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호 호숫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걸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자 서광철의 눈에 섬뜩한 살의가 번졌다.지난번 진서준이 결혼식에서 신부를 데려간 후, 워낙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던 서동현은 심각한 충격을 받아 우울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서광철은 아버지로서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갔다.그날 이후로 서광철은 진서준의 목숨으로 이 굴욕을 씻어내고 싶은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지난번에는 서광문이 제지했기 때문에 계획이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진서준을 끌어내기 위해 서지은에게 만년몽을 사용할 정도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서광철은 서지은이 일단 위험에 처하면 진서준이 반드시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역시나 진서준은 나타났다. 그것도 홀로 서씨 가문에 찾아온 것이다.지금 국안부는 해외 강자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의 모든 무인을 국경으로 파견했다.오늘 서광문이 방해하지 않는 한, 진서준은 반드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진서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난 네가 서지은의 목숨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평생 겁쟁이로 살 줄 알았어.”서광철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진서준을 차갑게 쳐다보았다.서광철은 진서준이 지난 석 달 동안 모습을 감춘 것이 틀림없이 자기를 피하고자 숨은 것이라고 생각했다.진서준은 서광철에서 불과 열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서광철을 냉랭하게 바라보았다.“내가 지난 석 달 동안 숨었다고 생각해?”“아니면 뭐겠나? 이 세상에 누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할 때 갑자기 모습을 감추겠어?”서광철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무도계의 타고난 재능을 갖춘 이들은 자기가 유명해질 기회에 실력을 과시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진서준은 경성에서 6연승을 거두고 용존이라는 봉호를 얻었다.서광철은 진서준이 이런 이름을 널리 떨칠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고 여겼다.“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숨어버린 거야. 그리고 그 잘못 건드린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지.”서광철은 자부심에 찬 듯 말
서광철이 모셔 온 이 두 사람은 모두 지의방 랭킹 50위 안에 드는 은세 강자였다.왼쪽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고성운이라 불리며, 지의방 44위에 있는 육급 절정 대종사였다.오른쪽의 감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육위준이라 불리며, 지의방 45위에 있는 육급 절정 대종사였다.이 두 사람은 이미 무도계에서 은둔한 지 오래되었다.30대나 40대의 젊은 무인 중 절반 이상은 두 사람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하지만 강남의 구세대 종사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다면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칠 정도였다.20년 전, 강남 명문대가들은 지금과 달리 광범위하게 널렸다.그때 서씨 가문은 최고의 가문이 아니라 실력이 출중한 가문 중 하나였다.이런 상황에서 강남의 명문대가들은 이익을 둘러싼 갈등으로 대규모 싸움을 벌였다.그날, 수많은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했고 무인도 대량으로 죽었으며 일부 종사와 대종사도 그날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바로 그 대규모 싸움 중, 고성운과 육위준의 손에 죽은 대종사만 해도 열 명이 넘는다고 알려졌고 종사는 스무 명이 넘었다.그 후, 국안부의 정안부가 이 사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자 고성운과 육위준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존재를 점차 잊었다.서광철이 이처럼 잔혹한 두 사람을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진서준을 죽이려는 결심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잠시 후 우리가 나서서 진서준을 구해야 하나요?”왕안석이 서광문을 보며 물었다.“하아...”서광문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서광문은 서광철이 이곳에서 죽는 것도 원치 않았고 진서준이 죽는 것도 원치 않았다.한쪽은 자기 가족이었고 다른 한쪽은 자기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그사이에 끼인 서광문이 가장 괴로웠다.“구할지 말지는 당신들 선택하기 나름입니다.”서광문은 선택권을 왕안석과 이한석에게 넘겼다.침묵을 지키던 이한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해외 용멸 계획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국안부의 최근 동향을 서씨 가문은
고성운은 담담한 눈빛으로 젊은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 있지만 여태껏 직접 본 적은 없었다.오늘 처음 보니 진서준이 겨우 스무 살을 넘긴 나이란 사실에 고성운은 큰 실망감이 들었다.스무 살 청년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실력과 바탕은 타고난 재능으로는 보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오랜 시간을 거친 노력이 필요했다.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결국 무용지물일 것이다.“저 녀석을 끝장내주세요.”서광철은 뒤로 물러나 고성운과 육위준에게 공격을 개시할 공간을 남겼다.“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가. 사람을 죽이는 느낌을 까먹을 지경이야.”고성운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날카로운 눈에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진서준은 고성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그럼 오늘도 사람을 죽이는 느낌을 경험할 수는 없을 거야. 그 대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느낌을 제대로 경험할 거야.”고성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얼씨구?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 이렇게 오만한가? 20년 전 내가 강남 종사들을 죽일 때 네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고성운의 도발에도 진서준의 눈빛은 여전히 평온했다.“20년 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죽는 사람은 오히려 너였을 거야.”고성운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예전의 나도 너처럼 젊고 혈기 왕성했지.”“젊고 혈기 왕성하다고?”말이 떨어지자마자 진서준의 허리에서 청색의 빛이 발산해 나왔다.곧바로 그 빛은 고성운의 눈앞에서 점점 확장해 칠척 길이의 장검으로 변했다.청색의 검이 천지 사이에 우뚝 서 있었고 태양의 빛마저 절반으로 가른 듯했다.이 장검이 나타나는 순간, 고성운은 발바닥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그 기운은 고성운의 사지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순간, 고성운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너...”고성운이 입을 열려던 찰나,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며 측면으로 뛰었
이렇게 엄청난 천재를 키워낸 스승 역시 실력이 형편없는 무인일 리 없었다.“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진서준이 서울의 감옥에 있었던 적이 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서광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멀리서 진서준과 대치하고 있는 서광철과 육위준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놀라움이 넘쳐흘렀다.특히 육위준은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육위준은 고성운과 거의 동등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방금 진서준의 그 일격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육위준 역시 고성운과 마찬가지로 꼴사나운 모습으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이 녀석이 정말 소문대로인 것 같군...”조금 전과 달리, 육위준의 눈에는 더 이상 진서준에 대한 경멸이 없었다.이 순간, 육위준은 강력한 적에 맞서는 것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전에 내가 당신들에게 말했죠? 저 녀석을 절대 얕보지 말라고요.”서광철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진서준이 정말 형편없는 실력이었다면 서광철이 굳이 고성운과 육위준 같은 고수를 모시기 위해 그렇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쿵!갑자기 고성운이 떨어진 자리에서 강력한 기세가 폭발했다.허공에서 흩날리던 먼지가 순식간에 이 기세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졌다.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쪽을 쳐다보며 확인하려고 했다.반백의 머리였던 고성운이 지금은 온통 백발이 되어 있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고성운이 내뿜는 기세는 상처 입은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는데 마치 방금 진서준의 그 일격이 고성운에게 닿지 않은 듯했다.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비장의 카드를 꺼내 드는 걸 보니 고성운도 참으로 신중한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진서준의 추측이 빗나가지 않았다. 고성운은 증원단이라는 단약을 복용했다.증원단의 효능은 폭원단과 비슷했다.증원단은 짧은 시간 내에 자기 실력을 대폭 향상할 수 있지만 그 효과는 폭원단보다 몇 배 더 좋았다.본래 육급 정점 대종사급에 있던 고성운이 지금은 육급의 한계를 뛰어넘어 칠급
칠급 대종사의 실력을 갖춘 고성운과 육위준을 바라보며 진서준의 얼굴에는 여전히 평온함이 가득했다.이 두 사람은 20년 전의 난전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니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두 사람이 폭원단 같은 단약을 복용했을 가능성도 진서준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칠급 대종사.”진서준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참선검을 천천히 가슴 앞에 가로로 들었다.단순히 실력을 논하자면 고성운과 육위준은 증원단을 복용했어도 신농산의 그 무인들의 실력에 미치지 못했다.신농산의 인물들도 진서준을 상대하기에 버거웠는데 이 두 사람이 진서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고성운과 육위준은 긴장한 채 몸을 바짝 당겼다.증원단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을 상대하자니 두 사람에게 목에 칼이 드리워진 것처럼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진서준이 손에 잡은 그 청색 장검이 언제든지 두 사람의 목을 베어낼 것만 같았다.두 사람은 차가운 숨을 들이켰다.“오늘 반드시 저 녀석을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해.”고성운이 갑자기 초조한 말투로 외쳤다.고성운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고 처음 진서준을 마주할 때 보였던 선풍도골의 모습이 지금은 흉악한 모습으로 변했다.육위준 역시 이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진서준이 오늘 죽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운 좋게 도망칠 수는 있어도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진서준은 유유히 웃으며 고성운의 직설적인 말을 듣고 있었다.그러고는 참선검의 칼날을 살짝 비스듬히 하여 청광이 하늘을 찌르듯 비추게 했다.“날 죽이겠다고? 너희는 혹시 개미가 하늘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개미가 하늘을 흔든다니, 진서준 이 녀석이 칠급 대종사 두 명을 개미에 비유하고 자기를 하늘에 비유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자 서광문은 저도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진서준은 오만하게 굴만한 근거가 있다.적어도 현재로서는 진서준의 기세가 이 두 사람 못지않았다.“얼씨구? 어디 두고 보자고, 도대체 누가 개미고
하늘의 먹구름도 검빛의 영향을 받은 듯 신기하게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이건 뭐지...”서광문 일행은 이 광경에 몸이 경직되었고 그 갑작스러운 검빛을 바라보며 말문이 턱 막혔다.검빛이 검은 강기를 뚫고 나가자 주변의 강기도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이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라져 버렸다.거의 동시에 세 사람의 형체가 다시 사람들의 시선 속에 나타났다.그중, 누군가가 한 손으로 검을 들고 서 있었고 그의 그림자는 먹구름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길게 늘어졌다.고성운과 육위준은 전부 몸이 굳어 있었다.두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눈 속에는 공포 외에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응? 이게 어떻게 된 거지?”정신을 차린 서광문 일행은 너무나 기이한 장면을 바라보며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불길한 예감이 서광철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고성운과 육위준이 설마 조금 전 그 참격을 맞고 죽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서광철 역시 대종사였기에 방금 전 하늘을 찢고 나오는 그 검빛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단 일격으로 두 명의 칠급 대종사를 죽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인 것 같았다.칠급 대종사는 이미 일반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무인의 등급이었다.게다가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팔급 대종사가 되는데 그 경지에 이르면 일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다.전 세계 팔급 대종사를 다 합쳐도 그 숫자는 겨우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서광문 일행이 도대체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검의 소리가 울려 퍼지며 진서준의 손에 잡고 있던 참선검이 계속 회전하다가 결국 팬던트가 되어 그의 허리에 돌아갔다.“진서준이... 지금 검을 거둔 겁니까?”서광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고성운과 육위준이 정말 서광문의 예상대로 죽은 걸까?쿵!거대한 옥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갑자기 천지 사이에 울려 퍼졌다.진서준의 허리에 걸려 있던
밤이 되었다.무도 포럼에 강남 서씨 가문 계정으로 올린 게시물이 등장했다.[용존 진 마스터, 검을 휘둘러 단 일격으로 육급 대종사 고성운과 육위준을 처단하다!]강남에서 가장 실력이 튼튼한 서씨 가문이 무도 포럼에 게시물을 올리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매번 서씨 가문에서 글을 올릴 때마다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역시나 이번에도 서씨 가문이 올린 게시물은 대한민국 무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이건 아무래도 헛소리겠지? 용존 진 마스터가 이미 석 달 동안 잠적하지 않았나? 왜 갑자기 또 나타난 거지?][검을 휘둘러 단 일격으로 육급 대종사 두 명을 죽였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육급 대종사가 뭐 사과처럼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과일인 것 같아?][내가 기억하기로, 이전 봉호전 때 진 마스터는 겨우 오급 대종사였던 것 같은데...]본래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했던 포럼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무도 포럼을 거닐던 수많은 무인이 이 게시물에 시선을 고정했다.단 일격으로 육급 대종사를 죽이는 건 르벨에 있는 팔급 검도 대종사 외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너무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던지라 대다수 무인은 이 게시물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3개월 동안 잠잠했던 용존 진 마스터가 이렇게 무도계를 발칵 뒤집는 엄청난 사건을 터뜨리며 다시 사람들 앞에 등장한 것이다.곧바로 게시물 아래에 달린 댓글 하나가 고정됐다.[저희 서씨 가문은 이 게시물의 진위를 명예를 걸고 보장합니다.]물론 여전히 서씨 가문의 계정으로 남긴 답글이었다.서씨 가문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자 대다수 의심하던 사람들도 자연스레 의심을 거두게 되었다.강남 서씨 가문의 신뢰도는 이 바닥에서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이 용존이 석 달 내내 세 번의 경지를 넘어서 팔급 대종사가 됐단 말이야?][불가능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난 이게 진짜라고 믿지 않아, 동영상이 있어야 믿을 수 있어.][다들 더 무서운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어? 용존 진 마스터는 검도
“좋아, 나도 더 이상 널 가르치려고 하지 않을게, 건가 잘 챙기고 이 전투에서 죽지 않도록 해.”전화를 끊고 난 후, 진서준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서준아, 얼른 밥 먹어.”서지은이 진서준에게 손짓했다.“알았어, 곧 갈게.”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서지은의 옆에 앉았다.진서준이 식탁에 앉자 서광문 가족이 드디어 젓가락을 들었다.이전에는 서광문이 서지은의 체면을 고려해 진서준에게 평온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제는 진서준에게 약간의 경외심이 생겼다.만난 지 겨우 석 달 만에 단 일격으로 고성운과 육위준을 처치했으니 1년이 더 지나면 서씨 가문은 이 용존 앞에서 진짜 하찮은 가족에 불과할 것 같았다.“진서준, 다음 계획이 무엇인가?”서광문이 물었다.진서준은 서지은이 집어준 그릇 안의 고기를 먹은 후 담담하게 대답했다.“용멸 계획이 곧 시작될 예정이니, 국경으로 갈 생각입니다.”서광문은 그 대답에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금세 인상을 풀었다.진서준이 오늘 보여준 실력으로 보아 만약 해외 강자와 맞닥뜨려 아쉽게도 패배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그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서광문은 진서준을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건 모든 국민이 응당 해야 할 일이다.진서준이 그런 능력이 있으니 서광문은 자연스럽게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우리 서씨 가문에서 도와줄 건 없어?”서광문이 진서준를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이 약재들, 서씨 가문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진서준은 진서라의 체내 독소 치료에 필요한 약재 리스트를 꺼냈다.그중 하나는 임씨 가문 가주가 진서준이 떠나기 전에 이미 준비한 것이었다.서광문이 대충 훑어보더니 마지막 약재를 보았을 때, 시선이 그 약재에 고정되었다.“그래, 이 약재는 네게 주지. 우리 서씨 가문에 두어도 큰 의미가 없으니까.”서광문이 집사에게 손짓했다.“가서 얼른 이 약재 가져와.”오하늘이 위에 적힌 약재를 보고 흠칫 놀라며 물었다.“저기... 가주님, 이 약재는 너무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유기철이 문을 열고 나가 앞에서 불길이 치솟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혹시 배논국 정부가 갑자기 쳐들어온 건가?”군대 외에 유기철은 묘강을 이 정도로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혹시 누군가가 단독으로 일으킨 소동인가?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았다.지선이 직접 나타나야만 이 정도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소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문기야! 저기 저 앞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유기철은 아들을 보자 급히 달려가 물었다.유문기는 유기철에게 신경 쓸 틈도 없이 급하게 움직이며 유기철을 밀어내며 말했다.“저도 몰라요. 마침 이 소동을 스승님께 알려드리려고 했어요.”유문기의 태도에 유기철은 마음속으로 상처를 받았다.이래 봬도 자기는 유문기의 친아버지인데 유문기가 어떻게 이런 태도로 자기를 대할 수 있는 거지?유문기는 속도를 내서 한달음에 전당 앞에 도착했다.이번에는 예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까 유문기가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앞에서 들리는 소란이 너무 요란했기 때문이었다.“스승님. 큰일 났어요!”유문기는 바로 문을 밀고 전당 안으로 들어갔다.“침착해, 나도 그 소동은 들었어.”묘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유문기도 한결 안심할 수 있었다.그와 동시에 유문기는 묘왕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전당에서 묘왕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었다.“스승님, 누가 우리 묘강을 기습한 겁니까?”유문기가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배논국의 그 몇 놈 외에 누가 더 있겠어?”묘왕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묘강의 세력이 점점 더 커져서 이제 배논국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규모가 되었어. 그래서 그놈들이 우리를 기습하는 거야.”묘왕의 말에 유문기는 깊이 공감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스승님 말씀이 맞아요. 배논국 부대 외에는 이렇게 큰 소동을 일으킬
“검 소리인가? 맞는 것 같은데?”“야, 누구 하나 나가 확인해.”결국, 방 안의 병사가 일어서기도 전에 고탑 전체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쿵!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 100미터 안팎을 뒤흔들었다.“무슨 일이야? 나가서 확인해 봐.”병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던지고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병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5미터가 넘는 철문이 이 순간, 쑥대밭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철문 앞에는 거대한 대한민국 용 한 마리가 서 있었다.그리고 그 용 위에는 한 사람이 검을 들고 뒷짐을 낀 채 있었다.이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하니 서 있었다.“대박이야, 용이 진짜 존재해!”배논국은 대한민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라 대한민국의 거대한 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진짜 용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빨리 경보를 울려! 침입자야, 침입자!”누군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경보를 울리려고 했다.하지만 병사들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청색의 검광이 바닥에서 하늘로 솟구쳤다.우르르!수십억이 넘는 고탑이 순식간에 무너졌다.진서준은 고탑을 바라보지도 않고 발밑의 올기에게 담담하게 지시했다.“앞으로 가.”올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본래 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창문을 열고 이 장면을 바라보았고 진짜 용이 나타난 걸 보고 모두가 멍해져 할 말을 잃었다.“어머나! 이... 이게 뭐야? 날아다니는 뱀인가?”“눈멀었어? 저건 용이야! 그렇게 상식이 없어?”“넌 상식이 있어 여기서 살아? 입 닥쳐!”올기는 아래의 사람들을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용존님, 이 사람들은 안 죽입니까?”“무고한 평민을 죽인다면 내가 그 개자식들과 다를 게 뭐야?”진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때 경보가 울렸고 완전하게 무장되지 않은 병사들이 나와서 진서준의 앞길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다들이 그 거대한 용을 보고는 모두 마른침을
유문기는 노인이 점점 더 격앙된 어조로 말하는 걸 보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제자 유문기는 스승님의 위대한 사업을 위해 몸이 부서지고 뼈가 으스러져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됐어.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네!”유문기는 조심스럽게 전당에서 물러났다.밖으로 나온 순간, 유문기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가득 드리웠다.잠시 후,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고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묘강 전역에 빗소리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 시각, 대한민국 국경 지역.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대한민국 국경 안쪽에서 국경 밖으로 날아갔다.경비병이 레이더에서 이를 포착하고 즉시 보고했다.레이더는 이 검은 그림자를 포착해냈지만 밤이 너무 어두웠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자욱해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의 윤곽 외에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이상하네, 저거 우리 신화에 나오는 용이랑 좀 닮지 않았어?”누군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이봐, 책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야? 세상에 어떻게 용이 있을 수 있어?”“그럼 저건 뭐라고 설명할 건데? 이렇게 크고 길면서 하늘을 날아다니잖아.”“아마 전신전 병사들이 또 임무 수행하러 나간 거겠지. 이제 익숙해져야 해.”대다수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전신전 병사들은 임무 수행 시 보안을 위해 경비병들에게 정보를 따로 제공하지 않았다.그만큼 극비 사항이기 때문이었다.이 검은 그림자를 포착한 건 대한민국 국경 경비병뿐만이 아니라 배논국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배논국 쪽은 더욱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심지어 대다수 사람은 대형 새일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다.동남아 지역은 각종 이수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이다.길이가 20미터나 되는 거대한 뱀이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기에 길이가 10미터나 되는 새를 포착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이 이수들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는 한 굳이 주동적으로 건드릴 필요도 없었다.이 검은 그림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 어부지리를 누리면 돼.”유기철은 호탕하게 웃었다.이 순간을 위해 유기철은 오래도록 기다려왔고 이제 곧 그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다.“아버지, 이제 돌아가면 우리 스승님 일을 계속 도와야 해요.”유문기가 갑자기 다른 화제를 꺼내자 유기철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건 당연하지. 근데 문기야, 제발 스승님 얘기 좀 그만해. 너와 내가 한 가족이야.”유문기의 태도에 유기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자기야말로 유문기의 친아버지인데 대화할 때마다 유문기는 자꾸 스승 얘기만 꺼내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묘강 묘주가 자기 불평을 들으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아버지는 물론 제 아버지입니다. 근데 그분도 제 스승님이잖아요.”유문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우리 스승님이 없었으면 지금 저도 이 자리에 없을 거였고 아버지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유기철은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다들 딸을 키우면 결국 남 좋은 장사만 될 거라고 하지만 유기철 아들은 더 심한 것 같았다.“그만하죠. 일찍 쉬세요. 전 스승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유문기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방을 떠났다.유문기가 나가자 유기철는 마음속에 쌓인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그깟 기술을 몇 개 가르친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 아들이 스승이 아니라 신선님을 모시는 것 같잖아. 이제 내가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가면 더 이상 네놈 말을 듣는지 두고 봐.”유기철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는 인형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유기철은 유씨 가문을 완전히 장악해 서남 지역의 모든 명문대가의 위에 서서 호령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유문기는 방을 떠난 후 큰길을 따라 규모가 거대한 궁전에 도달했다.그는 먼저 세 번 무릎을 꿇고 큰 예를 올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지금 유문기의 얼굴엔 경건한 표정이 가득했고 궁전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하늘의 신을 만나는 것처럼 대단한 일이라고 간주했다.“
진서준이 묘강으로 간다는 소리를 듣자 유기명과 유기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서둘러 만류하기 시작했다.“진서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 묘장은 배논국 국경 안에 있고 그 지역만의 무장 부대가 있어. 게다가 배논국 자체가 우리 대한민국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나라야. 네가 정말 묘강으로 간다면 배논국과 묘강의 이중 공격을 받게 될 거야.”묘강은 배논국 내에서도 굉장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들은 심지어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세력이어서 배논국 군부조차도 묘강을 언급할 때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진서준이 묘강으로 무작정 간다면 거의 십중팔구 죽음이 기다릴 것이다.“그곳에선 손발 묶일 일 없으니 저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진서준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묘강에서는 법과 규제를 무시할 수 있기에 진서준은 본인의 모든 힘을 맘껏 사용할 수 있었다.진서준은 유기철 부자가 자기 가족을 건드린 대가를 반드시 혹독하게 치르게 할 계획이었다.유기명과 유기태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쓴웃음을 지었다.“진서준, 정말 묘강으로 갈 거야?”“말을 뱉었으면 지켜야죠.”진서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럼 어떻게 갈 예정이야? 묘강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해. 순찰과 경비가 곳곳에 깔려 있어. 묘강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대한민국에 돌려보낼 가능성이 커.”유기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서준이 갑자기 묘강으로 뛰어간다면 생존할 확률이 높을 수 있다.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움직여서 그들에게 움직임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무조건 덫을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다.그렇게 되면 지선급 강자라고 해도 살아서 도망쳐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총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무시했고 사람이 거의 없는 지대에서는 거의 압도적인 지위를 자랑했다.더군다나 묘강 지역은 사람 목숨을 가치 있는 물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그들은 결사대를 조직할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명이 희생되더라도 진서준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제 딸은 지금쯤...”유기명은 두 사람에게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유정은 제 동생입니다. 제 동생이 독충 때문에 위독하다고 하니 당연히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죠.”진서준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주 신의님, 날도 어두워졌는데 오늘은 우리 집에 머무세요. 내일은 제가 두 분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겠습니다.”유기명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주두준에게 권유했다.“좋아요,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주두준은 유기명의 호의를 받아들였다.비록 유정의 병은 주두준이 치료한 게 아니지만 그의 독충 덕분에 진서준이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오빠, 어떻게 여기 왔어요?”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유정은 진서준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내가 오늘 안 왔으면 널 다시 볼 수 없었을 거야.”진서준은 따뜻한 눈빛으로 유정을 보며 말했다.“너도 참 답답해, 독충 때문에 고통받는데 왜 더 빨리 내게 말하지 않았어?”“오빠에게 방해될까 봐 그랬어요...”유정은 진서준이 혹여 자기를 나무랄까 봐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네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진서준은 유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넌 서라랑 똑같은 내 가족, 내 동생이야.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가장 빠른 속도로 내게 연락해야 해, 알겠어?”진서준의 부드러운 말투와 걱정 어린 말에 감동을 받은 유정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알겠어요, 오빠.”“좋아, 아직 몸이 좀 허약한 상태니까 일찍 쉬어.”“오빠, 내일 떠나지 않겠죠?”유정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정은 자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진서준이 사라지는 게 두려웠다.왜냐하면 유정은 너무 오랫동안 진서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당연하지, 너희 집에서 좀 더 있을 거야.”“그렇다면 다행이에요.”진서준이 웃으며 대답하자 유정은 그제야 시름 놓고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유정이 잠든 후에야 진서준은 자리를 떠났다.유기명과 유기태는 문 앞에서 진서준을 기다
본래는 흰색이었던 그 독충이 진서준의 영결에 맞고 난 후 눈에 띄게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응? 이게 뭐지?”난생처음 보는 장면에 주두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진서준은 별다른 설명 없이 빨갛게 변한 독충을 유정의 입에 넣어주었다.유기명이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진서준, 확실히 치료할 수 있겠어?”방금 주두준이 두 번이나 실패한 걸 직접 목격한 유기명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사실 진서준이 치료한다고 해도 유기명은 확신이 없었다.주두준은 독충술에 대해 오랫동안 깊은 연구를 해온 사람이었다.진서준은 의술에 능했지만 독충술은 또 다른 문제였다.본래 서로 다른 분야는 격차가 심했고 특히 이 두 분야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가 나는 두 분야였다.“확신이 없으면 저도 치료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진서준은 평온한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진서준은 가족의 목숨을 갖고 장난칠 사람이 아니었다.비록 의동생이긴 하지만 진서준은 이미 유정을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좋아, 그럼 부탁할게.”유기명은 이를 악물며 부탁했다.“은침을 주세요.”진서준이 갑자기 입을 열자 주두준은 본인의 은침을 진서준에게 건넸다.은침을 받은 진서준은 즉시 유정의 건리, 음교, 석문 세 곳에 정확하게 찔렀다.독충이 진서준이 원하는 자리에 도착했다고 추측한 진서준은 다시 영결을 그리기 시작했다.따뜻한 기운이 유정의 체내에서 흐르기 시작했다.3분이 채 지나지 않아 유정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눈에 띄게 빠져나갔다.조금 전까지 차갑기만 하던 유정의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얼굴에 생기가 보이더니 호흡도 힘차졌다.주위 사람들의 경악이 가득한 시선 속에서 유정은 갑자기 눈을 떴다.“세상에... 이렇게 바로 깨어났다고?”다들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방금 신의 주두준이 유정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애썼지만 결국은 해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이 청년이 단지 침술을 이용해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게다가 진
“유 가주님, 아까 말했듯이 가주님 따님은 이미 병이 몸에 너무 침투되어 회복 불가능합니다. 누구도 치료할 수 없을 겁니다.”주두준은 참지 못하고 냉랭하게 말했다.“주 신의님, 이분은 저희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천재입니다. 이분 의술은 성약당 당주도 감히 초월하지 못한다고 할 정도입니다.”유기명은 서둘러 진서준을 소개했다.“아이고, 그러세요?”주두준은 유기명의 말이 우스웠다.“이 사람 의술이 정말 가주님 말처럼 뛰어나다고 해도 가주님 따님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가주님 따님이 걸린 건 독충입니다. 평범한 침술로는 어림도 없죠. 내가 기른 팔곡 독충도 이미 체내에서 죽었습니다. 그만큼 가주님 따님 체내 얼음 독충이 강력하다는 증거입니다.”이 말은 절대 주두준이 과장한 게 아니었다.유정의 체내에 있는 얼음 독충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주두준이 10여 년을 기른 팔곡 독충은 본래 묘강 지역에서 기르는 독충을 상대하기 위해 키운 것이다.그런데 이제 그 팔곡 독충마저 죽어버렸는데 이렇게 젊은 청년이 과연 뭘 할 수 있단 말인가?진서준은 주두준의 말을 무시하고 유정의 맥을 자세히 짚기 시작했다.시간이 지날수록 진서준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진서준, 어때? 유정을 구할 방법이 있겠어?”유기명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르신, 혹시 다른 독충이 더 있나요?”진서준은 대답 대신 주두준을 쳐다보며 물었다.진서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주두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뭘 하려고 그러는데?”“독충이 필요합니다.”진서준은 간결하고 강력하게 답했다.“하나 더 있긴 해. 근데 이 독충은 가주님 따님 얼음 독충에 대항할 수 없을 거야.”주두준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제게 주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진서준의 말에 주두준은 상당해 불쾌했다.“이봐, 네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가 반드시 줘야 해? 난 이 독충을 몇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 거야. 근데 지금 네가 내놓으라고 하면 내가 시원하게 넘겨줄 것 같아?”독충을 기
유정 체내의 독충이 묘주가 직접 기른 독충인지 아닌지 유기명이 알 리가 없었다.지금 유기명한테 중요한 건 딸을 과연 살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주 신의님, 지금 당장 제 딸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유기명이 가까스로 침착을 유지하며 물었다.“다시 시도해 보겠습니다.”주두준은 짧게 대답하며 은침을 들었다.그러고는 놀라운 속도로 유정의 족삼리, 용천, 명문 등 세 주요 혈 자리에 침을 놓았다.일련의 동작이 유려하게 이어져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역시 신의님은 남다르군요. 이런 침술은 제가 평생 배워도 못 따라가겠네요.”“주 신의님께서 나섰으니 유씨 가문 아가씨 병은 틀림없이 완치될 겁니다.”“맞습니다. 주 신의님도 못 치료한다면 세상에 치료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방 안의 의사들이 한결같이 주두준을 아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하지만 그들의 칭찬이 주두준은 그다지 기쁘게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만약 이 여자를 살리지 못하면 주두준의 명성에 치명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침 세 개가 들어가자 유정의 사지에서 실낱같은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마지막 침!”주두준은 은침을 들어 유정의 정수리에 찔렀다.그 순간, 유정의 입에서 대량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 냉기가 방을 가득 채우며 실내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주 신의님? 이걸로 끝난 겁니까?”유기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유기명은 아까처럼 또다시 희망을 품다가 크게 실망하는 게 두려웠다.“내 독충이 나오는 걸 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주두준은 이번에는 아까처럼 자신감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침술을 하는 동안 주두준은 자기 독충이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평소 같으면 독충이 반드시 반응을 보였을 텐데 이번에는 너무 조용했다.주두준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주두준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1분이 지나도 독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상태가 조금 좋아졌던 유정이 갑자기 격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