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준은 즉시 설괴에게 가장 간단한 수법을 가르쳤다.몇 분도 안 돼서 설괴는 금방 그 수법을 익혔고 몸이 50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작아졌다.작아진 설괴는 눈처럼 하얀 작은 원숭이 같았고 누가 봐도 귀여워 보였다.“이제 네 이름은 하얀이야.”진서준이 설괴의 이름을 지어줬다.모든 준비가 끝난 후, 진서준은 하얀이를 데리고 천산을 내려갔다.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는 진서준이 데리고 온 하얀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천산에 원숭이도 있나요?”진서준이 운전기사에게 이 원숭이가 천산의 설괴라는 걸 알려준다면 운전기사는 아마 기절초풍했을 것이다.온 하루 쉬지 않고 운전한 결과, 해가 지기 전에 진서준은 봉천시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 하얀이는 진서준을 따라 조씨 가문 병동으로 걸어갔다.“진 마스터님!”진서준이 돌아오자 조태희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급히 달려갔다.“무슨 일이에요?”조태희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진서준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민영이 몸에 꽂힌 은침을 뽑았는데 장 의사가 말하기를 우리 민영이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네요...”조태희의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내가 떠나기 전에 은침을 뽑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내 말을 듣지 않죠?”“그게... 장 의사가 뽑으라고 해서 뽑은 겁니다. 제 동생이 천산설련을 가지고 돌아와서 장 의사에게 민영이를 치료해 달라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이렇게 됐네요...”조태희는 내심 괴로워하며 간절하게 부탁했다.“진 마스터님, 제발 우리 딸을 살려주세요.”그때, 병동을 떠나려던 장 의사가 조태희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조 가주님,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따님 장례 준비는 알아서 해두세요.”진서준은 태연하게 작별 인사하는 장 의사를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민영 씨 은침을 뽑으라고 한 거야?”장 의사는 그 말에 멈칫하더니 진서준을 아래위로 쭉 살펴보고 냉랭하게 웃었다.“맞아, 내가 뽑으라고
장 의사는 얼굴색이 급격히 변하더니 진서준을 보며 말했다.“이봐, 내 병을 짐작할 수 있는 걸 보니 네가 능력이 좀 있는 모양이야. 근데 네가 이 여자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웃기지 마, 그건 네가 내 병부터 치료한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얘기야.”장 의사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자존심이 워낙 강한 장 의사는 자세를 낮추고 진서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서늘한 표정으로 장 의사를 쳐다보았다.“네가 믿든 안 믿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진서준은 단 한마디로 장 의사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고 장 의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이봐, 치료할 수 있기나 해? 할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봐.”장 의사는 머리를 돌려 조태희를 보며 말했다.“조 가주님, 가주님 면목을 봐서 한마디만 할게요. 이 자식이 지금 가주님 딸에게 침놓으면 반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침을 놓지 않으면 가주님 딸이 몇 시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주님이 따님과 제대로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을 겁니다.”장 의사는 일부러 조태희를 자극하려 했다.장 의사의 목적은 단순했다. 진서준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조태희의 손을 빌리려는 것이다.조태희도 바보가 아니었다.장 의사의 말을 들은 조태희는 이내 그 속셈을 눈치챘고 머리를 돌려 진서준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진 마스터님, 제가 마스터님을 믿지 않으려는 건 아닌데요. 단지 전...”“알았어요.”진서준은 바로 장 의사 앞에 걸어갔다.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진서준이 경멸의 눈길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걸 보며 장 의사는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장 의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서준은 이유도 없이 있는 힘껏 장 의사에게 귀싸대기 두 대를 날렸다.짝! 짝!순간 방 안에 청량한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상황을 목격한 조태희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막 방에 들어오던 조기강도 그대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왜 갑자기 날 때린 거야?’갑
이때 조태희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혹시... 그 따귀 두 대로 장 의사의 병이 치료된 건가?정말 그런 신기한 치료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진서준은 장 의사를 힐끗 쳐다보고 냉랭하게 말했다.“저리 비켜, 방해하지 말고.”“네, 알겠습니다.”장 의사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초등학생처럼 급히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이제 침을 놓을 거니까 아무도 날 방해하지 마세요.”진서준은 말하고 나서 손에 든 은침을 마술처럼 능숙하게 다루며 조민영의 몸 위에 놓기 시작했다.그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조기강조차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조태희는 이 틈을 타 장 의사에게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장 의사님, 방금 그건 대체 무슨...”“이분이야말로 진정한 명의입니다. 제가 눈이 멀어 몰라봤네요.”장 의사는 부끄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이론적으로 제 병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그런데 진 마스터님의 따귀 두 대로 제가 오랜 세월 앓아온 신경 경화가 완치되었습니다. 이분은 명의가 아니라 신의라고 해야 할 겁니다.”조태희는 그 말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아까 조태희가 예상한 것과 같단 말인가?단 따귀 두 대로 장 의사의 불치병을 치료한 게 사실이라면 이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일 것이다.진서준의 무도 실력은 무도계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고 의술은 세상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이런 천재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조태희의 머릿속에서 번쩍이자 진서준을 바라보는 조태희의 눈빛도 번뜩이기 시작했다.조태희는 이미 진서준에게 자기 딸 조민영을 시집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물론 진서준과 조민영 사이에는 일곱 살 정도의 나이 차가 있지만 이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문제는 진서준이 이 결혼을 원하느냐는 것이다.만약 진서준이 원한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하지만 진서준이 원하지 않는다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그 시각, 진서준은 조민영의 치
조민영 체내의 칠채지독이 완전히 제거되자 진서준은 여자 하인들에게 조민영을 욕실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진 마스터님, 정말 감사합니다.”조태희는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조태희가 다시 몸을 치켜 세우자 진서준은 냉랭하게 물었다.“누가 독을 넣었는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요?”“변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의심됩니다. 근데 제 생각에는 변씨 가문의 가능성이 더 큽니다. 제 딸 민영이 이미 심씨 가문과 혼약을 맺은 상황에서 우리 조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손을 잡으면 변씨 가문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요.”조태희가 가문 사이의 상황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그 말을 들은 진서준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심씨 가문과의 혼약은 조 가주님이 정한 건가요, 아니면 민영 씨 본인의 뜻인가요?”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질린 조태희는 얼굴이 새파래지며 급히 대답했다.“진 마스터님, 이건 제 결정이긴 합니다만... 민영이도 동의했습니다.”“동의했다고요?”진서준은 동의라는 글자를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조 가주님이 제안했는데 민영 씨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나요?”가문 간의 혼사는 오직 양가 어른들 간의 합의만 있으면 결정되는 것이고 정작 그 당사자는 어떠한 거부권도 가질 수 없다.이전의 김연아도 이런 일을 경험했었다.김연아는 당시 가문 어르신과 저항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의 힘으로 진씨 가문과 서씨 가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지금 조태희가 조민영이 동의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참 가소로운 일인 것 같았다.“민영 씨가 깨어나면 내가 직접 물어볼 겁니다. 민영 씨가 진심으로 이 혼인을 원했다면 나도 더 이상 이 일에 간섭하지 않을 거고요. 하지만 민영 씨가 이 혼인을 원치 않는다면 누구도 민영 씨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겁니다.”진서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조민영은 이미 자기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만약 누군가가 진서준의 여동생 진서라에게 강제 결혼을 강요한다면 진서준은 그
“으르르르...”하얀이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조기강은 즉시 소리 나는 방향을 주목했다.그 울부짖는 소리는 조기강이 천산에서 마주했던 설괴의 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조기강은 곧바로 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하얀이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졌다.비록 몸집은 작아졌지만 하얀이의 몸속에 깃든 그 무시무시한 힘은 여전했기 때문이다.“이 짐승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지?”조기강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마주한 듯 긴장했다.진서준은 조기강의 긴장한 모습을 보자 하얀이를 향해 손짓했다.그러자 하얀이의 얼굴에 맺혀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고분고분 진서준의 발치로 달려가 그의 종아리에 머리를 비비댔다.조기강은 본인을 거의 빈사 상태로 몰고 갔던 설괴가 이렇게 얌전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과연 자기가 천산에서 만났던 그 사나운 설괴가 맞는가?어떻게 이렇게 순한 모습으로 변했지?“천산에서 검존님이 만났던 게 이 하얀이 맞죠?”진서준이 조기강에게 물었다.“맞아요... 근데 어쩌다 이런 모습으로 변했죠? 게다가 왜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거죠?”조기강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하얀이는 내 반려동물이 됐어요. 더 이상 천산의 야만적인 설괴가 아닙니다.”진서준이 설괴를 반려동물로 삼았다는 말에 조기강은 속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진서준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기강은 본인과 진서준의 실력이 비슷하리라 여겼다.조기강은 현존하는 검존으로서 언제나 자부심이 넘쳐났었다.진서준이 비록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고 해도 아직 스무 살 남짓이니 실전 경험에서는 조기강이 앞설 것이라 여겼다.그러나 지금 조기강의 모든 예상이 우르르 무너졌다.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조태희가 물었다.“기강아, 너 이 귀염둥이와 면목이 있어?”“형, 내가 천산에서 당한 상처가 바로 이 귀염둥이 때문이야...”조기강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하자 조태희는 동공이 흔들렸다.조태희는 친동생 조기강의 실
허윤진과 허사연 자매를 바라보는 변지오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이렇게 아름다운 자매는 변지오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변지오는 스스로 이쁜 여자를 많이 봐왔다고 자부했지만 허사연 자매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매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허윤진 씨는 정말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완벽하군요.”변지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허윤진에게 걸어갔다.변지오의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기품은 한눈에 봐도 여성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다.거기에 변씨 가문 가주 장남이라는 신분까지 보탰으니 일반적인 여자는 변지오의 매력에 빠져들고도 남을 터였다.그러나 허윤진은 다른 여자와 달랐다.허윤진은 변지오에게 일말의 호감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반감이 섞인 눈빛으로 변지오를 바라보고 있었다.“감사합니다.”허윤진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응하자 변지오는 멈칫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인 여자도 변지오는 난생처음이었다.이때 허순재가 급히 나서서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변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제 손녀는 원래 성격이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를 대해도 다 이렇게 냉랭하게 대하곤 하지요.”그러나 허순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윤진은 진서준의 팔짱을 껴버렸다.그 행동은 허순재의 체면을 구기는 것과 다름없었다.허윤진은 사실 허순재를 존중했지만 허순재가 그녀의 동의도 없이 변지오를 집으로 부른 것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허순재가 허윤진을 가문 사이 결혼에 필요한 도구 취급하는 것 같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허순재는 그 모습을 보며 눈빛에 살기가 번뜩였고 어색한 미소를 애써 유지했다.변지오 역시 허윤진의 돌발 행동에 화가 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작은할아버지, 저는 지금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허윤진이 단호하게 변지오를 알 생각이 없다고 하자 허순재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변 도련님이 오늘 여기 온 건 단지 너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야.”그러면서 허순재는 진서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허순재가 진서준과 말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허사연이 진서준을 편들지 않을 리 없었다.“작은할아버지, 제 남자 친구 문제는 이제 그만 신경 쓰세요. 그리고 윤진 남자친구 문제도요. 이런 건 작은할아버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에요.”허순재의 동공이 흔들리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꽉 악물었다.불효녀들이 오늘 여기서 대역죄를 저지르는 판이었다.옆에 있던 변지오는 상황을 대충 이해하고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허 어르신, 보아하니 허씨 가문 젊은이들이 당신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군요. 사실 오늘 밤 우리 범씨 가문 저택에서 여는 연회에 허씨 가문을 초대하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변지오는 허순재가 만류하려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허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허순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사연과 허윤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너희 둘, 정말 날 화병으로 죽이려는 거야?”진서준의 눈빛은 싸늘했다.“당신이 사연과 조금이라도 혈연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이 말은 허순재에게 겁주려고 위협하는 말이 아니었다.진서준은 이미 조씨 가문에서 조민영이 가문 사이 결혼을 강요당한 일을 듣고 내심 불쾌한 상태였다.그런데 허순재가 이번에는 허씨 가문을 위해 허윤진을 변지오에게 넘기려 하다니, 이건 진서준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진서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자는 죽어 마땅했다.그런데 뜻밖에도 허순재는 피식 웃으며 진서준을 비꼬았다.“나도 한때 너처럼 젊고 겁 없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곧 너희가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변씨 가문의 압도적인 실력은 너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야.”허순재의 뻔뻔한 모습에 허사연은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왜 지금까지 이 노인이 온순한 양의 가면을 쓴 늑대라는 걸 몰랐을까?“가자, 서준아.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어.”허사연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너희가 어디
허씨 가문을 떠날 때야 허윤진은 진서준과 함께 온 하얀이를 알아챘다.“진서준, 이 원숭이는 어디서 샀어?”허윤진은 하얀이를 원숭이로 착각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하얀이는 그 말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왜 다들 날 원숭이 취급하는 거지? 정말 원숭이처럼 생긴 건가?’진서준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이건 원숭이가 아니라 천산의 괴물 설괴야.”“설괴라고?”허윤진은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반짝였다.“그래. 내가 천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만난 녀석이야. 쉽게 말하면 누렁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진서준의 말에 허윤진은 금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누렁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려는 거야?”허윤진이 웃으며 물었다.“그런 셈이지. 게다가 하얀이는 누렁이보다 훨씬 강해. 집에서 누렁이랑 함께 있으면 어머니랑 서라 걱정을 덜어도 될 거야.”그때 허사연이 뜬금없이 물었다.“서준아, 그럼 변씨 가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아까 허순재가 말했던 것처럼 변지오는 변씨 가문 가주의 장남이었다.게다가 변씨 가문은 동북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가였으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세 사람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진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오늘 저녁에 열리는 변씨 가문 연회에 같이 가자.”“응? 근데 우린 초대도 안 받았잖아?”허윤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우리가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지?”“변씨 가문이 우리를 초대하진 않았지만 조씨 가문은 초대받았잖아.”진서준이 조씨 가문을 언급하자 허윤진은 질투 어린 눈길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아차, 깜빡했네. 네 귀여운 애인이 조씨 가문의 금지옥엽이었구나.”진서준은 그 말에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무슨 소리야? 민영이는 내 마음속에서 그냥 여동생 같은 존재야.”조민영은 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아무런 연애 감정도 없는 단순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조민영은 진서라처럼 진서준이 보호해 주고 싶은 대상일 뿐이었다.“흥, 너희 남자들 속은 뻔히 보인다고.”허윤진은
결연한 표정을 지은 조슬기를 본 장강훈은 순간 당황했다.“뭐든 다 협상할 수 있어. 제발 흥분하지 말자.”장강훈이 받은 임무는 조슬기를 데려가는 것이었고 그녀를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만약 조슬기가 다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날 상황이었다.“다시 물을게, 내 조건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조슬기가 단호하게 묻자 결국 선택지가 없었던 장강훈은 마지못해 동의했다.“좋아, 저 여자는 보내주겠어.”“안 돼요, 아가씨. 절대 저 녀석들과 함께 가면 안 돼요.”신수란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만류했다.“란 언니, 걱정 마세요. 이 사람들은 절대 저를 함부로 다치진 않을 거예요. 언니는 먼저 몸부터 챙기세요.”조슬기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대체 누가 자기를 잡으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가 이토록 신중히 행동하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건 확신했다.“조 아가씨, 시간이 얼마 없어. 서둘러 나가자.”장강훈이 손짓하며 재촉하자 조슬기는 말없이 단검을 쥐고 천천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킬러들은 신수란을 힐끔힐끔 주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조슬기가 문턱에 거의 다다른 순간, 장강훈이 갑자기 신속하게 움직였다.쨍그랑!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얼른 이 여자를 잡아!”장강훈이 명령하자마자 양쪽에 대기하던 킬러들이 조슬기를 단단히 제압했다.“왜 이렇게 비겁해? 약속을 지켜야지!”조슬기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조 아가씨, 내가 아까 한 자기소개를 잊었나 보네?”장강훈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여자는 생포해. 저 남자는 어디 보자, 그냥 죽여버려.”장강훈은 진서준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오빠, 미안해요. 우리 때문에 이런 일이...”조슬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했다.“이봐, 당장 창문으로 뛰어내려. 내가 시간을 끌게.”신수란이 이를 악물며 지시했다.지금의 신수란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일
“너희 둘 다 도망갈 생각 말고 얌전하게 따라오기나 해!”말을 마친 남자가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는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신수란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장강훈!”최근 서남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악당인 장강훈은 살인과 약탈은 물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였다.게다가 그 실력은 상당히 강력해서 범행은 그야말로 대담하기 그지없었다.국안부에서도 장강훈을 체포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장강훈은 유령처럼 자취를 감췄고 한 달간 수색했음에도 잡히지 않았다.신수란은 설마 자신들을 습격한 자가 바로 악당 장강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국안부의 분석에 따르면 장강훈의 실력은 지의방에 오를 정도로 강력했다.“오호라? 너희 곤륜산 애송이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이거 참 영광스러운 일이군.”장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란 언니, 장강훈이 누구죠?”조슬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신수란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짐승 같은 놈이에요.”장강훈의 말을 듣자 진서준의 눈에도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이 두 여자가 곤륜 종문의 사람이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곤륜은 대한민국 4대 최정상 은세 종문 하나인데 그 제자들은 대체로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이번에 내려온 건 아마 한 달 후에 있을 숭산 대회 때문일 것이다.“이봐, 아가씨. 말은 가려서 하는 게 좋을걸?”장강훈이 차갑게 경고했다.“우리가 잡으려는 건 이 여자야. 넌 그냥 덤으로 딸려 온 상품일 뿐이고. 내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너 따위는 내 노예로 삼아도 된다 이거야.”장강훈이 쌀쌀하게 비웃으며 말했다.최근에 장강훈은 살인과 약탈 중에 수많은 여자를 노예로 붙잡아 둔 상태였다.신수란처럼 보기 드문 미인은 장강훈이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더 개소리를 지껄여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신수란의 얼굴이 분노로 시퍼
“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별말씀을요. 얼른 옷 입혀주세요. 깨어나면 괜히 또 뭐라고 할 테니까.”진서준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그림자 몇 개가 하나둘 진서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모텔로 들어섰다.“귀찮게 됐군.”진서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잠깐 눈 붙였더니 이런 귀찮은 일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곧이어 조슬기는 신수란의 옷을 전부 갈아입혔다.“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괜찮으니까 얼른 떠나세요.”진서준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이건 그냥 지나가던 인연일 뿐, 두 사람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진서준은 낯선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지금 짊어진 문제만으로도 진서준은 이미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벅찼다.“알겠어요.”조슬기도 쫓아오는 자들이 무서워 서둘러 신수란을 데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바로 그때, 신수란이 눈을 떴다.“어라? 아가씨, 여기가 어디예요?”눈을 막 뜬 신수란은 아직 정신이 멍한 상태였기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까맣게 잊었다.“란 언니, 깨어나셨군요.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조슬기는 기뻐하며 급히 물었다.“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신수란은 자기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놀랍게도 상처에서 더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이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처치해도 피가 멈추지 않았었다.“오빠, 그럼 저희는 이제 가볼게요.”조슬기가 진서준에게 작별 인사하자 그제야 신수란도 진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신수란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표정이 살짝 변했다.“네가 날 구해준 거야?”“맞아.”진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흥!”신수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내 몸을 본 거, 네가 날 구해준 걸로 눈감아 줄게.”“란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오빠가 아니었으면 언니는 아마 지금쯤 사경을 헤맸을 거예요.”조슬기는 불쾌하다
“란 언니!”신수란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조슬기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신수란을 침대에 눕혔다.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조슬기는 결국 간절한 눈빛으로 진서준에게 도움을 청했다.“오빠, 제발 우리 란 언니를 좀 도와주세요. 얼마를 드리든 상관없으니 제발 란 언니를 살려주세요.”눈물범벅이 된 조슬기의 얼굴은 누가 봐도 마음이 아려올 정도였다.진서준은 여자 눈물에 약했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하나만 묻죠, 왜 내 방에 온 거죠?”조슬기는 말문이 막혀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우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요. 아까 여기 들어올 때, 프런트에서 이 방이 비어 있는 것 같아서 잠시 숨어 있으려고 했어요.”진서준은 바닥의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숨어 있으려면 최소한 자국은 남기지 말아야죠. 이렇게 허술하게 움직이면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이라도 준 격인데요?”조슬기가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그녀는 금세 얼굴이 창백해지며 다급하게 외쳤다.“큰일이에요. 그럼 그 사람들이 곧 여길 찾아오겠네요.”어리바리한 조슬기의 모습을 보고 진서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일단 이 사람부터 치료할게요. 상처가 낫는 대로 빨리 떠나세요.”“고마워요, 오빠.”조슬기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진서준은 은침을 알코올로 소독한 후, 호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병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이 여자 옷 좀 벗겨주세요.”“아, 네.”조슬기는 진서준의 말을 따르며 재빠르게 신수란의 옷을 전부 벗겼다.단숨에 신수란의 옷을 전부 벗겨내자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다시금 드러났다.물론 비밀의 숲을 포함한 그 신비로운 부분까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진서준은 갑자기 밀려온 충격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이 여자는 진짜 멍청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걸까? 상처는 복부에 있는데 왜 바지를 벗기는 거지?’“바지는 벗길 필요 없어요
“누가 이기고 질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습니까.”고인권이 끼어들었다.“맞아, 우리 8대 특전대도 호락호락한 부대가 아니야.”“전신전 놈들에게 우리 8대 특전대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주자.”나머지 사령관들도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였다.갑작스레 열정이 불타오르는 이들을 보며 상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좋아, 한 달 후에 자세한 일정을 알려주마.”영상 통화가 끊기자 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각자의 기지로 돌아가 장병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소식을 들은 모든 장병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전신전을 반드시 이겨야 해. 절대 진 교관님을 실망하게 하지 말자.”모두가 열기를 띠며 훈련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한편,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남 국경.진서준은 올기를 타고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마을은 크지 않았고 진서준은 대충 모텔을 한 군데 찾아 방을 얻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진서준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곯아떨어졌다.진서준은 너무 피곤했다.어젯밤의 전투로 지금의 진서준은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올기가 진서준을 등에 태우지 않았더라면 진서준은 아마 울창한 숲속 어딘가에서 쓰러졌을 것이다.진서준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느닷없이 열렸고 이어 아름다운 두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그중 청순한 외모의 여자는 나이가 스무 살 조금 넘어 보였다.다른 여자는 타이트한 검은색 옷차림에 글래머와 세련된 얼굴을 지닌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여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배 부분에선 피가 잔뜩 흘러내리고 있었다.딱 봐도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사람이 있네요.”두 여자가 곤히 자는 진서준을 보자 살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아래층 투숙 기록을 확인했을 땐 이 방에 투숙객이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저 사람 자고 있으니 조용히 움직이죠. 깨우지만 않으면 될 거예요.”젊은 여자가 말했다.“근데 자칫 중간에 깨어나면 어쩌죠...”성숙한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란 언니,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
아침, 설표 특전대 기지.단잠에 빠져 있던 소정태와 고인권 등 사령관은 갑작스러운 군부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8대 특전대 사령관들은 즉시 회의실에 집합했다.“어젯밤, 묘강에서 폭동이 발생했어. 그러나 배논국 군부가 폭동을 단숨에 진압하며 묘강은 다시 배논국의 영토로 돌아갔어.”상부의 이 한마디에 현장에 있던 여덟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소정태 일행은 서남 국경에서 묘강의 사수들과 적지 않게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다.다들 묘강의 사람들은 전부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미친놈일 뿐만 아니라 주술과 독충술까지 능숙히 다루는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만의 군대와 탱크와 같은 대형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배논국 군부가 강제로 공격했다간 양측 모두 피바다가 될 게 뻔했다.그런데, 단 하룻밤 만에 묘강이 평정되다니 너무나 기묘한 일이었다.“혹시... 진 교관이 한 일이 아닐까?”고인권이 불쑥 입을 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여덟 사령관은 진서준이 묘강으로 갈 가능성을 두고 논쟁을 벌였었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어마어마한 소식이 터진 것이다.“설, 설마 그랬겠어? 진 교관님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묘강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잖아?”누군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맞아. 그건 너무 황당한 얘기야. 게다가 진 교관이 대체 어떻게 묘강에 갔단 말이야? 그곳은 철통같이 방어되어 있어서 전신전 병사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야.”“난 오히려 가능성이 있다고 봐.”소정태가 갑자기 말했다.“너희들 기억하지? 예전에 너희가 설표 특전대가 최고 특전대로 올라설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지? 근데 진 교관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려운 걸 해냈어, 그것도 한 달도 안 걸려서 말이야. 지금도 난 똑같이 믿어. 진 교관님은 묘강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소정태는 진서준에 대해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었다.소정태는 그야말로 진서준의 열렬한 팬이었다.“그럼, 진 교관님께 전화라도 걸어볼까
레이더 화면에 수많은 적기가 포착됐고 곧이어 포탄이 몇 발 날아왔다.조종사들은 반응할 틈도 없이 폭격을 정면으로 맞았다.쾅!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칠흑 같은 밤하늘에 거대한 불꽃이 튕기며 대낮처럼 환해졌다.지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오스프리 전투기 두 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문기는 도망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유문기가 두려워하는 건 오스프리 전투기가 아니라 바로 그 괴물 같은 존재, 진서준이었다.묘왕은 자기 비장 카드인 오스프리 전투기가 파괴된 것을 보며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누가 한 짓이야? 어떤 미친놈이 감히 내 전투기를 부쉈어?”그 순간, 배논국 군대 로고가 새겨진 전투기 수십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이 광경에 묘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아까 상황 좀 더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할 걸...’전투기 편대가 먼저 도착하고 이어 대규모 부대가 들이닥쳤다.지도자를 잃은 묘강은 머리를 잃은 파리 떼처럼 혼란에 빠졌다.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진서준은 더 이상 이들과 놀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진서준은 참선검을 손에 잡고 단 일격으로 묘왕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눈을 뜬 채 죽은 묘왕의 눈에는 끝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묘왕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을 수 없었다.“날 죽여.”이때의 유기철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은 마치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유기철이 본인이 아무리 애원해도 진서준이 살려주지 않을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넌 네 친조카까지 해쳤어. 널 만 번 죽여도 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거야.”진서준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난 널 죽이지 않겠어. 대신 널 평생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살게 해주지.”그 말과 함께 진서준은 손바닥으로 유기철의 가슴을 내리쳤다.유기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유기철은 진서준이 자기를 죽이는 건 두렵지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자 유문기 일행은 순간 얼어붙었다.유문기와 묘왕은 내부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진서준은 그들의 공동의 적이었다.진서준이 살아있다면 그들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유문기와 묘왕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묘왕과 유기철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두 사람의 몸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너 폭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야?”유문기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방금 폭탄이 터진 후, 묘왕 혼자만 폭발의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본 유문기는 진서준이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실은 유문기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유문기의 예측은 현실을 완전히 빗나갔다.“네 생각에 그 포탄 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네 눈엔 내가 저 늙은 영감탱이만도 못해 보이나?”영감탱이는 당연히 묘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진서준, 네가 묘왕을 죽여준다면 내가 묘강의 재산 절반을 네게 주마. 어때?”진서준과 맞설 수 없음을 깨달은 유문기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바로 진서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진서준을 자기편으로 영입하면 진서준이 자기를 건드릴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묘강의 재산은 거의 배논국의 절반과 맞먹는 수준이었다.배논국은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국가였기에 그 재산은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였다.하지만 진서준에게 이 돈은 전혀 필요 없었다.진서준이 이번에 온 이유는 단 두 개, 유문기를 죽이고 묘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진서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더군다나 묘강의 돈은 대부분 불법적인 경로에서 온 더러운 돈이었다.그런 돈은 진서준이 원하지 않았다.유문기가 진서준을 설득하려는 걸 본 묘왕은 즉시 눈을 굴리며 외쳤다.“이봐 청년, 네가 저놈을 죽인다면 내가 묘왕의 자리를 네게 물려주겠어. 사실 너와 나 사이엔 그렇게 큰 원한도 없어. 유씨
묘왕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옷은 다 찢어졌으며 고약한 타는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묘왕의 옷 속에 숨어 있던 독충들이 조금 전의 고온에 의해 증발한 냄새였다.지금의 묘왕은 바람에 꺼져가는 촛불 같았고 누구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는 유문기는 유기철에게 소리쳤다.“아버지, 저놈을 죽여요! 저놈을 죽이면 우리는 묘강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유기철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내가 묘왕을 공격하라고?”유기철의 단전도 파괴되어 공격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제 단전도 저 진서준이란 자에게 쥐어박혀서 망가졌어요. 제가 공격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아버지를 시키겠어요?”유문기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유문기도 직접 전장에 나서서 묘왕을 죽이고 싶었다.그동안 유문기는 묘왕에게 개처럼 부려지며 살아왔다.때때로 독을 시험하는 일도 겪었는데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몇 년째 묘왕을 죽이고 싶었던 유문기는 드디어 적절한 기회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방금 진서준에게 단전이 파괴되어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내 단전도 파괴된 거 잊었어?”유기철의 말에 유문기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이걸 드시면 일시적으로 예전의 힘을 조금 되찾을 수 있습니다.”유기철은 약을 받아 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이거 부작용 없겠지?”부작용이 없다면 유문기는 자기가 먼저 먹었을 것이다.“부작용 있습니다. 먹으면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폐인이 됩니다.”유문기는 솔직하게 부작용을 실토했다.“아버지. 지금 이게 우리 유일한 기회예요. 저놈을 죽이고 제가 묘왕이 되면 뼈가 다 부서져도 제가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저놈 손에 죽을 겁니다.”유문기의 분석을 듣자 유미철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묘왕의 손에 죽거나 이 기회에 한 번 싸워보고 나중에라도 누군가 그를 돌봐 줄 수 있는 것,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유기철은 더 이상 망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