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남사는 규칙을 어기려는 거예요?”배수정의 목소리가 의장석에서 천천히 울려 퍼졌다.이번 4대 종문 대회에서는 장로들의 참석을 금지했고 새로 입문한 제자들만이 링에 올라갈 수 있었다.배수정이 질문을 던지자 문추원은 기운을 거두었다.“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문추원은 냉랭하게 경고하고는 돌아서서 내려갔다.“김평안, 어서 내려와!”은청준이 즉시 소리쳤다.“김평안 씨, 내려와서 좀 쉬어요. 무리하지 말고요, 아직 세 번이나 더 싸워야 해요.”조슬기도 급히 만류했다.이미 신농보다 승리를 하나 더 거머쥐었으니 진서준도 마침 쉬려고 했다.유자성과 도권우는 진짜 고수 중의 고수였다.진서준이 쉽게 이긴 것 같았지만 사실 그는 영기를 거의 다 소진했다.쉬지 않고 또 다음 경기를 치른다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천용 반지의 힘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상 천천히 하는 게 나쁠 건 없었다.“그러죠, 저도 내려가서 쉬려던 참이었습니다.”진서준은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무대에서 내려왔다.진서준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이 김평안 정말 대단하네. 국안부가 대규모로 홍보했던 이유가 있었구나.”“쯧쯧,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맞네. 동북 검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네.”“장백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승리에 관심이 없는 건가?”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백이 이번 대회에서 너무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다.장백은 경기 내내 소리치지도 않았고 제자들을 링에 올리지도 않았다.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건가?그럴 리가 없겠는데?그런데 정말 한 번도 링에 안 올라가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다들 의견이 분분할 때, 신농에서 또 한 사람이 일어섰다.이번에 링에 오른 것은 신농의 리더 유지수였다.“지금 4대 종문 대회 중 세 종문은 이미 링에 올랐는데 유독 장백만이 조용하네요. 혹시 겁먹은 건가요?”유지수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장백을 지목하며 도발했다.이 말이 떨어지자 장백의 제자들
“쯧쯧...”유지수는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이렇게 예의 바르니 죽이기 아까울 정도네요.”그 말에 정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저를 죽이려고요? 유지수 씨와 저 사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요?”“없어요. 하지만 제가 일단 공격하면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될 거예요.”유지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저는 유지수 씨가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정수현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정수현은 유지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가 신농의 리더인 이상 실력이 약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그래서 여자를 상대로 싸워도 정수현은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그럼 시작하죠.”유지수의 손톱이 점점 길어지더니 10cm 길이에서 멈췄다.날카로운 칼날을 예상케 하는 손톱을 보며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다.정수현도 방심하지 않고 손에 든 보검을 뽑았다.다음 순간, 두 사람은 정면으로 겨루기 시작했다.장검과 손톱이 부딪치며 금속이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김평안 씨, 저 두 사람 중 누가 이길 것 같아요?”조슬기는 이 경기의 결과가 궁금해졌다.“지금 보기엔 유지수가 이길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진서준은 직설적으로 대답했다.몇 번 교전하자 유지수는 이내 주도권을 손에 잡고 상대를 압도했다.반면, 정수현은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저 여자는 누구죠? 왜 이렇게 강한 거죠?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조슬기가 머리를 긁적였다.“정말 여자라도 남자 못지않네.”신수란도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소검선을 압도하는 여자는 바로 신수란의 우상이었고 신수란도 나중에 이런 고수가 되고 싶었다.“저 여자가 이 정도로 강하다고? 수현 선배가 상대가 안 될 지경이라고?”“그러게 말이야. 수현 선배를 압도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아.”“망했다, 우리 장백이 첫 경기부터 패배하게 되었네.”장백의 제자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정수현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였다.그런데 지금 신농의 듣보잡 여자 제자가 장백의 일인자를 압도하고
“그만둬.”배수정 곁에 있던 한 노승이 급히 말렸다.유지수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배수정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지금 지현민 주지도 자리에 없는데 만약 배수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구도 그 책임을 질 수 없었다.“괜찮아요. 단순한 시합일 뿐이니까요.”배수정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유 시주님이 너무 거칠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진서준과 유지수 사이의 과거 이야기는 배수정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지금 유지수가 배수정을 직접 지명해 링에 올라오라고 한 건 그 목적이 분명했다.유지수는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하지만...”유지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칼날은 눈이 없으니 평온 씨도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은 순간 술렁였다.“이 여자가 평온 스님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평온 스님은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 유명 여배우였다던데, 아마 둘 사이에 무슨 악연이 있는 모양이야.”“여긴 소림이잖아. 지현민 주지님도 지금 계시는데 저 여자가 정말 평온 스님을 죽이려고 하진 않을 거야.”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진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지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배수정을 대놓고 죽이려는 걸까?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진서준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배수정은 천천히 무대에 올라 유지수 맞은편에 섰다.둘 사이의 거리는 3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배수정, 진서준이 바로 아래서 보고 있잖아. 내가 널 죽이려고 한다면 진서준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유지수는 오직 그들 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날 혹시 알아요?”배수정은 유지수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했다.“진서준 곁에 있는 모든 여자는 난 다 알고 있어.”유지수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허사연은 이미 복수했으니 두 번째 복수 대상은 바로 너야.”복수라고?배수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유 시주님, 큰 오해를 하셨
유지수는 이를 보고 느긋하게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찰랑!수박을 자르듯, 금색 빛은 순간 산산조각 났다.유지수는 종아리에 힘을 주더니 순식간에 속도를 내며 배수정을 향해 돌진했다.벼락이 내리치듯 두 사람이 빠르게 교전한 후, 배수정의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배수정은 순간 뒤로 물러났고 시뻘건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어머나, 평온 스님이 다쳤잖아!”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평온 스님이 지현민 주지의 직계 제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평온의 실력은 동년배 무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그런데 지금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신농 제자에게 상처를 입었다.진서준은 마음이 조여들며 근육이 팽팽해졌다.진서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주자청이 물었다.“김평안 씨, 혹시 평온 스님과 아는 사이인가요?”“친구입니다.”진서준은 냉랭하게 한마디 던졌다.“저 여자가 아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공격하는 걸 보니 평온 스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겠어요.”주자청이 진서준에게 귀띔했다.“네? 저 유지수라는 여자가 평온 씨를 죽이려고 한다고요? 왜요? 둘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나요?”조슬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여긴 소림이잖아요. 저 여자가 진짜 평온 씨를 죽인다면 자기도 살아남기 어려울 건데요.”신수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주최 측의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려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저 여자가 진짜 마음먹고 평온 스님을 죽이려고 한다면요?”주자청은 진서준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슬쩍 떠보았다.“그럼 내가 평온을 구할 겁니다.”진서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진서준은 절대 유지수가 배수정을 죽이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지난번 유지수가 허사연을 고문할 때, 진서준은 현장에 없었다.이번에는 절대 그런 비극이 반복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배수정,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을 거야?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거야.”유지수는 눈을
“김평안, 너 설마 경기 규칙을 깨려는 거야?”용전이 벌떡 일어나서 곧장 진서준을 가리켰다.다른 사람들도 전부 경악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저자가 감히 링에 올라가 경기를 방해하다니, 다른 종문들의 분노를 사는 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보아하니 저 김평안이 평온 스님과 뭔가 숨겨진 과거가 있는 것 같아.”“영웅이 미녀를 구하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다만 안타깝게도 평온 스님은 이미 불문에 귀의했지.”은청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털어놨다.“저 자식,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건가? 저렇게 경기를 방해하면 이후의 경기는 어떻게 진행하라는 거지?”만약 모두가 진서준처럼 갑자기 난입해서 경기를 막아선다면 남은 대회는 아예 진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유지수를 바라보았다.“더 이상 무례하게 굴면 널 저세상에 보내 주마.”“뭐야, 네 소중한 애인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유지수가 실실 웃으며 비꼬았다.“진서준, 넌 참 한결같구나. 네 최대 약점은 너무 착하다는 거야. 지금 넌 그 여자를 구했지만 이후의 경기는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이나 해 봤어? 우승하지 못하면 천년병제련을 얻을 수 없고 자연스레 진서라도 살릴 수 없어. 근데 진서라와 이 여자 사이에서 넌 이 여자를 선택했어.”이 말에 배수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진서준이 천년병제련을 얻기 위해 이 대회에 참석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그 약초는 지금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검은 옷의 침입자가 들이닥쳤던 그날 밤, 주지가 직접 확인했을 때도 천년병제련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내가 남겨진 선택지가 단 두 개뿐이라고 생각해?”진서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웃기고 있네, 설마 네가 다른 곳에서 천년병제련을 구했단 말이야?”유지수는 여전히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진서라의 독은 내가 직접 놓은 거야. 천년병제련은 필수적인 약재지. 그게 없으면 진서라를 구할 방법은 없어.”“서라는 내가 반드시 구할 거야.
“진서준이 누구지?”은청준 일행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김평안이라는 신분이 가짜였던 말이야?”“잘 들어, 진서준. 네 주변의 여자들, 내가 하나씩 다 죽여버릴 거야. 오늘 날 죽이지 않으면 넌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유지수의 눈빛은 광기에 휩싸였고 그녀의 미친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소인은 건드려도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는 옛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좋아, 그럼 네 바람대로 해주지.”진서준이 담담하게 받아쳤다.“네 마음대로 날뛰게 놔둘 것 같아? 네가 지수를 죽이면 바로 네 정체를 폭로할 거야. 그땐 너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용전이 이를 갈며 위협했다.“굳이 네가 폭로할 필요도 없어. 난 이미 이 신분이 지겨워졌으니까.”진서준은 태연하게 손을 뻗어 얼굴에 쓴 인피면구를 벗어던졌다.“대박, 진짜 진 마스터잖아.”“진 마스터랑 김평안이 같은 사람이었다고?.”“이게 말이 돼? 한 사람이 검도, 횡련, 무도, 술법 네 가지를 다 정통했다고> 그럼 우리 같은 재능 없는 놈들은 대체 뭐 먹고 살라는 거야?”진서준의 젊은 얼굴이 드러나자 경기장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세 종문의 장로들은 진서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이 진서준이라는 청년은 아무리 봐도 20년 전 그 사람을 너무 닮아 있었다.혹시 이 진서준이 그 사람의 후손인 건가?“맞다, 이분이 바로 국경에서 나랑 수란 언니를 구해주셨던 그 은인이잖아.”조슬기가 눈을 반짝이며 단번에 진서준을 알아봤다.“맞네요.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네요.”신수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진서준과 김평안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걸 신수란이 예상할 리 없었다.“김평안이 진서준이었네. 그러니 배수정이 저렇게 신경 쓰고 있었던 거군.”양지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진서준이 주동적으로 인피면구를 벗는 모습을 본 용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이 녀석이 오늘 진짜 죽을 각오를 한 건가?자기를 노리는 종문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꺼져.
이번엔 유지수가 진짜 당황해했다.유지수가 진서준의 눈에서 강렬한 살의를 읽었기 때문이었다.진서준은 지금 진짜 유지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진서준, 정신 차려! 내가 죽으면 구지범은 절대 네 아버지를 풀어주지 않을 거야!”유지수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체내의 강기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그 느낌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구지범의 목적은 이미 알고 있어. 그놈은 단지 우리 아버지에게서 장청결을 얻으려는 것뿐이야.”진서준은 쌀쌀하게 말을 이었다.“널 풀어준 건 우리 아버지 흔적을 찾는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술수에 불과했어. 유지수, 넌 내가 일부러 널 살려줬다고 착각했어?”진서준이 말하는 동안, 용전이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우리 신농을 위해 이 배신자를 잡아. 선뜻 나서는 자에게는 우리 신농이 큰 빚을 지는 거야.”그 말을 듣자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대한민국 최상급 종문 신농이 큰 빚을 진다면 이후 대한민국에서 거의 법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당신은 신농의 한낱 제자일 뿐인데 어떻게 감히 신농을 대표해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죠?”조슬기가 단칼에 반박했다.진서준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은 조슬기는 진서준이 다수에게 포위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용전의 얼굴이 시퍼렇게 굳어졌다.조슬기가 자기 계획을 방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조슬기 씨 말이 맞아. 신농 제자 따위가 감히 신농을 대표할 자격이 있겠나?”“그냥 우린 지켜보자고. 무엇보다 저 용존 실력이 너무 강해.”“신농 제자들을 한 방에 처리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용전은 분통이 터졌다.용전은 이제라도 사실을 밝힐지 고민하고 있었다.진서준에게 선법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용전이 굳이 부추기지 않아도 이들이 알아서 덤벼들 것이다.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용전은 선법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승려는 진서준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 기운에 짓눌려 한 걸음 내딛는 것도 힘들어졌고 결국 진서준의 손바닥에 맞아 날아가듯 튕겨 나갔다.“감히 우리 승려를 공격해?”다른 소림 승려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겹겹이 둘러쌌다.“진 시주님, 이만 물러나세요.”황금 가사를 두른 승려가 앞으로 나서며 설득했다.이 승려는 소림 열여덟 금강 중 한 명이었는데 천의방에 오를 정도로 실력이 강력한 인물이었다.“주 장로님, 어서 진서준 오빠를 구해주세요.”진서준이 승려들에게 포위당하자 조슬기가 초조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다.“저 녀석이 우릴 전부 속였잖아. 애초에 수상쩍었는데 왜 굳이 구해줘야 해?”“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자를 학대하는데, 저런 놈을 왜 우리가 도와야 하지?”“슬기 후배, 너도 정신 좀 차려. 저런 미친놈은 여기서 죽는 게 좋은 일이야.”곤륜 제자들이 일제히 진서준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며 소림 승려가 죽이는 게 정당하다고 여겼다.“조슬기 아가씨, 저는 변경에서 저 녀석을 만났을 때부터 뭔가 수상쩍다고 생각했어요.”신수란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여자를 이렇게까지 학대하는데 남자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맞나요?”모두가 진서준을 비난했지만 아무도 진서준이 왜 이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여러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조슬기가 분노를 터뜨렸다.“진서준 오빠가 당신들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적대하는 거죠?”“조슬기 아가씨, 그럼 저 녀석이 여자를 죽도록 패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진서준 오빠가 저러는 건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요?”신수란은 여전히 진서준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얼씨구, 소림이 작정하고 오늘 끝까지 남의 일에 간섭하려 한다는 거지?”진서준이 금강을 노려보며 물었다.“시주님, 살생을 멈추세요.”“살생을 멈추라고? 말은 참 쉽군.”
“고생하는 건 괜찮았어. 하지만 문제는 유명해지자마자 우리 사장이 나한테 권력층들을 접대하라고 시켰다는 거야. 심지어 일반 접대도 아니고 성접대였어. 난 당연히 거절했지. 그랬더니 별의별 수단을 다 써서 협박하고 회유하더라고. 결국 화가 나서 계약을 해지했지만 사장은 끝까지 날 놓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몰래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결국 또 찾아온 거야.”말을 마친 조수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 뒤에 감춰진 조수아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톱스타? 영화제 여우주연상? 그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연예계는 정치판 다음으로 더러운 곳이었다.조수아가 신념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도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이 썩을 놈들, 감히 우리 수아에게 성접대를 강요해?”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거친 욕을 내뱉었다.“완전 미친놈들이네. 계약까지 해지했는데도 이 정도로 집착한다고? 수아야, 걱정 마. 네가 어떤 사장을 건드렸든 우리가 책임지고 널 지켜줄게.”장주완이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하자 조수아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얘들아, 정말 고마워.”“그래서 그 회사 이름이 뭐야?”보라색 원피스 여자가 물었다.“에리 스튜디오야. 사장 성은 박씨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박씨에 에리 스튜디오라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오직 한 가문이 떠오르게 된다.바로 명주시 박씨 가문이었다.그 가문은 대한민국 최상위 재벌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가문이었다.심지어 모두가 매일 쓰는 결제 앱조차 박씨 가문이 만든 거였다.조수아의 사장이 확실히 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뭐야? 왜 다들 그런 얼굴이야?”조수아는 모두의 이상한 반응을 보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조수아는 오랫동안 촬영에만 매진했기에 대한민국 명문대가에 관해 잘 요해하지 못했다.그러니 자연스레 박씨 가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
경호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조수아를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동작 그만!”장주완이 벌떡 일어서더니 살기가 가득한 띤 얼굴로 경고했다.“딱 3초 줄 테니까 당장 꺼져. 안 그러면 내가 너희를 가만 안 놔둘 거야.”“맞아, 우리 앞에서 사람을 끌고 가겠다고? 우릴 뭐로 보는 거야?”다른 남자도 맞장구쳤다.조수아는 이 모임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비록 김혜민처럼 집안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완벽한 여신이었다.이 상황에서 영웅이 되어 조수아를 구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평생 자랑할 무용담이 될 터였다.“흥, 너희 주제에 영웅이 미녀를 구하는 판타지를 꿈꾸는 거야?”중년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좋게 좋게 말할 때 알아서 밥이나 처먹어. 안 그러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중년 남자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두 남자를 위협했다.“웃기고 자빠졌네. 수아 일이자 내 일이야. 내가 있는 한 너희는 수아를 끌고 갈 꿈이나 깨.”장주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맞섰다.그의 당당한 태도에 현장에 있던 여자들의 눈에 경외심이 넘쳤다.위험한 순간에도 앞장서는 남자야말로 진짜 완벽한 남자였다.반면, 김혜민의 남자친구 진서준은 아직도 묵묵히 밥 먹고 있었다.이 차이는 정말 엄청나게 컸다.“좋게 말할 때 안 듣는다는 거지? 싸가지 없는 놈들, 이놈 다리나 하나씩 부러뜨려서 내던져.”중년 남자가 격노하며 명령을 내리자 경호원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하, 경호원 주제에 감히 나한테 덤벼? 나 혼자서도 너희를 상대하기엔 충분하거든.”장주완이 코웃음을 치며 혼자서 경호원들과 맞섰다.30초도 채 안 걸려 경호원들은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졌다.“주먹질 좀 한다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 생각을 한 거야?”중년 남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너,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네가 누군지 내가 알 이유가 있어?”장주완이 그대로 중년 남자의 왼쪽 눈가를 향해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중년 남자의 왼쪽 눈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무도라고? 혜민아, 너 아직도 어린애 같네.”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친구로서 한마디 하자면 남자는 믿음직한 사람을 골라야 해. 예를 들면 장주완 같은 남자 말이야. 유학 갔다 와서 지금 차이더리스에서 일하고 있고 연봉도 수십억대야. 이런 남자가 너한테 어울리는 거지.”여기 있는 사람들은 장주완이 대학 때부터 김혜민을 좋아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하지만 김혜민은 장주완의 여러 차례 고백을 전부 단칼에 거절했다.그런데 그런 김혜민이 지금 직업도 없는 돌팔이를 남자친구로 데려왔다니, 다들 납득할 수 없었다.“내 남자친구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김혜민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어때서?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보라색 드레스 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사람은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해. 괜히 계층을 넘나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이 식사만 해도 그래. 혜민아, 네가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이 사람 평생 열심히 벌어도 겨우 두세 번이나 먹을까 말까겠지? 하지만 우리한테 이런 밥 한 끼는 그냥 평범한 일상이잖아?”보라색 드레스 여자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루아 언니 말이 맞아. 솔직히 계층 차이를 무시한 연애는 오래 못 가.”“게다가 장주완도 이제 완전히 귀국했잖아. 혜민아, 한번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맞아, 맞아. 이 평범한 남자랑 있는 것보단 훨씬 낫지.”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거들기 시작했다.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김혜민과 진서준을 갈라놓는 것이었다.그러자 김혜민이 인상을 쓰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만해. 내 남자는 내가 알아서 선택해.”김혜민이 버럭 화를 내자 사람들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았다.장주완의 눈에 순간 싸늘한 기운이 스쳤지만 곧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혜민아, 너무 화내지 마. 그냥 다들 농담한 거야.”“이런 농담, 내 남자친구 앞에서는
“다들 오랜만이야.”김혜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소개할 사람이 있어. 내 남자친구 진서준이야. 한 명 더 데리고 왔는데 괜찮지?”이 말이 떨어지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진짜 남자친구라고?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금테 안경을 쓴 남자에게 향했다.“혜민아, 오랜만이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예뻐졌어. 더 여성스러워진 것 같아.”안경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칭찬 고마워.”김혜민은 싱긋 웃으며 진서준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진서준, 소개할게. 이쪽은 우리 반 반장이었던 장주완이고 이쪽분들은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미녀 친구들이야. 특히 여기 조수아는 우리나라 톱스타야.”김혜민은 왼쪽에 앉은 여자들을 가리키며 하나씩 소개했다.“안녕하세요.”진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김혜민이 워낙 미인이니 그녀의 친구들도 예쁠 수밖에 없었다.특히 조수아라는 여자는 외모와 몸매 모두 김혜민 못지않았는데 역시 톱스타가 될 만한 비주얼이었다.“혜민아, 그런데 네 남자친구는 어디 사람이야? 강남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물었다.“진서준은 외지인이야. 강남 출신은 아니고.”김혜민이 설명했다.“그렇구나. 그럼 무슨 일 해?”장주완이 두 손을 모으고 미소 지으며 물었다.“그건...”김혜민이 잠시 머뭇거렸다.“혹시 비밀스러운 직업에 종사하는 거야?”보라색 드레스 여자가 농담처럼 말했다.“난 의사입니다.”진서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네? 의사라고요?”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진씨 가문의 금지옥엽이고 강남의 유명한 미녀인 김혜민이 고작 의사를 남자친구로 둔다고?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김혜민은 굳어버린 얼굴로 진서준을 불쾌하게 쏘아봤다.‘어차피 이 사람들은 네 정체도 모른단 말이야. 대충 멋있어 보이는 직업으로 둘러대면 안 돼?’“진서준 씨는 어느 의대 출
“너희 동창 모임인데 내가 거길 왜 가?”진서준이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그 남자가 예전에 날 쫓아다녔거든. 듣자 하니 이번에 돌아와서도 계속 고백할 생각인가 봐.”김혜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그 녀석 눈이 멀었네? 널 좋아하는 걸 보니.”진서준이 의아하다는 듯 비꼬았다.“눈먼 건 너겠지.”김혜민이 분노하며 소리치자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날 방패 삼아 화력을 내게 돌리려는 거야? 그런 귀찮은 일은 사양이야.”진서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런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곤해지기만 할 것이고 쓸데없는 문제를 만들 수도 있었다.이번에 강남에 온 목적은 딱 두 가지였다.첫째는 김연아와 서지은을 만나러 온 것이었고 둘째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이렇게 과중한 임무를 안고 왔는데 남의 연애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너 그래도 국안부 소속이잖아. 이 정도 일로 쫄아?”김혜민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한데 자극적인 말로 날 도발해도 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냥 포기해.”진서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진서준이 요지부동하자 김혜민은 결국 김연아에게 도움을 청했다.“설득 좀 해줘.”김연아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혜민아, 너 그 남자가 그렇게 싫어?”“아니, 싫지는 않은데 관심이 없어.”김혜민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런데 오늘 술자리에서 분명 고백할 거야. 그러면 다른 애들도 분위기 맞추려고 부추기겠지. 내가 거절하면 모임 분위기가 싸해질 게 뻔해.”그 말을 듣고 진서준이 피식 웃었다.“결국 체면 문제잖아.”“나 친구가 몇 명 없단 말이야. 이런 어이없는 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면 나중에 누구랑 만나야 해?”김혜민이 툴툴거렸다.김혜민에게는 대학 동창들이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그런데 이런 일로 관계가 어색해지면 나중에 결혼할 때 들러리도 못 구할 판이었다.그런 처참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서준아, 점심때 혜민을 좀 도와줘. 난 마침 회사에 가봐야 해.”김연아가 진서준을 바라보며 말했
리앙은 낯선 청년에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얻어맞았다.이 치욕을 리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이대로 복수하지 않으면 자다가도 화가 치밀어 깨어날 판이었다.“도련님, 차라리 진씨 가문이랑 서씨 가문한테 조사를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이 동네 사정을 잘 아니 사람을 찾는 건 그들이 더 능숙할 겁니다.”옆에서 노련한 집사가 조심스레 권고했다.“당장 김태영이랑 서동현에게 연락해. 내일 해 지기 전까지 놈을 찾아내라고 전해.”리앙이 이를 갈며 명령했다.그 시각, 단꿈에 빠져 있던 김태영과 서동현은 갑작스러운 전화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둘은 내일 아침 일찍부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범인을 찾기로 했다.이튿날 아침.진서준은 얼굴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눈앞에는 김연아가 부드러운 머리카락으로 진서준의 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좀 더 자지 그래?”진서준이 김연아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어제 밤엔 꽤 힘들었을 텐데?”진서준이 장난스레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김연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오랜만의 재회는 꿀보다 더 달았다.서로 못 본 지 몇 달이 지났고 어젯밤 적당히 술까지 곁들였으니 당연히 두 사람은 불이 붙어버릴 수밖에 없었다.다행히도 김연아는 하녀를 부리는 습관이 없었다.하녀가 있었다면 정말 크게 망신당할 뻔했다.“아침 운동할래?”진서준의 시선이 김연아의 매끈한 몸매를 훑었고 손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온몸이 부서질 것 같아서 도저히 못 뛰겠어.”김연아가 고개를 저었다.“내가 말한 아침 운동은 그게 아닌데?”진서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김연아가 잠시 멈칫한 순간, 진서준은 순식간에 김연아 몸 위에 올라탔다.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두 사람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방을 나서자마자 김혜민이 거실에서 두 사람에게 아니꼽게 말했다.“너희 둘,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거야?”김혜민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언짢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김연아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김혜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요 며칠 동안 리앙이 나한테 계속 협상하자고 했거든. 물론 난 전부 거절했지.”김연아가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리앙은 우리랑 손잡고 싶어 했어.”김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둘뿐만 아니라 서씨 가문 서동현도 끼어들기로 했어. 근데 그놈들이 날 이렇게 배신할 줄은 몰랐네.”이제야 김혜민은 진서준과 김연아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이 둘이 자기를 속일 이유는 없었지만 김태영은 달랐다.아까 식사 자리에서 리앙이 분명히 김태영에게 자기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설마 그 충분한 성의라는 게 김혜민의 몸이었단 말인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김혜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집에 돌아가서 김태영이 누가 널 구했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진서준이 입을 열었다.“그리고 계속 그놈들하고 어울리는 척해.”“무슨 뜻이야? 날 너희 스파이로 사용하겠단 말이야?”김혜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자기는 어디까지나 진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였다.이런 고귀한 신분으로 도청이나 염탐 같은 비겁한 스파이 짓을 하라니 내킬 수 없었다.“스파이 노릇은 우리한테 진 신세를 갚는 거라고 생각해.”진서준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넌 김태영이랑 리앙이 어떤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인지 보고 싶지도 않아? 너랑 연아가 아무리 얼굴을 붉히며 싸운다고 해도 결국은 피로 이어진 가족이잖아. 하지만 김태영이랑 리앙은 완벽한 외부인이지.”가족이라고?김혜민은 순간 멈칫하다가 복잡한 시선으로 김연아를 바라봤다.김연아가 오기 전까지 아버지 김형섭은 오직 자신만 아끼고 사랑했다.하지만 김연아가 집에 들어온 후, 아버지는 자기에게 쏟던 관심을 점차 줄였다.그때부터 김혜민이 김연아를 시기하고 원망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원망과 질투의 감정은 점점 희미해졌다.그리고 김연아가 진씨 가문을 손에 넣은 후에도 딱히 자기를 곤란하게 한 적
진서준이 나오자마자 김연아는 급히 다가갔다.“어때?”“괜찮아. 옷이 좀 찢어졌을 뿐이야.”진서준은 차 문을 열고 김혜민을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김연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사하면 됐어.”둘이 차에 오르자 차가 출발했다.“응? 여기는 어디지?”얼마 지나지 않아 김혜민이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김혜민이 어렴풋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낯선 차 안이었다.그리고 자기 몸 위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외투가 덮여 있었다.순간, 김혜민의 얼굴이 굳어버렸다.“이게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김혜민은 단숨에 만취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났다.“깨어났어?”김연아가 고개를 돌려 김혜민을 바라봤다.“김연아? 왜 내가 네 차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내 옷은 왜 이래?”김혜민은 연달아 질문을 던지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술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김혜민은 김태영과 서동현 일행과 함께 있었다.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왜 김연아의 차 안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술 마신 다음 기억이 하나도 없어?”김연아가 평온하게 물었다.“마지막 기억은... 김태영이랑 술 마시다가 취해서 기절한 것뿐이야.”김혜민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네가 기절한 후에 누가 널 데려갔는지는 알아?”“당연히 너희 아니야?”김연아의 질문에 김혜민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우린 널 구한 거야.”운전 중이던 진서준이 무심하게 말했다.“뭐? 진서준, 너까지 왜 여기 있어?”김혜민은 깜짝 놀라면서도 급히 옷깃을 움켜쥐고 경계심을 높였다.“내가 없었으면 넌 이미 그놈한테 따먹혔을 거야.”진서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자 김혜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무슨 뜻이야?”“너 아까 같이 술 마시던 사람 중에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외국 놈 있었지?”진서준이 물었다.“응, 그 사람은 차이더리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잖아. 너 같은 놈이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김혜민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그 사람은 나한테 엄청 호
이건 되돌릴 수 없는 길이었다.한번 발을 들이면 후퇴는 있을 수 없었다.성공하면 권력을 잡지만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저세상에 가야 했다.한편, 리앙의 차는 한 5성급 고급 호텔 앞에 멈췄다.리앙은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김혜민을 안은 채 천천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김태영, 짐승만도 못한 개자식.”김연아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김태영은 김혜민의 몸을 이용해 리앙과의 협력을 따내려는 것이었다.애초에 김태영과 리앙은 신분 자체가 넘사벽이라 김태영이 뭔가를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내가 가서 구해올 테니까 넌 모르는 척해.”진서준이 소리를 낮춰 말했다.“큰 고기를 낚으려면 긴 줄을 던져야지.”김연아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부탁할게.”한편, VIP룸 안.리앙은 취한 김혜민을 침대 위에 눕힌 후 사냥감을 감상하듯 천천히 김혜민을 훑어보았다.리앙의 눈빛엔 노골적인 욕망이 가득했다.“쯧쯧, 역시 자매라 그런가? 몸매랑 얼굴이 비슷하네. 아쉽게도 오늘은 너 혼자지만... 뭐, 오래 걸리진 않겠지. 조만간 네 언니도 내 침대 위에 데려와야겠어.”그 순간을 상상하니 리앙의 입꼬리에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리앙은 여유롭게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친 후, 리앙은 수건을 걸친 채 룸으로 돌아왔다.“물... 물 좀...”김혜민이 술에 취한 채로 중얼거렸다.“걱정 마. 이따가 네가 흠뻑 젖도록 만들어줄 테니까.”리앙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녹화를 시작했다.“너희 대한민국 여자들은 순결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지? 이걸로 협박하면 넌 내 손바닥 안이겠지?”리앙은 핸드폰을 단단히 고정한 후, 김혜민을 향해 달려들었다.찌지직!김혜민의 겉옷이 거칠게 찢겨나갔고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며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김혜민의 가슴은 풍만하게 올라붙어 있었다.리앙이 더 깊숙이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때였다.쿵!누군가 박살 내듯 문을 거칠게 걷어찼고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