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허순재가 진서준과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허사연이 진서준을 편들지 않을 리 없었다.“작은할아버지, 제 남자 친구 문제는 이제 그만 신경 쓰세요. 그리고 윤진 남자친구 문제도요. 이런 건 작은할아버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에요.”허순재의 동공이 흔들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꽉 악물었다.불효녀들이 오늘 여기서 대역죄를 저지르는 판이었다.옆에 있던 변지오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어르신, 보아하니 허씨 가문 젊은이들이 당신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군요. 사실 오늘 밤 우리 범씨 가문 저택에서 여는 연회에 허씨 가문을 초대하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변지오는 허순재가 만류하려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허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허순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사연과 허윤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너희 둘, 정말 날 화병으로 죽이려는 거야?”진서준의 눈빛은 싸늘했다.“당신이 사연과 조금이라도 혈연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이 말은 허순재에게 겁주려고 위협하는 말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이미 조씨 가문에서 조민영이 가문 사이 결혼을 강요당한 일을 듣고 내심 불쾌한 상태였다.그런데 허순재가 이번에는 허씨 가문을 위해 허윤진을 변지오에게 넘기려 하다니, 이건 진서준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진서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자는 죽어 마땅했다.그런데 뜻밖에도 허순재는 피식 웃으며 진서준을 비꼬았다.“나도 한때 너처럼 젊고 겁 없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곧 너희가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변씨 가문의 압도적인 실력은 너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야.”허순재의 뻔뻔한 모습에 허사연은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왜 지금까지 이 노인이 온순한 양의 가면을 쓴 늑대라는 걸 몰랐을까?“가자, 서준아.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어.”허사연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너희가 어디
허씨 가문을 떠날 때야 허윤진은 진서준과 함께 온 하얀이를 알아챘다.“진서준, 이 원숭이는 어디서 샀어?”허윤진은 하얀이를 원숭이로 착각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하얀이는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다들 날 원숭이 취급하는 거지? 정말 원숭이처럼 생긴 건가?’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이건 원숭이가 아니라 천산의 괴물 설괴야.”“설괴라고?”허윤진은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그래. 내가 천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만난 녀석이야. 쉽게 말하면 누렁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진서준의 말에 허윤진은 금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누렁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려는 거야?”허윤진이 웃으며 물었다.“그런 셈이지. 게다가 하얀이는 누렁이보다 훨씬 강해. 집에서 누렁이랑 함께 있으면 어머니랑 서라 걱정을 덜어도 될 거야.”그때 허사연이 뜬금없이 물었다.“서준아, 그럼 변씨 가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아까 허순재가 말했던 것처럼 변지오는 변씨 가문 가주의 장남이었다.게다가 변씨 가문은 동북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가였으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세 사람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진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오늘 저녁에 열리는 변씨 가문 연회에 같이 가자.”“응? 근데 우린 초대도 안 받았잖아?”허윤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우리가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지?”“변씨 가문이 우리를 초대하진 않았지만 조씨 가문은 초대받았잖아.”진서준이 조씨 가문을 언급하자 허윤진은 질투 어린 눈길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아차, 깜빡했네. 네 귀여운 애인이 조씨 가문의 금지옥엽이었구나.”진서준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무슨 소리야? 민영이는 내 마음속에서 그냥 여동생 같은 존재야.”조민영은 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아무런 연애 감정도 없는 단순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조민영은 진서라처럼 진서준이 보호해 주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흥, 너희 남자들 속은 뻔히 보인다고.”허윤진은
“민영아, 이제 심씨 가문 도련님과 결혼하지 않아도 돼.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 앞에서 우리 조씨 가문 미래는 네가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기 위해서 가는 거야.”“네?”조민영은 그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이전에 조민영이 심씨 가문 도련님과 결혼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조태희가 얼마나 입이 아프게 자기를 설득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조민영이 병으로 쓰러지자마자 아버지가 이렇게 태도를 180도로 바꿀 줄은 몰랐다.조민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눈빛으로 조태희를 바라봤다.“아빠, 저한테 장난치는 거 아니죠?”“당연히 아니지. 아빠가 이제 결혼 안 해도 된다고 했으면 정말 안 해도 되는 거야.”“그래도...”조민영은 그 말에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조민영은 이 사회의 더러운 풍파 속에서도 순진무구함을 유지해 온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민영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혼인이란 특별한 관계로 손을 잡지 않으면 심씨 가문이 변씨 가문과 동맹을 맺을 게 뻔했다.그렇게 되면 조씨 가문은 동북 지역에서 떠나든가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는 길만 남을 것이다.“민영아, 사실 아빠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우리 조씨 가문에 귀인이 찾아왔기 때문이야.”조태희가 웃으며 설명했다.“귀인이라고요? 어떤 귀인이죠?”조민영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이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인데?”조태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 대체 언제부터 진 마스터랑 친구가 된 거야?”이 질문을 들은 조민영은 어안이 벙벙했다.진 마스터라니, 조민영이 아는 사람 중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아빠,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르는데요?”조민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그럴 리가 있겠어? 네 병을 고쳐준 사람이 바로 진 마스터야.”조태희는 딸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민영아,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남자친구를 사
조민영은 심씨 가문에 시집가기 전에 꼭 다시 한번 김평안과 만나고 싶었다.조민영은 김평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이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김평안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김평안에 대한 감정이 단순히 남녀 사이의 호감인지, 아니면 오빠에게 기대고 싶은 감정인지 심지어 조민영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그저 김평안이 옆에 있으면 조민영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진서준은 순수한 얼굴을 한 조민영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은 지금 수련 중이에요. 어디서 수련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 봉천시에 온 것도 김평안이 부탁해서 온 거예요.”자신의 소원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만 조민영은 그 말을 듣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실망감에 빠져 고개를 푹 숙인 조민영을 보며 진서준은 격려의 말을 건넸다.“괜찮아요, 나중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아니에요...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예요.”조민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조태희는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진서준이 멀리서까지 와서 조민영의 병을 치료해 준 건 전부 김평안 덕분이었다.조태희는 김평안에 대해 좋지 않았던 인상이 지금 완전히 사라졌다.“민영아, 걱정 마. 이 진 마스터님이 우리가 지금 겪는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줄 거야.”조태희가 조민영을 안심시키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저 때문에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조민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빠, 저 한 사람으로 우리 조씨 가문 장래가 밝아지게 할 수 있다면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조민영의 결연한 태도를 본 허사연과 허윤진은 즉시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진서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아이는 진서라와 정말 닮아 있었다.진서준은 여전히 차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고 조민영의 결정을 두고 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민영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민영 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진서준도 조태희를 거들었다.“아니요, 저도 같이 가요.”하지만 조민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그럴 건가요? 그럼 아빠랑 함께 가요.”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진서준의 말이 떨어지자 조태희는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고 조민영을 데리고 심씨 가문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조태희 부녀가 떠난 후, 허사연이 말문을 열었다.“서준아, 정말 민영 씨를 심씨 가문에 시집보낼 생각이야?”“모든 건 조민영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야. 조민영이 원하면 시집보내는 거지.” 진서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조민영이든, 진서라든, 다들 스스로 결혼을 원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진서준은 절대로 방해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결혼하든, 하지 않든, 모든 건 그녀들이 선택한 삶일 뿐, 다른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진서준의 생각이었다.“조민영은 심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허윤진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단지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려는 거야.”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청년이 진서준 일행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응? 저 세 명은 어떻게 들어왔지?”멋진 옷차림을 한 변지오는 차가운 눈빛으로 진서준 일행을 바라보았다.“지오야, 저 사람들 네가 아는 사람이야?”변지오와 비슷한 나이대의 또 다른 청년이 물었다.“알지. 오후에 허씨 가문 집안 어르신이 내게 존예를 소개한다고 했잖아. 바로 저 여자야.”변지오는 허윤진을 가리키며 말했다.“대박, 저렇게 예쁜 자매는 처음 봐.”그 청년은 부러워 입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나도 아쉽긴 해. 내가 네 여동생과 결혼하지 않으면 저 두 여자를 너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가졌을 텐데.”그 말을 듣자 변지오는 웃음을 터뜨렸다.“도준아, 네가 내 동생과 결혼한 게 대수야? 어차피 결혼해도 넌 따먹을 여자 다 따먹잖아.”“좋아, 나중에
변지오는 허윤진과 허사연이 이미 자기와 심도준의 노리개나 다름없다고 확신했다.여기는 동북지역 변씨 가문 세력 범위 내에 있는 수은 장원이었다.허사연 자매가 아무리 하늘을 찌르는 능력이 있다 한들, 변지오의 손바닥 안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의 3대 가문은 2대 가문으로 축소될 터였다.변씨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변지오는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변지오가 거만하게 웃는 꼴을 본 허사연 자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네 유언은 그걸로 끝이야?”변지오가 그 말에 멈칫하더니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짖어대? 아까 낮에 허씨 집안에서 널 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가마니로 보이지?”말이 끝나자 변지오의 몸에서 강력한 무인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이 기세를 보니 내공 절정이 틀림없었다.스물 남짓한 나이에 내공 절정까지 수련했다면 확실히 탁월한 천재라고 할 만했다.대도시는 몰라도 적어도 지방에서는 변지오가 큰소리를 떵떵 치며 다닐 수 있었다.비록 종사 아래는 전부 개미와 같은 수준이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봐도 종사급 무인은 손꼽힐 정도로 적었다.더구나 최근 대한민국 무도계는 큰 재난을 겪어 해외의 이족들과 맞서 싸우다 수많은 종사급과 대종사급 강자가 전사해 호국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충성을 다해 국가를 지킬 종사급 강자를 다시 육성하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이런 큰 배경 때문에 변지오는 진서준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내공 절정인 자기와 맞서 싸우려면 종사급 무인이 나타나지 않는 한 대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런데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이 감히 무인인 자기를 도발하다니, 변지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됐어, 그만하자. 연회 중에 변씨 가문 도련님이 평범한 인간이랑 시비 붙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체면이 구겨지지 않겠어?”
심국강은 전형적으로 각진 네모난 얼굴에 표정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는 사람이었다.심국강은 군 출신으로,20년간 군대에서 복무하며 강인한 카리스마를 길러왔다.조태희가 주동적으로 말문을 열었다.“심 가주!”심국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조 가주, 제가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그래요? 공교롭게도 저도 드릴 말씀이 있네요.”조태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먼저 말씀하시죠.”심국강은 여유로운 태도로 응답했다.“제 딸이 심도준과 결혼하는 건 없던 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조태희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요즘은 자유 결혼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제 딸에게 조씨 가문의 운명을 맡기자니 저도 내키지 않더군요. 제 딸만 믿으면 우리 조씨 가문 남자들이 너무 무능해 보일 테니까요.”조태희의 말에 심국강 옆에 있던 젊은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그게 무슨 말이죠? 조씨 가문에서 파혼하겠다는 말씀인가요? 파혼하려면 우리 심씨 가문에서 먼저 해야지 당신들 조씨 가문이 뭔데 그렇게 굴어요?”심민경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으며 조태희의 체면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심민경의 언성이 너무 높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이쪽으로 집중되었다.“민경아, 조 가주와 그런 말투로 말하면 돼? 얼른 사과드려.”심국강이 훈계하듯 말했지만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고 전혀 진심으로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조태희는 조씨 가문 가주로서 심민경 같은 후배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당하자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신 가주, 따님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까?”조태희는 굳은 얼굴로 차갑게 물었다.“제 딸 교육 문제는 조 가주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심국강은 조태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우리 심씨 가문과의 혼인은 조 가주가 제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파혼을 먼저 꺼내는 것도 조 가주님이네요. 조 가주 눈에 우리 심씨 가문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인가 봅니다?”심국강이 내뿜는 강렬한 기세는 주변 공기를 압
심민경이 내놓은 6조 원 배상금과 조민영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요구는 누가 봐도 도를 넘은 요구였다.조태희는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심민경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심민경이 이렇게 뻔뻔하게 요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무언가 깨달은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들의 시선은 변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심씨 가문이 조씨 가문과 이렇게 공개적으로 맞설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변씨 가문과 손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조씨 가문의 상황은 정말 암울해질 수밖에 없었다.심민경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조태희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그러자 심민경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럼 우리 가문에 어떤 배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조태희는 얼굴을 굳히며 강경한 태도로 대응했다.“배상 같은 건 없습니다. 혼약은 이미 끝났고 사과도 없을 겁니다. 심씨 가문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정면으로 대결해 보죠.”결단을 내려야 하는 밤인 만큼, 조태희도 물러서지 않고 단호한 태도로 맞섰다.조태희가 갑작스럽게 강단을 보이자 심씨 가문의 세 사람은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다.‘무슨 상황이지? 설마 조씨 가문이 외부 지원을 받은 건가?’놀라움도 잠시일 뿐, 심국강의 얼굴엔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노가 스쳤다.“조태희,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당연하지. 혼약은 우리가 이미 파기했고 절대 사과하지 않을 거야. 너희 가문이 불만이라면 지금이라도 한번 손대봐.”조태희는 거침없이 선언했다.그 얘기를 들은 주변에 모인 유명 인사들은 재빨리 물러났다. 혹시라도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심국강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 아주 좋아. 조씨 가문 태도가 정 그렇다면 우리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두 가문이 곧 서로에게 달려들 태세로 긴장을 끌어올릴 무렵, 위엄 넘치는
결연한 표정을 지은 조슬기를 본 장강훈은 순간 당황했다.“뭐든 다 협상할 수 있어. 제발 흥분하지 말자.”장강훈이 받은 임무는 조슬기를 데려가는 것이었고 그녀를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만약 조슬기가 다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날 상황이었다.“다시 물을게, 내 조건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조슬기가 단호하게 묻자 결국 선택지가 없었던 장강훈은 마지못해 동의했다.“좋아, 저 여자는 보내주겠어.”“안 돼요, 아가씨. 절대 저 녀석들과 함께 가면 안 돼요.”신수란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만류했다.“란 언니, 걱정 마세요. 이 사람들은 절대 저를 함부로 다치진 않을 거예요. 언니는 먼저 몸부터 챙기세요.”조슬기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대체 누가 자기를 잡으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가 이토록 신중히 행동하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건 확신했다.“조 아가씨, 시간이 얼마 없어. 서둘러 나가자.”장강훈이 손짓하며 재촉하자 조슬기는 말없이 단검을 쥐고 천천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킬러들은 신수란을 힐끔힐끔 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조슬기가 문턱에 거의 다다른 순간, 장강훈이 갑자기 신속하게 움직였다.쨍그랑!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얼른 이 여자를 잡아!”장강훈이 명령하자마자 양쪽에 대기하던 킬러들이 조슬기를 단단히 제압했다.“왜 이렇게 비겁해? 약속을 지켜야지!”조슬기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조 아가씨, 내가 아까 한 자기소개를 잊었나 보네?”장강훈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여자는 생포해. 저 남자는 어디 보자, 그냥 죽여버려.”장강훈은 진서준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오빠, 미안해요. 우리 때문에 이런 일이...”조슬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했다.“이봐, 당장 창문으로 뛰어내려. 내가 시간을 끌게.”신수란이 이를 악물며 지시했다.지금의 신수란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일
“너희 둘 다 도망갈 생각 말고 얌전하게 따라오기나 해!”말을 마친 남자가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는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신수란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장강훈!”최근 서남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악당인 장강훈은 살인과 약탈은 물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였다.게다가 그 실력은 상당히 강력해서 범행은 그야말로 대담하기 그지없었다.국안부에서도 장강훈을 체포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장강훈은 유령처럼 자취를 감췄고 한 달간 수색했음에도 잡히지 않았다.신수란은 설마 자신들을 습격한 자가 바로 악당 장강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국안부의 분석에 따르면 장강훈의 실력은 지의방에 오를 정도로 강력했다.“오호라? 너희 곤륜산 애송이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이거 참 영광스러운 일이군.”장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란 언니, 장강훈이 누구죠?”조슬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신수란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짐승 같은 놈이에요.”장강훈의 말을 듣자 진서준의 눈에도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이 두 여자가 곤륜 종문의 사람이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정상 은세 종문 하나인데 그 제자들은 대체로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이번에 내려온 건 아마 한 달 후에 있을 숭산 대회 때문일 것이다.“이봐, 아가씨. 말은 가려서 하는 게 좋을걸?”장강훈이 차갑게 경고했다.“우리가 잡으려는 건 이 여자야. 넌 그냥 덤으로 딸려 온 상품일 뿐이고. 내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너 따위는 내 노예로 삼아도 된다 이거야.”장강훈이 쌀쌀하게 비웃으며 말했다.최근에 장강훈은 살인과 약탈 중에 수많은 여자를 노예로 붙잡아 둔 상태였다.신수란처럼 보기 드문 미인은 장강훈이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더 개소리를 지껄여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신수란의 얼굴이 분노로 시퍼
“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별말씀을요. 얼른 옷 입혀주세요. 깨어나면 괜히 또 뭐라고 할 테니까.”진서준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그림자 몇 개가 하나둘 진서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모텔로 들어섰다.“귀찮게 됐군.”진서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잠깐 눈 붙였더니 이런 귀찮은 일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곧이어 조슬기는 신수란의 옷을 전부 갈아입혔다.“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괜찮으니까 얼른 떠나세요.”진서준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이건 그냥 지나가던 인연일 뿐, 두 사람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진서준은 낯선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지금 짊어진 문제만으로도 진서준은 이미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벅찼다.“알겠어요.”조슬기도 쫓아오는 자들이 무서워 서둘러 신수란을 데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바로 그때, 신수란이 눈을 떴다.“어라? 아가씨, 여기가 어디예요?”눈을 막 뜬 신수란은 아직 정신이 멍한 상태였기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까맣게 잊었다.“란 언니, 깨어나셨군요.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조슬기는 기뻐하며 급히 물었다.“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신수란은 자기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놀랍게도 상처에서 더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처치해도 피가 멈추지 않았었다.“오빠, 그럼 저희는 이제 가볼게요.”조슬기가 진서준에게 작별 인사하자 그제야 신수란도 진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신수란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표정이 살짝 변했다.“네가 날 구해준 거야?”“맞아.”진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흥!”신수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내 몸을 본 거, 네가 날 구해준 걸로 눈감아 줄게.”“란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오빠가 아니었으면 언니는 아마 지금쯤 사경을 헤맸을 거예요.”조슬기는 불쾌하다
“란 언니!”신수란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조슬기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신수란을 침대에 눕혔다.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조슬기는 결국 간절한 눈빛으로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했다.“오빠, 제발 우리 란 언니를 좀 도와주세요. 얼마를 드리든 상관없으니 제발 란 언니를 살려주세요.”눈물범벅이 된 조슬기의 얼굴은 누가 봐도 마음이 아려올 정도였다.진서준은 여자 눈물에 약했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하나만 묻죠, 왜 내 방에 온 거죠?”조슬기는 말문이 막혀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우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요. 아까 여기 들어올 때, 프런트에서 이 방이 비어 있는 것 같아서 잠시 숨어 있으려고 했어요.”진서준은 바닥의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숨어 있으려면 최소한 자국은 남기지 말아야죠. 이렇게 허술하게 움직이면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이라도 준 격인데요?”조슬기가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그녀는 금세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외쳤다.“큰일이에요. 그럼 그 사람들이 곧 여길 찾아오겠네요.”어리바리한 조슬기의 모습을 보고 진서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일단 이 사람부터 치료할게요. 상처가 낫는 대로 빨리 떠나세요.”“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진서준은 은침을 알코올로 소독한 후, 호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병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이 여자 옷 좀 벗겨주세요.”“아, 네.”조슬기는 진서준의 말을 따르며 재빠르게 신수란의 옷을 전부 벗겼다.단숨에 신수란의 옷을 전부 벗겨내자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다시금 드러났다.물론 비밀의 숲을 포함한 그 신비로운 부분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진서준은 갑자기 밀려온 충격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이 여자는 진짜 멍청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걸까? 상처는 복부에 있는데 왜 바지를 벗기는 거지?’“바지는 벗길 필요 없어요
“누가 이기고 질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습니까.”고인권이 끼어들었다.“맞아, 우리 8대 특전대도 호락호락한 부대가 아니야.”“전신전 놈들에게 우리 8대 특전대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주자.”나머지 사령관들도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였다.갑작스레 열정이 불타오르는 이들을 보며 상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좋아, 한 달 후에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마.”영상 통화가 끊기자 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각자의 기지로 돌아가 장병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소식을 들은 모든 장병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전신전을 반드시 이겨야 해. 절대 진 교관님을 실망하게 하지 말자.”모두가 열기를 띠며 훈련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한편,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남 국경.진서준은 올기를 타고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마을은 크지 않았고 진서준은 대충 모텔을 한 군데 찾아 방을 얻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진서준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곯아떨어졌다.진서준은 너무 피곤했다.어젯밤의 전투로 지금의 진서준은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올기가 진서준을 등에 태우지 않았더라면 진서준은 아마 울창한 숲속 어딘가에서 쓰러졌을 것이다.진서준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느닷없이 열렸고 이어 아름다운 두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그중 청순한 외모의 여자는 나이가 스무 살 조금 넘어 보였다.다른 여자는 타이트한 검은색 옷차림에 글래머와 세련된 얼굴을 지닌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여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배 부분에선 피가 잔뜩 흘러내리고 있었다.딱 봐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사람이 있네요.”두 여자가 곤히 자는 진서준을 보자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아래층 투숙 기록을 확인했을 땐 이 방에 투숙객이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저 사람 자고 있으니 조용히 움직이죠. 깨우지만 않으면 될 거예요.”젊은 여자가 말했다.“근데 자칫 중간에 깨어나면 어쩌죠...”성숙한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란 언니,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
아침, 설표 특전대 기지.단잠에 빠져 있던 소정태와 고인권 등 사령관은 갑작스러운 군부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회의실에 집합했다.“어젯밤, 묘강에서 폭동이 발생했어. 그러나 배논국 군부가 폭동을 단숨에 진압하며 묘강은 다시 배논국의 영토로 돌아갔어.”상부의 이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여덟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소정태 일행은 서남 국경에서 묘강의 사수들과 적지 않게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다.다들 묘강의 사람들은 전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미친놈일 뿐만 아니라 주술과 독충술까지 능숙히 다루는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만의 군대와 탱크와 같은 대형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배논국 군부가 강제로 공격했다간 양측 모두 피바다가 될 게 뻔했다.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묘강이 평정되다니 너무나 기묘한 일이었다.“혹시... 진 교관이 한 일이 아닐까?”고인권이 불쑥 입을 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여덟 사령관은 진서준이 묘강으로 갈 가능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었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식이 터진 것이다.“설, 설마 그랬겠어? 진 교관님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묘강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잖아?”누군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맞아. 그건 너무 황당한 얘기야. 게다가 진 교관이 대체 어떻게 묘강에 갔단 말이야? 그곳은 철통같이 방어되어 있어서 전신전 병사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야.”“난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봐.”소정태가 갑자기 말했다.“너희들 기억하지? 예전에 너희가 설표 특전대가 최고 특전대로 올라설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 근데 진 교관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려운 걸 해냈어, 그것도 한 달도 안 걸려서 말이야. 지금도 난 똑같이 믿어. 진 교관님은 묘강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소정태는 진서준에 대해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었다.소정태는 그야말로 진서준의 열렬한 팬이었다.“그럼, 진 교관님께 전화라도 걸어볼까
레이더 화면에 수많은 적기가 포착됐고 곧이어 포탄이 몇 발 날아왔다.조종사들은 반응할 틈도 없이 폭격을 정면으로 맞았다.쾅!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거대한 불꽃이 튕기며 대낮처럼 환해졌다.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오스프리 전투기 두 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문기는 도망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유문기가 두려워하는 건 오스프리 전투기가 아니라 바로 그 괴물 같은 존재, 진서준이었다.묘왕은 자기 비장 카드인 오스프리 전투기가 파괴된 것을 보며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누가 한 짓이야?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전투기를 부쉈어?”그 순간, 배논국 군대 로고가 새겨진 전투기 수십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이 광경에 묘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아까 상황 좀 더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할 걸...’전투기 편대가 먼저 도착하고 이어 대규모 부대가 들이닥쳤다.지도자를 잃은 묘강은 머리를 잃은 파리 떼처럼 혼란에 빠졌다.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진서준은 더 이상 이들과 놀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진서준은 참선검을 손에 잡고 단 일격으로 묘왕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눈을 뜬 채 죽은 묘왕의 눈에는 끝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묘왕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을 수 없었다.“날 죽여.”이때의 유기철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은 마치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유기철이 본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진서준이 살려주지 않을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넌 네 친조카까지 해쳤어. 널 만 번 죽여도 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난 널 죽이지 않겠어. 대신 널 평생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살게 해주지.”그 말과 함께 진서준은 손바닥으로 유기철의 가슴을 내리쳤다.유기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유기철은 진서준이 자기를 죽이는 건 두렵지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자 유문기 일행은 순간 얼어붙었다.유문기와 묘왕은 내부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진서준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었다.진서준이 살아있다면 그들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유문기와 묘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묘왕과 유기철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두 사람의 몸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너 폭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유문기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방금 폭탄이 터진 후, 묘왕 혼자만 폭발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유문기는 진서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유문기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유문기의 예측은 현실을 완전히 빗나갔다.“네 생각에 그 포탄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네 눈엔 내가 저 늙은 영감탱이만도 못해 보이나?”영감탱이는 당연히 묘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진서준, 네가 묘왕을 죽여준다면 내가 묘강의 재산 절반을 네게 주마. 어때?”진서준과 맞설 수 없음을 깨달은 유문기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바로 진서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진서준을 자기편으로 영입하면 진서준이 자기를 건드릴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묘강의 재산은 거의 배논국의 절반과 맞먹는 수준이었다.배논국은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국가였기에 그 재산은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였다.하지만 진서준에게 이 돈은 전혀 필요 없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온 이유는 단 두 개, 유문기를 죽이고 묘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진서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더군다나 묘강의 돈은 대부분 불법적인 경로에서 온 더러운 돈이었다.그런 돈은 진서준이 원하지 않았다.유문기가 진서준을 설득하려는 걸 본 묘왕은 즉시 눈을 굴리며 외쳤다.“이봐 청년, 네가 저놈을 죽인다면 내가 묘왕의 자리를 네게 물려주겠어. 사실 너와 나 사이엔 그렇게 큰 원한도 없어. 유씨
묘왕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옷은 다 찢어졌으며 고약한 타는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묘왕의 옷 속에 숨어 있던 독충들이 조금 전의 고온에 의해 증발한 냄새였다.지금의 묘왕은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 같았고 누구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유문기는 유기철에게 소리쳤다.“아버지, 저놈을 죽여요! 저놈을 죽이면 우리는 묘강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유기철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내가 묘왕을 공격하라고?”유기철의 단전도 파괴되어 공격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제 단전도 저 진서준이란 자에게 쥐어박혀서 망가졌어요. 제가 공격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아버지를 시키겠어요?”유문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문기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묘왕을 죽이고 싶었다.그동안 유문기는 묘왕에게 개처럼 부려지며 살아왔다.때때로 독을 시험하는 일도 겪었는데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몇 년째 묘왕을 죽이고 싶었던 유문기는 드디어 적절한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방금 진서준에게 단전이 파괴되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내 단전도 파괴된 거 잊었어?”유기철의 말에 유문기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이걸 드시면 일시적으로 예전의 힘을 조금 되찾을 수 있습니다.”유기철은 약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이거 부작용 없겠지?”부작용이 없다면 유문기는 자기가 먼저 먹었을 것이다.“부작용 있습니다. 먹으면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폐인이 됩니다.”유문기는 솔직하게 부작용을 실토했다.“아버지. 지금 이게 우리 유일한 기회예요. 저놈을 죽이고 제가 묘왕이 되면 뼈가 다 부서져도 제가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저놈 손에 죽을 겁니다.”유문기의 분석을 듣자 유미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묘왕의 손에 죽거나 이 기회에 한 번 싸워보고 나중에라도 누군가 그를 돌봐 줄 수 있는 것,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기철은 더 이상 망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