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창밖 나뭇잎을 뚫고 지나가며 산산이 부서져 진서준의 몸 위로 떨어졌다.“오빠, 밥 먹으러 나와!”진서라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여동생의 목소리에 진서준은 천천히 눈을 뜨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알았어!”진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며 진서라를 따라 1층 거실로 내려갔다. 조희선과 김연아는 이미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다.아침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변희영의 전화가 울렸다.“위치를 보낼 테니 바로 그리로 오세요.”변희영은 전화를 끊고 진서준에게 휴대폰을 건네 허씨 가문 별장의 위치를 황운재에게 보내게 했다.“진짜 그 장로를 불렀어요?”진서준은 변희영의 행동에 살짝 놀랐다.어제는 변희영이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당연하죠, 우리 성약당은 이제 예전과 달라 허준서 같은 돌팔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변희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진서준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사실 그 녀석이 돌팔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보통 사람을 깔보는 의사가 될 거예요. 그런 사람은 정말 당신들 성약당에 들어가면 안 되죠.”의사는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만약 모든 의사가 허준서처럼 약삭빠른 사람이라면 성약당도 결국 다시 과거처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약삭빠른 사람이라고요? 그럼 더더욱 성약당에서 받아들일 수 없죠.”변희영은 쌀쌀한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자, 얼른 식사나 하죠. 성약당 새 장로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요.”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진서준은 변희영과 함께 허씨 가문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황운재는 이미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황운재는 올해 예순이 넘은 백발의 노인이었다.황운재는 무인이 아니었지만 대신 뛰어난 의술과 높은 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밤새 차를 타고 와서인지 황운재는 매우 피곤해 보였다.“아가씨, 진 선생님!”황운재는 진서준과 변희영을 보자마자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 앞에 공손히 다가갔다.황
이건 사실을 직접 허준서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더 잔인한 방식이었다.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허준서에게 발차기를 날려 출발 지점으로 되돌려버리는 방식은 중간에 허준서를 막아서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하지만 그 잔혹함을 잘 모르는 변희영은 살짝 분개하며 말했다.“그럼 황 장로는 헛걸음한 셈이잖아요?”황운재는 자기가 헛걸음이었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급히 말을 돌렸다.“괜찮습니다, 아가씨. 여기 이제 제가 필요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겠습니다.”황운재가 급히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자 변희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황 장로, 하루 쉬고 가세요.”“안 됩니다. 강남에는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한 명 있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습니다.”황운재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강남에 황운재의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변희영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환자가 누구죠?”진서준이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비록 성약당이 새롭게 개편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여전히 성약당의 장로급 인물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황 장로를 부른 사람은 분명 강남에서 유명한 가문일 것이다.강남의 유명한 가문 중, 진씨 가문과 서씨 가문은 진서준도 알고 있었다.만약 진씨 가문이라면 진서준은 상관하지 않을 거지만 서씨 가문의 사람이면 진서준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서씨 가문 현 가주의 딸입니다.”황 장로가 진서준의 질문에 대답했다.“뭐라고요?”진서준의 눈동자가 확장되며 황 장로를 믿기지 않는 듯 쳐다보았다.진서준의 큰 반응에 황 장로는 깜짝 놀랐다.“진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서씨 가문 현 가주의 딸이라면, 서지은이 아닌가?시지은이 병에 걸렸다니, 그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진서준은 황운재의 손목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환자가 서지은이 맞습니까?”“네, 진 선생님도 혹시 아시나요?”황 장로가 진서준이 환자를 알자 깜짝 놀랐다.진서준은 서지은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마음이 다급해졌다.“무슨 병인가요?
허준서가 다시 나타나자 허사연 자매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어젯밤 허준서의 행동은 허씨 가문 모두에게 크나큰 불쾌감을 주었다.“성태 삼촌, 안녕하세요. 사연아, 안녕.”허준서는 오자마자 허사연 일행에게 차례로 인사했다.허성태는 미소를 지으며 허사연에게 말했다.“젊은이들끼리 얘기해. 이 영감은 끼지 않을게.”말이 끝나자 허성태는 낚시 도구를 챙기고 별장 옆 호수로 낚시하러 갔다.허성태가 그렇게 급히 나가는 모습을 보자 허준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어젯밤 허사연의 남자친구는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었다.물론 그 남자가 어젯밤 데려온 여자도 연기하고 있는 거였다.허성태도 두 사람이 망신을 당할 걸 알았기에 여기서 체면을 구길 수 없었던 것이다.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허준서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사연아, 네 남자친구는 어디 있어? 그 여자랑 황 장로님도 같이 데려오라고 얼른 전해. 난 여기서 네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을게.”허준서는 별장이 자기 집인 것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넌 한발 늦었어. 진서준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강남으로 갔어.”허윤진은 허준서와 그의 여자친구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뭐라고? 강남에 갔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허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그 사람이 강남에 간다고 해도 너희 허씨 가문 명성으로는 황 장로님을 청할 수 없어. 사연아, 내 말이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잘 들어. 서울에선 너희 허씨 가문이 어느 정도 체면은 있어도 서울만 넘어가면 모든 걸 장담할 수 없어...”말을 마치며 허준서는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물론 허준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뭐라고?”허윤진은 이를 악물고 허준서를 노려보았다.지금 허윤진의 성격은 이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진서준을 만나기 전이라면 허준서가 이렇게 허씨 가문을 모욕했으면 허윤진은 이미 경호원을 불러 허준서를 처리하라고 했을 것이다.친척이라고 해서 봐줄 필요는 없었다. 맞아야 할 사람은 맞아야 제정
“너 뭐라고 지껄였어? 또 한 대 더 맞으려고 작정했어?”허윤진의 차가운 표정을 보자 허준서는 겁먹고 한발 물러났다.허준서의 얼굴은 여전히 화끈거리고 아파서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허준서는 씩씩거리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 허윤진. 이 한 대는 내가 꼭 기억할게. 너희 자매 두고 보자.”“왜? 사람이라도 불러 내게 복수라도 하자고 그래?”허윤진은 냉소하며 대꾸했다.“좋아, 그럼 얼른 불러 봐.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허윤진의 거만한 태도를 보자 허준서는 치를 떨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허준서가 돌아서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눈앞에 누렁이가 한 마리 나타났다.허윤진을 실력으로 누를 수 없어도 허윤진이 기르는 개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허준서는 몇 걸음 다가가 누렁이에게 발길질했다.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누렁이는 허준서가 갑자기 공격해 오자 커다란 입을 벌려 허준서에게 달려들었다.우두둑!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허사연은 이 장면을 보고 이마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찌푸렸다.허준서가 허윤진에게서 받은 화를 누렁이에게 풀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누렁이는 사실 단순한 개가 아니라 전에 진서준에게 훈련받은 대형 사자였다.비록 허사연 자매의 실력은 지금 큰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누렁이를 상대하기에는 둘이 힘을 합쳐도 역부족이었다.“아악!”발목이 물린 허준서는 극심한 통증에 울음을 터뜨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누렁이야, 그만 물어.”허사연은 인명 사고가 날까 걱정스러워 얼른 누렁이에게 명령했다.허사연의 명령에 누렁이는 그제야 발목을 물었던 입을 벌렸다.하지만 누렁이의 이빨에는 이미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허준서는 바닥에 엎드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문 앞의 경호원들도 처절한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와 상황을 살폈다.허준서가 물린 것을 보고 경호원들은 허사연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을 보냈다.“저분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허사연은 손을 내저으며 답답한
가랑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검은 먹구름이 드리운 서씨 가문 위, 그 분위기는 지금 서씨 가문 모든 사람의 심경과 딱 맞아떨어졌다.사흘 전, 서씨 가문 가주 서광문의 딸 서지은이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병의 징후는 전혀 없었던 이번 사태는 몇 년 전 불시에 닥쳤던 대지진처럼 서씨 가문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서지은이 쓰러졌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서광문은 곧바로 외지에서 달려와 전국 각지의 명의를 초청해 딸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하지만 수많은 명의가 다녀갔어도 서지은의 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서광문은 심지어 성약당에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변지산은 제자 모집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어 서씨 가문에 들릴 시간이 없었다.그래서 변지산을 대신해 새로 임명된 장로 황운재가 초청받아 왔지만 그 역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어젯밤 황운재마저도 급히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호출을 받아 서씨 가문을 떠났다.“여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서광문의 아내는 눈물로 얼굴이 번진 채 울부짖었다.본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젊어 보이던 그녀는 단 사흘 만에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그만 울어. 내가 다시 변 당주를 청하기 위해 사람 보냈어. 변 당주가 이래도 안 온다면 그때 내가 직접 갈 거야.”서광문의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만약 변지산이 자기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왕안석 대종사에게 부탁해 강제로 밧줄로 묶어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우리 딸의 그 옛 남자친구는요? 그 사람도 의사잖아요?”서광문의 아내가 문뜩 뭔가 기억난 듯 말했다.“그 녀석은 잊어. 내가 안 찾은 줄 알아? 연락이 안 되잖아!”서광문은 굳은 얼굴로 냉정하게 말했다.그 역시 진서준의 뛰어난 의술을 알고 있었지만 수없이 전화를 걸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연락되지 않자 서광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작년 연말부터 진서준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증발한 것처럼 행방이 묘연했다.바로 이때, 서씨 가문 집사
진서준은 서지은의 중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러자 황운재가 갑자기 깨달은 듯 말했다.“그래서 제가 아가씨 맥을 짚었을 때, 맥은 평온했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깨울 수 없었던 거군요.”만년몽이라는 이 현혹향은 황운재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이 향은 일반 사람들은 구하기 힘들고 보통 부유한 사람들이 불면증에 시달릴 때 수면제로 조금씩 사용하는 것이었다.서지은이 스스로 만년몽을 사용했다고 해도 과다하게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는 누군가 서지은을 해치려 했다는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그 사람이 서지은을 죽이려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진서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서지은이 병에 걸린 후, 서광문 부부 외에 가장 마음이 급한 사람은 진서준이었다.그리고 서씨 가문에는 진서준을 이를 갈며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서광문의 동생 서광철이었다.이전에 진서준은 서광철의 아들 결혼식에서 김연아를 억지로 식장에서 밖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그 사건으로 인해 서광철 가족은 대한민국 명문대가 사이에서 체면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그런 치욕을 당했던 서광철이 진서준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작년 연말 이후로 진서준은 인간 세상에서 증발한 듯 자취를 감췄다.그래서 진서준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광철은 이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이다.서지은의 모습을 보면서 진서준은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진서준뿐만 아니라 서광문도 진서준의 설명을 듣고 나서 모든 것이 연결된 것처럼 머릿속이 개운해졌다.“그 녀석이 감히 우리 딸에게 이런 개수작을 부려?”서광문은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서지은이 치료될 수는 있겠지만 진서준이 겁쟁이처럼 머뭇거리며 오지 않았다면 자기 딸은 끝장났을 것이다.“서 가주, 이제 나가주세요. 서지은을 치료해야죠. 치료가 끝나면 서광철과 결판을 내겠습니다.”진서준의 눈에는 차디찬 살기가 번뜩였다.이미 서지은을 자기 가족으로 인정한 이상, 가
서광문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서광철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네가 한 짓이야?”서광문은 차가운 시선으로 서광철을 노려보며 물었다.“그래, 내가 했어.”서광철은 소파에서 일어나 통쾌하게 인정했다.어차피 진서준은 이미 도착했으니 서지은도 생명의 위협은 없을 것이다.서광문은 이따위 일로 서광철이 자기와 결투까지 하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있는 친형제였기 때문이다.서광문은 복수하고 싶어 하는 서광철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결국엔 진서준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서광문은 이를 악물며 따지기 시작했다.“잘 아네.”서광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석 달 넘게 진서준을 보지 못했잖아.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 지난번에는 형 체면을 봐서 진서준을 놓아주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광철은 서광문이 자기 복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래서 서광철은 오늘 특별히 고수 두 명을 초청했다.오늘 서광철은 절대 진서준이 서씨 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형, 이 일은 그냥 모른 척하세요.”서광철이 한마디 충고했다.서광철이 이토록 고집스러운 것을 보며 서광문은 한숨을 내쉬었다.“넌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구나. 내가 이러는 건 널 보호하기 위해서야. 석 달 동안 보지 않았는데 진서준의 실력이 더욱 강해졌어. 네가 데려온 이 두 명이 실력이 뛰어나긴 해도 진서준의 상대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 광철아, 이 복수는 이제 그만 포기해. 나중에 내가 다시 동현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줄게.”서광문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자기가 답답하기만 했다.“아니, 난 포기할 수 없어. 당시 그 많은 하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사람이 형 딸과 형 자신이었다면 이 복수를 내려놓을 수 있겠어?”서광철의 감정은 격해졌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당시 강남 전역의 사람에서 조롱거리가 된 사람이 서광문이었다면 그 역시 참지
서지은의 몸에서 나는 향이 코끝을 스치자 진서준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서준아, 정말 보고 싶었어...”진서준을 꼭 껴안은 서지은은 얼굴을 그의 품에 묻은 채 진서준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보고 싶었어.”진서준이 솔직하게 말했다.둘은 그렇게 서로를 꽉 껴안고 한참 동안을 말없이 있었다.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진서준은 서지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샤워하고 옷 갈아입어. 밖에서 기다릴게.”그제야 서지은은 자기가 알몸 상태로 진서준과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서지은의 얼굴은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졌고 살짝만 건드려도 물이 흐를 것 같았다.“진서준, 너... 왜 내 옷을 벗긴 거야? 여긴 어디지?”서지은은 자기가 이미 사흘간 혼수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네가 기절했었어. 그래서 내가 방금 추나요법으로 치료했어.”“뭐? 내가 기절했다고?”서지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코를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하지만 기절하기 전의 일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물가물했다.“내 기억으로는 오후에 광철 삼촌이 잠을 잘 잘 수 있게 해준다며 향낭을 주셨던 것 같아.”서지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역시 범인은 그 녀석이었다.이제까지는 진서준의 추측이었지만 서지은의 말을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서광철의 소행이었다.“잠은 잘 잤어?”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잘 잤어, 근데 이제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아. 다음에 깨어났을 때 네가 또 사라질까 봐 겁나.”서지은은 진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작은 고양이처럼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난 떠나지 않아. 먼저 샤워하러 가. 감기 걸리겠어.”진서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알겠어, 샤워하고 올게. 밖에서 기다려줘.”서지은은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태연히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며 진서준에게 일부러 자기 몸을 보여주었다.서지은은 은근슬쩍 진서준의 반응을 살폈다.진서준이 자기 몸에 시선을 빼앗긴
“좋아요,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하네요.”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후, 소정태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서준과 허사연 일행에게 방 세 개를 준비했다.방은 별로 화려하지 않고 심플하고 깔끔했고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진서준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조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벨이 오래 울렸음에도 아무도 받지 않자 진서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진서준이 전화를 몇 번 더 걸어봤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조민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지난번 양씨 가문에서 조민영은 자기 목숨을 걸고 진서준 앞을 막아섰다.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진서준은 조민영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진서준의 마음속에서 조민영은 이미 친동생과도 같은 존재였다.“모레쯤 조씨 가문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봉천시.조씨 가문 저택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조씨 가문의 개인 병원 병실 내 조민영이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조민영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숨결이 미약했으며 기운은 극도로 쇠약했다.조민영 곁에는 조태희와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대머리 남성이 서 있었다.“장 의사님, 제 딸 상태가 어떻습니까?”조태희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장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가주님, 따님께서 단순히 병에 걸린 것이면 다행이었겠지만 문제는 병이 아니라 중독된 겁니다.”딸이 중독되었다는 말을 듣자 조태희의 얼굴이 굳어졌다.‘중독이라고? 언제 중독된 거지? 내가 왜 몰랐지?’“무슨 독에 중독된 겁니까?”지금 범인을 찾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은 딸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딸을 살린 후에 범인을 찾아도 늦지 않았다.“민영 아가씨 상태를 보아하니 칠채지독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이 독은 오독의 독액에 빙정과 천산설련을 섞어 만든 무색무취의 독입니다.”장 의사가 자세하게 독에 관해 설명했다.설명을 들은 조태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빙정과 천산설련은 매우 희귀한 약재로 천지산 근처에서만 발견될 수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욕조를 보며 소정태는 머리를 돌려 진서준에게 물었다.“진 교관님,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그래요, 근데 처음에는 좀 아플 거니까 꾹 참아야 해요.”진서준이 한마디 일러두었다.소정태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소정태가 횡련 대종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여러 전장에서 생존한 덕분이었다.몸에는 칼자국과 총상투성이였고 아무리 강렬한 고통이라도 소정태는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소정태는 옷을 단숨에 벗어 던지고 욕조로 뛰어들었다.그 순간, 소정태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강렬한 약효가 소정태의 근육과 뼈대를 자극하며 우두둑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결국 소정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진서준이 작성한 처방전은 단번에 효과를 발휘했다.잠깐 사이에 소정태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소정태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무려 30분간 이어졌다.30분 후, 욕조 안의 약효는 완전히 사라졌고 피처럼 붉었던 욕조 물은 다시 맑고 투명해졌다.소정태를 다시 보니 온몸에서 이전보다 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난 소정태는 드디어 경지를 돌파하게 된 것이었다.소정태는 일급 대종사의 절정 단계에서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평생 이급 대종사에 이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진서준이 작성한 처방전 덕분에 단숨에 이급으로 돌파한 것이다.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기쁨과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욕조에서 나온 소정태는 급히 옷을 입고 무릎을 꿇어 진서준에게 머리를 숙였다.“진 교관님, 당신은 제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나 다름없습니다.”진서준이 없었다면 소정태는 평생 이급 대종사라는 경지의 문턱에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진서준 덕분에 소정태는 단 30분 만에 평생 넘지 못할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진서준은 소정태를 일으키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사령관님이 돌파할 수 있었던 건 사령관님이 이전부터 쌓아온
이때 병사들이 몰려와 허윤진에게 칭찬과 존경을 연신 쏟아냈다.“사모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젊으신데 벌써 종사라뇨.”“이런 대단한 사모님이 계시니 저희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주변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사모님이라 부르자 허윤진은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허윤진은 허사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서둘러 사람들을 정정했다.“저는 사모님이 아니에요. 저분이 사모님이고 저는 저분 동생이에요.”처제를 사모님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다들 아부하려다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사람들은 급히 허사연 곁으로 가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저희가 착각했어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사모님, 저희 때문에 교관님과 다투지 마세요.”“진 교관님, 정말 죄송합니다...”진서준의 얼굴이 잔뜩 굳어지더니 병사들에게 소리쳤다.“다들 한가한 모양이지? 어서 가서 권법 연습이나 해.”백여 명의 병사들은 재빨리 진서준이 개량한 열풍권을 연습하러 뛰어갔다.“진서준, 방금 내 실력 어땠어?”허윤진은 깡충깡충 뛰어 진서준 앞으로 오더니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정말 강하던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이 훨씬 늘었어.”“당연하지. 내가 누군데.”허윤진은 한껏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좋아, 너희는 알아서 구경하고 있어. 난 소정태의 상태를 좀 보고 올게.”소정태에게 중상을 입혔으니 진서준은 당연히 확인하러 가야 했다.진서준이 군구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간호사가 소정태에게 붕대를 감고 있었다.“진 교관님!”진서준이 오자마자 소정태는 벌떡 일어나 경례를 올렸다.“크게 다쳤는데 얼른 앉으세요.”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한쪽에 있던 간호사는 놀라운 눈빛으로 진서준을 쳐다보았다.소정태가 어떤 사람인지 군구 전체가 다 알고 있었다.심지어 군구 최고 책임자를 마주해도 소정태는 항상 당당했다.그런 소정태가 이제 겨우 스무 살 넘은 청년에게 먼저 경례를
고소연은 설표 특전대에서 유일한 여성 종사였고 그 실력은 압도적이었다.장서안 같은 일반 대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사령관인 박준명조차 고소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허윤진과 고소연의 대결 전, 사실 대다수 병사는 허윤진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겼다.진서준이 강하다고 해서 그의 여자친구도 강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병사들은 두 사람을 위해 넓은 공터를 마련했다.“허윤진 씨, 실례하겠습니다.”고소연은 허윤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저를 봐주지 말고 모든 실력을 보여주세요.”허윤진도 똑같이 예를 갖추어 답했다.그 말이 끝나자 고소연은 미세하게 다리를 굽힌 후 치타처럼 순식간에 허윤진을 향해 돌진했다.고소연의 속도는 너무 빨라서 주변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의 시선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고소연이 자기 실력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허윤진의 눈빛에도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고소연은 허리를 낮춘 채 양손을 날카로운 발톱처럼 치켜들고 허윤진의 팔을 향해 덤벼들었다.고소연의 의도는 단순했다.허윤진을 다치게 하지 않고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마침 잘 왔네요.”허윤진은 체내의 영기를 모으더니 불꽃처럼 타오르는 기운이 그녀의 양손에 뿜어져 나왔다.이 광경을 본 병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맙소사, 진 교관님의 여자친구도 종사였어?.”“세상에, 그래서 사모님이 고소연 부사령관님에게 대련을 신청했구나. 이제야 이해할 것 같네.”“사모님이라고? 야, 너 진짜 표현 잘한다.”곧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병사들 사이에서 퍼졌다.진서준은 그 단어를 듣자 얼굴이 어두워졌다.‘윤진은 내 처제가 아니야. 내 여자친구는 옆에 있는 사연이라고.’고소연은 허윤진도 종사라는 사실을 깨닫자 단전의 강기를 모아 기세를 더욱 끌어 올렸다.쾅...두 사람의 팔이 부딪히며 둔탁한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지면 위의 눈이 순간적으로 튕겨 나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허윤진은 제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고소연은 일곱 발짝 이상 뒤로 물러나며 겨우 몸을 가눴다.
진서준의 말에 소정태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진 교관님.”소정태는 감격해하며 한마디 더 보탰다.“진 교관님, 제 식구는 이제 진 교관님께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부디 제대로 된 훈련 부탁드립니다.”소정태가 떠난 후, 진서준은 백여 명의 병사를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아직도 날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나요?”“없습니다. 우리 모두 진 교관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병사들이 일제히 외치는 모습을 보자 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렇다면 특훈을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진서준은 설교 특전대에서 주목을 받는 장서안을 가리켰다.“이리 와 보세요.”장서안은 바로 앞으로 나와 공손히 물었다.“진 교관님, 무슨 지시가 있으십니까?.”“아까 여러분이 연습한 그 권법을 한 번 더 보여줘요.”진서준의 말을 듣자 장서안은 망설임 없이 설표 특전대 특유의 열풍권을 선보이기 시작했다.열풍권이란 권법은 이름 그대로였다.모든 주먹과 발차기가 굉장히 빠르고 맹렬했으며 거의 내지를 때마다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이 권법은 특전대 병사들의 직업 특성과도 관련이 있었다.특전대 병사들은 다들 국가를 지키고 전장에서 적을 처치해야 하는 군인이었다.한 방에 적을 죽이지 못하면 죽는 건 바로 병사들 자신일 것이다.이러한 절박함 때문에 열풍권은 빠르고 강렬하기는 했지만 방어 자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그래서 상대가 자기와 동등한 실력이라면 열풍권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나 상대가 더 강하다면 한 번의 공격 이후에 쓰러지는 건 오히려 아무런 방어도 없는 본인일 가능성이 높았다.진서준은 열풍권을 유심히 본 후 연신 고개를 저었다.“그 권법은 참 허점투성이군요.”“네?”진서준의 평가에 병사들은 전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이제 내가 그 권법을 개량해 줄 거니까 다들 집중해서 보세요.”진서준은 창욱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는 3년 동안 권법, 발차기, 검술, 도법 등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이렇게 여러 분야의
진서준의 속도는 이미 음속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빨라 아무도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했다.심지어 눈 위에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병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진서준이 이미 소정태의 바로 앞에 있었다.진서준이 모래 주먹 크기만 한 주먹으로 살짝 튕기는 듯한 동작을 하자 순식간에 수만 톤의 강력한 힘이 소정태의 가슴에 작렬했다.쿵!소정태는 곧바로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며 고막을 때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소정태가 날아간 방향에 따라 새하얀 눈밭 위로 엄청나게 긴 구덩이가 생겼다.멀리서 보면 초음속 전투기가 눈 위를 스치듯 비행하며 생긴 자국 같았다.소정태가 날아가는 동안 훈련장에 있는 장비들과 눈으로 덮인 나무들은 연달아 부서져 갔다.소정태는 수백 미터나 날아간 후에야 땅에 사나운 기세로 떨어졌다.순간, 훈련장은 완전히 정적에 빠졌다.하늘에서 내리던 눈송이조차 그대로 멈춘 듯이 공중에 멍하니 떠 있는 느낌이었다.모든 사람은 입이 떡 벌어져 사과 두 개는 들어갈 듯한 모습이었다.다들 도대체 뭘 본 거지?설표 특전대의 최고 전투력을 자랑하는 횡련 대종사가 겨우 손가락 하나를 맞고 이 지경으로 된 것이다.거의 평지가 된 훈련장과 숲을 보며 병사들의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졌다.소정태가 방심한 것도 같지 않았다.소정태가 아무리 방심했다 하더라도 진서준이 충분한 실력이 없었다면 소정태를 저렇게 멀리 날려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사실 소정태를 날려 보낸 게 아니라 진서준은 가볍게 튕겨 버린 것이다.하지만 그 충격은 개미가 코끼리를 넘어뜨린 것처럼 너무나 공포스러웠다.이제 병사들은 자연스레 공포에 사로잡힌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보게 되었다.고소연과 박준명조차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아무리 최강의 흑린군 사령관이라고 해도 소정태를 이 정도로 날려 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대박이야. 이 진 교관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사람이지?’“사람을 찾아서 병원에 보내.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만약 이분의 교관 자격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언제든 진 교관에게 도전해. 진 교관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야.”소정태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진서준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여러분 사령관 말대로 앞으로 며칠 동안 저는 여러분의 교관입니다. 저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언제든 도전하세요. 하지만 제 시간이 많지 않아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우리 할아버지께 약속드렸거든요. 여러분이 이번 8대 특전대 대회에서 우승하도록 훈련하겠다고요.”진서준의 말에 훈련장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알고 보니 이 청년이 자기 할아버지의 추천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그러니 이 청년의 거만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뒤에 나온 8대 특전대 대회 우승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병사들은 이건 분명 집안 어른들이 진서준의 경험이나 늘려주려고 이곳에 보냈다는 걸 이미 알아챘다.문제는 이번에 저 청년 집안에서 틀린 장소에 청년을 보냈다는 것이다.설표 특전대은는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곳이었다.아무리 높은 신분이어도 실력이 없으면 이곳에서는 누구의 인정도 받을 수 없었다.“진 교관, 일단 저는 개인적으로 당신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설표 특전대의 인재 장서안이 앞으로 나섰다.진서준은 장서안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다른 사람은 다 저를 인정하는 겁니까?”“우리는 전부 인정하지 못합니다.”백 명의 병사가 동시에 외쳤다.병사들의 목소리는 하늘을 울릴 만큼 강렬했고 먼 산까지 울려 퍼졌다.소정태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렇게 잘난 척하던 자식이 어떻게 해결하려나 보자.’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병사들을 보고도 진서준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병사들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오히려 처음부터 진서준을 인정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저는 여러분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괜히 여러분을 다치게 하면 훈련에 지장이 생길 테니까요.”진서준이
소정태의 얼굴은 물을 짜낼 만큼 어두워졌다.호국장군 진서훈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소정태는 방금 진서준에게 손을 대고도 남았을 것이다.설표 특전대 병사들이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그들은 소정태의 자식들이었다.부모의 눈앞에서 누가 감히 아이가 무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그건 부모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방금 설표 특전대 병사들이 약하다고 말했어?”이 말은 소정태의 치아 사이에서 억지로 새어 나온 것 같았다.“맞아, 내가 그랬어.”진서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서준의 직설적인 태도에 소정태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고소연과 박준명은 어느새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이건 소정태가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기 직전의 신호였다.이 진서준이라는 녀석은 이제 끝장났다고 볼 수 있었다.“그 병사들 앞에서 직접 그 말을 할 수 있겠어?”소정태는 웃음을 거두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당연하지.”진서준은 여전히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정태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바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고소연과 박준명도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보고는 따라나섰다.“서준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병사들의 자신감을 꺾을 수도 있잖아.”허사연이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그 병사들에겐 약간의 충격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성장할 수 없어.”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서준은 소정태 일행을 따라 훈련장에 도착했다.“집합!”소정태의 우렁찬 외침이 하늘을 찔렀고 그 소리의 충격에 지면에 쌓인 눈이 떨리는 듯했다.훈련에 여념이 없던 백여 명의 병사들이 단 3초 만에 소정태 앞에 깔끔하게 정렬했다.모두의 표정은 비장했고 한 명 한 명이 마치 투창처럼 곧게 서 있었다.소정태는 자기 병사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오늘 너희를 위해 특별한 교관을 초빙했어. 근데 이분이 내 사무실에서 너희 실력이 너무 약하다고 하더군.”소정태의 말에 병사들의
진서준은 훈련장을 대충 훑어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병사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훈련 중인 100명 중 절반은 무인이 아닌 일반인이었고 내공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병사들이 사용하는 권법은 허점투성이였다.심지어 진서준이 감옥에서 막 출소했을 때조차 이들 100명을 혼자 상대하는 것도 거뜬했을 것이다.훈련장을 지나 진서훈 일행은 세 층짜리 하얀 건물로 들어갔다.그 건물의 한 사무실 안에는 전투복을 입고 위엄 넘치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남자의 존재감은 호랑이와 같았고 몸에서 피가 끓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으며 체내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었다.딱 봐도 횡련 대종사가 분명한 인물이었다.남자는 바로 설표 특전대의 사령관 소정태였다.노크 소리가 울리자 소정태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와!”박준명은 문을 열고 진서준 일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소정태는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 위엄이 가득한 눈으로 박준명을 노려보며 물었다.“진 어르신이 약속한 교관은 어디에 있어?”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기세가 박준명에게로 쏟아졌다.박준명은 그 기세에 눌려 온몸의 털이 곤두섰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박준명은 억지로 심호흡을 한 뒤 경례하고 나서 말했다.“사령관님, 이분이 바로 진 어르신께서 찾아주신 교관 진서준 씨입니다.”소정태는 순간 멍해졌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박준명이 자기를 속일 리 없다는 걸 모른다면 아마도 박준명에게 귀싸대기를 날렸을 것이다.스무 살 조금 넘은 젊은 청년을 설표 특전대 교관으로 데려오다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농담은 없을 것이다.“이분이 진 어르신이 추천한 교관이라고?”소정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거의 고함을 지르듯 물었다.“맞습니다. 바로 이분이 진 어르신이 추천하신 교관입니다.”박준명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소정태는 그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진서준을 꼼꼼히 살펴보았다.반소매 차림인 걸로 보아 약간의 실력은 있는 듯했지만 진서준의 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