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돌아온 강지아는 병원 로비에서 화령과 최금성을 만났다.“오빠, 화령아, 유한이 오빠 보러 온 거예요?”최금성이 말했다.“응. 방금 얼굴 봤으니 나도 이만 출근하려고.”화령도 한마디 했다.“나도 좀 이따 인터뷰가 있어서 저녁에 다시 올게. 같이 저녁이나 먹자.”강지아는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병원문을 나오자 최금성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아직 시간이 좀 있는데 데려다줄까?”공짜로 고급 세단을 탈 수 있다면 자기 돈을 들여가며 택시를 타려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화령은 최금성의 말에 바로 그의 차에 타서 안전벨트 맸다.두 사람은 최근 만난 적이 없다. 카톡 친구가 되었지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화령도 당연히 돈을 갚지 않았다. 그 후에 화령이 최금성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으니 서로 빚진 게 없다.“주소.”화령은 그에게 위치를 보내줬고 최금성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은 뒤 시동을 걸었다.“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최금성의 물음에 화령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최 대표님에게 여자가 부족하진 않잖아요?”“부족해. 어쨌든 나도 정상적인 남자니까.”최금성의 얼굴이 하도 진지해 두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잠자리가 아니라 아주 유망한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죄송하지만 나는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가 아닙니다.”화령의 말에 최금성도 한마디 했다.“나도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여자를 찾는 게 아니야.”화령이 가만히 있자 최금성이 말을 이었다.“여자친구가 되어줄 고정된 파트너를 찾고 있어. 실제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나와 함께 석식에도 참가해야겠지. 물론 보수는 섭섭지 않게 줄게.”화령은 그제야 깨달았다. 최금성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과 결혼을 떠나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고정된 애인이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령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젊을 때 돈을 벌어놓고 결혼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돈으로 남은 생을
요 몇 년 동안 화령은 아주 많은 선을 봤다. 엄밀히 말하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현이라는 의사는 나름대로 조건이 괜찮은 편이었다.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직업 하나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입만 열면 허풍을 떠는 ‘대표님’이나 ‘사장님’이 아니다.그러나 나이는...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끗 본 화령은 이 사람이 최금성과 나이가 비슷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비교를 안 했더라면 몰랐겠지만 비교를 하고 보니...특히 이 남자는 그녀가 가정주부가 되어 가족들의 시중을 들어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게 내 요구사항이에요. 그리고 저축한 돈이 없어서 인테리어 비용은 낼 수 없고요.”대답을 마친 화령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최금성에게 첫 메시지를 보냈다.[애인이 되면 나보고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 거예요? 애인이 되려면 최금성 씨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나요?]최금성의 답장은 이내 도착했다.[아니.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옆에 있으면 돼.]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여자들은 왜 이렇게 이기적인가요? 내가 부주임 의사로 승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면 아내의 뒷바라지가 필요해요.”휴대전화를 보던 화령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승진하고 월급이 오르는 것이 아내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본인의 개인적인 가치와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내의 인생을 희생해야 하는 건가요? 아내는 사람이 아닌가요? 아내의 일은 일이 아닌가요?”그 물음에 어리둥절해진 박현은 다소 화를 내며 말했다.“한 가족에서 한 사람은 희생해야 하겠죠.”화령은 박현을 보며 말했다.“내 월급이 그쪽보다 낮지는 않아요. 아니면 그쪽이 집에서 애들과 부모님을 돌볼래요? 혈연관계인 부모님을 본인이 직접 모시세요.”박현이 말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자가 어떻게 여자와 같아요?”화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보였다.“박현 씨, 선을
이날 굳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선 온혁진은 큰 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장희수와 통화하며 마사지와 미용실을 예약하고 있는 최신애의 모습에 온혁진의 얼굴이 더욱 안 좋아졌다.통화를 마치자 온혁진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지아 심기를 건드리지 마. 하루하루 그렇게 트집을 잡다가는 조만간 우리 집이 당신 때문에 망하겠어.”갑자기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붓는 남편에 최신애는 심기가 불편했다.“왜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온혁진은 소파에 앉더니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신공장을 증설하는 중인데 강지찬 쪽에서 아직 입금을 안 하고 있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당신과 상관없다고? 지아를 어떻게 대했는지 강지찬이 모를 것 같아?”온혁진은 열받아 죽을 지경이었다.“뒤에서 지아의 험담을 하는 것도 정유진이 다 들었잖아. 당신, 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어!”하지만 본인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최신애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우리 제약회사가 몇 년째 수익이 얼마나 높은데 투자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어요. 강지찬이 입금을 하지 않으면 이참에 협력 관계를 끊어요. 내 말 들어봐요. 임씨 가문이...”“닥쳐!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온혁진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최신애, 당신이 미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미친 것일까? 강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싶은 거야? 우리 두 가문의 사이가 틀어지면 얼마나 큰 이익이 사라지는지 알아? 당신, 정말 늙을수록 더 바보가 되는 것 같아!”온혁진의 외침에 최신애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매일 임씨네, 임씨네! 내 앞에서 임씨 가문의 얘기 좀 작작 해!”온혁진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씨 가문은 투자를 하는 집안이야. 당연히 그 집 사람들은 당신에게 아부하겠지. 당신 진짜로 아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남에게 떠받들리는 그런 허영심을 만족하기 위해서야?”“나, 나는...”최신애는 얼떨떨해졌다.“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목 보호대는 이제 안 해도 되었기에 온 유한은 두 손 외에 머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강지아와 키스하는 것을 본 엄마가 이렇게 크게 반응할 줄은 온유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이것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화가 난 최신애는 강지아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너!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꺼져!”“어머니!”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던 온유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다급하게 한마디 했다.“어머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요?”최신애는 여전히 강지아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내가 뭘 하는지 내가 모를까 봐? 강씨 가문이야말로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묻고 싶네!”강지아의 멍해진 얼굴에 최신애가 말을 이었다.“네 오빠가 일부러 입금 안 하는 이유도 우리 온씨 가문을 망신시키기 위해서잖아? 왜? 네 오빠가 너 대신 나서는 거야? 허허, 프로젝트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우리 온씨 가문이 그것 때문에 흔들릴 줄 알았어?”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던 온유한인지라 병원과 회사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그저 최신애의 말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 했다.“회사 일은 나와 아버지가 처리하고 있으니 끼어들지 마세요.”“네 아버지가 지금 이 일 때문에 밥도 못 먹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최신애는 강지아가 너무 미워 눈총을 쏘며 말했다.“강씨 가문에는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어. 처음에 강지찬과 놀겠다고 할 때부터 너더러 조심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십 년 넘게 심부름을 해놓고 이제는 강지찬의 매제가 되려고 하다니! 평생 강지찬의 그늘에서 살고 싶은 거야? 잊지 마. 너는 우리 온씨 가문의 후계자야!”어머니가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던 온유한은 깜짝 놀라는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강지아도 멍해졌다.오빠들의 순수한 우정이 최신애의 눈에 이렇게 비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강지아는 넋 놓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예전에 제 앞에서 상냥
술집의 안주는 깔끔하고 시원하며 이곳 술도 사장님이 직접 담갔다.겨울에는 일찍 어두워지기에 가게 안도 비교적 어두워 강지아와 화령은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사실 창가 테이블이라고 해도 바깥의 풍경이라곤 볼 것이 없을 정도로 낡은 거리였고 거기에 가끔 바쁘게 살아가는 행인들만 지나가곤 했다.장난꾸러기 남자아이가 짝을 지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비가 내리면 울퉁불퉁한 거리에 물이 고여 흙탕물이 튈 때도 있다.어려서부터 재벌 집에서 자란 강지아는 창문을 통해 다른 생활을 볼 수 있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강지아의 마음은 점점 평온해졌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점차 맑아졌다.“걱정거리가 있는 거야?”화령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맞힐 수 있었다.“온 선생님 어머니와 또 싸웠어?”강지아는 대답하는 대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원샷했다.사장님이 담근 술이라 조금 쓰긴 하지만 사장이 직접 술맛을 조절하기에 여자들에게 주는 술은 달짝지근하고 맛은 칵테일과 비슷했다.“남자친구 엄마와 맞서서 기 싸움을 할 수 있는 네가 너무 대단한 것 같아. 나는 우리 엄마도 피하는데.”평소 가족 얘기를 절대 하지 않는 화령인지라 강지아는 그녀의 말에 살짝 놀라서 물었다.“부모님과도 사이가 안 좋아?”부모님과‘도’라는 글자에 화령은 피식 웃었다.“그렇지, 너보다 더 심각해. 너는 그래도 오빠와 새언니가 있잖아. 우리 오빠와 새언니, 부모님 모두 내 지갑만 쳐다보고 있어.”이 일을 화령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기자 일을 시작하면서 필사적으로 돈을 벌었고 지금은 고액 연봉을 받고 있지만 수중에 돈이 없다.사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큰 것도 아니다.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고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화령의 가족 상황을 모르는 강지아는 그저 한마디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이 말이 자랑이나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님을 화령도 잘 알고 있다. 강지아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고 절대 그녀를 동정하는
최금성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의 아내만 있으며 아무도 그 자리를 대체하지 못했다.화령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다만 고마운 것은 그녀가 최금성과 만나는 것을 강지아에게 말해도 강지아는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내가 왜 널 무시해? 그건 너의 선택이고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한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최금성은 최금혁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서 만나는 게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너만 행복하면 돼.”그제야 강지아는 오늘 화령의 옷차림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얼굴이 더 예뻐졌고 가방도 바뀌었다.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으며 사물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사람의 인품 중 하나이다.이때 웨이터가 닭발 한 접시를 가져오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어젯밤에 양념에 재워서 오늘 하루 종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만든 요리예요. 간이 다 배었을 테니 맛 좀 보세요.”화령의 눈빛이 반짝였다.“너무 맛있을 것 같아.”한 입 먹어본 강지아도 술안주에 딱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이 한창 먹고 있을 때 누군가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사장님, 내가 주문한 술 준비가 다 되었나요?”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든 강지아는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누구야? 알아?”“나에게 문신해준 전문가 선생님.”화령은 깜짝 놀랐다.“전문가 선생님이 이렇게 젊어?”진수혁도 한쪽켠에 있는 강지아를 발견했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던 진수혁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서울이 이렇게 작았나?”강지아가 웃으며 말했다.“나 여기 단골이에요.”진수혁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나보다 더 오래되지는 않을걸? 여기 영감님 술, 나 이제 10년 가까이 마시고 있어.”“그쪽이 이겼네요.”지인을 만난 강지아는 기분이 좋아 화령과 진수혁에게 서로를 소개를 시켜준 다음 인사를 하게 한 뒤 진수혁더러 합석하자고
강지아는 최금성이 화령을 온씨 저택에 데려와 자기 여자친구라고 소개할 줄 몰랐다.결혼 외에 모든 것은 다 상관없는 것 같았다.오늘 우아하게 차려입은 화령은 여기 있는 재벌가 사모님 못지않았다.화령은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최금성의 곁을 따라다녔고 나대거나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이런 화령이야말로 최금성이 필요로 하는 여자이다.석식 장소에 데리고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여자를 달래는데 너무 많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이때 누군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조만간 최씨 가문의 잔칫술도 마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축하합니다.”황은숙은 난감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젊은 사람들의 일은 본인들 맘대로 하게 놔둬야죠. 저는 상관 안 해요.”황은숙은 손님들 앞이라 최대한 화를 참았지만 맞은편 화령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화령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수줍은 척했다.옆 사람들은 이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연신 감탄만 했다.“최 대표님이야말로 우리 서울에서 유명한 사랑꾼이죠. 지난 몇 년 동안 그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았잖아요.”그러자 황은숙이 말했다.“우리 며느리가 명문대 출신에 학식도 깊어요. 우리에게 이렇게 총명한 손자를 낳아줬는데 본인은 정작 일찍 하늘나라로...”마음이 씁쓸해진 화령은 다른 사모님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서 강지아에게 몰래 눈짓을 했다.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만났다.“방금 온씨 집안 사모님을 만났는데 네 친구냐고 묻더라고.”화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아.”“괜찮아.”자기주장이 확실한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야. 너와 상관없어.”화령이 말했다.“여기 사람들은 내가 최금성의 자산을 보고 만난다고 생각해서 내가 최금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나 봐.”사실 최신애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화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너, 너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최신애는 온유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유한이 앞에서 감히 윗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다니, 강씨 가문에서는 이렇게 가르쳤어?”온유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어머니, 말 좀 작작 하세요.”“그냥 내가 나갈게요.”강지아가 말했다.“여기서 지적질이나 받으며 욕먹을 생각은 없습니다.”하지만 최신애는 포기하지 않았다.“거기 서! 한마디만 물을게.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네 친구더러 금성이를 꼬시라고 한 거야?”“혹시 피해망상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강지아는 최신애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랐고 온유한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형이 꼬신다면 넘어갈 남자예요? 엄마, 외숙모, 별일 없으면 가세요. 나도 이만 좀 쉬어야겠어요.”최신애가 화를 냈다.“네 형이 가족들에게 그 여자를 소개했어. 미래의 최씨 가문 안주인인 것처럼 말이야. 외숙모에게서 들었는데 그 여자 집도 외지에 있고 집안 형편도 별로라고 하던데. 예전에는 금혁이와도 어울리며 놀았고. 금혁이 아프리카에 가자마자 금성이의 침대에 오르는 여자가 좋은 여자일 리가 있어?”온유한은 이 일을 몰랐고 강지아는 설명하기 귀찮았다.이때 강지아가 말했다.“진화영이 어떤 여자인지는 금성이 오빠에게 물어보세요. 뒤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아요?”온유한은 그저 머리가 지끈거렸다.최신애는 벌컥 화를 내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가서 뺨을 한 대 때렸다.‘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모두가 멍해졌다.“어르신을 공경하는 게 뭔지 오늘 네 어머니 대신 내가 가르쳐줄게.”최신애는 강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꺼져, 다시는 내 아들 앞에 나타나지 마!”“어머니!”깜짝 놀란 온유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지아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가방을 들고 바로 나갔다.“지아야!”오늘 강지아가 이대로 병실을 나선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쇼핑 더 할 거야?”화령의 두 손에도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맞은편 가게에서 현채영이 치마를 입어보고 있었고 온유한이 그녀의 어깨끈을 고쳐주고 있었다.“이제 가자. 거의 다 샀어.”강지아가 말하는 순간 화령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한마디 했다.“곧 금성 씨의 생일이라 선물 좀 사야 할 것 같아. 같이 골라줘.”두 사람은 남성복 가게에 갔다.최금성은 항상 이 브랜드의 옷을 입었기에 가게에도 그의 옷 사이즈가 있었으므로 화령은 스타일만 고르면 되었다.양복과 셔츠 외에 화령은 넥타이도 골랐다. 총 2천만 원이 넘었다.“서 대표에게 뭐 안 사줘도 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는 멍해졌다.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필요 없을걸?”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지아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아지만 여자친구로서 주는 거라면... 왠지 이상했다.화령은 서원준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사람이 재미있기도 하고 강지아에게 일편단심이었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부모님의 인품도 좋다고 했다.“서원준에게 아무거나 하나 골라줘 봐. 요 몇 년 동안 일이 없을 때마다 날아가서 너와 같이 있어 주고 그랬잖아. 알 사람들은 다 알아.”화령의 말은 사실이었다.강지아는 어쩔 수 없이 서원준을 위해 은회색의 패셔너블한 넥타이를 골랐다.“괜찮아?”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강지아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잘 어울리겠지?”“당연히 잘 어울리지. 서 대표가 얼마나 스타일리쉬한데. 이런 컬러 잘 어울려.”강지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사기로 결심하고 종업원에게 건넸다.“이거 포장해 주세요.”뒤돌아선 순간 온유한과 현채영이 어느새 가게에 들어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현채영이 온유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유한 씨, 넥타이 사기로 했잖아. 내가 골라줄게.”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며 강지아의 옆을 지나갔다.종업원은 강지아와 화령의 물건을 재빨리 포장했다. 이
“강지아 씨, 이 치마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아 씨처럼 피부가 뽀얀 사람들만 소화해낼 수 있을 거예요.”종업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 이런 색상을 거의 입지 않은 강지아마저도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그래요. 이걸로 살게요.”이때 옆에 있던 임유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치마가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그러자 최신애가 말했다.“그럼 사.”임유희를 본 종업원은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죄송합니다. 이 치마는 저희가 새로 출시한 한정판 신상품이라 사이즈별로 한 벌씩밖에 없어요. 고객님도 S사이즈시죠? S사이즈는 더 없습니다. 대신 다른 스타일로 추천해 드릴게요. 저희 가게에...”“다른 스타일 말고 저걸로 줘.”최신애의 말에 종업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강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았다. 두 집안이 이미 인연을 끊었기에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드레스 룸에 가서 다른 치마로 갈아입었다.한편 최신애는 아직도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내가 이 가게 VIP야. 지금 이 치마가 마음에 들어서 입어보겠다고 하잖아.”종업원은 골치가 아팠다.한편 다른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강지아와 화령은 최신애가 없는 셈 치고 즐겁게 계속 쇼핑을 했다.강지아가 옷을 잔뜩 골라 종업원에게 주며 포장해달라고 했다.최신애는 빨간 치마를 뺏어오기로 마음먹은 듯 종업원이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빼앗아서 임유희에게 건넸다.“유희야, 입어 봐.”임유희가 치마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지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이 치마는 제 거예요.”임유희도 물러서지 않았다.“아직 돈을 내지 않았잖아요. 그럼 당연히 강지아 씨의 것이 아니죠.”“내가 먼저 결정한 것이고 이미 사겠다고 얘기도 끝났어요. 대학교수면 누가 먼저인지 기본 도리는 알지 않나요?”“강지아 씨보다 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단아한 분위기의 임유희에게 빨간 치마가 더 잘 어울린다고?강지아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
현채영의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나서 가버렸고 임유희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집안에 들어서기 전, 뒤에 있던 임유희가 불쑥 물었다.“현채영 씨, 유한 오빠 입술에 난 상처... 진짜 현채영 씨가 그런 거예요?”현채영은 걸음을 멈춘 뒤 뒤돌아서 임유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면 임유희 씨가 그랬겠어요?”임유희의 눈빛은 아주 차분했다.“유한 오빠와 만나는 척하지만 현채영 씨에게서는 한 번도 키스 마크를 본 적이 없어요. 현채영 씨의 향수 냄새는 아주 강하지만 유한 오빠에게서는 한 번도 진한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늘 은은한 향수 냄새 그대로죠.”현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임유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오늘 저녁 강씨 가문 생일잔치에 간 거죠? 유한 오빠도 누구를 만나려고 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강지아 씨가 돌아왔나요?”현채영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시 임유희 씨, 대학 선생님답게 꼼꼼하네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강지아 씨가 온 것은 맞지만 그게 유한 씨와 무슨 상관이죠? 유한 씨는 아이를 보러 간 거예요. 유한 씨가 옛 친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유희 씨도 잘 알잖아요.”그러자 임유희가 말했다.“그래요? 유한 오빠 입술 상처도 강지아 씨가 낸 거죠?”현채영은 일부러 놀란 척하며 눈을 크게 떴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두 사람 오래전에 헤어졌어요.”임유희가 계속 물었다.“현채영 씨 역할이 뭔가요? 목적이 대체 뭐예요? 돈 때문이에요?”현채영은 박수를 쳤다.“임유희 씨, 상상력 하나만은 정말 탄복할만하네요.”“내가 돈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라면 어머님이 주신 20억 원을 왜 안 받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 목적은 온유한이라는 사람 곁에서 온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왜 온씨 가문에 빌붙어 사는 거죠?”임유희가 말했다.“온유한 씨가 좋아서요.”현채영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따지고 보면 임유희 씨도 너무 불쌍해요.
강지아가 서원준과 사귀는 것에 대해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유진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온미정은 옆에 있는 온유한을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유한이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정유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다분했다.“그냥 다들 더 이상 시끄러운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때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뜨거운 그의 손바닥과 달리 강지아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생일파티에 워낙 일이 많았고 또 강지아도 더 있을 마음이 없었기에 정유진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한 사람이 뒤따라 차를 탔다.익숙하고 은은한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온유한은 동하민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강지아에게 다가갔다.“일부러 그런 거야?”강지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서원준은 몇 년째 나만 기다렸어.”온유한이 가만히 있자 앞 좌석에 있던 동하민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온 선생님, 여자친구도 몇 명씩이나 있는 분이 우리 대표님에게 왜 이러세요?”강지아도 한마디 했다.“이만 내려줘. 오빠 여자친구나 내 남자친구가 보면 안 되지 않을까?”온유한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강지아를 매섭게 쳐다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쾅 닫았다.강지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동하민이 말했다.“대표님, 온 선생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몰라.”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강지아가 떠나자마자 온유한과 현채영도 자리를 떴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본 최신애와 임유희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더니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오늘 술을 좀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유한 오빠가 좀 다친 것 같아요. 어머님, 유희 씨, 신경 쓰지 마세요.”“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천한 년!”최신애가 손을 들어 때리려 하자 온유한이 막아 나섰다.“그만 하세요!”큰소리로 외친 온유한은 기분이 언짢은
목욕 타올을 두르고 있는 강지아는 왠지 낭패한 모습이었다.서원준 얼른 깨끗한 목욕 타올을 가져와 그녀를 감쌌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일부러 나를 놀래키려고 이러는 거야?”“오버하지 마.”강지아가 웃으며 말하자 서원준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웃긴 뭘 웃어! 웃기 싫으면 웃지 마. 아닌 척하지 마.”온몸이 축축한 것을 보니 문신을 지운 곳에도 물이 닿은 것 같았다.“너 정말, 나 그만 걱정시키면 안 돼?”서원준은 동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약을 사 오라고 했다.강지아는 자신의 발목을 힐끗 본 뒤 한마디 했다.“이왕 젖은 김에 그냥 샤워나 해야겠어.”서원준은 문밖에 서서 그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발목에 물이 많이 닿으면 안 되니까 빨리 씻어.”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아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다시 옅어졌다.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는 동하민만 있었다.“대표님, 온 선생님이 왔다면서요?”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색도 별로 안 좋았다.“내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너와 상관없어.”이런 곳을 워낙 잘 알고 있는 온유한이였기에 강지아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서원준은?”“급할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어요. 절대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강지아가 화장대 앞에 앉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뭘 하길래 말도 안 하고 간 거야?”온유한이 사라진 지 20분이 되었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입술에 상처가 생겼다.그의 입술을 본 현채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사실 현채영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온 부원장이 현채영 씨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어떤 여자들은 겉으로는 청순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온 부원장이 이런 것을 좋아하네요. 어쩐지 현채영을 자기 여자라고 하더니. 임유희나 강씨 가문 아가씨는 본인 입맛과 안 맞았나 봐요.”그러자 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온유한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예전에 온유한은 항상 속삭이는 말투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지금 온유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강지아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싫은 거 아니야. 하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용기를 내어 고개를 든 강지아는 익숙한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3년 사이 온유한은 살이 조금 빠진 것 외에 변한 게 없었다.달라진 것을 굳이 짚으라고 하면 기질일 것이다.온유한만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었고 오롯이 차가운 느낌만 들었다.“나와 엮이기 싫어서 문신을 지운 거야?”뻔히 알면서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강지아의 턱을 잡고 말했다.“문신 지울 때 안 아팠어?”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나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팠어?”강지아의 눈빛이 변했다.온유한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깜짝 놀란 강지아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너무 거친 키스에 강지아는 온몸이 부서질 듯했다.감정이 북받친 키스에 강지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그제야 강지아를 놓아준 온유한은 깨물린 입술에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미쳤어?”강지아는 얼른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멀찌감치 떨어졌다.온유한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만 상처가 깊어서 그런지 다시 피가 솟구쳤다. 지금의 온유한은 정말로 점잖은 망나니 같았다.“미쳤냐고?”온유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강지아를 보며 말했다.“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가슴이 심하게 출렁인 강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싫어. 이러지 마... 싫다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아는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이런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더욱 자극이 된 듯 그녀를 쫓아가려 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
“괜찮아?”강지아의 손을 잡은 화령은 그녀의 손이 차가운 것을 발견했다.“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뒤돌아서는 순간 때마침 쟁반 가득 술을 들고 오는 웨이터와 부딪혔다.와르르, 술잔이 그녀의 치마에 쏟아졌다.갑작스런 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저도 모르게 고래를 돌린 온유한은 웨이터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지아에게 사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가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죄송해요.”강지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얼른 치워요.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지면 안 되니까.”“네, 네. 바로 치우겠습니다.”화령은 황급히 수건을 가지고 와서 강지아의 치마를 닦아줬다.“옷 갈아입으러 같이 가자.”“괜찮아. 나 혼자 가면 돼. 넌 여기 유리 파편들 깨끗이 치우는 것 좀 봐줘.”강지아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긴 온유한은 그녀의 발목에 문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문신이 있던 자리는 피부만 빨갛게 되어 있었다.강지아는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여분의 치마를 준비해 놓았기에 갈아입을 수 있었다.술이 엎질러져 몸까지 끈적끈적해 샤워를 해야 했다.옷을 다 벗고 나서야 타투한 곳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진수혁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나와 방수밴드를 찾았다.방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 동하민인 줄 알고 한마디 했다.“치마는 세탁이 안 될 것 같으니 매장에 처리할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법이 없으면 그냥 버려.”방 안의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서랍에서 방수밴드를 꺼내 들고 돌아선 순간 강지아는 소파에 앉은 사람이 동하민이 아니라 온유한인 것을 발견했다.강지아는 흠칫 놀랐다.온유한은 강지아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정신을 차린 강지아는 서랍을 닫으며 말했다.“왜... 여기 있어?”“타투 지웠어?”강지아는 자신의 종아리를 한 번 본 뒤 말했다.“응, 지웠어.”온유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의 발목만 뚫어지게 바라봤다.샤워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