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채취한 지 오래되지 않아 영약의 약효가 남아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껍데기만 남은 허상에 불과했을 것이다.진서준은 즉시 영기를 다루어 두 약재를 감싸 약효가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준비를 마친 진서준은 동굴을 나서려 했지만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체형이 약 3미터에 이르는 하얀 털로 뒤덮인 괴물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쾅!설괴가 지면에 떨어지자 주변 100미터 내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고 단단한 지면마저 갈라지며 충격이 사방으로 퍼졌다.진서준은 설괴의 몸에 난 칼자국과 피를 보며 의아한 기색이 눈에서 스쳤다.아까 동굴 안에서 발견했던 핏자국은 이 설괴의 것이었고 그 영약도 이 설괴가 채집한 것이 분명했다.설괴의 상처를 보며 진서준은 누가 남긴 흔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아마도 천산설련을 찾으러 온 조기강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사실 진서준의 추측은 거의 정확했다.천산설련과 천산빙련은 전부 설괴가 발견하고 오랫동안 키운 영약이었다.수년간 자신을 위해 아껴 두었지만 조기강이 그중 한 송이를 훔쳐 가버린 것이다.나머지 두 영약까지 빼앗길까 봐 두려웠던 설괴는 나머지 두 송이를 동굴 안으로 가져와 오늘 사용하려던 예정이었다.하지만 운이 없게도 진서준이라는 도둑을 만나고 말았으니 설괴 입장에서는 최악의 하루였다.“으르르르...”설괴는 진서준의 몸에서 자기 영약 기운을 감지하고 분노의 포효를 터뜨리며 둥근 동전만 한 눈동자로 진서준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화내지 마. 이 영약은 내가 가져가겠지만 그냥 가져가는 건 아니야. 내가 적절한 공법으로 너와 교환하마.”진서준은 무식하게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을 경멸했다.설령 상대가 설괴와 같은 괴물이더라도 진서준은 교환의 방식을 선호했다.진서준의 말을 설괴도 이해했지만 이미 분노로 가득 찬 상태인지라 진서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설괴는 대화 대신 거대한 나무보다 굵은 팔을 들어 진서준의 머리를 내리쳤다.공기를 가르
붉은 피가 금세 땅을 시뻘겋게 물들였다.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진 설괴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눈앞의 이 인간은 설괴가 어제 만난 그 인간보다도 수십 배는 더 무서운 존재였다.설괴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다음 순간 바로 목이 떨어질 걸 직감했다.그래서 설괴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진서준의 말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진서준은 설괴의 반응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잡은 참선검을 빛의 흐름으로 변신해 허리에 다시 꽂았다.설괴는 그제야 사형선고를 면한 듯한 안도감에 사로잡혔고 본능적으로 진서준과 거리를 벌리려 했다.“움직이지 마. 먼저 상처를 치료해 주마.”진서준이 입을 열었다.설괴는 비록 인간의 말을 완벽히 구사하지 못했지만 진서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자 설괴의 얼굴에는 의심과 불신이 가득했다.살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혜인데 이 인간이 치료까지 해준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진서준은 설괴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개의치 않고 한 손을 설괴의 몸에 얹어 본인의 영기를 천천히 설괴의 몸 안으로 흘려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설괴는 체내에서 편안한 느낌이 흐르기 시작한 걸 알아챘다.설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서준을 바라봤다. 눈앞의 사람이 설괴의 눈에는 괴물과도 같았다.단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진서준이 만들어낸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상처가 완전히 아물자 설괴는 인간을 흉내 내어 진서준에게 고개를 숙여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진서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됐어. 아직 감사 인사는 일러. 이제 네게 몇 가지 요수용 수련법을 전수해 줄게. 네가 늘 설산에서 지내니 얼음과 관련된 술법을 전수해 주마.”말을 마친 진서준은 손바닥을 설괴의 머리에 얹었다.다음 순간, 끝없이 깊은 바다 같은 방대한 공법이 설괴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갔다.설괴의 눈빛은 점점 생기를 되찾았고 그 안에서 이채로운 빛이 번뜩였다.누렁이와 비교했을
진서준은 즉시 설괴에게 가장 간단한 수법을 가르쳤다.몇 분도 안 돼서 설괴는 금방 그 수법을 익혔고 몸이 50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작아졌다.작아진 설괴는 눈처럼 하얀 작은 원숭이 같았고 누가 봐도 귀여워 보였다.“이제 네 이름은 하얀이야.”진서준이 설괴의 이름을 지어줬다.모든 준비가 끝난 후, 진서준은 하얀이를 데리고 천산을 내려갔다.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진서준이 데리고 온 하얀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천산에 원숭이도 있나요?”진서준이 운전기사에게 이 원숭이가 천산의 설괴라는 걸 알려준다면 운전기사는 아마 기절초풍했을 것이다.온 하루 쉬지 않고 운전한 결과, 해가 지기 전에 진서준은 봉천시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하얀이는 진서준을 따라 조씨 가문 병동으로 걸어갔다.“진 마스터님!”진서준이 돌아오자 조태희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급히 달려갔다.“무슨 일이에요?”조태희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진서준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민영이 몸에 꽂힌 은침을 뽑았는데 장 의사가 말하기를 우리 민영이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네요...”조태희의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내가 떠나기 전에 은침을 뽑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듣지 않죠?”“그게... 장 의사가 뽑으라고 해서 뽑은 겁니다. 제 동생이 천산설련을 가지고 돌아와서 장 의사에게 민영이를 치료해 달라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이렇게 됐네요...”조태희는 내심 괴로워하며 간절하게 부탁했다.“진 마스터님, 제발 우리 딸을 살려주세요.”그때, 병동을 떠나려던 장 의사가 조태희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조 가주님,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따님 장례 준비는 알아서 해두세요.”진서준은 태연하게 작별 인사하는 장 의사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민영 씨 은침을 뽑으라고 한 거야?”장 의사는 그 말에 멈칫하더니 진서준을 아래위로 쭉 살펴보고 냉랭하게 웃었다.“맞아, 내가 뽑으라고
장 의사는 얼굴색이 급격히 변하더니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이봐, 내 병을 짐작할 수 있는 걸 보니 네가 능력이 좀 있는 모양이야. 근데 네가 이 여자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웃기지 마, 그건 네가 내 병부터 치료한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얘기야.”장 의사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자존심이 워낙 강한 장 의사는 자세를 낮추고 진서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서늘한 표정으로 장 의사를 쳐다보았다.“네가 믿든 안 믿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진서준은 단 한마디로 장 의사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고 장 의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이봐, 치료할 수 있기나 해? 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봐.”장 의사는 머리를 돌려 조태희를 보며 말했다.“조 가주님, 가주님 면목을 봐서 한마디만 할게요. 이 자식이 지금 가주님 딸에게 침놓으면 반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침을 놓지 않으면 가주님 딸이 몇 시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주님이 따님과 제대로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장 의사는 일부러 조태희를 자극하려 했다.장 의사의 목적은 단순했다. 진서준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조태희의 손을 빌리려는 것이다.조태희도 바보가 아니었다.장 의사의 말을 들은 조태희는 이내 그 속셈을 눈치챘고 머리를 돌려 진서준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진 마스터님, 제가 마스터님을 믿지 않으려는 건 아닌데요. 단지 전...”“알았어요.”진서준은 바로 장 의사 앞에 걸어갔다.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진서준이 경멸의 눈길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걸 보며 장 의사는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장 의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서준은 이유도 없이 있는 힘껏 장 의사에게 귀싸대기 두 대를 날렸다.짝! 짝!순간 방 안에 청량한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상황을 목격한 조태희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막 방에 들어오던 조기강도 그대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왜 갑자기 날 때린 거야?’갑
이때 조태희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혹시... 그 따귀 두 대로 장 의사의 병이 치료된 건가?정말 그런 신기한 치료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진서준은 장 의사를 힐끗 쳐다보고 냉랭하게 말했다.“저리 비켜, 방해하지 말고.”“네, 알겠습니다.”장 의사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급히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이제 침을 놓을 거니까 아무도 날 방해하지 마세요.”진서준은 말하고 나서 손에 든 은침을 마술처럼 능숙하게 다루며 조민영의 몸 위에 놓기 시작했다.그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조기강조차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조태희는 이 틈을 타 장 의사에게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장 의사님, 방금 그건 대체 무슨...”“이분이야말로 진정한 명의입니다. 제가 눈이 멀어 몰라봤네요.”장 의사는 부끄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이론적으로 제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그런데 진 마스터님의 따귀 두 대로 제가 오랜 세월 앓아온 신경 경화가 완치되었습니다. 이분은 명의가 아니라 신의라고 해야 할 겁니다.”조태희는 그 말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아까 조태희가 예상한 것과 같단 말인가?단 따귀 두 대로 장 의사의 불치병을 치료한 게 사실이라면 이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일 것이다.진서준의 무도 실력은 무도계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고 의술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이런 천재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조태희의 머릿속에서 번쩍이자 진서준을 바라보는 조태희의 눈빛도 번뜩이기 시작했다.조태희는 이미 진서준에게 자기 딸 조민영을 시집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물론 진서준과 조민영 사이에는 일곱 살 정도의 나이 차가 있지만 이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문제는 진서준이 이 결혼을 원하느냐는 것이다.만약 진서준이 원한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이 원하지 않는다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그 시각, 진서준은 조민영의 치
조민영 체내의 칠채지독이 완전히 제거되자 진서준은 여자 하인들에게 조민영을 욕실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진 마스터님, 정말 감사합니다.”조태희는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조태희가 다시 몸을 치켜 세우자 진서준은 냉랭하게 물었다.“누가 독을 넣었는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요?”“변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의심됩니다. 근데 제 생각에는 변씨 가문의 가능성이 더 큽니다. 제 딸 민영이 이미 심씨 가문과 혼약을 맺은 상황에서 우리 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변씨 가문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요.”조태희가 가문 사이의 상황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심씨 가문과의 혼약은 조 가주님이 정한 건가요, 아니면 민영 씨 본인의 뜻인가요?”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질린 조태희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급히 대답했다.“진 마스터님, 이건 제 결정이긴 합니다만... 민영이도 동의했습니다.”“동의했다고요?”진서준은 동의라는 글자를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조 가주님이 제안했는데 민영 씨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나요?”가문 간의 혼사는 오직 양가 어른들 간의 합의만 있으면 결정되는 것이고 정작 그 당사자는 어떠한 거부권도 가질 수 없다.이전의 김연아도 이런 일을 경험했었다.김연아는 당시 가문 어르신과 저항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 진씨 가문과 서씨 가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지금 조태희가 조민영이 동의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참 가소로운 일인 것 같았다.“민영 씨가 깨어나면 내가 직접 물어볼 겁니다. 민영 씨가 진심으로 이 혼인을 원했다면 나도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않을 거고요. 하지만 민영 씨가 이 혼인을 원치 않는다면 누구도 민영 씨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겁니다.”진서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조민영은 이미 자기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만약 누군가가 진서준의 여동생 진서라에게 강제 결혼을 강요한다면 진서준은 그
“으르르르...”하얀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조기강은 즉시 소리 나는 방향을 주목했다.그 울부짖는 소리는 조기강이 천산에서 마주했던 설괴의 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조기강은 곧바로 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하얀이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졌다.비록 몸집은 작아졌지만 하얀이의 몸속에 깃든 그 무시무시한 힘은 여전했기 때문이다.“이 짐승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지?”조기강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마주한 듯 긴장했다.진서준은 조기강의 긴장한 모습을 보자 하얀이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하얀이의 얼굴에 맺혀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고분고분 진서준의 발치로 달려가 그의 종아리에 머리를 비비댔다.조기강은 본인을 거의 빈사 상태로 몰고 갔던 설괴가 이렇게 얌전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과연 자기가 천산에서 만났던 그 사나운 설괴가 맞는가?어떻게 이렇게 순한 모습으로 변했지?“천산에서 검존님이 만났던 게 이 하얀이 맞죠?”진서준이 조기강에게 물었다.“맞아요... 근데 어쩌다 이런 모습으로 변했죠? 게다가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거죠?”조기강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하얀이는 내 반려동물이 됐어요. 더 이상 천산의 야만적인 설괴가 아닙니다.”진서준이 설괴를 반려동물로 삼았다는 말에 조기강은 속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진서준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기강은 본인과 진서준의 실력이 비슷하리라 여겼다.조기강은 현존하는 검존으로서 언제나 자부심이 넘쳐났었다.진서준이 비록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고 해도 아직 스무 살 남짓이니 실전 경험에서는 조기강이 앞설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지금 조기강의 모든 예상이 우르르 무너졌다.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조태희가 물었다.“기강아, 너 이 귀염둥이와 면목이 있어?”“형, 내가 천산에서 당한 상처가 바로 이 귀염둥이 때문이야...”조기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하자 조태희는 동공이 흔들렸다.조태희는 친동생 조기강의 실
허윤진과 허사연 자매를 바라보는 변지오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이렇게 아름다운 자매는 변지오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변지오는 스스로 이쁜 여자를 많이 봐왔다고 자부했지만 허사연 자매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매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허윤진 씨는 정말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완벽하군요.”변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허윤진에게 걸어갔다.변지오의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기품은 한눈에 봐도 여성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다.거기에 변씨 가문 가주 장남이라는 신분까지 보탰으니 일반적인 여자는 변지오의 매력에 빠져들고도 남을 터였다.그러나 허윤진은 다른 여자와 달랐다.허윤진은 변지오에게 일말의 호감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반감이 섞인 눈빛으로 변지오를 바라보고 있었다.“감사합니다.”허윤진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응하자 변지오는 멈칫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인 여자도 변지오는 난생처음이었다.이때 허순재가 급히 나서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변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제 손녀는 원래 성격이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를 대해도 다 이렇게 냉랭하게 대하곤 하지요.”그러나 허순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윤진은 진서준의 팔짱을 껴버렸다.그 행동은 허순재의 체면을 구기는 것과 다름없었다.허윤진은 사실 허순재를 존중했지만 허순재가 그녀의 동의도 없이 변지오를 집으로 부른 것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허순재가 허윤진을 가문 사이 결혼에 필요한 도구 취급하는 것 같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허순재는 그 모습을 보며 눈빛에 살기가 번뜩였고 어색한 미소를 애써 유지했다.변지오 역시 허윤진의 돌발 행동에 화가 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작은할아버지, 저는 지금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허윤진이 단호하게 변지오를 알 생각이 없다고 하자 허순재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변 도련님이 오늘 여기 온 건 단지 너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야.”그러면서 허순재는 진서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용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진서준과 황예은은 동년배 중에서 소문난 천재였다.이 두 사람은 연애 상대를 찾을 때 자기 실력과 지위가 비슷한 사람을 찾을 것이다.“이 삼촌.”황예은이 이용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지만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진 신의님, 사실 이번 경매에서 저는 신의님을 지원할 생각이었습니다.”이용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근데 우리 황 조카가 있으니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요.”황씨 가문의 재력과 비교하면 이용진의 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면 진서준은 무조건 칠색정화를 손에 넣을 것이다.진서준이 대화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그중 진서준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그중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흰 모자를 쓰고 짙은 눈썹과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세상에, 저 사람은 샛터 셋째 왕자가 아니야? 왕자도 이 장소에 왔어?”“저 왕자가 원하는 물건이 나와 겹치지 않을지 걱정이야. 그럼 오늘 경매장에 헛걸음을 치게 될 게 분명할 거야.”“쯧쯧, 샛터의 셋째 왕자 앞에서는 초아국 금융 업계 거물들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거야.”사람들은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다들 돈 많은 최고급 권력자였기 때문에 자기보다 더 고귀한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한없이 들떠 있었다.황예은이 진서준에게 소개했다.“저 사람은 샛터 셋째 왕자, 소하비야.”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로마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로마에서 태어났다.이 말은 바로 샛터의 왕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샛터의 부유함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다.세상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8성급 호텔도 샛터에 있었다.그곳에는 부유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이다.샛터 왕실은 돈을 그냥 휴지로 취급했다.소하비는 경매장에 들어서자 한바퀴 휙 돌아본 뒤, 바로 황예은에게 다가갔다.“황예은 씨, 이렇게 여기서 만나다니
경매장은 유람선의 가장 위층에 자리 잡고 있고 입구의 보안 검사도 매우 엄격했다.첫 번째 검사는 바로 자산을 제시하는 것이었다.전체 자산이 조 단위여야 했고 손에 쥔 예금 역시 조 단위여야 했다.첫 번째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경매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이 검사만 해도 99%의 사람들이 걸러지게 된다.조 단위 자산을 자랑하는 부자는 꽤 있겠지만 조 단위 예금을 갖춘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대다수 부자는 손에 쥔 돈을 투자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했다.“너랑 함께 와 참 다행이네. 네가 없었다면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을 거야.”진서준이 엄격한 검사를 보며 감탄했다.황예은은 보기 드물게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진서준도 드디어 황예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진서준은 경매장에 들어서자, 한 번 둘러보았다.경매장은 70여 평 크기로 4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고 그 좌석들 정면에는 무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경매가 시작되면 전시물은 바로 이 무대에서 등장하게 된다.두 사람은 한적한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아 조용히 경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네 여자 둘을 데려오지 않아서 불안하지 않아?”황예은이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서지은과 허윤진은 함께 경매장에 따라오지 않았고 유람선의 다른 곳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다.“괜찮아, 누군가 그 애들을 보호하고 있어.”진서준이 대답했다.정확히 말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교룡이었다.진서준은 올기가 서지은과 허윤진과 함께 다니게 했다.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도 교룡인 올기 한 마리로도 충분히 그녀들을 보호할 수 있다.올기는 동호에서 풀려난 이후 서서히 실력을 회복하고 있었다.비록 아직 절정의 상태는 아니지만 칠급 이하의 대종사는 올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황예은 씨, 또 만났네요.”이때 박서명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황예은 씨도 여기 물건에 관심이 있나 보네요.”예전에 박서명이 경매에 참석했을 때 황예은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황예은이 예전에 오지 않은 건 단순히 시간이 없었기
진서준과 서정훈은 환경 오염을 대가로 지역 경제 발전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박진강은 네가 죽였지?”진서준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예상외의 질문에 박서명은 움찔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서준을 쳐다봤다.박서명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냉기를 품은 독기가 눈에서 뿜어나왔다.박신준과 연락이 닿지 않게 된 그 순간부터 박서명은 자기 형제가 뭔가 큰 일을 당했음을 직감했다.“내가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일 수 있지?”박서명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진서준은 바로 사실을 폭로했다.“그 녀석이 네 친아들이 아니니까 죽일 수 있지. 물론 너와 박신준 둘 중에 누가 누구에게 오쟁이를 진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이 말에 박서명은 순간 당황해하며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말했다.“오늘 밤 달빛이나 제대로 즐겨.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말을 마친 박서명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너 말이 참 거칠어.”황예은의 말에 진서준은 어깨를 으쓱했다.“이건 전부 저놈이 자초한 일이야.”“너는 혼자잖아. 박씨 가문이 공해에서 너에게 무슨 일을 할지 걱정되지 않냐=아?” 황예은의 질문에 진서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언젠가는 한 판 벌여야 할 싸움이야.”“대한민국 전역에서 너처럼 거침없고 대담한 사람은 아마 몇 명 되지 않을걸?”“그 말은 칭찬이야? 아니면 욕이야?”진서준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묻자 황예은은 대답하지 않았다.황예은의 말에는 칭찬과 비하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잠시 후, 유람선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유람선은 서서히 부두를 떠나 어두운 바닷속으로 향해 나갔다.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진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황예은은 달랐다.“유람선 안으로 들어가자.”진서준이 제안하자 황예은은 선뜻 동의했다.“좋아.”두 사람이 막 유람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 마스터님.”진서준이 머리를 돌리자 두 사람
“이렇게 큰 유람선은 처음 봐!”차에서 내리자 허윤진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철갑 괴물을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서울시 명문대가 출신인 허윤진도 이 유람선 앞에서는 감탄 이외에 할 말이 없었다.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 말을 잃을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주변을 지나가는 권력자들도 유람선의 규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듯했다.대한민국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지만 천하 유람선에 올라설 수 있는 부유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황예은이라는 대한민국 최고 갑부 맏딸이 아니었다면 진서준은 초대장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진서준, 너랑 서지은은 이렇게 큰 유람선을 본 적 있어? 너희는 전혀 놀라지 않은 것 같은데.”허윤진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묻자 서지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 아빠랑 이 유람선에 탄 적 있어. 그때 내 표정도 너 지금 표정과 똑같았거든.”서씨 가문은 강남 최고의 가문인지라 서지은이 천하 유람선에 올라탄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난 오늘이 처음이야.”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하자 허윤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넌 이 유람선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안 놀랍다면 거짓말이지.”진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허윤진은 말로만 놀랍다고 하고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는 진서준이 못마땅해 눈을 굴렸다.“배에 올라타자.”황예은이 말을 꺼내자 다들 그녀를 따라 여러 차례의 보안 점검을 거쳐 유람선에 올랐다.유람선 안에 들어선 후, 진서준은 서지은에게 허윤진을 데리고 유람선 내부를 구경하라고 시켰다.그리고 자기는 황예은과 함께 유람선 갑판에 올라가 배에 오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유람산에 올라온 사람 중, 권력자도 많았고 무인도 적지 않았다.종사 경지의 무인들은 흔치 않았고 대다수는 사급 대종사였으며 오급 대종사와 육급 대종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이 정도 인원만 해도 이미 굉장히 큰 규모였다.강남과 서남 지역에서는 이렇게 많은 대종사가 한자리에 모인 걸 진서준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명주시는 역시 진짜
이 자식은 정말 밉상인데 의술 하나만은 정말 뛰어난 듯했다.황예은은 오늘 진서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또 다른 평가를 내렸다.“미리 말해두지만 난 거기서 널 보호하는데 그렇게 많은 정력을 퍼부을 수 없어.”진서준이 미리 경고했다.진서준은 진서라을 치료할 약재를 손에 넣은 후, 간첩을 찾으러 가야 했다.그때가 되면 유람선 위에 사람이 많아 자연스레 보는 눈도 많을 것이다.누군가 황예은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그건 큰 문제가 될 것이다.황예은은 이내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알아서 날 보호할 사람을 구할 거야. 알았어, 그럼 너 먼저 밥 먹어. 나중에 약 바르러 올게.”진서준은 방을 나갔다.허윤진은 진서준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바로 물었다.“진서준, 오늘 밤만 지나면 우리는 서울로 돌아갈 거지?”“왜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려 해?”진서준은 허윤진의 말에 의아해했다.황예은이라는 여우를 경계하기 위해서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허윤진이 차마 꺼낼 수 없었다.“너무 늦으면 엄마랑 진서라가 걱정할까 봐 그래.”허윤진이 비장 카드인 두 사람을 꺼냈다.어머니와 진서라를 생각하니 진서준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약재만 받으면 내일 바로 돌아가자.”“이따가 또 저 여자 약 발라줘야 해?”허윤진이 질투와 원한이 섞인 눈빛을 보이자 진서준은 등골이 서늘했다.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서준이 허윤진을 속이고 불륜을 피운 거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응, 근데 이따가 바르는 건 마지막 약이야.”“그럼 다행이네.”허윤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황예은의 몸매는 너무 매력적이라 여성인 허윤진조차도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진서준 같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만약 두 사람 사이에 정말 불꽃이라도 튄다면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았다.“약 바를 시간이야. 일단 들어가서 약 바르고 나올게.”진서준이 약을 들고 들어가자 황예은이 이미 죽을 다 먹은 걸 발견했다.“엎드려, 먼저 등부터 발라줄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은 이미 사라졌다.황예은은 낯선 방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죽었나?”그날 밤의 고문은 황예은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지독한 기억이었다.살 속에 깊숙이 박힌 가시가 빠져나갈 때는 피부와 살까지 함께 묻어 나왔다.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깨어났구나.”익숙한 목소리가 황예은의 귀에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진서준이 평범한 죽 한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여기는 어디지?”진서준은 천천히 대답했다.“내 방이야.”이건 사실이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황예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진서준을 빤히 쏘아보았다.지금의 황예은은 병기운이 살짝 있었고 평소의 차갑고 도도한 여왕의 분위기와는 완판 다른 다소 애교가 섞인 느낌이 있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의 반응에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왜?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맞긴 한데, 그 말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어.”황예은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누가 들으면 우리 둘이 이 방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든 줄 알겠어.”“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손해 본 건 나야.”진서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응하자 황예은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정말 얼굴 두껍구나.”“난 여자친구가 있어. 내 여자친구가 내가 다른 여자를 내 방으로 데려온 걸 알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여자친구가 화나서 나랑 헤어지면 내가 손해 본 게 아니야?”진서준이 논리적으로 해명하자 황예은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쓸데없는 말은 그만 집어치워. 일단 밥이나 먹어. 다 먹었으면 약 바를 거야.”진서준은 그릇을 황예은에게 건넸다.황예은이 일어나자 몸에 덮인 이불이 떨어졌다.진서준의 눈앞에 황예은의 완벽한 곡선을 자랑하는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진서준은 그 부위를 힐끗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내 잘못 아니야.”진서준이 한마디 보태자 황예은의 얼굴은 눈에 띄게 더 붉어졌다.
황씨 가문은 일시적으로 갈 수 없었다. 그곳은 아직 안전하지 않다.동호 별장에 돌아왔을 때, 올기는 여전히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다.“용존님.”진서준이 돌아오자 올기는 신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다.진서준은 진지한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문을 잘 지켜.”‘또 그 여자야? 이 여자는 왜 자꾸 다치지? 혹시 액운이 깃든 운명인가?’올기는 호기심을 품고 생각했다.이때는 이미 깊은 밤인지라 허윤진과 서지은은 잠들어 있었다.진서준은 가볍게 발을 옮기면서 될수록 소리를 내지 않고 황예은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황예은을 침대에 눕히고 진서준은 큰 물통에 물을 채운 후 가제와 은침을 준비했다.모든 준비가 끝난 후, 진서준은 황예은의 볼품없게 된 옷을 벗겼다.이전의 완벽하고 무결했던 몸과는 달리 지금의 황예은은 차마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황예은의 몸은 온전한 곳 하나 없이 피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채찍에 맞은 자국, 피부가 갈라진 자국, 심지어 가시가 박혀 있는 곳도 있었다.진서준은 그 상처들을 보며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억누르려 했다.허사연 일행이 이런 고문을 당했다면 진서준은 오늘 밤 이후, 박씨 가문이 다시는 명주시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진서준은 황예은을 사랑하지 않았다.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연약한 여성이 이렇게 비인간적인 무자비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 누구나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진서준이 젖은 수건으로 황예은의 몸에 묻은 피를 닦을 때 의도치 않게 그녀의 상처에 손이 닿았다.가볍게 닿기만 해도 황예은은 몸을 바르르 떨며 움찔했다.진서준이 황예은의 온몸에 묻은 피를 닦는 데만 두 시간이나 걸렸고 수건은 20개 이상 교체해야 했다.가제에 묻은 핏자국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진서준은 흉터를 없애는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가 부족해 늦은 시간임을 뻔히 알면서도 약왕 이용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누구야?”밤늦게 전화를 받은 이용진이 기분 나쁘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모든 이들의 몸을 감쌌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산맥이 자기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숨이 막혀 호흡이 어려웠다.본래 아무런 두려움도 없던 군인들도 이 순간, 총을 잡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진서준은 박신준의 비명이 울려 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손에 든 참선검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불과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박신준의 배 부분의 살과 피부가 모두 떨어져 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 안에 하얀 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몇몇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참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 구토하기 시작했다.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이었다.하문천도 이 광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몸을 돌렸다.“이건 시작에 불과해.”진서준의 말에 박신준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배가 파여 나갔으나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니, 박신준의 몸과 정신은 이와 같은 무자비한 대우를 감당할 수 없었다.진서준은 발을 들어 박신준에게 발차기를 날려 넘어뜨렸다.바닥에 쓰러진 박신준의 등은 진서준을 향해 있었다.이후, 진서준은 다시 참선검을 꺼내 이전의 행동을 반복했다.3분도 채 되지 않아 박신준의 등 쪽에 있던 척추뼈가 그대로 드러났다.박신준의 팔과 다리에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물건이 수십 년 된 유골일 것이라 오해했을 것이다.박신준의 드러난 뼈 위에 살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날 죽여줘... 날 얼른 죽여!”박신준이 비참하게 울부짖었다.“진서준, 그 녀석을 죽여.”하문천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박씨 가문 사람들은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몰살하겠어.”말이 끝나자 진서준은 손을 들어 공중에서 박신준의 등을 가격했다.딱!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박신준의 등에 있는 뼈는 한 조각씩 부서져 부스러기로 변했다.진서준은 참선검을 들고 지옥에서 나온 악마처럼 냉정하게 자기를 막고 있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비켜! 비키지 않는 놈은 죽는 길밖에 없을 거야.”살인귀의
“저기 있어...”진서준은 박신준을 바닥에 내던지고 빠르게 건물로 달려갔다.“경비 연대 좀 보내.”박신준은 숨을 두어 번 가까스로 몰아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오늘 박신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황예은이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하문천 어르신, 보셨죠? 저는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얌전하게 있는데 저 녀석은 제 체면 따윈 신경도 안 씁니다.”박신준이 이를 악물고 바로 고자질하자 하문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만둬, 방금 일어난 일은 못 본 걸로 할게.”박신준은 하문천이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말은 사실 진서준에게 하는 말이었다.지선도 죽일 수 있는 진서준이 굳이 박신준을 두려워할 리 없다.진서준은 속도를 내서 뛰어가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진서준은 진한 피비린내를 맡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빠르게 피비린내가 나는 쪽을 따라갔다.우르릉!갑자기 진서준은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눈앞의 황예은은 도살장에 끌려간 죽은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황예은의 몸은 피투성이였고 피부가 찢겨나갔으며 살점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지금 황예은의 몸에는 거의 온전한 상태의 피부가 보이지 않았다.피는 황예은의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떨어져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쿵!진서준은 발로 감옥 문을 열어젖히고 참선검을 꺼내 밧줄을 끊어냈다.그러자 황예은이 이내 진서준의 품에 떨어졌다.“이 개자식!”진서준은 황예은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박신준이 여자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박신준의 아들 박진강은 황예은이 죽인 게 아니었다.참선검도 주인의 살기를 감지한 듯 미세한 빛을 발산했다.진서준은 황예은를 안고 천천히 건물을 빠져나갔고 참선검은 그의 뒤를 떠다녔다.작은 건물 밖에는 수백 명이 총을 장전하고 출구를 겨누고 있었다.진서준이 황예은를 안고 나오는 것을 보자 군인들은 총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