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어!”집에 들어온 최신애는 하인을 향해 가방을 내던지며 말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또 왜 그래? 누가 또 당신을 건드린 건데?”온혁진이 무심코 물었다.“정유진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젊은 사람이 이 나이 든 사람의 체면도 안 봐주고! 그러니까 강홍식이 계속 싫어하는 것이겠죠. 이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는 정말 교양이 없어요.”“지아에게 또 뭐라고 한 거야?”“몸에 문신을 해서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면 안 돼요? 어느 집의 점잖은 여자애가 지아처럼 그런 행동을 하겠어요?”최신애를 바라보는 온혁진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지만 밤에 편히 자기 위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최신애가 온유한에게 말했다.“유희가 퇴원하겠다고 투정을 부리니 네가 좀 달래. 다리가 아직 안 나았어. 우리 병원에 재활전문의가 있으니 계속 입원하라고 말이야.”온유한이 말했다.“퇴원시킬 거예요.”“왜?”“진작 퇴원을 해야 했어요. 쓸데없이 계속 입원해서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최신애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안 되지? 병원에 VIP 병실이 얼마나 많은데. 계속 입원해서 의사와 간호사가 병간호를 해야 마음이 놓여.”온혁진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병원이 그 사람 한 명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야? 퇴원할 때가 되면 퇴원해야지, 계속 병원에 있으면 뭐 하는데?”온유한은 어머니와 다투기 싫어 황급히 식사를 마쳤다.“저녁에는 밥을 먹으러 오지 않을 거예요.”최신애가 얼른 그를 불러세웠다.“참, 너 곧 휴가지? 본가에 있는 외할아버지 묘에 인사하러 가야 하니까 준비해.”온유한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지난번에 금방 다녀왔잖아요?”최신애가 말했다.“지난번에 가면 이번에 못 가? 외할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일 년에 고작 몇 번 갔니?”외할아버지 묘를 가자는 건 그를 휴가 보내기 싫다는 것이다.“시간 날 때 할아버지 뵈러 갈 거예요.”온유한이 말을 마치자
천천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엔 온유한과 임유희만 있었다.온유한은 그의 학생이 아침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제 수술한 한 환자가 거부 현상이 나타났는데 온유한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의사가 대응하고 있었다.“온 선생님, 강지아 씨와 싸운 적이 있나요?”임유희가 불쑥 물었다.“없어요.”온유한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임유희의 미소가 굳어졌다.“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그 말에 온유한이 한마디 했다.“지아가 예전에 크게 아팠어요. 일찍 철이 들었는데 병이 나은 후에는 지금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전보다 더 철이 들었어요.”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최신애의 그런 태도에 진작 도망갔을 것이다.온유한은 강지아가 자신을 위해 수많은 서러움을 참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강지아가 예전에 아팠던 일을 당당하게 꺼내는 온유한의 모습에 임유희는 조금 놀랐다.최신애가 강지아를 그렇게 싫어하지만 온유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예전에 몸이 아팠던 강지아를 언급할 때의 말투는 아픈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고 그런 강지아가 창피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강지아가 이런 남자를 만나다니, 정말 운이 좋은 여자다.이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흔들렸고 격렬한 흔들림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을 마음 졸이게 했다.“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아요.”온유한이 다가가 문이 열리는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엘리베이터는 16층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멈췄다.긴급 호출 버튼을 누르니 층의 전등이 모두 켜졌다.바로 이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지르는 임유희의 모습은 평소의 온화하고 아늑한 이미지와 완전히 달랐다.온유한도 당황한 나머지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빠르게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갑자기 멈췄고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찌직하는 전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있던
엘리베이터 안은 너무 조용해 바깥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층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온유한이 말했다.상황이 매우 골치 아프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전문 구조대가 있어야만 구조 작업을 실행할 수 있고 이 또한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한동안 갇히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임유희는 군말 없이 온유한에게 다리 담요를 건넸다.“이거라도 깔고 앉으세요.”현재로서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온유한도 사양하지 않고 담요를 바닥에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올해 제가 운이 안 좋은데 저 때문에 온 선생님에게까지 누를 끼쳤네요.”임유희의 말에 온유한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런 걸 믿나요?”대학 선생님이 미신을 믿다니, 그녀의 기질과 어울리지 않는다.임유희는 점차 차분함을 되찾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갇히는 것도 꽤 낭만적인 일이라는 생각에 덜 무서워진 것 같았다.“제자들과 몇 살 차이 안 나요. 올해 운수를 봤는데 큰 화를 겪을 거라고 그랬어요. 온 선생님, 큰 화를 겪을 거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들어봤어요. 재수 없다고 하더군요.”“맞아요. 점쟁이 말이 생각보다 맞는 것 같아요.”임유희는 피식 웃었다.“심려를 끼쳐서 죄송해요.”온유한은 조용히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거 안 믿어요?”임유희가 또 물었다.“안 믿어요. 이런 일은 확률의 문제겠죠?”한편 임유희는 엘리베이터가 너무 고마웠다. 평소에 온유한과 말을 더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고 대화 내용도 대부분 그녀의 병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온유한의 눈에 자신이 다른 환자와 똑같다는 것을 임유희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이것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밖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다.온유한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것을 확인한 태안병원 보안 팀장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달려왔다.온혁진이 화를 냈다.“엘리베이터는 자주 정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태안병원에 엘리베이터를 바꿀 돈이 부족해요? 병원에서 그저 놀고먹기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큰
엘리베이터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자 강지아는 틈 사이로 온유한이 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다른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구조대원들이 잇달아 들어가 두 사람을 들어냈다.“정신을 잃었어. 얼른 응급실로 데려가.”“유한이, 유한이는 어때요?”“유희야, 유희야. 엄마 놀래키지 마.”일행은 또 급히 응급실 쪽으로 몰려갔다.사람들의 뒤를 따라 달리는 강지아는 앞에 있는 의료진과 가족들 때문에 앞으로 비집고 나갈 수 없었다.엘리베이터가 6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결과가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강지아가 두 손을 꽉 쥔 채 온몸을 떨자 온미정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겁먹을 것 없어. 괜찮을 거야.”사실 온미정도 너무 걱정이 되었다.온유한은 온씨 집안의 외아들이었기에 고모인 그녀도 온유한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온혁진의 품에 안겨 우는 최신애는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이내 간호사가 나왔다.“임유희 씨 가족분 있나요? 환자는 괜찮습니다. 이미 깼어요.”이내 임유희가 나왔다. 그녀는 너무 놀라 기절했을 뿐이고 넘어졌을 때 마침 온유한의 위에 있은 덕에 다리뼈가 부러진 곳이 조금 아픈 것 외에 다른 데는 문제가 없었다.“유희야,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장희수가 임유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엄마, 나는 괜찮아. 온 선생님은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네.”임유희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온 선생님이 나를 또 한 번 살려주셨어.”먼발치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강지아는 가슴이 찡하고 괴로웠다.허튼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의사와 환자일 뿐이고 온유한이 임유희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온유한이 구한 사람이 임유희가 아니었다면 절대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임유희는 사람들 사이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강지아를 발견했다.높게 포니테일을 묶고 트위드 코트를 입고 있는 강지아는 젊고 아름다웠다.두 눈이 마주친 두 여자는 눈빛이 한없이 평온했
사실 강지아는 학교에 다녔다.건강을 회복하고 반에 돌아왔을 때,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4학년이 되었다.그때 많은 여학생들이 그녀를 화장실에 가둬놓은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밀치고 꼬집으면서 비웃었다“너 바보인 거 알아? 더 이상 반에서 1등이 아니야. 꿈 깨.”“엄마가 죽었으니 너의 아버지도 너를 싫어하겠지?”“불쌍하네. 더 이상 도도한 공주님이 아니라 바보가 되어서.”누군가는 그녀에게 물을 뿌렸고 누군가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보석 머리핀을 잡아당겼다.어린아이들의 왕따는 정말 끔찍했다. 어린 지아는 담 모퉁이에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상대방이 온유한의 어머니일지라도 두렵지 않았다.사람들의 시선과 말은 더 이상 그녀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두 사람이 전부터 감정이 있었다는 말을 믿으세요?”강지아가 임유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임유희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분위기가 점점 굳어지자 온미정이 달려와 수습했다.“유한이가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새언니, 말 좀 적당히 하면 될까요?”그녀는 강지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을 아끼라고 손짓했다.상대는 어쨌든 어른이고 사람들 앞에서 말대꾸하는 것은 정말 보기 안 좋다.강지아는 온미정의 뜻을 알고 고개를 돌렸지만 장희수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이 아이, 역시 강씨 집안 사람답네요. 꼴을 보니 아무도 안중에 없는 것 같아요.”장희수가 최신애를 보며 말했다.“딸을 안 키워서 최 사모님은 모르시는 것 같아요. 아들 키우는 것보다 딸 키우는 게 더 힘들어요. 잘 가르치지 못하면 가정교육을 못 배우게 되죠. 특히 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여자애의 한 마디와 행동이 가족 전체의 체면을 대표해요.”한쪽으로 물러서려던 강지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한 마디와 행동이 가문의 체면을 대표한다고?만약 그녀의 새언니와 오빠가 여기에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화를 그냥 참을 수 있었을까?절대 그럴 리 없다.평소 다정다감한
강지찬과 최의현이 달려왔을 때 온유한은 이미 수술실로 실려 간 상태였다.방금 응급실 의사가 나와서 온유한이 심하게 다쳤고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다고 말했다.엘리베이터 바닥에 추락 방지 보안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면 6층 높이에서 한 명을 껴안고 떨어진 상태라 분명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안았다고? 사람을 안았다고?”최이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누구를 안았는데?”사람들은 가만히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임유희는 얼굴이 창백했다.“어머니, 죄송해요.”이렇게까지 큰일이 날 줄 몰랐던 임유희는 너무 슬펐다.그녀뿐만 아니라 사실 모두가 이렇게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임유희가 멀쩡하니까 온유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최신애는 심장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네 탓이 아니야.”임유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아들이 이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임유희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척추까지 다쳤다고 하던데 온유한이 앞으로 못 일어나면...최신애는 온혁진의 품에 안겨 슬피 울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살지 못할 것이다.최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임유희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강지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강지아는 침착하게 수술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잠시 후, 최씨 집안의 최금성과 그의 어머니도 같이 왔다.최신애는 친정 형수를 껴안고 또 울었다.“강 대표님, 최 팀장님.”강지찬과 최의현에게 인사를 한 최금성은 옆에 있는 강지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강지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한 번 쳐다봤다. 두 사람이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최금성이 그녀에게 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온유한은 심하게 다친 탓에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수술을 마쳤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온유한이 병실에 갔지만 강지아와 강지찬은 병실이 꽉 찬 탓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안에는 전부 온씨와 최씨, 그리고 임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가고 나서야 강지아는 마침내 온유한 앞에 다가올 수 있었다.침대에 있는 사람은 미라처럼 묶여 있었고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등을 수술한 탓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어 옷조차 입을 수 없었다.왼쪽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한 채 매달려 있다.이렇게 심하게 다쳤다니, 어쩐지 최신애가 계속 울고 있더라니...“명이 긴 녀석이네.”최의현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태안병원의 엘리베이터가 그나마 안전성이 좋은 거라 다행이야. 만약 일반 엘리베이터였다면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과 다름없어. 절대 살아 남지 못했겠지.”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강지아가 그들을 돌려보낸 뒤 혼자 병실에서 온유한을 지켰고 강지찬은 아무 말 없이 최의현과 함께 온혁진의 사무실로 갔다.태안병원에 안전사고가 나서 자기 아들이 다친 것만으로도 온혁진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정보가 새나가 기자가 굳이 취재까지 하려 하자 온혁진은 짜증이 났다.“우리 태안병원은 제일 좋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해.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공장에 연락했어? 사용한 지 5년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사고가 날 수 있어?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전해!”아랫사람들은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찬과 최의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지만 온혁진의 안색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태안병원의 우스운 꼴 보러 왔어? 이렇게 얘기하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오늘 내 아들이 다쳐서 다행이야. 남의 아들이었으면 정말 난처했을 거야.”최의현이 앞으로 나와 한마디 했다.“그러게요.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본인 목숨까지 바쳤어요.”임유희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최의현은 당연히 자신의 절친이 엉뚱한 사람 때문에 다친 것에 불만이었다.게다가 그 여자는 스캔들의 대상이기도 했다.지아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강지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지아와 사모님이 또 말다툼을 했다고 하던데... 아저씨, 전에
온유한이 깨어났을 때 강지아와 의사가 함께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어 입을 벌려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수술을 집도한 주임이 온유한을 제지하며 말했다.“일단 말하지 마세요. 좀 이따 검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테니까.”온유한은 입을 다문 채 강지아를 바라봤다.검사 후 간호사가 와서 산소 호흡기를 뗀 뒤 몇 가지 테스트 질문을 했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생명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했다.“유한아, 네놈은 팔자가 세구나.”외과 주임은 온씨 집안사람들과 잘 아는 삼촌뻘 되는 사람인지라 말투가 친절했다.“앞으로 그렇게 나서지 마. 네 목숨은 중요하지 않아? 네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두 눈이 다 부었어.”의사와 간호사가 떠난 후, 온유한은 강지아를 바라보았다.“넌 안 울었어?”“내가 왜 울어야 하는데?”강지아가 되묻자 온유한이 피식 웃었다.“화났어?”온유한이 이제 막 깨어났기에 강지아는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어때? 많이 아파?”온유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지금은 안 아파. 마취가 풀리면 아프겠지.”그때가 되면 온몸의 뼈가 다 아플 것이다. 생각만 해도 다리가 나른해진다.“다들 돌아갔어?”온유한이 뭔가 물어보려는 듯 병실을 한번 훑어보자 강지아가 말했다.“임유희는 다치지 않았어.”온유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설명했다.“그때는 여러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여기는 태안병원이고 나는 태안병원의 사장으로서 여기 있는 모든 환자들을 책임져야 하니까.”“응, 오빠가 한 게 맞아.”강지아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온유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경을 쓰지 않아 강지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 있는 여자친구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진짜 화가 난 거야?”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묻고 싶었다.임유희와 일 외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말이다.그런데 아침 이른 시간에 엘리베이터에 갇힌 두 사람이 설마 일적으로 만나지는 않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