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이장우를 포함한 이들은 편지 한 장을 받았다.빨간색 편지지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이장우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건방진 놈이 역시 눈에 보이는 게 없군. 지금 나한테 청혼을 취소하라고 강요하는 건가? 아, 아니군. 청혼을 취소하는 건 물론 진주 이씨 가문마저 짓밟으려고 하네? 그럴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나?”맞은편에 앉은 김만태가 웃으면서 말했다.“김세자는 이번에 너무 섣불렀어요. 비록 손씨 가문과 홍인경을 처리했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돌림으로써 나씨 가문을 포함한 3대 가문이 결국 우리 편에 서게 한 것과 다름없잖아요. 상황이 점점 더 흥미롭게 흘러가는데요?”이장우는 무심하게 말했다.“당연하지, 나성군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미 연락 와서 대책을 의논하겠다고 하더라. 이번에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우리는 어부지리로 덕만 보면 돼.”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선이 마주친 이장우와 김만태는 웃음을 터뜨렸다.사실 손씨 가문 사건 때문에 나머지 3대 가문은 하나같이 위축되어 차마 CY그룹을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 와중에 김예훈이 직접 세 가문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겠는가! 인생은 정말 예측불허했다.이장우가 말을 이어갔다.“뭐, 이 얘기는 그렇다 치고, 그보다 방금 전해 들은 소식인데 한국 의학계 거장인 전남산 어르신이 3일 뒤에 귀국한대.”“네? 전남산 어르신이요?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있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나타났대요?”침착함을 유지하던 김만태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전남산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저승사자의 천적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그가 치료한다면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마저 기사회생한다는 소문마저 무성했다.하지만 전남산은 5년 전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행방을 수소문한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다들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그런 분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무려 성남시에 온다니?김만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한편, 성남 공항.VIP 통로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는데, 정지용과 정가을이 제일 앞에 있었다.다만 과거의 오만방자하던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하인처럼 비굴해 보였다.두 사람의 뒤로 화려한 슈트 차림의 쌀쌀맞아 보이는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정지용, 정가을! 난 분명 기회를 줬다? 이번에 잘 좀 해서 전남산 어르신을 부산으로 모셔올 수만 있다면 우리 견씨 가문의 하인으로 받을 줄게. 만약 실패했다면 일찌감치 꺼져! 견씨 가문에 꼬붕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너희까지 필요한 건 아니야.”정지용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청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최선을 다할게요. 성남시는 우리 구역이라서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예요.”정가을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청오 도련님, 먼 길 오시느라 지쳤을 텐데 오늘 밤 확실하게 모실게요.”“찰싹!”견청오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비서가 불쑥 다가와 정가을의 뺨을 내리치고는 싸늘하게 말했다.“개보다 못한 년이 어디서 나대는 거야?”“죄송합니다!”정가을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정지용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는 원망으로 가득했다.김예훈, 정민아! 우리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너희를 짓밟아 뭉갤 수만 있다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될 테니까!...부산 견씨 가문을 제외하고 크고 작은 가문들이 속속 성남시를 방문했다.대체 누가 전남산 어르신의 귀국 소식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국 상류층에서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의학계 거장 정도면 아무리 제일의 명문가라고 해도 거의 받들어 모시다시피 하는 귀한 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마저 전남산 어르신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했다.따라서 의학계에서 전남산 어르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갔다.물론 이 일에 대해 논의하는 CY그룹 직원도 적지 않았다.어쨌거나 CY
“대표님, 대체 누구를 픽업하러 가시는데 허름한 차일수록 좋다는 거예요?”하은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김예훈이 대답했다.“그거 알아요? 그분은 취미가 툭 하면 전쟁터에 가서 허름한 차를 구경하는 건데, 고급 차를 끌고 가봤자 쳐다보지도 않을걸요?”비록 김예훈이 누굴 픽업하러 가는지 모르지만, 그가 부탁한 이상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적어도 십여 년은 되어 보이는 봉고차 한 대가 CY그룹 정문에 나타났다.김예훈은 송준한테 운전을 부탁했고, 두 사람은 쏜살같이 성남 공항으로 향했다.하지만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송준은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공항을 겹겹이 둘러싼 고급 차 행렬은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마이바흐, 벤틀리, 롤스로이스 등 없는 게 없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급 차를 전시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반면, 허름한 봉고차를 몰고 온 김예훈과 송준은 기사들의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저 사람은 뭐 하자는 거지?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나?”“오늘은 무려 전남산 어르신이 귀국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잖아. 오로지 어르신을 한번 뵙기 위해 여러 가문에서 찾아왔다고! 어떻게든 어르신의 눈에 띄려고 다들 제일 비싼 차를 끌고 오지 못해 안달인데, 고작 봉고차를 타고 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조수석에서 내린 김예훈이 허름한 봉고차에 ‘전남산 어르신이 성남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알아봤다.“하하하, 저 사람 정 씨 일가 데릴사위 김예훈 아니야? 역시나 별 보잘것없는 회사에 걸맞게 허름한 봉고차로 전남산 어르신을 픽업하러 왔네? 장난하나?”“하하하, 미쳤나 봐, 어쩌면 이렇게 멍청하지?”“다들 김예훈이라는 사람이 머리에 든 게 없는 데릴사위라더니, 그동안 안 믿었거든? 이제는 왜 그러는지 알겠네!”“역시 백문불여일견이군.”이윽고 정민아의 데릴남편이 봉고차를 끌고 전남산을 픽업하러 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사람들 틈에서
견청오는 피식 웃었다.“내가 있는데 감히 어딜 넘봐?”부산 견씨 가문은 한국 10대 제일의 명문가 중 일원으로서 비록 9위에 불과하지만, 현장에 있는 어중이떠중이와 비교하면 견청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없다.정지용은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청오 도련님, 사람을 시켜서 저 자식을 잡아 올까요?”“괜찮아. 우선 일부터 보고! 여자는 아무 때나 빼앗아 와도 되니까.”견청오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일의 중요도를 구분해야지 않겠는가!견청오 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 윤해진, 나성군, 임무경이 나란히 서 있었다.김예훈이 다가오자, 임무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쓰레기 같은 놈은 여기 왜 왔지? 창피하게!”김예훈은 임씨 가문의 외손녀 사위로서 망신을 당하는 순간, 임씨 가문마저 체면을 잃기 마련이다.나성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외손녀 사위가 색다른 접근으로 전남산 어르신의 눈에 들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나중에 진짜 그런 일이 생기면 저희도 좀 잘 챙겨주세요.”그의 말에 윤해진도 히죽 웃었다.오늘 그들이 모인 목적은 아주 간단했고, 바로 전남산을 모셔가는 것이다.그 뒤로 하정민, 공문철, 선우건이의 모습도 보였다.한마디로 오늘 성남 공항에는 성남시 거물급 인사들이 암암리에 다 모여 있었다. 물론 외지에서 온 귀한 손님들은 얼마나 더 많은지 짐작이 안 갔다.이장우는 맨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이내 김예훈을 발견하는 순간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다른 사람은 김예훈의 정체를 모를 수 있지만, 그는 속으로 뻔했다. 김예훈은 절대로 데릴사위에 그칠 분은 아니며, 전설 속의 김세자일 가능성이 컸다.다만 이장우는 김세자가 딱히 두렵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는 무려 진주 이씨 가문의 세자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진주 이씨 가문은 한국 10대 제일의 명문가를 제외하고 모두를 압도하는 그런 존재이다.“네 놈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다는 거지? 가소롭군, 오늘은 널 상대할
김예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장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시끌벅적하던 공항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다들 하나같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김예훈을 바라보았다.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혹시 잘못 들었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히 진주 이씨 가문을 도발하다니? 그것도 이씨 가문 세자의 앞에서 말이다.이장우가 처음 성남시에 왔을 때 상류층 인사들이 발 벗고 마중 나간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따라서 이런 분의 신분과 지위는 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감히 진주 이씨 가문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협박을 마다하지 않는다니?이때 암암리에 지켜보던 하정민 일행도 아무리 김예훈의 정체를 안다고 하지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진주 이씨 가문은 진주 4대 제일의 명문가 중 일원으로서 가히 짐작할 수 없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설령 한국 10대 제일의 명문가라고 해도 진주 이씨 가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그런데 지금 누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실제로 하다니!큰소리 떵떵 치는 사람이 사실 정민아의 데릴남편이라는 걸 알아본 이도 적지 않았다.정민아는 둘째 치고, 정 씨 일가를 놓고 봐도 고작 성남시 이류 가문에 불과할 뿐, 상류층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이런 가문은 당연히 진주 이씨 가문 앞에서 벌레보다 못한 신세였다.하지만 정 씨 일가의 데릴사위에 불과한 놈이 감히 이씨 가문 세자인 이장우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죽고 싶어 안달 났나?“훗.”이장우는 피식 웃었다.“진주 이씨 가문이 생겨난 이후로 우리를 무너뜨리겠다는 사람은 그쪽이 처음이군. 그리고 감히 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사람도 당신이 처음이고. 배짱이 대단한데?”김예훈이 싸늘하게 말했다.“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알아서 판단해.”이장우의 옆에 있던 측근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김예훈, 너 따위가 대체 뭐라고? 우리 도련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놈이 감히 세자를 협박해? 무려 세자님한테 사과하라고?
한편, 성남 공항 게이트 앞에 포르쉐가 한 대가 어렵게 주차할 곳을 찾아 멈춰섰다.운전석에서 내린 정민아는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몰려왔다.“엄마, 아빠, 진짜 전남산 어르신을 모시러 갈 거예요?”정민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오늘 아침 집에서 전남산이 성남시에 온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임은숙과 정군은 그녀한테 같이 가자고 꼬드겼다.이때, 임은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딸아, 너희 회사에서 지금 백운 별장을 짓고 있지 않아? 시공 일정대로 진행한다면 아마 한두 달 뒤부터 매매할 수 있겠네?”정민아는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대답했다.“네, 비슷해요.”임은숙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홍보할지도 고민해 봐야지. 그동안 대체 어디 가서 광고 모델을 찾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 눈앞에 떡하니 나타날 줄이야!”“무슨 뜻이죠?”정민아는 아리송했다.“전남산 어르신 말이야! 만약 우리 백운 별장 공사 현장에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비춘다면 나중에 전남산 어르신마저 인정한 살기 딱 좋은 곳이라고 홍보하면 그만이잖아! 그렇다면 별장 매매가도 쑥쑥 오르지 않겠어?”비록 무식하게 행동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임은숙은 어디까지나 부잣집 출신으로서 사업 감각은 타고났다.정민아는 눈이 반짝 빛났다가 이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이렇게 하면 분명 홍보 효과는 톡톡히 보겠지만, 엄마 아빠도 보셨다시피 현장에 고급 차들이 즐비해 있잖아요. 다들 유명한 가문이나 대기업에서 찾아온 분일 텐데, 우리처럼 자그마한 회사에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전남산 어르신을 초대하겠어요?”이때 정군이 목을 가다듬었다.“딸아, 자신감을 가져. 넌 무려 김세자가 공개 프러포즈한 여자라는 걸 잊지 마! 이따가 자기소개할 때 김세자의 약혼녀라고 하면 되잖아. 과연 경기도 일인자인 김세자의 체면마저 안 봐주는 사람이 있을까?”정군과 임은숙은 결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어떻게든 이 일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사실 전남산을 이용하여 홍보하는 것보다 정민아
이때, 성남 국제공항 VIP 통로 밖에는 이미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인원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자격 여부와 관계없이 다들 운에 맡기자는 심정으로 출구 쪽에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그 순간 공항 내부에서 소식이 들려왔는데, 전남산이 탑승한 전용기가 이미 착륙했고 곧 밖으로 나올 거라고 했다.이장우를 비롯한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기대에 들뜬 마음을 안고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예훈은 굳이 경쟁할 생각이 없는 듯 구석진 곳으로 물러났다.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냉소를 터뜨렸다.아무리 데릴사위라고 해도 자기 분수는 알고 있는 듯싶었다. 전남산 어르신을 초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항복한 꼴이라니.물론 그렇게 납득이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진주 이씨 가문의 세자인 이장우가 버젓이 있는데, 대체 누가 감히 그와 경쟁하겠는가?약 3분 뒤, VIP 통로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맨 앞에서 걸어오는 분은 다름 아닌 전남산이다.어르신은 일흔에 가까운 나이지만 기운이 넘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그는 의술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전통 무술도 뛰어나다고 했는데 태극권, 태권도, 합기도, 무술 등 못 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심지어 젊은 시절에는 여러 전국 대회에 익명으로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이런 인물은 그야말로 전 국민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이번에 그가 해외로 출국한 이유도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전염병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남산은 무려 사비를 들여서 갔는데, 그 나라의 전염병을 종식하는 데 몇 년이나 걸렸다.하지만 이런 위인일수록 더더욱 소탈했다.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의 곁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비서 한 명이 있었다.심지어 백팩마저 직접 메고 있지 않겠는가! 비록 VIP 통로에서 걸어 나왔지만 허세가 전혀 없어 보였다.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외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자세를 똑바로 했다.이때, 이장우가 가장 먼저 나서며 공손한 얼굴로 말했다.“어르신,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산이 이장우를 거절할 줄이야! 게다가 그는 가스라이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이장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든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어쩌면 괜히 가스라이팅하려다가 전남산이 진주 이씨 가문 전체에 불만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어르신, 저는 경기도 정부의 비서실장입니다. 하정민 어르신께서 점심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데, 경기도 의료 체계에 대해 조언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네요.”하정민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비서실장이 다가와서 전남산을 초대했다.“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 경기도 관청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는지라 기관에서 마련한 식사 자리에 함부로 참석했다가 괜히 불필요한 구설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어르신께서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전남산은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그리고 제일의 명문가를 대표하는 대변인들이 잇달아 나서서 전남산을 초대했다.다들 서로 다른 이유로 접근했지만, 하나같이 거절당했다.이장우를 비롯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전남산 어르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은 걸까?지금 그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데, 설마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멀뚱멀뚱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이때, 맨 뒤에 서 있던 임은숙이 정민아를 툭 밀자 휘청거리는 바람에 마침 전남산의 앞길을 막았다.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정민아에게 쏠렸고,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심지어 이장우마저 옆에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을 뿐인데, 감히 전남산의 앞길을 막는 여자라니? 간덩이가 부었군!정민아를 제일 먼저 알아본 임무경은 깜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민아야, 뭐 하는 거야? 길막하지 말고 얼른 비켜!”견청오는 여신급 미모를 자랑하는 정민아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지용아, 나 더는 못 참겠어!”정민아에게 프러포즈한 적이 있는 김세자 때문에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꽤 많았다.이내 공항은 술렁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