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일찍 집으로 돌아간 강지아는 정유진이 정원에서 강형원과 산책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녀석이 하루가 멀다 하고 통통하고 예쁘게 커가고 있다.“요즘 볼 때마다 엄마를 닮은 것 같아요.”“아기들이라 그래. 아직 눈썹도 제대로 자라지 않았어. 나중에 크면 누구를 닮을지 아직 몰라.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정유진이 강지아를 보며 물었다.“집에 와서 일하려고요.”사실은 온유한을 피해 일찍 집에 온 것이다.지금 온유한을 만나면 임유희의 일로 싸울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를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작업실에 간 온유한은 강지아가 일찍 퇴근한 것을 확인하고 이내 본가로 쫓아갔다.“봤어?”온유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응.”“화났어?”“몰라.”진짜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은 불편했다.그녀의 얼굴을 주무른 온유한은 강지아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었다.“임유희는 내 환자일 뿐이야. 그리고 여자친구가 있다고 진작 얘기했고.”“하지만 임유희가 오빠를 좋아하잖아.”강지아가 고개를 들고 온유한을 쳐다보며 말하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그런데 질투 나?”“응.”“그럼 앞으로 일 외적으로는 만나지 않을게.”온유한은 한마디 설명을 덧붙였다.“오늘은 간병인이 임유희 핸드폰을 가지러 가는 바람에 내가 휠체어를 밀게 된 거야.”“정말? 아주머니가 나가서 햇볕이 좋으니 산책하라고 한 게 아니라?”온유한은 강지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강지아가 생각보다 예민하고 직감도 꽤 정확하기 때문이다. 사실 최신애와 장희수는 온유한과 임유희에게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애썼다. 오늘 정원에서 산책하게 된 것도 그 두 사람이 단둘이 있게끔 여건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하지만 오늘 외에 다른 날들은 온유한이 모두 피했다.“우리 엄마 말을 들을 필요 없어.”온유한이 말했다.끈질기게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이 아닌 강지아였기에 일부러 정색을 하고 난폭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엠 디자이너」에서 가장 사랑받은 디자이너는 강지아와 하미소로 제작진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희망초등학교에 기부를 했다.반면 서원준은 강지아에게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라고 추천했지만 강지아가 거절했다.“왜 안 나갈 건데? 재밌잖아. 돈 벌기도 쉽고.”“내게 돈이 부족하지는 않잖아? 그 돈은 다른 사람이 버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원준이 말했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강지아는 「아이엠 디자이너」의 공식 블로그를 리트윗했고 이것으로 컬래버레이션은 끝난 셈이다.하지만 하미소와 사적으로 좋은 친구가 되어 가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다만 하미소가 다른 촬영에 들어가는 바람에 많이 바빠졌다.“너 요즘 온유한과... 어떻게 지내?”서원준이 불쑥 물었다.“잘 지내.”“그래? 그럼 됐어.”강지아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자 서원준도 더 이상 귀찮게 하기 미안했다.“나중에 헤어지면 알려줘.”강지아는 이 인간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었다. 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꺼져!”서원준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어제 병원에 갔을 때 온유한이 다른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의 감정선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그래서 특별히 알아보러 왔는데 멋도 모르고 기뻐한 것 같다.태안 병원.최신애가 보온 통을 들고 자리를 뜨자마자 때마침 들어온 온미정은 두 명의 젊은 간호사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온씨 집안 사모님이 임유희 씨에게 정말 잘해 주네. 매일 각종 보양식을 병원에 나르고 있잖아. 임유희 씨가 진짜로 우리 미래의 온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건 아니겠지?”“어쩌면 진짜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그럼 강지아 씨는?”“아휴, 난 강지아 씨가 너무 좋아. 예능에서 너무 이쁘게 나왔잖아. 기질도 좋고.”“하지만 임유희 씨도 괜찮잖아. 대학교수라 학생들도 가끔 병문안을 오고. 말하는 것도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얼굴도 예쁘고.”두 간호사는 당사자인 온유한 보다 더 고민하는 듯했다.온미정이 한 번
“들었어? 온 주임이 다음 주 휴가 때 여자친구 데리고 여행 갈 거라는 얘기?”“뭐? 근데 임유희 씨가 퇴원하려면 아직 멀었잖아?”“바보야, 임유희가 온 주임님의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거지, 진짜 여자친구는 강지아라는 뜻이지.”“하지만 다들...”“다들 허튼소리 그만해. 흉부외과에서 나온 얘기야. 온 주임님의 학생이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임유희는 간병인을 보며 말했다.“햇볕이 너무 강하니 이만 병실로 돌아가죠.”간병인은 그녀를 밀고 병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임유희 씨, 간호사들의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어요. 온 선생님의 어머니가 임유희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말솜씨가 좋은 간병인 아주머니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간병인의 말에 임유희가 피식 웃었다.“하지만 온 선생님이 나를 안 좋아하잖아요.”“이 병원에서 몇 년을 일하면서 온씨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예전에 온 선생님이 강지아와 사귄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사귀기 시작한 것도 올해의 일이에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오랫동안 인연이 있죠. 정말 평생 함께할 거였으면 진작 함께 있었겠죠? 그러니 마음 편히 쉬세요. 온씨 집안과 같은 가정에서 태어난 온 선생님 같은 사람은 결혼도 당연히 부모님의 뜻을 따라야 해요.”책장을 넘기는 임유희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강지아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당연히 알죠. 전에 「아이엠 디자이너」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검색하면 나올 거예요.”휴대전화를 집어 든 임유희는 팬들이 이쁘게 포토샵한 강지아의 사진을 한 무더기 찾아냈다.강씨 집안 사람들은 미간이 비교적 깊지만 강지아는 강지찬처럼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의 장점이 조화롭게 매칭되어 있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에 어른이 된 강지아는 대범한 재벌 집의 외동딸 기질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임유희의 온유하고 아늑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최신애는 온유한이 임유희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
온유한은 휴가를 애만 쇼가 끝난 후에 가기로 했다.강지아가 다른 일에 집중하지 않고 오롯이 놀게 하기 위해서이다. 괜히 쉴 때 일을 생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불이 난 탈의실 두 개는 새로 장식해 화재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지난번 리허설 이후 쇼장이 조금 변동되었고 이미 준비를 마쳤다.쇼장에서 나온 강지아가 다시 경찰서에 갔을 때 강지찬은 이미 기훈 법률사무소 변호사와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오빠, 용의자가 자백했어?”“응.”“누구인데?”“처음에는 너와 예능을 찍었던 걔.”“주민희?”“네.”옆에 있던 변호사가 말했다.“그런데 이미 외국으로 도주해서 당분간은 잡히지 않을 거예요. 오늘 강지아 씨를 부른 이유는 좀 더 조사하고 싶어서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경찰이 묻는 대로만 대답하면 돼요.”미처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강지아는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었다.이제 연예계에서 발을 내디딜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에게 보복하는 게 이해를 못 할 일은 아니다.경찰서에서 나온 강지찬은 차를 타기 전에 두서없이 물었다.“유한이와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야?”갑작스러운 물음에 강지아가 말했다.“일단 지금처럼 있는 거지. 왜? 오빠, 또 무슨 찌라시라도 들었어?”“아니.”강지찬이 차에 올라탔다.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지아는 자신과 온유한의 관계가 당분간 변함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급하지 않았다.동하민을 데리고 신상 겨울옷들을 사러 갔는데 쇼핑을 마치고 나오니 날이 저물었다.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진수혁이 그녀에게 문신 도안을 보내왔다.모두 그가 직접 디자인한 도안으로 강지아가 그중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다시 디자인할 수도 있다.강지아가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예술 감각이 끓어 넘치는 알파벳 H와 N이었다. 동하민도 이 디자인이 예쁘다고 생각했다.워낙 대범한 강지아인지라 바로 원하는 도안을 선택했다. 괜히 번거롭게 다른 도안을 디자인하라고 하지 않았다.식사하고 있는데
“대표님, 저, 저...”동하민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저분이 정말 온 선생님 어머니 맞나요?”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강지아의 체면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니 말이다.살짝 웃음을 짓는 강지아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우리 그냥 밥이나 먹자.”동하민은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대표님, 설마 나 때문에 대표님의 얼굴이 깎인 거 아니에요?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머리를 기를까요?”“너와 상관없어.”강지아가 말했다.“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불만일 뿐이야.”“너무해요.”동하민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온 선생님 같은 분에게 어떻게 이런 엄마가 있을 수 있어요?”이렇게 말한 동하민은 문득 무슨 생각이 나는 듯했다.“그럼 대표님이 문신하면 더 꼬투리를 잡겠네요? 그때는 분명 또 그 핑계를 대고 뭐라고 할 거예요.”“내 일은 내가 결정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동하민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역시 우리 강씨 집안 아가씨다운 대표님! 저런 사람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어요.”애만 쇼를 앞두고 강지아가 다시 한번 타투샵을 찾았다.이번에는 문밖에 작은 나무 팻말에서 ‘상선약수'라는 단어를 발견했다.이것은 아마 진수혁의 작업실 이름인 것 같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지은 탓에 전혀 타투샵 이름 같지 않았다.강지아가 선택한 도안이 크지 않아서 2시간 내로 완성이 되었다.문신하는 도중에도 한 번도 아프다고 끙끙거리지 않았고 그저 차분하게 누워서 핸드폰을 봤다.진수혁이 사진까지 찍어 주자 그녀는 그 사진을 온유한에게 보내 예쁘냐고 물었다.곧이어 온유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지아야, 문신하러 갔어?”“응, 예쁘지 않아?”“예뻐.”예쁘다는 온유한의 말에 강지아는 입술을 달싹였다.이때 온유한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왔다.“H는 나야?”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문신을 바라본 강지아는 너무 마음에 들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흉터가 발목 바깥쪽에 있었
애만쇼 때문에 이날 강지아는 아주 바빴다. 쇼의 디자이너라 자연스럽게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봐야 했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조정해야 했다.별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국내외 패션계 인사와 사진작가, 언론인 기자들이 몰려들었다.한가해진 뒤 정유진은 누군가 강지아를 찍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전에 예능에 나가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기에 누군가 찍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런데 실검에 오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대표님, 대박이에요!”동하민이 신이 나서 달려왔다.“이것 보세요. 연예인들까지 우리 사진에 밀렸어요.”휴대폰을 넘겨 받은 강지아는 그녀를 찍은 사진작가가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사진은 그녀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눈, 코, 입술, 발목 문신 등 다양한 디테일까지 담아냈다.오늘 실검에 오른 많은 스타들은 모두 애만의 모델들이었고 강지아는 수많은 미남미녀 중에 있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그뿐만 아니라 애만쇼는 해외 유명 브랜드 쇼 못지않게 트렌디하다는 업계 호평을 받았다.처음엔 강지의 미모를 칭찬하더니 나중엔 그녀의 재능을 칭찬하기 시작했다.그 덕분에 팬들이 또 늘어났다.“대표님, 연예계 진출을 안 한 게 너무 아쉬워요.”동하민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강지아가 미처 숨을 돌리기 전에 에이미 언니가 친구 몇 명을 데리고 와서 강지아와 인사를 하게 했다.에이미의 지인들이라면 대부분 패션계 인사들이고 그중 한 명은 해외 유명 잡지의 편집장이었는데 이 사람은 한국 문화에 아주 흥미를 느껴 한국 문화와 관련한 시리즈를 만들어내기 위해 협력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그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들은 후 에이미 언니가 강지아를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웃으며 말했다.“오늘 애만쇼가 이렇게 성공한 데는 너의 공이 커. 외국인들도 국내 시장을 겨냥하고 있으니까 너만 관심이 있으면 같이 협력해도 돼.”강지아는 당연히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비즈니스 대화를 오래 나눴고 에이미 언니와 함께 얘기하는 모습을 기자들이 사진을
“어이가 없어!”집에 들어온 최신애는 하인을 향해 가방을 내던지며 말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또 왜 그래? 누가 또 당신을 건드린 건데?”온혁진이 무심코 물었다.“정유진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젊은 사람이 이 나이 든 사람의 체면도 안 봐주고! 그러니까 강홍식이 계속 싫어하는 것이겠죠. 이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는 정말 교양이 없어요.”“지아에게 또 뭐라고 한 거야?”“몸에 문신을 해서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면 안 돼요? 어느 집의 점잖은 여자애가 지아처럼 그런 행동을 하겠어요?”최신애를 바라보는 온혁진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지만 밤에 편히 자기 위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최신애가 온유한에게 말했다.“유희가 퇴원하겠다고 투정을 부리니 네가 좀 달래. 다리가 아직 안 나았어. 우리 병원에 재활전문의가 있으니 계속 입원하라고 말이야.”온유한이 말했다.“퇴원시킬 거예요.”“왜?”“진작 퇴원을 해야 했어요. 쓸데없이 계속 입원해서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최신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안 되지? 병원에 VIP 병실이 얼마나 많은데. 계속 입원해서 의사와 간호사가 병간호를 해야 마음이 놓여.”온혁진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병원이 그 사람 한 명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야? 퇴원할 때가 되면 퇴원해야지, 계속 병원에 있으면 뭐 하는데?”온유한은 어머니와 다투기 싫어 황급히 식사를 마쳤다.“저녁에는 밥을 먹으러 오지 않을 거예요.”최신애가 얼른 그를 불러세웠다.“참, 너 곧 휴가지? 본가에 있는 외할아버지 묘에 인사하러 가야 하니까 준비해.”온유한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지난번에 금방 다녀왔잖아요?”최신애가 말했다.“지난번에 가면 이번에 못 가? 외할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일 년에 고작 몇 번 갔니?”외할아버지 묘를 가자는 건 그를 휴가 보내기 싫다는 것이다.“시간 날 때 할아버지 뵈러 갈 거예요.”온유한이 말을 마치자
천천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엔 온유한과 임유희만 있었다.온유한은 그의 학생이 아침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제 수술한 한 환자가 거부 현상이 나타났는데 온유한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의사가 대응하고 있었다.“온 선생님, 강지아 씨와 싸운 적이 있나요?”임유희가 불쑥 물었다.“없어요.”온유한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임유희의 미소가 굳어졌다.“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그 말에 온유한이 한마디 했다.“지아가 예전에 크게 아팠어요. 일찍 철이 들었는데 병이 나은 후에는 지금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전보다 더 철이 들었어요.”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최신애의 그런 태도에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온유한은 강지아가 자신을 위해 수많은 서러움을 참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강지아가 예전에 아팠던 일을 당당하게 꺼내는 온유한의 모습에 임유희는 조금 놀랐다.최신애가 강지아를 그렇게 싫어하지만 온유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예전에 몸이 아팠던 강지아를 언급할 때의 말투는 아픈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고 그런 강지아가 창피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강지아가 이런 남자를 만나다니, 정말 운이 좋은 여자다.이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흔들렸고 격렬한 흔들림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을 마음 졸이게 했다.“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아요.”온유한이 다가가 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엘리베이터는 16층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멈췄다.긴급 호출 버튼을 누르니 층의 전등이 모두 켜졌다.바로 이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는 임유희의 모습은 평소의 온화하고 아늑한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다.온유한도 당황한 나머지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빠르게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갑자기 멈췄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찌직하는 전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있던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