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은 사실 최신애에게 잡혀 있었다.집에 가지 않고 온유한의 휴식실에서 잠을 잔 최신애는 깨자마자 임유희를 보러 갔다.중환자실.임유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다치고 정강이뼈도 부러진 것을 보니 부상이 심한 것은 사실이었다.“너는 여기서 환자나 잘 봐, 의사니까!”최신애의 말에 온유한은 양미간을 비비며 말했다.“엄마, 지아가 다쳤는데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가 옆에 있어 주지 못했어요.”“많이 다쳤다고? 유희보다 더?”최신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오전에 병원에 없어서 임씨 집안 사람들이 너를 찾지 못한다고 불만이 많아. 넌 의사이고 지금은 근무시간이야. 환자를 돌보는 게 네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지아를 보러 갈 테니 너는 유희나 잘 돌보고 있어. 곧 깨어날 거라며? 유희가 깨어나서 주치의인 너를 못 찾으면 안 되잖아!”온유한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아는 최신애가 그녀를 보러 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지아의 병실에 꽃과 과일이 가득한 것을 본 최신애는 빈손으로 온 것이 멋쩍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다쳤다고 해서 보러 왔어.”하지만 빈손인지 아닌지 강지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왜 왔는지 궁금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고마워요. 아주머니,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어요.”최신애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한마디 했다.“괜찮다니 다행이야. 화상은 흉터가 남을 거야. 여자에게 흉터가 남으면 얼마나 보기 흉하겠니.”강지아는 어이가 없었다.“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예전 같았으면 강지아는 그녀의 팔을 잡고 애교를 부렸을 테지만 이제는 마주 보는 것도 어색하다.병실에 아무도 없자 최신애가 또 한마디 했다.“유한이가 교통사고 환자를 수술한 거 알지? 다친 사람이 내 친구의 아이인데 많이 다쳤어.”그러자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알고 있어요. 환자가 더 중요하죠. 저는 괜찮아요.”최신애는 더 명확히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 애는 너보다 세 살 위야. 대
“선생님, 다리에 흉터가 남을까요?”“글쎄요.”할아버지로 보이는 주치의는 머리도 희끗희끗했다.“당분간 먹는 음식을 주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말 흉터가 남아서 치마를 못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치마를 못 입을 수도 있다는 말에 강지아는 속이 답답했다.약을 바꾸면서 온몸에 땀이 난 바람에 그녀는 간병인더러 몸을 닦아달라고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잠시 후 병실에 도착한 강지찬은 강지아가 혼자 병실에 있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찰 쪽 상황만 이야기했다.“용의자가 거의 확정되어서 경찰이 검거에 나서고 있어.”“누구야?”“몰라.”강지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돈을 받아 일하는 사람일 거야. 그 사람을 잡아야 배후를 밝혀낼 수 있어.”하지만 강지찬이 의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강지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병실을 한 번 훑어본 강지찬은 기분 나뿐 듯한 얼굴로 말했다.“왜 혼자야?”“간병인이 있잖아. 동하민도 좀 이따 올 거야.”강지찬이 말했다.“그 사람을 물은 게 아니잖아.”강지아는 피식 웃었다.“온 선생님은 지금 출근 중이야. 오빠, 오빠도 별일 없으면 빨리 가. 난 괜찮으니까.”강지찬도 회사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던지라 여기에 더 머물 수 없었다.어젯밤 일은 제작진과 강지찬, 그리고 애만이 손을 잡아 정보가 외부에 새는 것을 막았기에 인터넷에 퍼지지 않았다.[아이엠 디자이너] 총연출 감독은 미칠 지경이었다. 프로그램 열기는 아주 뜨거웠지만 매회 일들이 발생하였기에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마지막 회까지 무사히 마치기만을 바랐다.다행히 인터넷에 별다른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온유한이 강지아의 병실에 찾아왔다.피곤한 그의 얼굴을 보니 강지아는 마음이 아팠다.“임유희 씨는 괜찮은 거야?”강지아의 물음에 온유한은 흠칫 놀랐다. 임유희에 대해 강지아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했어?”강지아도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냥 해야 할 말만 했어.”온
“쯧쯧, 임유희 엄마가 우리 온 선생님을 보는 눈빛 못 봤나 보네, 사위라고 부르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았어.”“온 선생님의 어머니가 매일 병문안을 오시는데 고작 몇 층밖에 안 떨어져 있으면서 강지아 씨 병실에는 한 번밖에 가지 않았어. 차별이 너무 심하네.”젊은 의사 몇 명이 수군거리며 사무실로 돌아갔고 그 사이에 있는 온유한의 학생인 전성호가 말했다.“우리 온 선생님 눈에는 강지아 씨 말고는 다른 그 누구도 안 보여.”그러자 한 여학생이 말했다.“하지만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이 없으면 행복하기도 힘들죠?”또 한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강지아 씨가 어때서요? 왜 온 선생님의 어머니는 강지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요?”“사모님은 강지아 씨가 무식하다고 싫어한다고 들었어요...”이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성호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강지아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모두들 얼른 입을 다물고 어색한 얼굴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강지아는 식탁 위의 식료품 봉지를 가리키며 말했다.“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역시 우리 의사들을 챙기는 사람은 강지아 씨밖에 없네요.”전성호는 훌륭한 말솜씨를 뽐냈다.“그래도 온 선생님이 고생이 제일 많아요. 금방 회진을 마쳤는데 또 주임님에게 불려갔어요.”모두들 강지아가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일제히 고맙다고 인사했다.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 온유한의 학생들이었기에 그녀를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이때 한 여자아이가 강지아에게 귀띔을 주었다.“강지아 씨, 우리 병실에 교통사고 환자가 온 거 알죠? 요즘 온 선생님의 어머니가 계속 병문안을 오세요.”하지만 그 학생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러자 강지아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조심할게요.”온유한이 사무실에 없었기에 강지아도 오래 있지 않고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강지아는 사실 온유한에게 퇴원하겠다고 말하러 갔다.모퉁이를 돌자 우아한
성실한 의사 온유한은 임유희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수술 자국을 살피던 온유한은 허리를 펴더니 책상 위의 여러 보온통들을 훑으며 장희수에게 말했다.“수술 자국이 약간 시뻘게지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좀 이따 간호사가 와서 약을 바꿔줄 거예요. 환자의 몸 상태로는 아직 보양식을 먹을 수가 없으니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해 주세요.”“괜찮다니 다행이야.”장희수가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온 선생이 특별히 와서 봐주니 마음이 든든하네.”온유한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그는 병상에 누워있는 임유희를 바라보며 인사했다.“휴식을 충분히 하면 될 겁니다.”임유희는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한편 뒤돌아선 강지아는 마음이 쓰라렸다. 전에 주유정을 만나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말이다.동하민은 강지아의 퇴원 수속을 서둘러 마쳤고 온유한은 너무 바쁜 탓에 그녀를 차를 타는 곳까지 바래다줄 수밖에 없었다.“이건 아침저녁으로 발라야 해.”온유한은 연고 두 개를 강지아에게 건네주었다.“퇴근하면 바로 갈게.”강지아가 말했다.“오빠가 본가로 오라고 했어.”그러자 온유한이 말했다.“그럼 나도 그쪽으로 갈게.”“그래.”강지아는 순순히 대답했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동하민더러 천천히 운전하라고 당부했다.차 문을 닫자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사라졌고 집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강지아는 강홍식과 마주쳤다.얼굴을 못 봤더라면 이런 친아버지가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뻔했다.강홍식은 첫날부터 그녀가 퇴원할 때까지 한 번도 병문안을 간 적이 없다.“퇴원했어?”강홍식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집에 가만히 있으면 그런 일도 없었잖아. 너의 오빠가 너를 푸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계집애가 하루 종일 밖에서 어슬렁거릴 생각만 하니까 그렇지! 인터넷 여론도 생활도 엉망진창인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강지아는 강홍식을 투명인간 취급하고는 곧장 걸어서
정유진은 방경숙더러 하인 몇 명을 강지아 쪽으로 보내라고 했고 강지아는 이내 자기 집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이렇게 빨리 건너온 이유는 그녀에게 걱정거리도 있고 이제는 사생활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새언니를 자꾸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이엠 디자이너] 방송이 다 끝날 때까지 온유한은 오지 않았다.한 시간 전에 일이 생겨서 좀 늦을 거라고 메시지가 왔다.“대표님, 지금 팔로워가 거의 200만 명이 다 되어가요. 출연자 중에 팔로워가 제일 많이 늘었어요.”강지아는 시간을 힐끗 본 후 하품을 했다.“이만 자자.”동하민은 사장님이 왠지 싱숭생숭해 하는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간 동하민은 마당 밖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온 선생님?”온유한이 바로 물었다.“너의 대표님은 일어났어?”“아직이요.”온유한이 밤새 기다린 듯한 모습에 동하민은 얼른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언제 오셨어요? 밤새 못 주무신 것 같아요.”“방금.”사실 온유한이 밤새 잠을 못 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강지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1층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잤다.자고 일어나니 오전 10시가 넘었고 강지아는 마당에서 효과도를 검토하고 있었다.온유한은 강지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에 임시로 수술이 추가되어서 못 왔어. 화 많이 났지?”강지아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아니. 오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뭐.”이때 하인이 아침밥을 가져다 주었고 온유한은 그녀 옆에 앉아 먹었다.“지아야, 다음 달에 며칠 휴가를 낼 건데 우리 어디 놀러 갈래?”강지아는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왜 갑자기 휴가야?”“요즘 좀 피곤해서 휴가를 내고 싶어.”“그래.”안경을 낀 온유한의 렌즈 뒤의 눈빛은 아주 따뜻했고 그런 모습에 강지아도 그의 마음을 바로 알았다. 그녀에게 보상해주려고 그러는 것이다.전에 주유정의 일도 그렇고 뒤이어 임유희의 일도 있으니 말이다.이렇
시간이 좀 지나자 그 까만 딱지가 떨어졌고 하얗고 매끈했던 다리에 흉터 자국이 튀어나왔다.강지아는 의사에게 가서 재검사를 받았고 상처를 본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상처 난 주위가 그나마 심각하지 않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심한 곳은 흉터 연고와 피부과에 가 보셔도 되는데 아마 무리일 거예요.”“의학 병원도 안 되나요?”“완전히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병원에서 나온 강지아는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자신의 몸에서 그나마 가장 만족하는 곳이 길고 곧은 다리였다.그런데 이제 흉터가 있어 반바지와 치마를 평생 못 입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청천벽력이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흉터를 제거하지 못해도 대표님의 다리는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예쁘니까요. 그리고 섹시하게 보이는 방법이 있어요!”강지아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방법인데?”“타투이스트를 찾아가서 문신을 하는 거죠.”동하민은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아는 타투이스트가 있는데 전국 문신대회 우승자예요. 이것 보세요. 저도...”동하민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강지아에게 목을 보여 주었다.“이 독수리가 바로 그 타투이스트가 그려주신 건데 이렇게 작은 도안도 그때 제 월급의 절반이나 써서 일주일 내내 라면만 먹었어요. 한 번 보세요. 이 독수리 무늬 너무 예쁘지 않아요?”강지아는 가까이 가서 봤다. 확실히 검은 독수리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깃털이 검고 윤이 나 보이는 걸 보니 타투이스트의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것 같았다.하지만 강지아는 문신을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다리에 흉터가 비교적 크게 났기에 하려면 큰 패턴의 문신을 해야 했고 그러면 너무 눈에 띄어 최신애가 분명히 싫어할 것이다.문신이라는 것은 많은 기성세대의 눈에 일탈이라고 보인다.“일단 피부과에 가 보고 다시 얘기하자.”강지아가 온유한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정원에 낯익은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오늘 날씨가 매우 좋아 병원의 정원에서 많은 환
차는 골목 밖에 주차했다. 이곳은 강지아가 와본 적이 없다.옛날 동네라 대부분 나이 든 노인들이 살아 왠지 노을이 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골목이 좁아서 동하민은 혹시라도 강지아의 고급 차에 기스라도 날까 봐 감히 운전해서 들어가지 못했다.강지아는 시멘트로 얼룩진 골목 어귀에 서서 머뭇거리는 얼굴로 물었다.“타투이스트 선생님이 이 안에 있다는 말이지?”“맞아요. 바로 안에 있어요.”동하민이 차 안에서 물을 두 병 가지고 나왔다.“대표님, 겉이 허름하다고 절대 깔보면 안 돼요. 많은 연예인 스타들이나 재벌가들도 여기에 문신을 하러 와요.”동하민의 말에 강지아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이 골목은 오래돼 보였지만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길가에 낙엽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도 청소부가 매일 열심히 청소함을 알 수 있었다.건물 안에서 이따금 젊은 사람이 엄마를 찾는 고함소리가 한두 번씩 들려왔다.점심시간인지라 건물 입구를 지나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이 집은 장조림을 하는 집이에요. 이 집은 양고기. 이 집은 매운 음식인가 보네요. 콜록콜록. 아 매워.”타투이스트의 작업실이 음식점이 가득한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골목 끝까지 가니 반쯤 열린 작은 철문이 보였고 마당에 들어서니 눈이 확 뜨였다.마당에 꽃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심은 것 같다. 꽃 종류가 너무 많아 어수선했지만 마당 전체가 활기차 보였다.안에는 팔뚝을 드러낸 런닝을 입은 남자들이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대문을 들어서는 발걸음 소리에 한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는 채 말했다.“점심시간이니 오후에 다시 오세요.”동하민이 얼른 다가가 말했다.“잘생긴 오빠, 여기에 일부러 찾아온 거니까 수혁 오빠에게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재밌네. 여기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팔에 문신이 가득한 남자가 말을 하며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있는 강지아를 보고는 그대로 멍해졌고 참지 못하고 바로 휘파람을 불었다.“와! 예쁜이!”그리고 바
2층은 1층과 디자인이 완전히 달랐고 전부 작은 칸막이로 이루어져 있었다.이곳은 타투이스트들이 작업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공간이다.그 수혁이 형이라는 남자는 이제 막 작업을 마친 듯 2층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응접실이라고는 하지만 텅 빈 곳에 소파와 탁자 몇 개를 아무렇게나 늘어놓았을 뿐이다.가게 밖에서부터 안까지 제멋대로인 것을 보니 사장도 본인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문신하려고?”턱에 턱수염이 조금 있는 진수혁은 키가 아주 큼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긴 다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진수혁의 물음에 강지아가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문신하러 왔어요.”“왜 문신을 하려는 것인데?”“몸에 흉터가 생겨서요.”“한번 봐봐.”이 사람...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야?옆에 있는 그나마 조금 젊고 잘생긴 타투이스트가 강지아의 의아한 얼굴에 한마디 설명을 덧붙였다.“문신하려는 곳이 문신하기에 적합한지 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흉터 크기 등도 확인해야 하고요.”동하민이 강지아의 바짓가랑이를 걷어주자 몸을 앞으로 내밀고 흉터를 살핀 진수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문신할 수는 있어. 원하는 그림은 있나?”처음 문신을 접한 강지아가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에 옆에 있던 동하민이 한마디 했다.“수혁 오빠 말은 대표님이 원하는 문양이 있는지 묻는 거예요. 생각해 놓은 디자인이 없으면 가게에 있는 것을 고를 수도 있고 새로 디자인도 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그럼 새로 디자인해주세요.”강지아의 말에 진수혁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그 흉터 딱지 방금 떨어졌지? 당분간은 문신하면 안 돼. 나중에 다시 와. 지금 문신을 해도 되는데 그림이 너무 커서 종아리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일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좀 작아질 것 같으니 그때 적당한 사이즈로 문신을 하면 될 것 같아.”그 말에 강지아가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알파벳 N과 H가 들어간 디자인으로 부탁드려요.”진수혁이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