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강지아는 학교에 다녔다.건강을 회복하고 반에 돌아왔을 때,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4학년이 되었다.그때 많은 여학생들이 그녀를 화장실에 가둬놓은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사람들은 그녀를 밀치고 꼬집으면서 비웃었다“너 바보인 거 알아? 더 이상 반에서 1등이 아니야. 꿈 깨.”“엄마가 죽었으니 너의 아버지도 너를 싫어하겠지?”“불쌍하네. 더 이상 도도한 공주님이 아니라 바보가 되어서.”누군가는 그녀에게 물을 뿌렸고 누군가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보석 머리핀을 잡아당겼다.어린아이들의 왕따는 정말 끔찍했다. 어린 지아는 담 모퉁이에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상대방이 온유한의 어머니일지라도 두렵지 않았다.사람들의 시선과 말은 더 이상 그녀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두 사람이 전부터 감정이 있었다는 말을 믿으세요?”강지아가 임유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임유희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분위기가 점점 굳어지자 온미정이 달려와 수습했다.“유한이가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새언니, 말 좀 적당히 하면 될까요?”그녀는 강지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을 아끼라고 손짓했다.상대는 어쨌든 어른이고 사람들 앞에서 말대꾸하는 것은 정말 보기 안 좋다.강지아는 온미정의 뜻을 알고 고개를 돌렸지만 장희수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이 아이, 역시 강씨 집안 사람답네요. 꼴을 보니 아무도 안중에 없는 것 같아요.”장희수가 최신애를 보며 말했다.“딸을 안 키워서 최 사모님은 모르시는 것 같아요. 아들 키우는 것보다 딸 키우는 게 더 힘들어요. 잘 가르치지 못하면 가정교육을 못 배우게 되죠. 특히 우리 같은 가정에서는 여자애의 한 마디와 행동이 가족 전체의 체면을 대표해요.”한쪽으로 물러서려던 강지아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한 마디와 행동이 가문의 체면을 대표한다고?만약 그녀의 새언니와 오빠가 여기에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화를 그냥 참을 수 있었을까?절대 그럴 리 없다.평소 다정다감한
강지찬과 최의현이 달려왔을 때 온유한은 이미 수술실로 실려 간 상태였다.방금 응급실 의사가 나와서 온유한이 심하게 다쳤고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다고 말했다.엘리베이터 바닥에 추락 방지 보안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면 6층 높이에서 한 명을 껴안고 떨어진 상태라 분명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안았다고? 사람을 안았다고?”최이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누구를 안았는데?”사람들은 가만히 있었고 그 사이에 있는 임유희는 얼굴이 창백했다.“어머니, 죄송해요.”이렇게까지 큰일이 날 줄 몰랐던 임유희는 너무 슬펐다.그녀뿐만 아니라 사실 모두가 이렇게 심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임유희가 멀쩡하니까 온유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최신애는 심장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네 탓이 아니야.”임유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아들이 이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임유희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척추까지 다쳤다고 하던데 온유한이 앞으로 못 일어나면...최신애는 온혁진의 품에 안겨 슬피 울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살지 못할 것이다.최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임유희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강지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강지아는 침착하게 수술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잠시 후, 최씨 집안의 최금성과 그의 어머니도 같이 왔다.최신애는 친정 형수를 껴안고 또 울었다.“강 대표님, 최 팀장님.”강지찬과 최의현에게 인사를 한 최금성은 옆에 있는 강지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강지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한 번 쳐다봤다. 두 사람이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최금성이 그녀에게 인사를 할 줄은 몰랐다.온유한은 심하게 다친 탓에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수술을 마쳤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온유한이 병실에 갔지만 강지아와 강지찬은 병실이 꽉 찬 탓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안에는 전부 온씨와 최씨, 그리고 임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가고 나서야 강지아는 마침내 온유한 앞에 다가올 수 있었다.침대에 있는 사람은 미라처럼 묶여 있었고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등을 수술한 탓에 붕대가 둘둘 감겨 있어 옷조차 입을 수 없었다.왼쪽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한 채 매달려 있다.이렇게 심하게 다쳤다니, 어쩐지 최신애가 계속 울고 있더라니...“명이 긴 녀석이네.”최의현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태안병원의 엘리베이터가 그나마 안전성이 좋은 거라 다행이야. 만약 일반 엘리베이터였다면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과 다름없어. 절대 살아 남지 못했겠지.”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강지아가 그들을 돌려보낸 뒤 혼자 병실에서 온유한을 지켰고 강지찬은 아무 말 없이 최의현과 함께 온혁진의 사무실로 갔다.태안병원에 안전사고가 나서 자기 아들이 다친 것만으로도 온혁진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정보가 새나가 기자가 굳이 취재까지 하려 하자 온혁진은 짜증이 났다.“우리 태안병원은 제일 좋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해.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공장에 연락했어? 사용한 지 5년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사고가 날 수 있어?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전해!”아랫사람들은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찬과 최의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지만 온혁진의 안색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태안병원의 우스운 꼴 보러 왔어? 이렇게 얘기하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오늘 내 아들이 다쳐서 다행이야. 남의 아들이었으면 정말 난처했을 거야.”최의현이 앞으로 나와 한마디 했다.“그러게요.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본인 목숨까지 바쳤어요.”임유희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기에 최의현은 당연히 자신의 절친이 엉뚱한 사람 때문에 다친 것에 불만이었다.게다가 그 여자는 스캔들의 대상이기도 했다.지아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강지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지아와 사모님이 또 말다툼을 했다고 하던데... 아저씨, 전에
온유한이 깨어났을 때 강지아와 의사가 함께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어 입을 벌려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수술을 집도한 주임이 온유한을 제지하며 말했다.“일단 말하지 마세요. 좀 이따 검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테니까.”온유한은 입을 다문 채 강지아를 바라봤다.검사 후 간호사가 와서 산소 호흡기를 뗀 뒤 몇 가지 테스트 질문을 했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생명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했다.“유한아, 네놈은 팔자가 세구나.”외과 주임은 온씨 집안사람들과 잘 아는 삼촌뻘 되는 사람인지라 말투가 친절했다.“앞으로 그렇게 나서지 마. 네 목숨은 중요하지 않아? 네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두 눈이 다 부었어.”의사와 간호사가 떠난 후, 온유한은 강지아를 바라보았다.“넌 안 울었어?”“내가 왜 울어야 하는데?”강지아가 되묻자 온유한이 피식 웃었다.“화났어?”온유한이 이제 막 깨어났기에 강지아는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어때? 많이 아파?”온유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지금은 안 아파. 마취가 풀리면 아프겠지.”그때가 되면 온몸의 뼈가 다 아플 것이다. 생각만 해도 다리가 나른해진다.“다들 돌아갔어?”온유한이 뭔가 물어보려는 듯 병실을 한번 훑어보자 강지아가 말했다.“임유희는 다치지 않았어.”온유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설명했다.“그때는 여러가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여기는 태안병원이고 나는 태안병원의 사장으로서 여기 있는 모든 환자들을 책임져야 하니까.”“응, 오빠가 한 게 맞아.”강지아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온유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경을 쓰지 않아 강지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에 있는 여자친구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진짜 화가 난 거야?”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묻고 싶었다.임유희와 일 외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누구였느냐고 말이다.그런데 아침 이른 시간에 엘리베이터에 갇힌 두 사람이 설마 일적으로 만나지는 않
“온 선생님, 제가 여기에 온 게 강지아 씨에게 폐를 끼치는 건가요?”“네.”온유한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대답할 줄 몰랐던 임유희는 순간 마음이 쓰라렸다.“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푹 쉬세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그럴 필요 없어요. 지아가 옆에 계속 있어 줄 것이라 다른 사람은 올 필요 없어요. 그리고 임유희 씨가 여기 있으면 지아가 기분이 나빠질 거예요.”여태껏 살면서 이토록 난감한 적이 없었던 임유희는 순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다른 집 부모님들의 부러움을 샀던 임유희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자랑이자 임씨 집안의 보배였다.대학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집안에 상당히 떳떳한 일로 이것은 그들 임씨 가문이 돈뿐만 아니라 재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남들 입에서 늘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로 칭찬받던 임유희는 어느 날 누군가에게 이렇게 하찮은 존재가 될 줄은 몰랐다.그것도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말이다.“그래요...”깊은 숨을 들이쉰 임유희는 눈시울이 찡해졌고 겨우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온 선생님, 그럼 쉬세요. 그리고 진짜로 고마웠어요.”말을 마친 임유희는 혼자 휠체어를 돌린 뒤 고개를 쳐들고 자리를 떴다.그녀에게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강지아가 밥을 먹고 느릿느릿 돌아왔을 때 온유한은 다시 잠이 든 상태였고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임유희뿐만 아니라 그녀가 가져온 보온 통도 없었다.이내 남자 간병인 두 명을 데리고 병실에 들어온 온혁진은 온유한이 자는 것을 보고는 깨우지 않고 대신 강지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지아야, 최씨 아주머니 말은 마음에 두지 마.”온혁진의 표정은 왠지 어색해 보였다.“늙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나와 유한이 체면을 봐서라도 그냥 참아줘.”강지아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매번 최씨 아주머니와의 마찰은 제가 일으킨 게 아니에요. 두 분이 예전에 저에게 얼마나 잘해줬던지 늘 기억해요. 저도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닙니다.”그녀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기 시작한 6층은 실제 아파트 7층 가까이 되는 높이이다.사람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면 죽을 확률이 높다.당시 그는 품에 임유희를 안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강지아뿐이었다.이대로 죽는다면 너무 손해가 아닌가?온유한이 뜨거운 눈빛을 내뿜으며 말했다.“지아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죽으면 네가 분명 울 테니까.”여기까지 말한 온유한은 옆에 있는 강지아를 힐끗 본 후 말했다.“그런데 깨어나 보니 양심 없는 계집애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더라고.”강지아는 흐뭇한 얼굴로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오빠를 위해 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하나쯤은 없어도 돼.”사실 강지아가 말한 사람은 임유희이다.“양심 없는 자식.”“흥!”강지아는 화장실에 가서 따뜻한 물수건을 빨아와 온유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온유한이 이렇게 다쳤으니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런데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씻지 못해 많이 불편할 것이다.얼굴과 손은 이내 다 닦았고 다른 데는 붕대를 감고 있어 닦을 수가 없었다.“가서 자, 지아야.”“오빠는? 잠이 올 것 같아?”“잘 수 있어. 조금만 있으면 바로 잘 거야.”늦은 시간이었기에 온유한은 강지아가 밤을 새우는 것이 싫었다.본인이 얼마나 다쳤는지 의사로서 제일 잘 알았고 수술도 성공적으로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다.강지아가 잠도 못 잔 채 옆에서 그를 지키느라 밤을 새우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오빠가 잠들면 그때 잘게.”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이 타일렀다.“빨리 가서 자. 간병인더러 들어와 소파에서 자라고 해. 네가 있으면 간병인이 잘 곳이 없어.”그 말에 강지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이튿날 아침, 강지아가 깨어나기도 전에 최신애가 찾아와 온유한의 침대 앞에서 또 한바탕 울었다.“많이 아파? 아들, 밤새 못 잤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어머니, 목소리 좀 낮춰요.”최신애는 안 쪽 작은 문을 힐끗 보고
아침을 먹고 돌아온 강지아는 병원 로비에서 화령과 최금성을 만났다.“오빠, 화령아, 유한이 오빠 보러 온 거예요?”최금성이 말했다.“응. 방금 얼굴 봤으니 나도 이만 출근하려고.”화령도 한마디 했다.“나도 좀 이따 인터뷰가 있어서 저녁에 다시 올게. 같이 저녁이나 먹자.”강지아는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병원문을 나오자 최금성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데려다줄까?”공짜로 고급 세단을 탈 수 있다면 자기 돈을 들여가며 택시를 타려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화령은 최금성의 말에 바로 그의 차에 타서 안전벨트 맸다.두 사람은 최근 만난 적이 없다. 카톡 친구가 되었지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화령도 당연히 돈을 갚지 않았다. 그 후에 화령이 최금성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으니 서로 빚진 게 없다.“주소.”화령은 그에게 위치를 보내줬고 최금성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은 뒤 시동을 걸었다.“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최금성의 물음에 화령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최 대표님에게 여자가 부족하진 않잖아요?”“부족해. 어쨌든 나도 정상적인 남자니까.”최금성의 얼굴이 하도 진지해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잠자리가 아니라 아주 유망한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죄송하지만 나는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가 아닙니다.”화령의 말에 최금성도 한마디 했다.“나도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를 찾는 게 아니야.”화령이 가만히 있자 최금성이 말을 이었다.“여자친구가 되어줄 고정된 파트너를 찾고 있어. 실제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나와 함께 석식에도 참가해야겠지. 물론 보수는 섭섭지 않게 줄게.”화령은 그제야 깨달았다. 최금성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과 결혼을 떠나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고정된 애인이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령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젊을 때 돈을 벌어놓고 결혼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돈으로 남은 생을
요 몇 년 동안 화령은 아주 많은 선을 봤다. 엄밀히 말하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현이라는 의사는 나름대로 조건이 괜찮은 편이었다.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직업 하나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만 열면 허풍을 떠는 ‘대표님’이나 ‘사장님’이 아니다.그러나 나이는...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본 화령은 이 사람이 최금성과 나이가 비슷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비교를 안 했더라면 몰랐겠지만 비교를 하고 보니...특히 이 남자는 그녀가 가정주부가 되어 가족들의 시중을 들어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게 내 요구사항이에요. 그리고 저축한 돈이 없어서 인테리어 비용은 낼 수 없고요.”대답을 마친 화령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최금성에게 첫 메시지를 보냈다.[애인이 되면 나보고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 거예요? 애인이 되려면 최금성 씨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나요?]최금성의 답장은 이내 도착했다.[아니.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옆에 있으면 돼.]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여자들은 왜 이렇게 이기적인가요? 내가 부주임 의사로 승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면 아내의 뒷바라지가 필요해요.”휴대전화를 보던 화령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승진하고 월급이 오르는 것이 아내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본인의 개인적인 가치와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내의 인생을 희생해야 하는 건가요? 아내는 사람이 아닌가요? 아내의 일은 일이 아닌가요?”그 물음에 어리둥절해진 박현은 다소 화를 내며 말했다.“한 가족에서 한 사람은 희생해야 하겠죠.”화령은 박현을 보며 말했다.“내 월급이 그쪽보다 낮지는 않아요. 아니면 그쪽이 집에서 애들과 부모님을 돌볼래요? 혈연관계인 부모님을 본인이 직접 모시세요.”박현이 말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자가 어떻게 여자와 같아요?”화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보였다.“박현 씨, 선을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
현채영의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버렸고 임유희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집안에 들어서기 전, 뒤에 있던 임유희가 불쑥 물었다.“현채영 씨, 유한 오빠 입술에 난 상처... 진짜 현채영 씨가 그런 거예요?”현채영은 걸음을 멈춘 뒤 뒤돌아서 임유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면 임유희 씨가 그랬겠어요?”임유희의 눈빛은 아주 차분했다.“유한 오빠와 만나는 척하지만 현채영 씨에게서는 한 번도 키스 마크를 본 적이 없어요. 현채영 씨의 향수 냄새는 아주 강하지만 유한 오빠에게서는 한 번도 진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늘 은은한 향수 냄새 그대로죠.”현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유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강씨 가문 생일잔치에 간 거죠? 유한 오빠도 누구를 만나려고 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강지아 씨가 돌아왔나요?”현채영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시 임유희 씨, 대학 선생님답게 꼼꼼하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강지아 씨가 온 것은 맞지만 그게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죠? 유한 씨는 아이를 보러 간 거예요. 유한 씨가 옛 친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유희 씨도 잘 알잖아요.”그러자 임유희가 말했다.“그래요? 유한 오빠 입술 상처도 강지아 씨가 낸 거죠?”현채영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두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어요.”임유희가 계속 물었다.“현채영 씨 역할이 뭔가요? 목적이 대체 뭐예요? 돈 때문이에요?”현채영은 박수를 쳤다.“임유희 씨, 상상력 하나만은 정말 탄복할만하네요.”“내가 돈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면 어머님이 주신 20억 원을 왜 안 받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목적은 온유한이라는 사람 곁에서 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왜 온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거죠?”임유희가 말했다.“온유한 씨가 좋아서요.”현채영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따지고 보면 임유희 씨도 너무 불쌍해요.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