말을 이었다.“널 풀어준 건 우리 아버지 흔적을 찾는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술수에 불과했어. 유지수, 넌 내가 일부러 널 살려줬다고 착각했어?”진서준이 말하는 동안, 용전이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우리 신농을 위해 이 배신자를 잡아. 선뜻 나서는 자에게는 우리 신농이 큰 빚을 지는 거야.”그 말을 듣자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대한민국 최상급 종문 신농이 큰 빚을 진다면 이후 대한민국에서 거의 법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당신은 신농의 한낱 제자일 뿐인데 어떻게 감히 신농을 대표해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죠?”조슬기가 단칼에 반박했다.진서준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은 조슬기는 진서준이 다수에게 포위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용전의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졌다.조슬기가 자기 계획을 방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조슬기 씨 말이 맞아. 신농 제자 따위가 감히 신농을 대표할 자격이 있겠나?”“그냥 우린 지켜보자고. 무엇보다 저 용존 실력이 너무 강해.”“신농 제자들을 한 방에 처리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용전은 분통이 터졌다.용전은 이제라도 사실을 밝힐지 고민하고 있었다.진서준에게 선법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용전이 굳이 부추기지 않아도 이들이 알아서 덤벼들 것이다.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용전은 선법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도지아는 그 표정이 왠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부모님이 나가자 집 안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우리 집에 손님이 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부모님이 좀 들뜨셨나 봐.”도지아가 무심하게 해명했다.“괜찮아, 이해해. 우리 집도 손님 올 때마다 우리 엄마 엄청 챙기시거든.”진서준이 웃으며 대응했다.“맞다, 아까 우리 동생 봤을 때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도지아가 본론을 꺼냈다.“이상한 점? 글쎄, 딱히 못 느꼈는데?”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애초에 네 동생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아까 네가 유흥업소에 갇혔을 때, 걔가 엄승현 찾아가서 인맥을 동원해 널 구해달라고 부탁했어.”도지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우리 동생이 진짜 요즘 이상해. 말로는 독설을 퍼붓는데 속은 여전히 착해.”“혹시 일부러 너희를 멀리하는 거거나 너희를 보호하려는 거 아닐까?”진서준이 나름대로 추측했다.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뭔가 압박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걸 수도 있었다.“설마 민수가 잡혀갔을 때 하경범 부하들이 협박이라도 한 걸까?”도지아도 진서준의 추측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날, 도지아의 부모와 도민수는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민수가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전화해서 집에 오라고 해야겠어.”도지아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걸어도 도민수가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꺼버렸다.“이 자식이 정말...”도지아가 인상을 찌푸렸다.“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한테는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일단 그냥 내버려둬. 말하고 싶으면 알아서 말하겠지.”진서준이 위로하듯 말했다.한편, 노래방의 한 방에서 도민수는 테이블에 엎드려 하얀 가루를 탐욕스럽게 들이마시고 있었다.그러고는 완전히 취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때? 기분 좋아?”노란 머리 청년이 민수의 머리채를 잡고 비열하게 웃었다.
다들 그 말을 듣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진서준이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깔끔한 상태로 나올 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엄승현은 눈을 굴리더니 이내 눈치 빠르게 잽싸게 뛰어가 아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호랑이님, 아까 소란을 일으킨 그놈 찾으시는 거죠? 제가 어디 갔는지 압니다. 당장 안내해 드릴게요.”“뭐라고?”조호의 얼굴이 싹 어두워졌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눈빛이 번뜩였다.엄승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호랑이 씨, 그놈 진짜 제대로 혼내줘야 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지금 바로 길을 안내할게요.”“닥쳐, 이놈아.”철썩!조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엄승현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미친놈아, 죽고 싶으면 혼자 뒤져. 왜 애꿎은 사람까지 끌어들여? 꺼져!”힘들게 저 귀신 같은 무시무시한 녀석을 보내버렸는데 어디서 굴러온 개념 없는 놈이 다시 자기를 이끌고 저 녀석에게로 데려가겠다는 거지?조씨 가문 거물도 없는데 조호 본인이 감히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조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승현은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뭐, 뭐야? 호랑이가 지금 겁먹은 거야?”“이상하네, 저놈이 대단한 배경이라도 있나?”“말도 안 돼. 저놈 그냥 외지인이잖아. 배경은 개뿔.”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엄승현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틀림없이 호랑이가 직접 손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동부 구역은 호랑이 구역이잖아. 근데 내가 길을 안내하면 체면이 안 서잖아. 소문이 퍼지면 체면도 구겨질 거고.”“승현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다들 엄승현의 말에 공감하자 엄승현은 자신감을 되찾고 비웃었다.“두고 봐. 오늘 밤 도민수 그 녀석 가족이 다 뒤질 거야.”20분 후.진서준과 도지아는 차를 타고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건물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도지아 집 문 앞에 섰다.“엄마
갑자기 누군가 봉쇄된 유흥업소에서 걸어 나오니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어라? 진짜 저 녀석이네? 근데 왜 멀쩡하지?”엄승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상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조호가 직접 나서서 판을 깔았다면 피를 안 보고 끝날 리가 없었다.진서준이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만신창이가 됐어야 정상인데 지금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했다.“어서 나랑 가서 진서준한테 감사하다고 하자.”도지아가 도민수를 잡아끌었다.“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난 안 가.”도민수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뭐야, 너 왜 그래? 아까는 진서준을 누구보다 더 걱정했잖아?”동생의 앞뒤 다른 태도에 도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닥치고 신경 꺼.”도민수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동생의 거친 행동에 도지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진서준을 찾아갔다.“이상하네, 저 녀석 진짜로 멀쩡하잖아?”엄승현 일행은 의아해하며 웅성거렸다.“승현 오빠,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세요?”“나도 몰라.”엄승현은 고개를 저었다.“혹시 저 녀석이 호랑이한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한 거 아닐까요? 호랑이가 저 녀석을 저렇게 고분고분 풀어 줄 이유가 없잖아요?”단발머리 여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가능성 있어. 아니면 어떻게 호랑이의 구역에서 저렇게 멀쩡하게 나왔겠어?”“그래, 직접 물어보자.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떠나 진서준 쪽으로 걸어갔다.“진서준, 괜찮아?”도지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다친 것처럼 보여?”진서준이 홀가분한 말투로 되물었다.“이깟 조무래기 건달도 못 이길 거면 내가 감히 하경범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그렇긴 해.”도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진서준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도지아도 잘 몰랐다.황예은에게 슬쩍 떠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황당했다.황예은의 입에서 나온 진서준은 거의 만능 인간이었다.세상에 정말 그런 남자가 존재할까?“야, 너 대체 어떻게 호랑
“뭐? 네 개가 되라고?”정장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했다.“네가 뭔데 우리 아버지를 개 취급해? 거울이나 보고 네 꼴부터 확인해.”조호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래, 네가 종사인 건 인정해. 하지만 우리 귀도파에도 종사가 없는 게 아니야. 종사라는 이유로 날 얕볼 생각은 하지 마. 그리고 우리 귀도파도 그냥 조직이 아니야.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진서준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그래? 그럼 너희 귀도파 주인은 누구야?”조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이 청년이 하는 말이 참 기분이 나빴다.진짜 주인이라니,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기분 나쁘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조호가 이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는 건 귀도파 뒤에 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르벨 하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조호가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익숙한 가문의 이름에 진서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결국 하씨 가문에 빌붙은 거였군.”“빌붙다니? 우리 조씨 가문은 단순히 의지하는 게 아니야. 하씨 가문에서 우리 조씨 가문의 대단한 인물을 공양하고 있거든. 그분은 대종사야.”조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래? 대종사였어? 하씨 가문에서 그 대종사를 공양하고 있어?”진서준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짙은 흥미를 보였다.“그럼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인물 말이야.”“좋게 말하는데 너 선 넘지 마. 얼른 여기서 나가. 네가 종사라 오늘은 특별히 봐주겠어.”조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근데 계속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 가문 거물을 보겠다고 떠들면 내가 장담하건대 넌 무조건 죽을 거야.”종사와 대종사는 하늘과 땅 차이처럼 격차가 컸다.이 애송이가 조씨 가문의 거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건 조호가 보기엔 한낱 망상일 뿐이었다.“상관없어. 마침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잘 됐어.”진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언제든 너희 집안 그 거물 불러내. 하씨 가문이 공양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좀 해보자고.”“죽고
“그럼 됐네요.”정장 남자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흥, 우리 아버지한테 개기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어.”하지만 정장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누군가가 공중을 가르며 정장 남자의 옆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뭐지?”조호 부자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날아간 게 귀도파 정예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금 그 정예는 죽은 개처럼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뭐야, 이게?”조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조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조금 전까지 우쭐대며 다가가던 정예들이 전부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내고 있었다.반면, 진서준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 광경을 본 조호의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몇 초 만에 자기 정예 부하들이 전부 나가떨어졌다.진서준이 설마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네 부하들, 영 쓸모가 없는데?”진서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네 차례인가?”조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이곳 르벨의 고수들은 죄다 알고 있는 조호였지만 이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설마 외지에서 일부러 찾아와 귀도파와 시비를 걸려는 놈인가?“대체 넌 누구야?”조호가 쌀쌀하게 물었다.“지금에서야 내 신분이 궁금해졌어? 늦어도 한참 늦었어.”진서준이 여유롭게 대답했다.“경고하지. 르벨 동부 구역은 내 구역이야. 설령 네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내 구역에서 깽판 치면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조호가 굳은 얼굴로 위협했다.“그래? 그럼 네가 어떻게 날 못 나가게 하는지 한번 보자.”진서준이 가볍게 웃었다.조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네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총알은 못 피하겠지?”옆에서 정장 남자도 한숨을 돌리며 비웃었다.“방금까지 그렇게 까불더니 총 앞에서도 한번 까불어 봐.”지금 시대에서 총을 손에 쥔 자가 곧 생사를 결정하는 법이다.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일반인은 총알 한 방이면 끝장
“문 닫아, 전원 퇴장시켜.”조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즉시 움직였다.순식간에 유흥업소에서 즐기던 사람들이 전부 나갔고 유흥업소 전체가 텅 비었다.감시 카메라는 전부 끊겼고 유흥업소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됐다.이유도 모른 채 쫓겨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렸다.“대체 누가 호랑이 구역에서 깽판 친 거야?”“호랑이가 모든 사람을 내쫓으면 그건 누군가 죽는다는 뜻인데?”“조용히 살면 안 돼? 왜 하필 호랑이를 잘못 건드려서...”사람들은 몇 마디 수군거리고 이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이봐 청년, 생각보다 꽤 침착해 보이네.”조호가 진서준을 보며 의외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지에 지렸을 텐데 이 녀석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꼼짝도 안 했다.“하지만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조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삿날이라고? 나한테 하는 소리 맞아?”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하는 소리라도 된다는 거야?”정장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아까 그렇게 잘난 척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까불어 봐.”진서준은 정장 남자를 한번 쓱 보더니 진지하게 경고했다.“입단속 잘해. 안 그러면 조금 있다가 평생 말할 수 없게 될 거니까.”그 말에 조호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자식이 정말 건방지네. 좋아, 네 오만함을 봐서 특별히 기회를 주지. 스스로 팔 하나 자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게.”조호가 칼을 꺼내 진서준 앞에 던졌다.그런데 진서준은 가볍게 웃더니 주머니에서 천기각 각주의 옥패를 꺼냈다.“이거 본 적 있어?”“그냥 싸구려 옥패 아니야? 뭐야,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늦었다, 이 자식아.”정장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조호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서준은 옥패를 집어넣었다.이 무리는 천기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그렇겠지. 애초에 그 노인네가 지하 세계를 누빈 것도 아닌데 이런 조폭들을 천기각에 끌어들이진
“됐어, 다들 그만 좀 해.”이때 엄승현이 나서서 중재하기 시작했다.“다들 아까 일 때문에 민감해진 것 같은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자.”“엄승현, 너 인맥 넓잖아? 아까 그 사람 구해낼 수 있어?”도민수가 갑자기 물었다.“뭐? 무슨 소리야? 나보고 호랑이 손아귀에서 사람을 빼내라고?”엄승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이 녀석이 호랑이의 아들을 때려놓고 이제 와서 엄승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사실 방금 엄승현이 자기 목숨 건진 것도 기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민수야, 그럴 필요 없어. 진서준은 괜찮을 거야.”도지아가 조용히 말했다.“헛소리 마. 상대는 호랑이라고. 동부 구역에서 호랑이는 그야말로 지하의 황제야.”도민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분한테 찍히면 대단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무조건 죽는다고.”자기 동생이 아직도 착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아채자 도지아는 가슴이 뭉클했다.“내가 왜 나서야 하는데?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엄승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사실 도와주고 싶어도 도무지 도울 수 없었다.호랑이가 마음만 먹으면 엄씨 가문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적어도 저 사람은 우리를 구해줬어.”도민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팩트를 말했다.“내가 구해달라고 했어? 애초에 저놈이 괜히 주먹을 휘둘러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저놈이 흥분하지만 않았다면 우린 진작에 저기서 나왔어.”엄승현이 뻔뻔하게 말했다.“맞아, 자기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제 곧 처맞을 텐데 아주 꼴좋네.”단발머리 여자가 대놓고 비웃었다.그들의 차가운 태도에 도민수는 분노가 치밀었다.“민수야, 넌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진서준이 무사할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도지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누나를 믿으라고?”도민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어떻게 누나를 믿어? 며칠 전 일은 벌써 잊었어?”도지아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잊지 않았어. 근데 결국 다들 무사히 돌아왔잖아.”“무사히 돌아왔다고?”
진서준이 호랑이의 아들까지 후려치는 걸 보자 사람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너 미쳤어? 조 도련님은 호랑이 아들이라고. 이분을 때린 건 곧 호랑이의 얼굴에 뺨을 때린 거랑 다름없다고.”엄승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조 도련님, 복수할 대상을 잘못 찾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저 사람들이지 우린 아무 상관 없습니다.”“맞아요, 조 도련님. 저희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장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이 쪽팔린 놈들아, 다 꺼져.”정장 남자가 침을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이렇게까지 비굴한 놈들은 정장 남자도 처음 봤다.“어서 가자, 다들 서둘러.”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 기쁨에 찬 얼굴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너희도 가. 여긴 나 혼자로도 충분해.”진서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래도...”도지아는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여기 남아봐야 나한테 짐만 돼. 그냥 가.”진서준이 단호하게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그 말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도지아는 진서준을 살짝 째려봤다.“알겠어. 조심해. 가자, 민수야. 여긴 진서준한테 맡기자.”도지아는 도민수의 팔을 끌며 방을 나섰다.같은 시각, 정장 남자도 전화를 마쳤다.정장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노려봤다.“어디 한번 보자. 네가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인지. 우리 아버지가 오시면 그때도 지금처럼 잘난 척할 수 있길 바랄게.”진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조호가 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엄승현 일행은 유흥업소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그들은 창문을 통해 건물 앞에 줄지어 선 승합차들을 확인했다.그 차에서 강철로 된 칼을 든 건장한 남자들이 쏟아져 나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어휴,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죽었어.”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아까 정장 남자가 엄승현 일행을 놔주지 않았다면 저 방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야, 도민수. 그냥 네 누나한테 조 도련님이랑 한 달만 있으라고 해. 그럼 우린 다 여기서 나갈 수 있잖아.”“그래, 네 누나가 조 도련님이랑 잘 되면 넌 조 도련님 처남이 되는 거야. 그건 일반 신분이 아니야.”“맞아, 너희 집안이 이 기회를 잡고 르벨에서 우뚝 서는 거야.”다들 자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민수를 설득하려 했다.“너희들 인간 맞아? 우리 누나를 희생해서 너희 목숨을 구하겠다고?”도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자기 친구들이 이 정도로 역겨운 사람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 일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가 조 도련님을 때리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 꼴 났겠어?”정장 남자가 엉덩이를 만졌던 여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까 저놈이 네 엉덩이 만졌을 때, 네가 먼저 성추행이라고 소리쳤잖아?”도민수는 어이가 없었다.아까 기껏 도와줬더니 지금 와서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있었다.정말 배은망덕하긴 짝이 없었다.“그때 저 사람이 조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난 절대 그런 말 안 했어.”여자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너희들 정말 대박이다.”도민수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너희랑 같은 학교 다녔다는 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수치야.”“조 도련님, 우리 모두 도민수 누나가 조 도련님을 모시는 걸로 동의했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를 풀어주세요.”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도지아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진서준, 부탁할게.”도지아는 진서준을 바라봤다.“알았어. 넌 먼저 동생을 데리고 나가 있어.”진서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도민수의 병을 봐주는 거였는데 주먹을 또 휘두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 여자는 못 건드려.”진서준은 무심한 말투로 정장 남자에게 경고했다.“넌 또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정장 남자는 진서준의 건방진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